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 역사 조작에 맞서다 (上)
『극단의 시대』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이 글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의 저서 『극단의 시대』가 최근 프랑스 아곤(Agone)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을 기념해,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이 쓴 서문이다.
우리는 동굴 속에 웅크려 그늘을 응시하는 삶을 견딜 수 있다.
삶의 어느 한순간, 사슬을 부수고 날개를 펼쳐 태양을 바라볼 수 있기에.
업턴 싱클레어, 『정글』 (1906)
20세기는 끝났지만, 그 역사에 대한 해석은 이제 막 시작됐다. 홉스봄은 “기억이란, 역사와 달리 기록이나 선택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했지만, “과거를 통해 현재의 욕망을 보여준다”라는 점에서는 기억과 역사가 궤를 같이한다. 현재에서 가까운 과거만이, 현대인의 투쟁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일까? 물론 오늘날의 독자, 특히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루이 11세 시대에 대한 해석보다는 공산주의 역사 분석에 더 흥미를 보일 것이다. 혹은 핵무기로 한 줌의 재가 돼 버린 시민들을 돌아보거나, 파시즘의 부상을 견제하는 사회운동 세력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이들이 계속 등장하고, 민중들이 질서를 전복시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일을 오랜 과거의 한 페이지로 처박아 둘 수는 없다. 민중들의 희망은 때로는 실망, 파괴, 혹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졌듯) 참수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빛을 본 적도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경우지만). 운명을 바꾸고 싶을 때 인류가 늘 무력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이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지 않았다.”(1)
1994년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를 출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프랑수아 퓌레가 자신이 창립한 생시몽 재단의 후원으로 『환상에 찬 과거』를 펴냈다. 퓌레는 공산주의자였다가 나중에 확고한 자유주의자가 됐는데, 자신이 스탈린의 추종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탈자본주의 사회라는 ‘환상’을 몰아내는 것을 중요시했다. 20여 년 전 일찍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신화에 맞섰듯, 퓌레는 환상으로부터 프랑스를 정화하려고 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베를린 장벽 붕괴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면서 퓌레는 큰 성공을 거뒀다.
공산주의자이자 역사학자인 알베르 마티에즈는 레닌을 “성공한 로베스피에르”라고 일컬었다. 볼셰비키가 자코뱅파에서 영감을 얻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두 개의 유토피아를 일구기 위한, 같은 종류의 흙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래 갈까?
역사의 실수는 반복된다
25년 후 상황은 변했다. 『극단의 시대』가 출판됐을 당시, 미국의 주도 아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등장해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다. 먼저 국경이 희미해졌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본래의 관할 영역을 벗어나 유고슬라비아,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까지 개입했다. 정치적 경계 또한 희미해졌다. 자본주의로 전향한 좌파정부는 정계에서 제2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미테랑, 클린턴, 블레어, 슈뢰더 정부에서는 집권당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정부는 오만에 차 있었다. 프랑스 외무부 장관 위베르 베드린은 1997년 8월 프랑스 대사들을 상대로 국제정세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널리 공유됐다.
“냉전이 끝난 뒤 눈에 띄는 한 가지 현상은 서구에서 유래한 민주주의, 시장, 미디어와 같은 개념이 점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저명한 논객들도 동의한 내용이었다. 경제 전문 기자이자 훗날 <르몽드>의 수장이 된 에릭 이즈라엘비츠는 “신산업혁명이 균열을 초래했지만, 세기말에 보편적 낙관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도 했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시아의 부상은 세계 경제성장에 기여하며 산업국가들에 자극을 준다. 아시아 국가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지 말고, 세계 시장에 새로운 일원이 합류했음을 기뻐하며 그들이 세계 경제에 선사하는 역동성을 즐겨라.”(2)
환경문제의 위기를 안심시키는 분석이 나온 지 몇 달 후, 금융위기가 터졌다. 동남아시아와 남미에서 금융위기는 ‘행복한 세계화’를 뒤흔들었고, 소련을 탈피한 러시아를 덮쳤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상품으로 가득 찬 상점 이상의 존재임을 깨달았다. 돈 없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충격은 서막에 불과했다. 10년 후인 2007~2008년에 또다시 경제위기가 터지자, 위기의 중심지가 미국과 유럽으로 옮겨갔다. 퓌레나 후쿠야마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곧 자본주의를 완전히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경제위기에 맞서 대응책을 내놓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모델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품었던 유토피아의 종말, 그리고 영원한 자유민주주의라는 희망의 불씨는 꺼졌다. 역사의 실수가 반복됐다.
홉스봄은 이 모든 것을 25년 전에 예견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특정 민족을 상대로 터진 유혈사태 때문이었을까? 그는 저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아우르던 공산주의 정권의 추락과 함께, 이 광활한 지역은 정치적 불안정, 무질서, 내전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게다가, 40년 이상 국제관계의 안정을 지켜주던 국제사회의 체계마저 파괴해 버렸다.” 이후 홉스봄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사라진 반면, 상대격인 북대서양 조약기구는 점점 팽창하며 관할지역 외 지역까지 개입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새로운 질서의 이면을 드러냈다. 유럽연합의 현 회원국 대부분이 참여한 이라크 침공 직전에 대해, 홉스봄은 “과대망상은 두려움을 버린 승자들의 고질병이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가 그렇다”라고 썼다.(3)
부르주아 계층을 통제하던 골칫거리가 제거되자, 게임의 승자가 된 그들은 가진 힘을 남용했다. 국제관계에 드리운 불안정성은 곳곳에서 들끓는 사회 분노와 궤를 같이했다. 유권자들의 선택이 번번이 무시되고 힘 있는 자가 법을 만드는,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민주주의 속에서, 정치적 돌파구를 찾지 못한 민중의 분노는 씁쓸함을 남긴다. 국가 간 속도 경쟁을 벌이면서 독선적인 자유주의와 극우파 민족주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거부함으로써 해방이 이뤄진다는 선택지는 논외로 보였다. 그렇다면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를 완성한 뒤, 이미 여러 번 사회를 붕괴시켰음에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지배 체제에 의문을 던졌던 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민중들이 속임수가 가득한 정치게임에 신뢰를 잃었을 때, 자국 정부의 주권이 짓밟혔을 때, 자신들의 규칙을 강요하는 은행들을 비난할 때, 분노가 스스로를 어디까지 집어삼킬지 모른 채 저항운동을 이어갈 때, 좌파의 활동은 활발한 정도가 아니라 끓어올랐다(그 결과가 꼭 승리는 아니었지만). 이는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한 미국의 지식인이 “우리 욕망에 붙인 이름(톨스토이가 신을 두고 쓴 표현)”이라고 일컬었던 사회주의는, 그런 의미가 퇴색된 듯하다. 20여 년 전, 정부에서 사회주의를 언급하면, 대중들은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비밀경찰과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로 요약되는 공산주의 체제, 또 하나는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사회민주주의다. 홉스봄은 타계 1년 전 이미 경고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혁명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마르크스식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4)
그 어떤 정치인의 철학도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오늘날 직면한 어려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홉스봄이 지적하듯, “경제의 세계화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없애버렸다.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도 사라졌다. 즉, 노동자 계층의 국가에 행사할 힘이 약해졌음을 의미한다.”(5) 따라서, 국가는 노동자의 무력함을 변명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됐다. 그리스 급진 좌파는 2015년 집권 몇 달 만에 무기를 반납했고, 결국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혁명의 불꽃에 고무된 이들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를 밝힌(종종 불사르기도 했던) 혁명의 불꽃은 유독 그 빛이 창백하다. 작품이 출간되던 해 치러야 했던 대가이자, 펜촉을 쥔 이가 느꼈던 환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던 히치콕 감독처럼, 저자는 자신이 쓴 이야기에서 이따금 직접 목소리를 낸다. 불가능에 맞서고자 했던 이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호의 대포가 다시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던 이들, 신중하기만 했던 이들, 미래를 예측만 하던 이들과 달리 승리를 확신하던 이들. 홉스봄은 혁명 속에서 이들을 헤아린다. 그는 “혁명은 인민전선 시위에서 ‘라 카르마뇰(혁명가)’을 부르던 청년들 곁에 있었다고, 나는 증언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6) 하지만, 저자가 시도한 과거로의 도약은 환멸과 아이러니 속에 사라진다.
“쿠바혁명에는 모든 게 있었다. 낭만주의, 산속에서 피어난 영웅주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이들, 사리사욕 없는 청년들(최고 연장자가 30대 초반)이 보여준 용기. 관광객들의 눈에 쿠바는, 미소 짓는 사람들이 룸바 리듬에 맞춰 사는 열대기후의 천국이었다.” 쿠바혁명은 자신들 옆에서 위세를 떨치던 미국 제국주의를 물리쳤다. 이런 문맥에서 1960년대를 보면, 그 열기와 낭만주의, 이타성을 한층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몇십 년 후 쿠바혁명은 순진하고 부적절했다는 시대착오적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홉스봄 이후의 세대들도 반공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혁명의 이미지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부르던 혁명가는 과거, 때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지난 세기에 대한 분석이 이뤄졌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산주의’라고 하면, “혁명의 순간을 평생 기다린, 이상을 품은 겸허한 투쟁가”보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떠올렸다. 역사 방송, 유명 평론가들의 단골 소재였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1981년 5월 10일, 당선일 저녁 연설에서 언급한 이들이 바로 이들, 주간지 <뤼마니떼 디망쉬>나 5월 1일 노동절 은방울꽃을 팔던 겸허한 투쟁가들이었다.
50년 후 이들의 업적, 시민들이 입은 은혜를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다면 대중들에게 남는 기억은 과연 무엇일까? <전함 포템킨(Le Cuirassé Potemkine)>, <프랑스 사람들(La vie est à nous)>, <흔들리는 대지(La terre tremble)> 같은 영화를 누가 볼 것인가? 장 페라가 68혁명을 기리며 “36개가 아닌 68개의 양초를 든 나의 프랑스”라고 부른 노래나, 조르주 무스타키가 공제조합 건물 앞에 집결한 반프랑코 투사들을 격려하며 “믿음을 잃은 이들에게/ 그들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라/ 그들에게 전해라 붉은 카네이션이/ 포르투갈에 활짝 피었다고” 하는 노래를 누가 들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칠레 산티아고의 군인 차파예프』는 미국전쟁 기간 그와 베트남 사이의 연대가 담겨있다. 독자는 저자가 1965년 12월 칠레 공산당 소속 모리스 토레즈 진영의 정책 담당 보좌관이었고, 그의 동료가 응우옌 반 트로이 진영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국가에 대해, 레닌 혁명과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에 대해 토론하며, “거대한 러시아 땅에 봉기를 일으키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한 제정의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72시간 동안 입씨름을 벌였던 사실”을 떠올린다. 그들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책 『강철은 어떻게 단련됐는가(Et l'acier fut trempé)』와 소련 영화를 권한다.
사실 ‘국경을 초월한 이야기’들은 많다. 전직 파시스트들은 엔젤라 데이비스, 파블로 네루다, 앙브루아즈 크루아자, 파블로 피카소 같은 인물을 자신들과 동일선상에 놓는 오만을 범한다. “남미 국가 곳곳에서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중산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조국을 해방시키거나 현대화하고자 했다. 대부분 시골 출신에 까막눈인 민중들, 전통 사회와 매우 밀접한 이들을 움직이는 데 열중했다.”(7) 그 결과가 항상 부정적이었다고 누가 주장할 것인가?
홉스봄이 분석하는 20세기, 그리고 그 속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열정적이다. 그 태도는 홉스봄이 선호하는 다른 화제를 꺼내며 개입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롤링스톤스와 동시대에 살지 않았다면, 그들이 1960년대 중반 지핀 열기에 동참할 수 있을까? 답은 또 다른 질문 속에 있다. 현재 우리가 열광하는 노래와 이미지 중에 노래 자체가 명곡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과연 어디까지 ‘우리의’ 노래라고 부를 수 있을까?”
20세기 혁명의 역사는 곧 20세기를 살아낸 이들의 역사다. 그들은 자신이 품었던 기대와 지식을 바탕으로 용단을 내렸다. 명예의 전당에는 부하린, 고르바초프, 루즈벨트, ‘고결한 호치민’, ‘위대한 드골 장군’, 그리고 인민전선이 있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평균수명 이상 살아남은 우리 대다수의 눈에 1936년의 스페인 공화국처럼 순수하고 매혹적인 정치적 대의는 유일무이하다. 비록 퇴보를 겪었을지라도 말이다.” 반대로, 전당에 오르지 못한 이들로는 스탈린, 마오쩌둥, (홉스봄이 직접 만나기도 했던) 카스트로, ‘아름다운 순회 혁명가’ 체 게바라, 그리고 순수주의 극좌파가 있다. ‘20세기 가장 과대평가된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가장 불쾌한 성품을 지닌’ 닉슨 대통령이 빠졌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인민전선과 계몽주의
결과적으로 명예의 전당 제일 위에 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이 자리한다. 홉스봄은 스페인 내전을 언급하며, “이 내전이 자유주의자들과 좌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진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합친 성향에 가까웠고, 이는 그의 20세기 분석 전반에 잘 배어있다. 그의 글에서는 운동가로서, 청춘으로서 삶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겪었던 청년을 느낄 수 있다.
1936년 7월 14일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트럭 위에 올라섰던 이 청년은 인민전선 시기, 이어서 찾아온 2차 세계대전 주축국에 대항하던 연합국이 영원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저 파시즘에 맞선 임시적 방어전술의 일환이 아닌, 평등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새로운 길을 트기 위해서 말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대립구조는 온건, 혹은 수정 자본주의라고도 불리는 사회민주주의의 큰 틀 안에서 서서히 희석됐다. 뉴딜정책, 계획경제, 강력한 노조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부유한 계층을 겨냥한, 상당한 세율이 적용됐다. 이런 사상의 재구성은 민족주의 대 보편주의, 반계몽주의 대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논쟁을 낳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은 이 책의 서평을 쓰며 때론 후하고, 때론 엄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근본적으로 대척점에 놓인 사회 계층과 정치 체제들의 대립을 해소(또는 완화)해줄 만한 진보 연합에 기대를 거는 것이 허황되다고 지적한다. 이 견해는 소련과 미국의 17년간(1962~1979)의 ‘평화로운 공존’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이 시기 동안 소련과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핵전쟁을 우려했다. 상대적인 평화상태도 전쟁이나 쿠데타를 막지 못했고, 소련과 미국 둘 중 하나의 지원을 받기 일쑤였다.
동남아시아, 남미,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전쟁과 쿠데타의 중심인물 앞에는 거의 항상 ‘초강대국’이라는 현실적(혹은 잠정적) 고객이 존재했다. 상황이 어쨌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국제관계를 둘러싼 양극단적 이데올로기 해석이 난립할 때에도 홉스봄의 반제국주의적 신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걸프전과 아프간전을 반대했고, 서구권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앤더슨은 적어도 이 점에서는 “홉스봄만큼 중요하고 스스로의 행보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영국 지식인은 드물다”고 평한다.(8)
국내 정치에 있어서 홉스봄의 선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홉스봄은 더 넓은 연합을 선호했고, 정당주의와 냉전에 관한 담화를 피했다. 그의 태도는 정당성이 부족한 노선에 관대함을 보인다는 인상을 주기 일쑤였다. 그는 클린턴, 미테랑, 곤잘레스라는 ‘모든 진보주의와 민주주의 세력의 필요 불가결한 연합’ 아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9) 야망에 찬 교활한 인물들이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좌파를 참담한 상태로 방치했음에도 그들에게 헛된 희망을 품었다. 홉스봄이 자유 기업 체제와 사설 시장이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했을 때, 그는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에게마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바지 입은 대처’(10)에게 열광했음을 깨닫고 후회한다.
소련의 붕괴로 바뀐 계획
『극단의 시대』는 원래 ‘재난의 시대’(1914년부터 스탈린의 죽음까지)와 ‘개혁의 시대’, 두 개의 장으로 구성할 예정이었다. 후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페레스트로이카로 문명화된 공산주의가 섞인 ‘황금시대’에 가까웠다. 대립하는 두 체제가 가까워진다는 홉스봄의 호언장담은, 1960년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연상시킨다. 이후 15년에 걸쳐 사회문제와 환경문제에 대한 저항이 이어지면서 벨의 발표는 무색해졌다.
홉스봄은 자신이 속한 세기의 역사를 분석하고자 역사학자로서 평생동안 연구했던 18세기와 19세기를 잠시 제쳐둔다. 케네디 형제 암살자, 마틴 루터 킹, 말콤 X, 인도차이나 전쟁, 비아프라 공화국의 기근,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붉은 여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서구권에서의 잇따른 경제위기 때문에 글을 재구성하게 된다. 홉스봄이 생각했던 (혹은 소망했던) 두 체제의 화해는 간데없고, 대신 한쪽의 완전한 소멸과 다른 한쪽의 승리만을 목도할 수 있었다.
혁명 속의 혁명
이런 지각변동 때문에 홉스봄은 세 번째 장을 추가했다. 페리 앤더슨은 이를 “마치 건축가가 건축 설계도를 다시 손보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11) 20세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혼합경제, 계획경제, 경제위기를 예방해줄 수요정책, 자본주의 억제, 부의 (상대적) 공유 등은 이제 낡은 화두가 돼버렸다. 소련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깊어가는 불평등과 국력 상실이라는 잔해 위에 남은 것은 절대권력을 가진 매체, 다른 문화권과의 전쟁, 개인주의 영웅화,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 확산, 그리고 정체성 정치뿐이었다. 모두 홉스봄이 혐오하던 것들이었다.
한편, 이 시기는 여성해방의 시기이기도 했다. 여성의 출산 선택권, 성소수자 인권,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됐다. 홉스봄이 25년만 더 늦게 책을 썼다면, 이런 진일보를 비중 있게 다뤘을 것이다. 실제로 『극단의 시대』에서 저자는 사회 대격변(인구 구성, 도시화, 과학기술, 그리고 음악)과 그로 인한 우리 일상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핀다. 홉스봄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 수까지 인용하는 정확함을 겸비했으며, 종교나 UFO 같은 주제도 그만큼 진지한 태도로 분석할 줄 알았다. 또한 재난의 시대가 은막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홉스봄은 독자에게 “중세시대는 인류의 80%에게 1950년대에 갑작스럽게 중단됐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한다. 그는 발렌시아, 팔레르모, 페루 등지에서 관광개발이나 급성장하는 도시 부동산, 변화하는 전통 의상에 대해 직접 관찰한 예시를 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라진 특권을 덧붙인다. “1950년대부터 역사가 이런 방식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젊거나, 기동력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그 경험의 재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분명 20세기는 핵에너지가 인류의 것으로 길들여졌고 교통이 용이해졌으며, 도시가 팽창하고 영화가 널리 보급된 시기였다. 하지만 홉스봄은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다. “20세기 후반 가장 큰 파급효과를 일으킨 눈부신 사회변화는 바로 농경사회의 종말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 대다수는 흙과 가축, 고기잡이를 가까이하며 살았다.” 우리 차례엔 기후 변화가 과거 세계와의 영원한 단절을 초래하게 될까?
2002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홉스봄은 인정한다. “나는 여전히 소련에 대한 기억과 전통을 관대하고 애정 어린 태도로 대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에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나는 10월 혁명이 곧 세계의 희망이라고 믿었던 세대의 사람이고, 이는 중국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12) 이런 편향성은 소련이 보내는 신중한 행동지침에서 해방된 후 제3세계에서 일어난 혁명에 홉스봄이 왜 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는지, 유럽 ‘좌파’에게 왜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반면, 문화 혁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얼마나 막대한 사망자를 냈는지에 그친다.
홉스봄은 혁명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문제, 혹은 혁명의 명분으로 쓰였던 타락한 관료주의에 대한 우려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중국인의 복종하는 경향을 ‘조화’라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연결해 설명한다. 마오쩌둥이 고위 관료에 대항해 들고일어나 “사령부를 불태우자”고 부르짖던 것이나, 수정주의가 홍위병뿐만 아니라 서구의 급진주의 분파 청년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할까? 홉스봄과는 반대로 이들은 소련 체제를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또한 늘 반대 결과만 불러오는 투표를 통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질서를 날려버리고 싶어 했다.
“그을린 피부로 밀림 속에 서 있는 게릴라병의 이미지가 1960년대 제1세계 국가들의 급진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1960년 이후 젊은 혁명가들의 영감의 원천은 이제 소련이 아니라 제3세계 투쟁이었다. 그런데도 홉스봄은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논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관료화, 개혁, 혁명, 평화로운 공존이나 혁명전쟁만큼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홉스봄은 소련 체제와 그에 복종하는 공산당들이 반자본주의 세력의 지지를 잃을 때 20세기의 방향을 잘못 짚은 것이다. 일선에 놓인 문제로는 중산 계급화되는 상위 노동자 계급, 관료주의 노조의 보수성, 혁명 속 또 다른 혁명의 시급성이 있었다.
프랑스 68혁명을 분석하면서 홉스봄은 학생과 노동자들의 다양한 동기를 짚는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다시 없을 경제회복과 완전고용 상황에서 20년을 보낸 뒤,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머릿속에 혁명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홉스봄은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그는 거만한 어조로 “살면서 한 번이라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본 경험이 있는 진정한 성인이라면, 68혁명의 슬로건이나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당시 사용된 ‘Tutto e subito(전부 다 즉시)’ 같은 단호한 슬로건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역사의 주인공들이 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본 이들은 아니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부 다 즉시’는 미래에 관리자나 엔지니어, 경영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어느 부르주아 청년이 휘갈긴 슬로건이 아니다. 이는 파업투쟁 당시 토리노에 자리한 피아트 공장 건물 벽에 적혀있던 그래피티 문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홉스봄은 정부나 노조가 인정하는 익숙한 형태의 투쟁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간과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1960년대 반항아들을 새로운 흐름, 혹은 좌파의 변종으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이었을까? 이 경우 그들은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 특히 기존의 좌파를 갈아엎는 새로운 선택을 한 셈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1960년대가 지닌 역사적 의의의 진가를 필자가 간과했음이 명백하다.”(13)
‘흑서(黑書)’, 그 이면의 공산주의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평소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지만 명확하게 이해하지도, 완전히 지워버리지도 못했던 조작된 20세기 역사의 진실을 알아챌 수 있다. 홉스봄이 언젠가 밝혔듯, “패배만큼 역사학자의 사고를 날카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패자들은 역사가 왜 자신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14) 하지만 30년이 넘도록 승자들이 고집스레 쌓아올린 대규모 역사 왜곡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 관대한 처사다. 오늘날 역사를 돌아보려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아니, 답은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한 특정 국가의 역사가 20세기를 지배하고 이데올로기 낙인찍기를 주도한 나머지,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국가, 바로 소련에 대해 논할 때다.
소련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선전물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특히 1997년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의 어두운 면을 다룬, 통칭 『공산주의 흑서』가 출판된 이후가 그랬다. 이 책은 홉스봄의 저서만큼이나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책을 펴낸 스테판 쿠르투아가 털어놓은 출간의 목적은 가상의 수치들을 근거로, 공산주의가 그 사촌쯤으로 취급받는 전체주의 나치즘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쿠르투아는 “공산주의 체제는 약 1억 명에 달하는 인구에게 범죄를 저질렀다.(15) 이에 비해 나치즘은 2,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며(16) 새로운 뉘른베르크 재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체제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은 계속 이어졌다. 유럽의회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근거없는 주장이 뒤섞인 결의안이 나왔을 정도다. 결의안은 의원들의 압도적인 과반수로 통과됐다.
공산주의가 제3인터내셔널 창립을 기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은 만큼, 공산주의를 하나로 통틀어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그중 소련이 겪은 변화를 말하자면, 스탈린은 레닌의 볼셰비키당 간부들을 숙청하면서 당을 상당 부분 청산했다. 그 후 1937~38년 동안 광기에 찬 전대미문의 숙청작업이 이어졌다(자그마치 68만 명이 총살됐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런 사실을 고발했고, 5년 뒤 붉은 광장에 있는 영묘에서 방부처리된 스탈린의 유해를 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발표했을 때, 그가 겪었던 수용소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1980년대 소련의 수감자 수는 미국에 비해 훨씬 낮았다. 평범한 소련 시민이 “살해, 내전, 혹은 국가 때문에 죽을 위험은 아시아, 아프리카, 미대륙의 많은 나라들에 비해 낮았다”
홉스봄은 스탈린 시대 이후 25년 간 지속된 정체로 체제가 마비될 지경있던 시기, 소련 국민의 신뢰감을 회상했다. “1970년대 전반기의 소련 주민 대부분은 과거 어떤 시기보다 즐거웠다.” 소련과 공산주의는 번번이 국민을 억압하는 체제로 취급받았기에,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던 이들에게는 놀랄만한 사실이다. 한 미국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1960~1970년대 “소련의 새로운 인물상은 자국이 일군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며, 소련이 국제무대에서 부상하는 강대국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경제 발전이 개인의 삶의 질 향상으로 나타나며, 소련 체제가 특히 청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확신한다.”(17) 10~20년 후 드러난 변화를 향한 추진력은 아래에서가 아닌 위로부터 시작됐다. 체제의 전복은 지도자들이 “그들 고유의 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었을 때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의 결말이 과연 이와 같았는가?
1977년 베트남의 ‘평화 회복’에 기여한 지식인 중 한 명인 새뮤얼 헌팅턴마저도 냉전이 확대되는 동안 소련 체제가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궁금해했다. 이는 성가신 문제였는데, 2년 전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발표해 주목받은 보고서에서, 헌팅턴은 걷잡을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18) 그 당시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고민하면서 수많은 요소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요소란, 질서와 안정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과 소련국민이 원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체제의 가치를 공고히 해줄 집단 사회화, 유일당이 대처할 수 있을 만한 뿌리 깊지 않은 문제들, 안정 유지에 기여할 경제성장, 삶의 질 향상, 강대국이라는 지위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핵심 지표들을 성과로 거둔 헌팅턴은 애석하게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미래에 다가올 예기치 못한 문제들은 모두 소련에서 이미 해결한 것들과 질적인 차이가 없을 듯하다.”(19) 그 후 일어난 일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소련이 해체되자 솔제니친은 망명지 미국에서 조국 러시아로 돌아갔고, ‘붕괴 상태’의 러시아와 직면했다. 자유주의 혁명가들은 그곳에서 충격요법을 행하고 있었다. 홉스봄은 “1930년대에 평판이 완전히 추락해버린 순수 자유시장을 50~60년이 흐른 뒤 다시 도입하려는 시류”에 경악과 불신을 내비쳐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솔제니친은 무료급식소, 기아 행진, 쌓여가는 분노를 직접 겪었다. 술꾼이자 서구의 꼭두각시였던 보리스 옐친의 집권 하에 경제체제가 낱낱이 해부되면서, 한때 소련이었던 나라가 급속도로 가난해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1992년에서 1998년 사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50% 가까이 급감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에서 겪은 것보다 더 큰 감소율”이었다.(20) 국민의 기대수명은 전시나 기근 수준으로 떨어졌다. 홉스봄이 자유민주주의의 평판을 흔드는 부적절한 반어법을 절제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소련 체제하에 일어난, 정도를 벗어난 범죄들은 이제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초기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반대세력에 맞서야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여지가 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공포가 클수록 우리의 승리도 커질 것이라고 외쳤다. 비록 러시아 인구의 3/4이 피를 봐야 할지라도 우리는 러시아를 구해내야 한다.”(21) 더욱 의미심장한 일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서구의 산업 수준을 따라잡는 것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강대국이 되는 일이었다. 홉스봄은 이 결과를 인상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근거로, 러시아는 원래 “인구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나라”이자, “타국의 원조가 모두 끊긴 후진국”이었다고 쓴다. 혁명이 퍼지길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최악의 상황에서 미지를 향해 도약할 수밖에 없던 국가였다. 성공에 필요한 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력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적대국에게 봉쇄당하고,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고난의 길을 걸었다.(22)
반면 홉스봄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용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중국 공산당이 “20년간 마오주의가 낸 결과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신처럼 추앙받던 한 지도자의 사상이라는 미명하에, 잔혹한 반계몽주의가 초현실적인 부조리함과 만났던 시기였다”고 평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다시금 “마오주의의 결과가 서구를 충격에 빠뜨릴 의도는 분명 없었지만,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깊은 인상을 주기엔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남반구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지켜내는 동안, 공산주의 국가의 행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로부터 해방된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신식민주의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극약처방을 피하려던 남반구 국가들에겐 유용하고 고무적인 경험이었다. ‘공산권’ 국가들이 존재함으로써, 서구와 싸우던 국가 해방 운동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 필요한 경우 무기 원조까지 받을 수 있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두 체제의 결탁에 대한 이상적인 상징으로, 매년 필수적으로 기념한다. 반면 뮌헨 협정 기념일이 가지는 교훈의 가치는 이와 다르다. 스탈린을 제외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가 히틀러와 협정을 맺었다. 때때로, 적어도 50년에 한 번쯤은 다른 조약을 언급할 수는 없을까? 서구 국가들이 프랑코, 수하르토, 피노체트 장군이나 모부투 국가원수, 샤(이란), 보카사 황제나 토마 상카라를 죽인 암살자들과 맺었던 공식, 혹은 비공식 조약들 말이다.
또한 50년에 한 번씩이라도 ‘자유 세계’가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오랫동안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몇 달 후 무너졌다. 프랑스, 미국, 서독과 영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련과 베트남, 동독, 쿠바가 개입한 일이었다. 아프리카 국민의회(ANC) 간부 여럿이 남아프리카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하노이, 동독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아프리카 국민회의 세력을 나미비아와 앙골라까지 바짝 뒤쫓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쿠바 군대가 개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당시 미국과 영국 정부는 남아프리카 정부에 ‘건설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명백하게 인종차별주의 정권이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라는 이유로 먼저 고발됐다. ‘식민’이라는 용어가 좌파와 학교 교육 내용에 침투해 있었고, 인종차별이라는 의혹은 즉각적인 명예실추를 의미하던 시대였다. 쉬쉬하기보다 지적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홉스봄은 이를 조명하는 데 전념했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François Furet, 『Le Passé d’une illusion 환상에 찬 과거』, Robert Laffont/Calmann-Lévy, Paris, 1995, p. 574.
(2) Erik Izraelewicz, 『Le Monde qui nous attend <르몽드>가 우리를 기다린다』, Grasset, 1997, p. 12, pp. 128~129.
(3) Eric J. Hobsbawm,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 Abacus, 2002, p. 409 (한국어판: 『미완의 시대』, 이희재 옮김, 민음사, 2007).
(4) Eric J. Hobsbawm, <The Observer>, 2011년 1월 16일.
(5) Eric J. Hobsbawm, ‘A conversation about Marx, student riots, the New Left, and the Milibands’, Tristram Hunt와의 대담, <The Observer>, 2011년 1월 16일.
(6) 위의 책, p.114.
(7) Claude Julien, ‘Le siècle des extrêmes 극단의 세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3월호.
(8),(9) Perry Anderson, ‘Confronting defeat’, <London Review of Books>, 2002년 10월 17일.
(10) Eric J. Hobsbawm, 『Interesting Times...』, op. cit., p. 276.
(11) Perry Anderson, ‘Confronting defeat’, art. cité.
(12) Eric J. Hobsbawm, Interesting Times...』, op. cit.
(13) 위의 책, p.251.
(14) Eric J. Hobsbawm, ‘Rien n’aiguise l’esprit comme la défaite 패배만큼 사고를 날카롭게 벼려 주는 것도 없다’, 『Marx et l’Histoire 마르크스와 역사』, Demopolis, 2008, p. 196.
(15) 『공산주의 흑서』 띠지에 ‘희생자 8,500만 명’이라고 적혀있다.
(16) Stéphane Courtois (dir.), 『Le Livre noir du communisme 공산주의 흑서』, Robert Laffont, 1997, pp. 24~25.
(17) John Bushnell, ‘The “New Soviet Man” turns pessimist’, in Stephen F. Cohen, Alexander Rabonowitch and Robert Sharlet (dir.), 『The Soviet Union Since Stal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0.
(18) Samuel Huntington, Michel Crozier and Joji Watanuki, ‘Crisis of Democracy’, 『Report on the Governability of Democracies to the Trilateral Commission』,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19) Samuel Huntington, ‘Remarks on the meaning of stability in the modern era’, in Seweryn Bialer and Sophia Sluzar (dir.), 『Radicalism in the Contemporary Age』, vol. III: Strategies and Impact of Contemporary Radicalism, Westview Press, Boulder (Colorado), 1977, p. 277.
(20) Maxime Petrovski & Renaud Fabre, ‘La “thérapie” et les chocs : dix ans de transformation économique en Russie ‘치료’와 충격: 10년에 걸친 러시아의 경제 변화’, <Hérodote> 104호, 2002년 1월.
(21) Lucien Sève의 인용. 『Octobre 1917. Une lecture très critique de l’historiographie dominante. 1917년 10월. 주요 사료편찬에 대한 아주 중대한 독서』, Les Éditions sociales, 2017, p. 68.
(22) Moshe Lewin, 『Le Siècle soviétique 소련의 세기』, Fayard-Le Monde diplomatique, Pari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