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는 가도 부족들은 남는다
무아마르 카다피 체제의 종말이 아랍 세계, 특히 시리아에서의 저항운동을 배가한다 해도 평화를 이룩하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한 ‘과도국가위원회’는 카다피 체제의 기반을 해체해야 하고 다른 부족들, 특히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서부 지역 부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몇 주 만에 두 명의 독재자를 사임시킨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봉기를 지켜본 수많은 관찰자들은 지난 2월 17일 리비아에서 벌어진 반란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지난 3월 초 서부 쪽 사막도로 위에서 픽업트럭에 뛰어오르는 키레나이카(리비아의 동북부 지역) 반군들의 모습이 모든 위성채널에서 반복적으로 방영되었다. “이틀 안에 트리폴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단언하는 젊은 전사들의 용기와 열정에 사람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진탄족, 트리폴리 함락 결정타
그런데 북서대양조약기구(NATO)가 감행한 8천 번의 폭격과 6개월 이상의 내전이 지난 뒤에도 브레가와 미스라타의 전선은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며칠 만에 트리폴리 함락을 이끌어낸 결정적 군사행동은 동부 지역 주민들의 공적이 아니라, 나푸사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거대 아랍 부족인 진탄족이 이끄는 서부의 몇 개 도시 주민들이 대부분 이뤄낸 공적이었다. 이 내전의 특수성과 카다피 이후 시대의 거대한 도전을 이해하려면 42년 전부터 작동된 카다피 체제의 주요 특성부터 살펴봐야 한다. ‘인민의 국가’라는 뜻인 ‘자마히리야’(Jamahiriya) 권력 시스템은 ‘혁명·군대·부족’이라는 세 가지 합법적 근거에 의지해 유지되었다. 이 세 가지 지렛대가 1975년 이래 권력 시스템의 장수를 보장해주었다. 세 가지 지렛대는 비도덕적 방식임에도, 봉기가 시작된 이후 6개월 동안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우선, 혁명위원회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르가 집권한 바스당과 유사하다. 국가의 모든 조직과 대기업의 내부에 존재하는 혁명위원회는, 중국의 홍위병이나 이란의 혁명수비대처럼 자마히리야 교의를 지키고 민중을 동원하는 보증인 역할을 했다. 기존 회원들의 지명으로 선출되는 3만 명에 이르는 혁명위원회 회원들은 승진과 물질적 보상의 혜택을 누렸다. 지난 2월 15일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위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벵가지에 투입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고, 이 진압 때문에 이틀 뒤 폭동이 발생했다. 혁명위원회는 ‘혁명수비대’라는 통칭으로 재편성되어, 나라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민병대들에 의존해 유지된다. 민간인 복장으로 무장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민병대들이 폭동 초기부터 폭동을 억제하고, 심지어 진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음으로 카다피와 그의 가족 보호를 전담하는 친위대가 폭동 전 1만5천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보안부대’라고 불리는 3개의 대규모 대대(그중 벵가지의 대대는 초기에 패배했으나, 상당수 간부들과 병사들이 트리폴리타니아로 후퇴했다)와 육·해·공 통합군 형태의 3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카다피 체제에 충성하는 리비아 중부와 남부의 두 거대 부족(카다파 부족과 마가리하 부족)에서 주로 충원되었다. 이들은 자동차 혹은 외국 여행 같은 수많은 재정적 혜택을 받았다. 바로 이들이 거의 6개월 전부터 세 곳의 전선(브레가, 미스라타 지역, 나푸사 산악지대)에서 싸우고 있고, 2월과 3월의 초기 봉기를 진압하러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의 도시(자위야 · 사브라타 · 주아라)에도 일시적으로 개입했다. 카다피의 막내아들인 카미스는 미스라타 전선에 배치된 3개 여단 중 하나를 지휘했고, 장남 무타심은 또 다른 여단의 지휘관일 것이다.
나토 공습은 결정적 영향 못 미쳐
카다피 시스템을 장수시킨 세 번째 중요 요소는 주민들에게 어떤 부족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부족을 도구화한 전략이다. 1969~75년 리비아 혁명 초기에는 권력이 부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 <녹서>(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카다피의 비전을 제시한 책)에서 부족들에 대한 예우를 표하고 한 개의 장을 그들에게 헌사한다.(1) 그 뒤 부족은 카다피 시스템의 핵심인 인기영합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것은 사회적 평화, 심지어 국가의 통일성을 위협할 우려를 무릅쓰고 부족들과 지역들 사이의 균형을 존중하면서, 석유 수입을 배분하는 장치와 연관된 요소다.
카다피는 오랫동안 적절한 제재, 위협, 보수, 협상으로 부족들을 이용했다. 리비아 부족들은 하나로 통제된 구조나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평화시 이들의 구성은 유연한 연대 네트워크와 유사하고,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원이나 관직에 접근하고, 개별적 혹은 공동체적 전략을 짜기도 한다.
부족 구성원들 중 하나가 카다피와 가깝거나 혹은 반목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부족에 속하는 것이 이점이 되기도 하고 장애가 되기도 한다. 미스라타 주민들(2)은, 이 도시의 거대 부족들이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부족(3)을 형성하지 못한다 해도, 1975년까지 카다피의 총애를 받았다. 그 뒤 초기 동료 중 한 명이고 미스라타 출신인 오마르 알메이치 대령과 개인적·이데올로기적 차이로 갈라선 카다피는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그들의 역사적 적수인 바니왈리드 출신의 와르팔라 부족과 손을 잡았다. 그 뒤부터 미스라타 주민들은 중요 직무(친위대·보안부대)에서 배제당하고 기술관료직으로 밀려났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족은 같은 지역 출신 주민들이 구역별로 모여 사는 도시들과 시골에서 효과적인 동원도구가 된다. 구역별로 볼 때 주민들은 각각의 원로가 존재하는 수십 개의 하부 그룹으로 나뉜다. 그래서 분쟁 초기에 양 진영이 같은 부족의 여러 원로들에게 받은 충성서약들을 서로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벵가지에 거주하는 카다파 부족의 구성원들은 상당수가 반군의 ‘과도국가위원회’(NTC)에 충성을 맹세하고도 군사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쟁 초기 언론에 제시된 NTC나 카다피 쪽과 동맹을 맺은 부족의 리스트는 큰 의미가 없다.
카다피와의 관계가 곧 부족 간의 관계
카다피 시스템에 깊이 연루된 거대 부족들의 구성원들이 많이 사는 중부·서부·남부 도시와 시골 지역에서는 봉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시골 지역과 도시들은 카다피에게 전투원과 민병대원들을 제공했다. 특히 와르팔라족의 봉토인 바니왈리드 지역, 트리폴리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타르후나족의 중요한 부족동맹 봉토인 타르후나 지역, 카다파족의 봉토인 시르테, 카다파·마가리하·하소나·투아렉족의 봉토인 페잔 지역, 가까이 위치한 미스라타 주민들에 대해 오랜 불신을 품고 있는 타우르가 지역, 현재까지 카다피 권력에 충성하는 상당수의 자람나 부족이 살고 있는 알제리 국경 근처의 가다메스 지역 등이 이에 해당한다.
부족·마을마다 입장 갈려
다른 지역들은 비록 카다피 체제에 호의적임에도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를 가늠하며 신중히 중립을 지키고 있다. 마차치야·아우라드 부 사이프족의 봉토인 미즈다주의 도시들로서 알우이레라트, 와단, 훈, 수크나, 즐리텐이 이에 해당한다. 이곳에 거주하는 아우라드족 주민들은 북서 국경 쪽 미스라타 주민들을 불신하고 있다.
마을마다 선택하는 전략이 다르다. 예를 들어 진탄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라이벌인 마차치야족과 대립하고 있다. 두 부족의 구성원들은 비록 부족 간 결혼은 금지되어 있지만, 미즈다에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진탄족의 봉토인 진탄시가 반군의 손에 들어갔을 때, 미즈다의 진탄족은 미즈다시에 대한 공격을 경계하면서 봉기에 참여했다. 미즈다시의 마차치야족은 다른 도시의 동료들이 카다피 진영에 합류해도 중립을 지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통적 협상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폭력을 제한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피해가게 해준 점이다.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분쟁이 끝났을 때, 국가공동체를 재건하기 더욱 어려울 것이다.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해방된 도시들에서 건너온 시민군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이렇다 할 봉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혁명수비대·보안대대·혁명위원회의 통제에서 석방돼 민병대로 편입된 일반 죄수들로 구성된 ‘민병수비대’ 같은 억압적인 보안기관이 많이 있었다. 둘째는 트리폴리라는 도시의 사회학적 구조 때문이다. 벵가지시의 경우 권력에서 똑같이 거부당한 키레나이카 지역 거대 부족들의 행동 통일이 가능했다. 반면 트리폴리 주민의 반은 바니왈리드와 타르후나 지역 출신의 거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운명은 카다피 체제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 다른 주민의 반은 소규모 부족들이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어, 동원이나 전투구조로 변신할 수 있는 중요 그룹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몇몇 구역의 봉기 시도는 조속히 진압되었다.
전공 놓고 부족 간 갈등 불거질 수도
브레가와 미스라타 전선에서 5개월간 발생한, NTC와 NATO의 대변인들이 위급하다고 언급한 ‘전술적 단절’은 사실상 나푸사 산악지대 출신의 진탄이라는 강력한 아랍 부족에 의한 것이었다. 5월 초 이 부족의 전사는 3천 명이 안 되었다. 이 부족이 공격에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광역 지역보다는 기초 지역 우선’, ‘중앙정부보다는 지역 우선’이라는 리비아 문화의 전통을 세우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는 각 지역이나 마을 출신의 주민들이 해방 전쟁을 수행토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부 지역 반군의 연맹 조직자들이며 선봉부대인 진탄족은 해방시켜야 할 도시(자위야·소르만·가리안) 출신의 전투부대원들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필요한 장비를 대주었다. 그 뒤 이 전투부대들이 동시에 세 도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NATO의 홍보전문가들과 프랑스 및 영국의 정치책임자들이 반군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폭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아무리 자랑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브레가와 미스라타의 전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전술적 단절도, 카다피나 그 가족들의 거주지 혹은 트리폴리의 전략적 지역들의 폭격에 의한 체제 와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저 동부를 점령한 반군의 군사적 전황이 서부 쪽으로 확장되어 동서 양쪽 전황이 균형을 이룬 것은 서부반군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리한 서부반군의 책임자들이 현재 NTC 조직 내부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NTC의 실질적 대표성에 문제를 야기한다. 달리 말해 3월부터 프랑스와 영국이 리비아 정부로 인정한 NTC가 ‘리비아 국민의 합법적 대표’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기 바란다면, 마지막 승리에서 서부 반군이 달성한 중요한 군사적 역할에 합당한 정치적 대표성을 서부반군에게 조속히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른 시일 안에 서부에 또 다른 자치정부가 생길 수 있다.
또 다른 도전은 오랫동안 대다수가 카다피 체제를 지지한 지역(시르테·타르후나·바니왈리드·세바·가트·가다메스 지역)과 부족의 대표들을 미래의 국가기구에 통합하는 것이다. 내전의 논리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이 지역들의 주민, 연루가 가장 덜 된 혁명위원회 회원과 군사 책임자들의 미래를 NTC가 보장해주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자신들의 군사적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반군들이 자체적인 영토 기반을 갖고 오랫동안 카다피 편을 들던 부족들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면 오히려 내전이 계속될 것이다.
자율성과 평등이 통합의 열쇠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논리에서 ‘중재’와 ‘협상’이라는 베두인족들의 전통적 메커니즘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몇몇 부족이 오랫동안 카다피를 지지했어도, 그 어느 것도 베두인족의 전통이나 실용주의 속에 확고히 굳어져 영속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서구는 이들 사회를 명예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처럼 풍자적으로 묘사해왔지만, 그룹의 이익은 명예의 논리보다 때로 우선한다. 지역과 도시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를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새 정부가 상당한 자율성을 넘겨준다면, 석유를 조속히 수출하고, 지역들 사이에 투명하고 공평하게 수입을 배분하는 것이 안정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차후 무기가 유통될 한 국가에서 내전의 출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나라에는 정치문화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고, 지방의 이익이 여전히 국가 이익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NATO는 언제 리비아 시민들이 더 이상 NATO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결정할 것인가?
글•파트릭 하임자데흐 Patrick Haimzadeh
2001~2004년 트리폴리 주재 프랑스 외교관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카다피가 지배하는 리비아의 심장부에서>(장클로드 라테 출판사, Paris, 2011) 등이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각주>
(1) <녹서>(트리폴리·1999)에 대한 ‘세계연구센터’의 연구 참조.
(2) 미스라타 주민들은 키레나이카 지역 주민들이 봉기하자마자 체제에 저항해 무기를 들었다. 미스라타와 벵가지 주민들 사이에는 상당한 사회적·역사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벵가지 주민의 반은 원래 미스라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3) 여기서 ‘부족’은 시조를 공유하는 그룹을 말한다. 그 구성원들은 부계 쪽 혈통에 의해 형성된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