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고통스러운 귀환

10년 후, 재앙의 현장에서

2021-04-30     세실 아자뉘마 브리스 외

“마사카! (이럴 수가!)” 

활기차게 대화를 이어가며 차를 몰던 일본 여성, 요코가 갑자기 외쳤다. 그녀는 차를 세우더니, 인상을 쓰며 뿌연 앞 유리창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마사카! 어, 여기 맞는데! 분명 여기가 맞는데….” 우리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땜질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듯, 회색 시멘트와 검은색 아스팔트로 돼 있는 평평한 공터에 가깝다. 우리는 텅 빈 공간의 한 가운데, 원래 토미오카의 한 가운데에 있다. 토미오카는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 마을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전에는 주민 수가 1만 5,000명이었다.(1) 6개월 전 폐쇄된 마을은 재개장됐다. 2011년에는 마을을 떠나 달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10년이 지난 현재에는 ‘집으로 돌아가 달라’는 새로운 지시가 생겨났다. 어쩌면 후쿠시마를 떠난 사람들 16만 명은 정부의 오락가락한 지시 앞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성을 잃지 말자.”

비극적인 사고 발생 후 1년, 우리는 토미오카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피해의 흔적은 여전히 깊었다.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잔해를 비추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였다. 바다가 보이던 작은 역은 사라졌다. 토미오카는 동일본 대지진 때 지진, 해일, 6개의 원자로 중 3개 폭발이라는 연속 3중의 타격을 그대로 받았다. 토미오카는 초토화가 됐다. 집, 가게, 공장, 골목길, 가로등, 모든 것이 순식간에 쓸려갔다. 전에는 해가 지면 가로등의 부드러운 빛이 쇼와시대(1926~1989)의 흔적을 간직한 이 작은 마을을 비추곤 했다. 그나마 하나 남은 가로등이 반쯤 쓰러진 채 이발소를 향해 있었다. 이발소의 시곗바늘은 지진이 발생한 시각 그대로 멈춘 상태였다. 이후 이발소는 포크레인에 밀려 사라졌다. 마치 이름만 남은 토미오카처럼 말이다.

 

평야 위를 덮은 시멘트

이후 역은 새롭게 복구됐다. 원전 주변에 있던 다른 두 역도 복구됐다. 아날로그 방식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던 이 역들은 매표소에서 개찰구까지 전부 자동화됐다. 위에는 24시간 내내 주변의 방사능을 측정하는 전광판이 있다. 근처에 있는 작은 가게는 생필품과 카레, 라면 등의 간편식을 팔고 있다. 모래와 흙을 운반하는 공사장 인부들 외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건물들만 단조로운 모습으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서있을 뿐이다. 후타바 마을도 폐허가 됐으나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후쿠시마 사태로 식물의 소중함이 환기됐다. 풀과 나무가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고 해일의 피해를 줄여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넓은 평지에 콘크리트 건물들을 세우고 있었다. 건설 중인 거대 방파제가 보호막 역할을 해주므로 괜찮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말이다.(방파제는 도후쿠 지방의 해안과 아주 가깝다).

후타바에는 ‘동일본대지진 및 원전사고 기념 박물관’이 세워졌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돼 있는 박물관의 구조는 주변 마을에서 건설 중인 건축물 구조와 묘하게도 비슷하다. 사건 당시 대피 지시가 떨어진 1,100㎢(마을 약 10곳) 중 337㎢은 ‘특별한 경우라면 차로 지나갈 수 있는’ 구역이지만 여전히 차로도 접근이 금지돼 있다. 원전사고 전에 일본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방사능 수치는 평균 0.04μSv/h(마이크로시버트 μSv/h는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단위)였다. 국제적으로 권고하는 방사능 안전 기준치는 최대 0.23μSv/h이다.

 

오랜 과거가 된 후쿠시마 사태

이곳 기념관에서도 영상을 통해,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관객들은 3D 헬멧을 쓰거나 180도 회전하는 대형 화면 앞에서, 해일과 원전 폭발이라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영상은 갑자기 마무리되며 재건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주입한다. 책 한 권이 덮이면서 후쿠시마 사태 이전에 일어난 다른 재앙들이 보관된, 산업의 지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산업 사고들을 담은 흑백사진들이 펼쳐진, 넓은 흰색 통로로 이어진다. 이 사진들에 나온 산업 사고들은 극복과 발전을 상징한다. 당연히 후쿠시마의 비극도 이 흑백사진 앨범 속에 들어간다. 고풍스러운 우체통과 다른 재앙의 잔해들은 후쿠시마 사태를 오랜 과거의 일로 만들어버린다.

벽을 스크린 삼아 상영되는 영상에서는 나레이터가 후쿠시마 재앙을 여러 단계로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레이터는 침착한 목소리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을 완전히 분석했다면서, 현재의 기술발전으로 미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근처에 있는 다른 박물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원전을 담당하는 도쿄전력(TEPCO)(2)이 운영하는 이 박물관은 현재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며, 밝은 미래를 이끌어가겠다는 공식 멘트를 전한다. 결국 기술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메시지다.(3) 이를 기대해보며 이제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만나는 팸플릿을 통해 정확한 숫자로 표시된 통계 결과를 확인해 볼 시간이다. 2020년 12월 7일, 후쿠시마현은 사망자 수를 4,146명으로 밝혔는데, 이 중 2,136명은 재앙 때문이 아니라 ‘질병 혹은 피난으로 피폐해진 삶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1만 5,435채는 완파됐고, 8만 2,783채는 절반가량 파괴됐다. 정부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후쿠시마 피난민 수는 16만 4,865명에서 3만 6,811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역시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후쿠시마 주변의 방사능 수치는 1.91μSv/h에서 0.13μSv/h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방사능 수치가 꽤 많이 떨어진 셈이다. 이런 사실은 어느 공고문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원전으로부터 동북부 방향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던 후쿠시마시에는 대피령이 떨어진 적이 없다(원전에서 반경 20km 지점까지만 대피령이 떨어졌다-역주). 인구수가 적지 않으며 아스팔트 길로 된 후쿠시마시에서는 방사성 오염물질 제거(제염) 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오쿠마 마을은 최근에 피난 명령이 해제됐으나 폐허가 된 집들 아래에서 측정된 방사능 수치가 5μSv/h이다. 이 수치가 국제적인 방사능 안전 권고치를 무려 20배나 초과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후쿠시마는 박물관에서 모범적인 재앙 극복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복구작업, 새로운 세뇌작업?

이제 42만 채의 주택, 1만 2,000개의 공공시설(학교, 공원 등), 1만 9,000km의 도로, 3만 1,000헥타르의 논밭은 제염작업이 이뤄졌다는 안내가 나온다. 관람객들은 이 같은 통계 수치를 읽은 후 후쿠시마현 지사의 메시지를 읽는다. 원전 부근의 마을들은 교통편과 함께 점차 다시 정상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즉, 이제 후쿠시마는 상황이 나아져 부흥하고 있다는 메시지다. 후쿠시마는 묘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박물관 벽마다 복구작업이 잘 진척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전시물이 보인다. 새로운 세뇌작업일까? 아직 위험한 부분, 불확실한 부분이 있고 땅과 물이 방사능에 오염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피난민들에게 후쿠시마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작업이다. 2021년 3월 9일 2년 전 건설된 오쿠마 주택에 거주하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시장에게 초청을 받은 오쿠마 주민 200명이 나가사키 대학교 연구원들의 설명을 들었다”라고 전했다. 연구원들은 120만 톤의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오염수 120만 톤이 현재 960개의 저장탱크에 보관돼 있었다. 원자로 냉각에 사용된 오염수는 매일 170톤이 추가로 나오고 있다. 만일 지진이 다시 발생하면, 오염수 저장탱크는 강가의 주민들에게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희석이 된다는 주장은 현지 어부들과 주민들도 동의하기 어렵다. 120만 톤의 오염수가 태평양에 방류되면, 어부와 주민들은 완전히 실업자가 될 수 있다. 이곳 바다의 물고기를 누가 사 먹으려고 할까? 이 질문에 대해, 박물관은 당연히 침묵으로 일관한다. 

 

표범의 점 같은 방사능 지도

건물과 경작지의 제염작업은 나름 신중하게 이뤄지고 있다. 물론 후쿠시마 오염토의 양만 2,000만m2(면적 20㎢에 해당)인데, 이를 몇 년 간 저장해 보관하는 것도 문제다. 오염토는 검은색 자루에 담겨 평야에 쌓여 있다. 오염토의 방사능 수치가 킬로그램 당 8,000베크렐 이하로 떨어지면 2016년부터 봉투에서 꺼내 다양한 건축 자재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후쿠시마현의 1만 3,784㎢ 중 70% 이상이 숲이다. 숲을 제염하는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심각한 상황이다. 식물이 흡수하는 방사성 물질은 기대와 달리 비에 씻겨 없어지지 않는다.(4) 오쿠마처럼 다시 문을 연 여러 마을을 보면 숲이 무성한 지대의 방사능 수치가 오히려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주민들은 표범의 반점처럼 표시된 후쿠시마의 방사능 지도가 정확히 작성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오염지역으로 등을 떠미는 귀향 캠페인

이런 상황에서는, 오염지역 밖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급하던 보조금을 갑자기 중단해도 피난민들은 귀환하지 않을 것이다. 원전 주변에 살던 주민 9만 5,000명 중 약 35%가 대피한 11개 마을에 새롭게 정착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은 뒤 ‘원전 난민’이라는 지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두려워하며 타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죽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쿠시마의 많은 난민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발생한다. 이들이 마주한 새로운 현재는 자신들의 존재가 배제된 채 세워진 것이다. 이들의 과거를 이루던 모든 흔적(나무, 집, 접근 금지된 강 등)은 전부 예전과 다르다. 이는 이주민들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식료품, 의료 서비스 등 필수적인 것을 얻으려면 차로 40분을 가야 한다. 

 

와세다 대학교의 츠지우치 타쿠야 교수는 자연재해 혹은 산업재해 이후 겪는 외상 후 장애를 연구하는 전문가다. 츠지우치 타쿠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피난민 40% 이상이 외상 후 장애를 앓고 있다.(5)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곳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이어서, 서로 돕고 살던 마을 사람들의 끈끈한 관계도 식어버렸다. 해일과 지진 피해를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원전사고를 겪은 산속 마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원전의 동북부에서 40km 떨어진 이타테처럼, 길게 이어진 산촌에는 시내 중심지가 없다. 농장과 집들은 분산돼있고, 주민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타테 마을의 경우, 주민 수가 6,500명에서 1,700명으로 줄었다. 지역사회의 유대관계가 약해지면서 고립감이 커졌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 고립감은 한층 깊어졌다. 

 

제염작업도 불균형하게 이뤄진 상태에서, 정부의 복귀 장려책은 피난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또 다른 폭력이다.(6) 재난 관리자들은 주민들이 귀환하지 않는 이유를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에서만 찾을 뿐, 그들의 정신적 충격은 고려하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후쿠시마 지역을 재개장하면서 ‘귀향 캠페인’을 개발해, 다른 지역에 사는 후쿠시마 난민들을 ‘사회적 지원의 수혜자’로 만들었다. 후쿠시마 난민들이 더 이상 다른 지역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공식 메시지가 나오자, 난민들에 대한 차별이 심화됐다. 차별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7)  

 

 

글·세실 아자뉘마 브리스 Cécile Asanuma-Brice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일본에 거주 중이며, 『후쿠시마 그 후 10년 - 재앙의 사회학』의 저자다.
필리프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저널리스트 겸 작가, 현대예술 전문가. 아시아 예술가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설립된 협회 ‘Est-Ouest 371’의 공동 창립자(2015년)이다. 자신의 웹사이트 www.philippepataudcélérier.com에 예술과 국제 관련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번역위원


(1) 원전사고와 후폭풍에 관한 주제를 다룬 기사들 : Harry Harootunian, ‘La Maison Japon se fissure 갈라지는 일본 집’, Gavan McCormack, ‘Le japon nucléaire ou l’hubris puni 원자력의 일본 혹은 벌 받는 자만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4월. / Philippe Pataud Célérier, ‘À Fukushima, une catastrophe banalisée 후쿠시마, 보편화된 재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4월. 
(2) Renaud Lambert, ‘Tepco et ses actionnaires 도쿄전력과 주주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4월.
(3) Edgar Cabanas, Eva Illouz,  『Happycratie. Comment l’industrie du bonheur a pris le contrôle de nos vies 행복 만능-행복 비즈니스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통제했는가』, Premier parallèle, Paris, 2018.
(4) Olivier Evrard, Jean Patrick Laceby, Atsushi Nakao, ‘Effectiveness of landscape decontamination following the Fukushima nuclear accident : a review’, European Geosciences, Union, vol.5, n°2, 2019년 12월 12일.
(5) Takuya Tsujiuchi, ‘Post-traumatic stress due to structural violence after Fukushima Disaster’, Japan Forum, 2020년 2월 14일.
(6) Cécile Asanuma-Brice, 『Fukushima, dix ans après. Sociologie d’un désastre 후쿠시마 그 후 10년-재앙의 사회학』, MSH, Paris, 2021.
(7) Maeda Masahura 외, ‘Fukushima, mental health and suicide’, Journal of Epidemiology and Community Health, London, vol. 70, n°9,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