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제가 평가하는 68년 5월 학생 혁명

최초로 공개되는 마르쿠제의 미출간 강의록

2021-04-3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 철학자

독일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신좌파에 빼놓을 수 없는 영적 리더였다. 다음 내용은,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 교수였던 마르쿠제가 1968년 5월 파리와 베를린 방문 중 학생시위 사태를 목격한 직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가졌던 강연 전문으로, 사상 처음으로 공개된 녹취록에서 가져왔다.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파리와 베를린의 학생운동은 전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학생운동의 향배가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신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68년 5월 23일 샌디에이고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그의 강연 녹취록은 68년 유럽 학생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이 사료를 통해, 소요사태의 중심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적 활력을 엿볼 수 있다. ‘현대 과학적 사고 발전에 있어서 칼 마르크스의 역할’이란 학회 참석을 위해 마르쿠제가 파리를 방문했을 당시, 학생시위 사태는 이미 시작됐고 프랑스 언론은 마르쿠제를 “반항적인 학생들의 우상”으로 언급했다.

그는 5월 10일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라탱가(街)에서 벌어진 시위대와 경찰의 폭력적인 충돌을 직접 목격했고, 이 사태는 그의 강연에 자세히 묘사된다. 이후 13일, 베를린을 방문한 그는 급진파 학생들과 회동을 갖고 파리 학생운동에 관해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마르쿠제는 23일 목요일 UC샌디에이고 대학 대강당에 운집한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했다. 같은 날, 프랑스 학생시위대는 전국 규모로 확대됐고 샤를 드골 정부는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물론 마르쿠제도 예상했지만 당시 드골은 대통력직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레미 팝킨은 당시 마르쿠제 교수의 수업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된 학생이다. 현재 켄터키주립대 역사학 교수다. 당시 마르쿠제 강연을 녹취한 팝킨의 요약본이 UC샌디에이고 학보에 게재됐었으며 마르쿠제 에세이집에 수록됐다. 하지만 강연 전문 녹취록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파리 학생시위는 학내개혁 운동으로 매우 순수한 동기로 출발했다. 분명한 사실은 파리대학의 새로운 분교 낭테르대학이 베트남 반전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징계하기로 결정한 뒤 학생들의 반발이 커졌고, 뒤이어 소르본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소르본 앞마당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요구는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낡은 구조를 개혁하라는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또 1천 명의 교수 증원 및 학교건물 증축, 그리고 도서실을 확대하라는 요구도 포함됐다. 

완전한 평화시위였음에도, 소르본대 총장이 내무부 장관의 제안에 따라 경찰력의 본교 투입을 요청해 학생들을 내몰았다. 소르본대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학내로 침입해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지금까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례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전 유럽 역사에서 경찰의 대학진입은 전무했다. 프랑스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사실상 경찰의 대학진입이 있을 수 없는 일일 정도로 이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사상 최초의 소르본대 경찰진입으로 수백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고 결과적으로 더 큰 시위사태를 몰고 왔다. 파리 외곽에서부터 시작된 소규모의 시위대들이 라탱가로 속속히 모여들었다. 한편 소르본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경찰은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대학을 봉쇄했다. 학생들은 이제 대학 문을 다시 열라며 라틴구 내 경찰 병력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다.

 

바리케이드를 치다

경찰이 소르본 지역에 병력을 재투입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학생들은 다시 모여들어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자발적인 결집이었다. 그들은 도로 주변과 주차장의 차들을 끌어다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차 주인이 누구든, 그들은 차를 뒤집고 포개 도로를 가로막았다. 대로에서는 불가능했고, 소르본과 가까운 좁은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가 쌓아 올려졌다. 자동차 바리케이드 위에는 나무조각, 쓰레기, 박스, 쓰레기통 등이 올라갔다. 학생들은 ‘일방통행’, ‘우선멈춤’과 같은 거리 표지판을 뽑아냈다. 미국의 포장도로는 단단해서 표지판을 뽑기 어렵다. 하지만 1848년과 1870년 두 차례의 프랑스 혁명에서 목격했듯, 파리의 도로는 조각돌로 만들어졌기에 표지판들은 쉽게 뽑혀 경찰력을 방어하기 위해 쓰였다.

학생들은 또 체인을 들고 쓰레기통 뚜껑을 방패로 사용했으며, 바리케이드로 사용된 자동차 위로 가로수에 설치된 쇳조각을 뜯어 얹었다. 바리케이드의 높이는 3.5~4미터였다. 학생들은 경찰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슬로건과 함께, 바리케이드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새벽 2시 30분까지 모든 게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경찰은 병력을 투입해 거리 점령을 시도했고 바리케이드를 해체했다. 경찰은 염소 가스 수류탄과 최루탄을 투척했다. 염소 가스 사용에 대해서는 경찰은 부인했으나, 증거는 차고 넘쳤다. 나도 학생들의 얼굴과 눈이 붉어진 것을 목격했다. 이런 가스탄으로 경찰은 바리케이드 제거에 성공했다. 학생시위대가 방독면만 착용했더라면, 경찰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리 경찰은 사용이 금지된 총 대신 납으로 둘러싼 곤봉을 마구 휘둘러댔다.

보안회사들은 라이플이나 카빈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권총처럼 연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학생들에게 해를 입히지 못했다. 경찰들은 가스탄으로 학생들을 몰아내고, 바리케이드를 불질렀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파리와 미국에서 발생한 유사한 소요사태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파리의 라틴 구역 주민들은 학생시위대를 응원했다는 점이다. 주민들이 창문을 열고, 학생들을 쫓는 경찰에게 손에 잡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침실에 둔 요강까지 집어던졌다. 경찰 역시 아파트와 주민들을 향해 가스탄을 쏘아댔다. 시위대는 좁은 도로 양쪽 입구에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드 안에 갇혀버렸다. 학생들은 얻어터졌다.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열성을 다해 학생시위대와 함께한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과 함께 거리에 있었고, 바리케이드 위에서 학생들을 도왔다. 반대편 바리케이드가 이들의 도주를 막았기에, 경찰에게 아주 유리했다. 그날 밤 학생시위대 약 800명, 경찰 350~4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 프랑스 최대 노조와 연대

그렇다고 시위가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바리케이드 설치를 주도하고 새벽 6시까지 계속 시위대와 함께했던 다니엘 콩방디라는 젊은 리더는 거리 위의 전쟁에서 패하자 장엄하게 말했다. “이제 한 가지 일만 남았다. 총파업이다.” 이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한 시간 내로 프랑스 최대 노조를 방문했고, 다시 한 시간 내에 다가오는 월요일 노조 총파업 결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알려진 바와 같이, 노조 파업은 100% 참여로 실행됐다.

이제 나는 이번 파리 학생시위 사태가 왜 중요한지를 말하고자 한다. 우선 이 시위는, 지식인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등감을 해소해줬다. 학생들은 노동자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줬고,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슬로건과 행동방침을 따라줬다. 사실 파리 대학생들은 혁명가가 아니라 아방가르드(미국식 히피-역주)에 가까우며, 이 사태는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들의 행동이 대규모 결집을 이끌어 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3주 동안 파리에서 벌어진 일은 전격적인 유럽 전통의 부활이자 복귀였다.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정신은 휴면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 혁명적 전통을 부활시켰다. 우리는 파리의 학생시위가 자발적으로 더 커지고 강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학생들이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에서부터 주변 건물로까지 시위가 전파됐다. 맨 처음 대학건물에서 시작된 시위는 극장, 공장, 공항과 방송국 등으로 퍼졌다. 물론 학생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등장했고 직장인들까지 시위 주체로 참여했다. 시위 초반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노조와 공산당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시위대의 폭력적 상황을 비난했다. 그들은 학생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비난하며 수십 년 넘은 계층갈등을 끄집어냈고 부르주아 아이들이라고 깎아내렸다.

부르주아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했던 그들이, 부르주아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사태 초기 학생운동 반대 세력은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 학내문제를 넘어 프랑스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식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학생들을 부르주아 아이들이라고 부를 만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노동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간주되는 프랑스 공산당 노선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라도 수년간 정권을 잡을 듯한 정당이었다.

학생시위가 어떻게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원래 학생시위는 대학 내 문제에 국한된 것이었고, 요구사항도 대학 개혁이 전부였다. 즉, 이 시위를 통해 대학은 전체 사회의 일부임이 인정된 것이다. 시위가 대학 문을 넘지 못했다면, 전체 사회의 취약 부분을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학내시위에 그쳤을 것이다. 이번 시위사태가 촉발되기 오래전부터 노동자들은 노조의 시위금지 노선에 활발히 반대해왔고 그 벽을 넘고자 했다. 학생들은 파리 주변 공장지대로 가서, 노동자들과 소통하며 동조자를 만나고,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갈 때, 노동자들도 함께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외쳤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학내개혁 슬로건이 나란히 등장했다. 이 두 그룹은 자발적으로 연합했고 보조를 맞췄다. 이런 방법으로 학생시위 사태는 더 큰 사회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정치적 운동으로 전개됐다. 게다가 수십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해 파리 인근의 공산주의 노조가 주류인 공장들을 점거하자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은 지지 성명과 함께 파업과 시위 동참을 공식 결정했다. 프랑스 노총은 시위사태가 자신들의 손을 벗어나서 확대되자 더 이상 공산당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시위를 지지했고 시위 상황의 조직적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자처했다.

 

시위사태…부패한 기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 

이번 시위사태의 정치적 요구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며 대학의 정치 활동을 보장하라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는 수업에서 배운 것과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연결하자는 신호였다. 중세시대의 낡은 구조, 시대에 뒤떨어진 커리큘럼과 교실 밖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와의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대학의 정치참여, 표현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 등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콩방디는 미국 주도의 정책과 베트남 전쟁을 용인하는 것은 ‘언론 자유의 남용’이며, 언론 자유의 권리를 정책홍보를 위해 남용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또한, “희미하게나마 세상을 바꿀 마지막 자유의식이 남아있음에도, 프랑스 정부가 신식민주의적 발상으로 이런 사회의식을 없애려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학생들은 직장 창출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분노와 공포를 유발한 것은 전국적으로 높은 프랑스의 실업률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과 생계 해결이 어려웠다. 이런 현상은 과학, 엔지니어, 기술 전공자들에게 더욱 심했으며, 청년들 모두 실업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의 학내 개혁 요구가 정치적 요구와 맞물렸으며 이들의 시위는 기존 사회를 상대로 한 저항이었다. 시위사태는 갈수록 자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주의적 양상을 띄어갔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그 초기부터 압제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거부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이 때문에 시위 학생들에게 마오주의자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설명될 수 있다. 공산당 언론 역시 학생들을 주로 트로츠키 신봉자, 수정주의자 또는 마오주의자로 묘사하며 비난했다. 마오쩌둥은 어쨌든 사회주의 건설의 심볼이었다. 이는 소련과 소련 위성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난 스탈린식 관료주의적 억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차이점은 프랑스 학생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미국과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일맥상통하는 점은, ‘완전 저항’이다. 분명한 악과 명백한 실패에 대한 저항이었다. 동시에 사회 전체의 가치 시스템과 목표와, 기존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능력을 향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 사회문화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상황에 대한 거부였다. 경제 상황, 정치적 환경 그리고 뼛속까지 부패한 가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프랑스 학생운동은 ‘문화혁명’이다. 전체 사회의 도덕성을 포함해 기존 문화시스템 전체에 대한 혁명인 것이다.

 

서독 학생운동, 급진적 진보로 사회에서 고립   

프랑스 학생운동이 어떻게 대중의 자발적인 도움과 지지를 받았는지, 미국과는 달리 전체 노동자의 완전한 지지를 확보했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프랑스는 미국처럼 풍요롭지 않다. 대다수 국민의 삶의 조건이 미국에 비해 열악하다. 프랑스인들은 미국과 달리 사회적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활발한 전통을 가진 프랑스의 노동운동은 지금까지도 상당한 사회적 변수로 작용한다. 추상적인 설명일 수도 있지만 극단적 사회운동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전망은 다르다. 모두가 알다시피 프랑스는 100년 동안 4차례의 혁명이 있었고 이런 역사는 분명 프랑스인들에게 혁명적 전통을 심어줬다. 또 이런 전통은 언제든지 기회만 맞아떨어진다면 다시 새롭게 타오를 수 있다.

서독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말하겠다. 다른 지역은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를린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1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상당한 변화가 감지됐다. 베를린 학생운동은 매우 급진적으로 변했다. 시위 함성만 해도 더 격해졌고 어떤 형태의 대화도 거부하고 있었다. 다급한 성취욕을 보였고, 매일 그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학생들의 회동은 매일 벌어졌다. 대학 내 가장 큰 교실이 학생들의 정치적 모임 장소가 됐다. 한편 자유대학은 내가 아는 한, 1948년부터 학생대표의 학사운영 참여를 허용한 유일한 대학이다. 학생대표들은 대학평의원회 의원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교수임용 찬반투표를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 베를린의 급진적 학생운동은 위험하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학생운동의 경우 시위참가자는 최초 1만~1만 5,000명으로 시작해 8만~10만 명 규모로 커졌다. 또한 전국민의 지지를 받았기에 오랜 시간 건물을 점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곳의 학생운동은 베를린 주민의 분노와 노조의 반대여론에 직면했다. 미국과 비슷한 이런 상황에서는 학생시위가 한층 격렬해져서 경찰과의 충돌까지 감수할 정도로 위험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베를린의 학생시위대가 후퇴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조차 경찰병력의 위험성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줘야 했지만 소용없었다. 학생들의 참을성은 바닥난 상태였다. 그들은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적 절차를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학생들은 독일 경찰의 잔학성을 잘 알고 있었고 나치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로 독일연방정부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대학 역시 여전히 권위적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교수와 대학운영자들도 학생운동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독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학생운동이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줘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몸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더 급진적으로 나갈수록, 또 반대편 목소리를 더욱 깔아뭉갤수록 상황은 더더욱 좋아진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학생들은 가게 창문을 깨고 휘장을 불태우고 그런 행동을 시도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방법만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릴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또 그들의 회동에서 학생 신분이 아닌 청년들은 이를 납득하기 힘들어했다. ‘행동을 위한 행동’이라는 급진적 아이디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비판대상이 됐다.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진보적’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해 보인다. 덜 급진적인 의견이 나올라치면 반대부터 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어떤 경우에도 ‘진보’는 저주받은 단어였다. 물론 독일 진보주의의 역사를 안다면 진보라는 단어가 저주받는 상황도 이해할 만하다. 독일 학생들의 이런 경향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 학생들의 의도와 달리, 또 국제사회의 추세와 달리 이런 상황이 된 배경을 파악하면, 학생들의 급진적 성향이나 행동들을 비난하는 일도 주저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동일시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와 실수를 통해 학생운동이 힘을 얻고 동시에 국제사회와의 동조와 협력 역시 더 강화될 것을 바란다.

이 정도면, 도입부에서 할 말은 다한 듯하다.

 

[현장 질의응답]

 

마르쿠제 교수는 강연 후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억압적 관용’”

 

  • - 베트남전 지지 의사를 표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찬성하는가?

“그런 생각을 지지해왔고, 그렇게 발언했다. 그러나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내가 분명하게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민주사회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옹호하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민주적 표현의 자유 권리를 누려선 안된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그랬듯,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훼손시킨다. 따라서 이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 - 아인 랜드(Ayn Rand)의 객관주의(Objectivism)와 같은 또 다른 철학적 사고방식의 금지를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오늘날 그 어떤 철학도 기존 사회 시스템을 위협하거나, 더 나은 방향을 위해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만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은 예술, 문학, 음악, 철학 등에 대해 검열하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주장한 것은 이미 나타난 것처럼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운동에 대해 거부하는 ‘억압적 관용’이다.”

 

  • - 서독에서 준비 중인 비상시국(긴급조치)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상시국법, 또는 그와 유사한 법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통과된다면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사악한 법이 될 것이다. 비상시국법에 따라 정부는 헌법이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를 중지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군병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 지금 서독 학생운동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비상시국법이다. 학생운동이 성공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비상시국법은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결국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아주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학생운동에는 좌파 급진주의가 만연해있고, 이는 우익 보수만 강화시킨다는 논쟁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를 구실로 학생운동을 반박한다. ‘적들을 분노케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반대파를 분노케 하지 않는 반대파를 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반대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역시 국제적인 음모론의 일종이지만, 좌파 특히 좌파학생들은, 이미 유럽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극우세력 준동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나치 등장 이전 시대에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반대파는 같은 말을 했었다.

간곡하게 당부하는 바다. 적어도 우리들은, 이런 주장이 뻔뻔한 역사적 오류임을 확인해야 한다. 히틀러는 좌파가 너무 급진적이고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급진적이고 더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좌파는 쪼개졌고 그런 내부의 분란이 극우정권을 가능하게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 벌어진 일들을 보자. 급진적이고 강한 좌파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급진적이고 강하지 못한 좌파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치가 권력을 잡았다. 좌파는 분열됐고 파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좌파는 약해졌고 극우세력의 집권이 가능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 -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 연대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지금 학생과 노동자 연대가 이뤄졌지만 이런 운동은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고 관련 이슈에 따라서도 분리될 수 있다. 프랑스의 극우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지금처럼 시위 반대파는 기존 정부 내의 극우파를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변화이고 아마도 나치즘, 파시즘과 싸운 역사의 영향으로 보인다. 물론 프랑스의 극우정당은 처음부터 좋지 못한 향기를 뿌렸으며 보수를 대표하는 적절함도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의식이 존재한다. 최소 희미한 의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좋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전통적인 노조운동으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젊은 노동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전통적인 노조에 불만이 매우 많으며,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이상의 것을 원한다. 즉 대통령이 전권을 휘두르는 정부의 종식, 효과적인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시위 요구들이 의식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 등장한 사례는 없었다. 이는 학생들의 성명서를 통해 등장했으며 노동자계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안한 이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동유럽 상황, 특히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 상황에 대해 말해달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거의 스탈린 시대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실상 테러에 가까운 억압 체제라 해도 무방하다. 생각의 표현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 완전한 억압 통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같은 상황은 정치경제가 안정돼 보일수록 더 심화되고 있다. 사실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래서 경제 개혁이 요구되고 있으며, 절대적인 중앙통제 시스템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사실 자본주에서 따온 것이다. 장려금과 이익분배라든지, 또 기업 경영자의 권한 증대 등등….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노동운동은 기존사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사회주의 자체에 해롭다고 평가됐던 스탈린체제 이후를 향한 움직임이다. 이런 경제체제의 여유는 문화적 여유를 가져온다. 즉, 검열제도 및 사전검열의 철폐라든가 작가, 철학가 전문가 그룹에 대한 공산당의 강고한 통제를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 등을 말한다.”

 

프랑스 시위의 자발성, 사회적 정당성 얻어 

 

  • - 학생시위가 혁명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나?

“실용적인 차원에서 학생운동의 성격은 전통 이데올로기에 대항한 것이다.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 뿌리 깊은 거짓에 대한 의심 때문에 나타난 상황이다. 즉, 실용적인 성격을 지닌다. 나는 학생운동을 혁명으로 보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든 미국에서든 혁명적 상황이나 그 전 단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가설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가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를 이해한다면 지금 벌어지는 시위사태에 대해 ‘혁명’ 또는 ‘혁명적’이라는 개념을 붙이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프랑스의 학생들이나, 미국의 학생들이나 굳이 ‘혁명’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벌어지는 여러 상황 속의 한 가지 사건이 전체를 뒤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달 내가 겪은 학생운동은 나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 그리고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전략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는 구시대적인 생각이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은 분별력 있는 정신이 가장 요구되는 상황이다. 대규모 시위가 조직돼서 어느 날 워싱턴, 펜타곤, 백악관 등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은 몽상이나 마찬가지이며, 사실을 전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24시간 내로 초대형 시위가 벌어져서 텍사스나 노스 다코타주에 새로운 백악관이 들어선다고 해도, 그것은 곧바로 끝날 일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프랑스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발적으로 발생하고 자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시위운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자발적 운동’이라는 이 개념을 강조한다. 일말의 도움도 받지 않는, 그런 독립적 자발성과는 다르다. 프랑스 시위의 자발성은 다른 전통적 시위와 구분되는 요소다. 현재의 프랑스 시위는 전통적인 시위, 노조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이유로든 수십만, 아니 수백만 시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지점이 다가올 수 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상적으로 출근하고 명령을 받고 똑같은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요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집에 머물거나 산책을 하는 것 말고 또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그곳에서 기거했다. 아니키스트가 따로 없었다. 어제 막 알려진 것처럼, 그들은 공장 기계를 점검한 뒤 어떤 것도 고장나지 않았고 어떤 재산상의 피해도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들은 외부자를 차단했고, 이런 행동으로 회사의 일이 바로 자신들의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앞으로도 그 점을 계속해서 부각시키며 자신들의 시위를 정당화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시위를 규정하는 한 단면이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겠지만, 전통적인 노동자 운동에서 공장 점거는 공식적으로 지지받지 못했다. 또 사유재산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됐다. 노동시위는 보통 노조정책에 대해 반대하며 자발적으로 진행됐다. 이런 자발적인 성격이 새로운 시위운동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전통을 넘어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말이다. 프랑스에서의 사회 마비 현상이 지속되거나 정부측의 노력이 무산되고 시민운동이 성공할 경우, 물론 이 같은 견해는 나의 가정일 뿐이지만, 우리는 정부가 어떻게 붕괴되는지 볼 수 있다. 그 어떤 사회도 그 정도의 장기적인 마비 현상을 용납할 순 없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에 항거하는 시위는 사유재산을 깔보는 인식에서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가치를 배격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동의하건 못하건 이것은 전통적 교육방법과 전통적 부르주아 문화를 혐오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에 대해 보다 확고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내가 학생들의 편에 서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1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있었다. 나의 친구 테어도어 아도르노가 서독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괴테의 희곡 『이피게네이아』에 대해 강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들이 밀고 들어와 그의 강의를 막았다. 이유는 이란의 팔라비왕을 비판하며 시작된 시위에서 학생 한 명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 베를린의 정치 상황에서 아도르노의 휴머니즘 드라마와 관련한 강연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실에서도 항의시위가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강의가 다시 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도 베를린에서 유사한 사건을 겪었다. 학생들이 수차례나 강의를 방해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개념이나 이론을 논할 때냐”라며 “교실 대신 거리로 나가자”고 울부짖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학생들의 태도다. 이런식으로는 학생들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의 주장이 아름답고 심오하고 고상하다 해도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베트남 전쟁이든 거리 위의 바리케이드든,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의 고상한 생각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그것에 관해서는 잊고, 우리가 이런 긴박한 현실에서 우리 손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직시해보자. 굳이 첨언할 필요는 없지만, 위험해 보이긴 해도 반박하긴 어려운 태도다.

나는 항상 미국의 대학들이 상대적으로 사고와 표현의 자유지대로 존재해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적절히 마련돼 있다고 본다. 대학들에 급진적 개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급진적 개혁을 대학이 주도해서는 안되며 대학을 파괴하는 형태로 진행되서도 안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가 앉고 있는 나뭇가지를 베어내버리는 것과 같다. 결국 대학은 반대론자들을 키워내는 곳이며 반대론자들도 교육을 받고 있다. 대학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더 큰 해를 입히는 일이다. 반대론자들과 나를 포함해 우리야말로 대학이 나쁜 곳이 아니란 것을 입증하고 있다.” 

 

  • - 현재 서유럽의 위기 상황과 당신의 사상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말해 달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콩방디의 성명서를 보면 나의 수필 『억압적 관용』에 동조하고 있고 많은 학생들도 그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그 이상의 언급은 필요 없다. 학생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는 나도 의문이며 내가 아닌 학생들이 답할 문제다. 철학자로서, 이론가로서 나는 기존 사회에 대한 비평을 제공해왔다. 마크르스주의건 사회주의건 사회체제는 모든 전통 이데올로기로부터 가능한 가장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전통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성격을 띠고 시작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일지라도 진정한 변화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또 다른 우세한 세력이 기존세력을 대체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유형의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나서 경쟁 가치만 내세우는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제압한다면 다른 상황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진정한 질적 변화는 우월세력과 탄압세력 연합체의 붕괴에서 온다. 어떤 체제 속에서도 이것이 이뤄질 때, 우리는 기존 세상과 다른, 진정으로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말할 수 있다.” 

 

 

글·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독일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는 1934년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60년대 유럽과 미국 신좌파의 기원이었다. 저서로는 『에로스와 문명』, 『일차원적 인간』 등이 있다.

번역·이정필 jplee4907@gmail.com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