그녀들에게도 노동조합을

2011-09-07     피에르 수숑

노조활동 전통이 전무하고 노사관계에 대한 의식도 높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일하는 가사도우미들을 조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르데슈·베리·솜 지역의 가사도우미들을 직접 만나봤다.

“벌써 옷 입으셨어요, 뒤마 부인? 방 치워드릴 테니까, 그동안 아침 드시고 계세요.” 폴린 뒤마 부인(가명)은 천천히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3월의 어느 아침, 여든이 넘은 뒤마 부인은 거동이 불편해 정기적으로 생활 도우미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우미는 가사에서부터 부인의 산책과 신문(쉬드아르데슈 지방 일간지 <도피네 리베레>) 읽기까지 거든다. 시력이 안 좋은 뒤마 부인이 제목을 고르면 갈루 부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기사를 읽어준다. 예전에는 에어리퀴드에서 간부로 일했던 갈루 부인이 ‘남아르데슈 가사지원·동반 서비스 제공협회’(사담·Saadam) 직원으로 일한 지 벌써 9년째다. 다른 30여 명의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직업을 바꾼 경우다. 대신 월급은 예전의 3분의 1로 줄었다. 사담 대표 지네트 랑델이 설명한다. “우리 직원들은 미용사, 사장 비서, 기술자, 요리사 등 출신이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관광업과 노인 돌보는 일을 제외하면 이 지역에서 할 일이 없다.”

은퇴한 도우미를 돕는 도우미

갈루 부인은 에어리퀴드 재직 당시 민주노동연맹(CFDT) 소속 노조원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가사도우미들을 조직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노동총연맹(CGT)의 지역 위원장이자 협회 직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노동운동에 익숙지 않은 분야다 보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조합비를 걷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동료들에게 조합비가 임금의 1%라고 설명하자, 자신들이 한 달 버는 돈이 얼마인지 알면서 그러느냐고 묻는다. 직원들 대부분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보니 월말이면 한 푼도 남지 않는다. 조합비로 8유로를 내느니 그 돈으로 가족을 먹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갈루 부인의 강한 의지와 CGT 보건위원을 지낸 랑델의 숨은 도움으로 현재 노조원이 10명을 넘어섰다. 우체부로 일하다 퇴직 뒤 가사도우미 노조운동에 앞장서온 루이즈 레바스트르는 “지난 15년간 개미처럼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말한다. 같은 날 저녁, 그녀는 CGT 오브나스지부 회합에서 진행자로 나섰다.

피자 몇 판을 놓고 둘러앉은 노동자들이 각자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낮은 임금, 직종에 대한 무시, 불안정 고용, 파트타임 강요, 단체협약 불이행, 자원봉단체들의 노동법 무지 등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나온다. 요구는 많은데 그것을 관철할 힘이 부족하다. 사회·가족지원기술자(TISF) 수습생인 크리스틴 마르탱이 입을 연다. “발롱퐁다르크 지역의 한 여직원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직원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보고회 준비를 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러나 보고회에는 달랑 처음 연락한 직원 1명만 참석했다.” 여러 장애물이 있다. 여러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고립된 채 일을 하는 가사도우미들을 한자리에 모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업으로 인식되는 이 분야는 노조 문화에 익숙지 않다.” 레바스트르가 아쉽다는 말투로 말을 잇는다. “이 분야에서 일하려면 ‘신념’과 ‘모성애적 기질’이 있어야 한다.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 때문에 고용관계에서 힘겨루기가 불가능해진다.”

가사도우미들을 파업으로 이끄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TISF로 일하는 실비 프랑슈토 부인은 “파업을 하면 내가 돌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부터 떠오른다. 이게 우리가 가진 대단한 직업의식의 숨겨진 이면이다.” 생활 도우미인 이자벨 지롱 부인은 노조를 결성하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동료들은 대부분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싶다면 CGT 같은 곳에는 가입하지 않는 게 좋다.” 상당수 가사도우미들은 ‘공산주의나 혁명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CGT를 저어한다. 그러나 베바스트르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CGT 가사도우미 노조의 도의회 방문이 성사됐고, 2008년 24명이던 조합원 수가 올해는 60여 명으로 늘었다.

로랑스 본테르 부인은 2004년부터 직원 수가 180여 명에 달하는 협회에서 ‘대리’ 자격으로 가사도우미 일을 한다. 그녀의 고객이 곧 고용주다. “아르데슈의 동료들이 부럽다. 일주일에 하루 쉴 수 있고, 주말 일은 한 달에 한 번만 하면 된다. 유급휴가도 있다.” 그녀의 처지에서 보면 협회 직원들은 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더욱이 본테르 부인은 자동차 유류비도 지원받지 못한다. 15일간 쉬지 않고 일한 적도 있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을 돌본 적도 있다. “이미 받았어야 할 월급이 지금 공증사무소에 묶여 있다. 내게 월급을 주던 고객이 숨지자 자식들이 상속 문제로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한 가족의 어머니로서 ‘삶에 의미를 주는’ 이 직업에 애착을 갖고 있는 그녀는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 발벗고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노조원으로 활동하는 CGT의 도움을 받아 단체 하나를 결성했다. “사람들은 가사도우미가 노인을 학대한다고 비난하지만, 나는 오히려 가사도우미가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사적인 일터… 회합도 어려워

그녀는 홍보 유인물을 만들어 자동차 앞유리나 우체통 같은 곳에 배포했다. 지역 라디오와 신문사에서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나 본테르 부인이 처음으로 준비한 보고회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랭드르 지역의 가사도우미들 중 단 1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동료들의 얼굴을 볼 일이 없다. 고용이 불안정하다 보니 서로 경쟁심만 높아진다. 힘 빠지는 일이다. 유인물을 돌리러 다닐 때마다 벌레 보듯 하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일이 힘들어 이미 지친 상태에서 본테르 부인은 거의 ‘포기 일보 직전’이다. 때로는 ‘15분 혹은 30분’만 일해달라는 전화도 받는다. 심지어 ‘정원에서 삽질을 해달라’는 요청도 있다. 그녀는 규칙적으로 사회당 소속의 아르장통쉬르크뢰즈 시장인 미셸 사팽의 사무실을 찾는다. “친절하고 내 말도 잘 들어준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에게는 나 한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조직화 위해 뛰고 또 뛴다

최근 솜 지역에서는 육아 도우미 직원 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다. CFDT 노조원 카트린 마토스 부인은 이 기회에 보고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는 2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이곳에서 투표를 하는 줄 알고 잘못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산업시설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이 지역에서 가사도우미로 전업하는 여성 수가 급증했다. 그러나 이들이 받는 시급(시간당 2.18~5유로)은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들은 가사도우미 일을 제대로 된 직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저 부업 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단체협약이나 노동법이란 말을 들먹이는 게 쉽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마토스 부인 역시 2002년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노동법에 어긋나는 조항들을 담은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시에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파리조 시에주 드 프랑스’에서 일한 그녀는 “공장에서는 간단하다. 노조 사무실을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이 바닥에서는 도움이 필요해도 손을 내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마토스 부인은 “육아 도우미들은 응급처치나 아동 안전에 관한 교육은 받아도 노동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다”며 유감스러워한다.

뒤마 부인은 갈루 부인이 차려준 식사를 마쳤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보러 올 거지, 파트리샤?” 갈루 부인이 “그런 말씀 마세요!” 하며 맞받아친다. 뒤마 부인은 오랫동안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그 공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문을 닫았다. 그 뒤로 그녀 역시 가사도우미로 일했다. “1984년까지 12년을 일했다. 우리 지역에 가사도우미는 3명뿐이었지만 풀타임으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30명이나 된다. 우리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달력이나 복권 같은 것을 팔러 다녔다. 참 가난했던 시절이다. 시대가 변하면 사는 모습도 변하기 마련이다.” 정말 그럴까?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노동운동가)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