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농업에 맞서는 브르타뉴의 재래식 농업

2021-04-30     마엘 마리에트 | 기자

생산량 압박에 시달리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생산방식에 비난받으며, 호화 별장들에 둘러싸인 모르비앙의 재래식 농업인들은 유기농, 직거래, 짧은 유통 등 새로운 농업방식으로 방향을 튼 동료 농업인들의 성공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서로 다른 방식의 농업이 공존하는 가운데, 농업 분야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재래식 모델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8월의 어느 날, 브르타뉴 남부의 고급 휴양지 키브롱(Quiberon)으로 이어지는 1차선 도로에서, 교통체증으로 멈춰선 운전자들의 시선이 한 표지판으로 향했다. “치즈 장인 로제르의 농장. 매일 17시~19시 30분 개방. 소 젖 짜기 18시.” 호기심에 방향을 돌린 여행객의 눈에, 작은 벽돌집과 햇볕 아래 걸린 빨랫감, 잡풀이 무성한 텃밭, 바닷가의 미풍으로 돌아가는 풍력 터빈이 들어온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건초 더미가 수북이 쌓인 투박한 축사 옆에서 어린 송아지들이 뛰어논다. 오래된 연장들이 놓인 나무 헛간이 대미를 장식하며 방문객들에게 시간을 초월한 풍경을 선사한다.

나막신을 신은 50대의 활력 넘치는 로제르 아발랭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는 오래된 보호종인 ‘브르톤 피 누아르’ 소 8마리를 이제 막 축사에 들여보낸 참이었다. 소들은 모두 브르타뉴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휴가를 보내러 렌에 온 한 가족이 젖 짜기를 구경하러 왔다. 이들의 방문은 처음이 아니다. “게으른 농부들이 쓰는 트랙터와는 다른 유일한 진짜”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아발랭만큼이나 역마(일을 시키는 데 쓰는 말-역주)의 소중함을 잘 안다. 기업의 간부였던 이들은 몇 해 전, (손수 건축한) 시골 목조주택에 정착했다. 채소 재배를 시작하고 약초 치료법을 이용하며 ‘진짜 인생’을 되찾기 위해서다. 

아발랭은 소들을 한 마리씩 자동 착유기에 연결하며, “나는 소비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단순한 삶을 누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농촌을 착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과 함께한다. 우리는 식량은 물론, 에너지도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발언은 “로제르는 에센셜 오일로 소들을 돌보는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렌의 가족들을 비롯해 이 지역, 프랑스 전역, 유럽과 미국의 국제 방송국들을 감탄시켰다. 이 ‘치즈 장인’은 “러시아, 미국, 독일의 기자들이 방문했고, 한 번은 알래스카에서 누군가 온 적도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키브롱 시장에서 브르타뉴 사투리로 관광객들을 사로잡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광객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거름을 싣고 가는 트랙터를 싫어한다. 짜증스러운 경적과 욕설을 퍼부으며 해변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망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행히 그 트랙터들이 출발한 경작지는 천국 같은 해변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반대편에 있다. 그곳에서 40대의 낙농업자 야니크 모르방이 일하고 있다. 야니크의 집은 카르나크 해변이나 라트리니테쉬르메르 해변, 키브롱 해변에서 멀지 않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바닷물에 발을 적신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항상 일한다. 휴가도 없다. 나는 저들과 다른 세상에 산다.”(1)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 안다면…”

야니크는 몇 대째 내려오는 가족 농장에서 16세부터 일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 지역 다른 농민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제는 은퇴한 야니크의 아버지 베르나르 모르방이 말했다. 

“우리 부모님에게는 소가 서너 마리 있었다. 부모님은 직접 만든 버터와 달걀, 송아지들을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시장에 가서 파셨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농업이 현대화되면서 생긴 낙농조합들은, 농민들이 버터 제조를 그만두고 우유생산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리고 농장에 와서 우유를 직접 가져갔다. 처음에는 좋았다. 종일 시장에 나가 있거나 버터를 만들려고 우유를 거르는 것보다 편했고, 수익도 규칙적이었다. 부모님은 소를 늘리셨다. 그러나 조합이 계속 커지면서, 조합원들은 발언권을 잃었다. 우유가격부터 모든 것을 조합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농민들이 맞서기에, 조합은 너무 거대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이런 상황은, 당시 “프랑스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국이 시행한 생산 제일주의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베르나르 모르방이 농업에 뛰어들었을 때, 모두가 농장을 두 배로 키우라고 부추겼다. 베르나르는 말했다. “투자를 했다. 축사를 더 크게 짓고 현대화하려고 대출을 받았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책에 나오는 대로, 당시 농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그대로 말이다. 그리고 기술 덕분에 훨씬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됐다. 야니크도 농업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생산하는 법만 배웠다. 그리고 고등 기술자 자격증 과정(BTS)(2)에서는 ‘최소 비용의 최대 수익’을 배웠다. 교육내용은 재래식 농업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농업회의소에서 하는 이야기와 같다. 야니크도 가입한 농업회의소는 농민들에게 “기술적·행정적 지원을 해주며 농업 경영인들과 함께 한다.” 농업회의소는 프랑스 최대 농업조합인 ‘농업경영인 조합연맹(FNSEA)’에서 꽤 오랫동안 주도권을 잡아왔다. 

프랑크 게네크 연맹 회장은 “이런 교육방식에 대해 할 말이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고용시장에 대한 전망이 있다. 그래서 그에 따라 교육 분야를 나눈다. 예를 들어 BTS 취득자들이 특정 분야를 선택해, 그 분야의 역량을 키우게 한다. 또한 농민들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교육한다.” 그러나 이 지역 한 농업고등학교에서 경영과목을 가르쳤던 파트리크 당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학교교육을 농업부가 담당하지 않고 국가교육 차원에서 다뤘다면, 학생들이 로비 활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산방식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정부와 FNSEA가 장려한 생산방식은 3대를 내려오는 동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은 변했다. 모르방의 농장이 자리한 구역의 인구는 약 2배 늘었다. 물가 폭등을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오는 가정들을 위한 주택 단지도 들어섰다. 이제 카르나크, 라트리니테쉬르메르, 키브롱 해변가 주택의 70%는 별장이고, 이 별장 소유자의 1/3은 파리 시민이다.(3) 주택 가격 급등은 일부 투기에서 비롯됐고, 농경지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색 있는’ 건물들이 헐값에 넘어간 후, 리모델링돼 ‘진짜’를 찾는 이들에게 팔렸다.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돌벽으로 된 옛 농가 건물이 보였다. 야니크 모르방은 근사하게 리모델링된 그 건물을 가리키며, 자신이 농장 옆에 집을 짓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했을 때, 이 버려진 농가를 사려고 했다. 하지만 공증인에게 가격을 듣고는 곧바로 포기했다! 결국 파리에 사는 은퇴자 부부가 이 건물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저 집에 가끔 올 뿐이다.” 

베르나르 모르방은, 일 년 내내 마을에 거주하는 새로운 주민들에 대해서 “도심에서 장사를 하거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전체 주민 가운데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다. 프랑스의 유사 농촌 지역에서 농민의 비율은 1968년 40% 이상에서,(4) 2019년 2% 이하로 감소했고,(5) 농민들은 지역 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졌다. “예전에 시장은 항상 농민 출신이었는데, 최근에 시장을 맡았던 두 사람은 회계사와 간호사 출신이었다.”

결국, 두 세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갈등도 생긴다. 농업 생산방식이 새로운 주민들의 바람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젖소를 사육하는 피에르 후아노는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우리가 마을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농약분무기를 들고 지나가면, 부모들이 아이를 한쪽으로 피하게 하고 아이들의 코를 가린다. 그럴 때는, 꼭 거지가 된 기분이다. 거름을 옮길 때도 일부러 멀리 돌아간다. 사람들이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고, 욕도 하기 때문이다. 거름을 밤에 옮길 수 있게 LED가 부착된 트랙터도 새로 나왔다. 우리는 환경오염 주범자 취급에, 동물학대자 취급까지 받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 사람들이 알면,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동물보호협회 사람들은 영상 등 소통도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다.”

또 다른 농민은 자녀가 종종 놀림을 받는다고 토로했다. “학교에서 촌뜨기라고 놀림을 받는다고 한다. 하루는 아들이 버스에서 놀림을 받았다며 울면서 집에 왔다.” 농업세계가 점점 취약해지는 것은, 줄어드는 농부의 수와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익성과 생산량 경쟁을 이유로 농업계 내부 구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려움에 처한 가축 사육자들을 돕는 ‘농민 연대’ 피니스테르(Finistère) 지부장이자 은퇴한 낙농업자인 장샤를 자코팽은 이렇게 설명했다. “토지에 대한 경쟁이다. 모두가 경작지와 생산량을 늘리려고 땅을 구한다.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비열한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한다.” 

농업 규모가 커진 것도 상부상조를 가로막는 원인이다. 은퇴한 또 다른 농민은 말했다. “수확이나 엔실리지 사료 저장과 같은 대규모 작업은, 이제 기계를 보유한 기업들이 한다. 예전에는 엔실리지를 저장할 때 농민들이 교류하면서 상부상조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만날 일이 별로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장 인수자를 찾기는 어렵다.(6) 가족 내에서도 후계자를 찾기 힘들다. 후아노의 부인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농장을 물려받을 생각도 해봤지만, 자리 잡기가 힘들다. 농장 규모가 커지면서 비용도 많이 든다. 게다가 부모님의 지친 모습을 보면, 농장을 운영할 생각이 싹 사라진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만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농민들은 사회에서 고립되고, 생활고와 노동조건 때문에 농민조합에서도 탈퇴하면서 더욱 어려워진다. 게네크는 “조합에서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 농민들이 조합활동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니크 모르방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합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거대 농장주뿐이다. 조합 회의에 참석할 시간에, 농장을 봐줄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FNSEA 회원증은 나도 가지고 있지만, 조합이 내 이익을 대변해 준다고 느끼기 어렵다.”

한 젊은 농부는 “농촌에는 미혼이 아주 많다”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초원에 사랑이 있다> 같은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비난했다. 2005년부터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위대한 사랑’을 찾는 미혼 남성 농부들이 자신의 농장에서, 제작진이 주선한 스피드 데이트를 통해 선택한 도시 ‘구혼 여성’들을 맞이해 1주일을 보낸다. 한 편당 40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할 만큼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우리에 대한 최악의 편견을 만들어낸다!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어떻게 여자들이 우리에게 매력을 느끼기를 기대하나?” 자코팽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미혼 농민이 늘어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이런  TV 프로그램이 제작될 만큼 관심을 가지는 반면, 정작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농민연대에는 심리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농민들의 전화가 점점 더 많아진다. 안타깝지만 자살도 주기적으로 발생한다.”(7)

농민들은 어려운 상황을 버티기 위해 더욱더 일에 매달린다. “우리는 노동시간, 거둬들인 우유의 양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사회적 고립에 대한 해결책이 요원한 가운데,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직업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야니크 모르방도 우리에 갇힌 자신의 소들을 바라보며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그리고 초창기에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소들이 이렇게 갇혀있는 걸 보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소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는다. 애착을 버리려고 한다. 어차피 소도 너무 많다.” 그러나 자코팽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농장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다. “가업을 잇는 농민들은, 농장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 나 때문에 대가 끊어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해고를 당한 공장 노동자는 경제적인 이유로 힘들겠지만, 그는 자신을 해고한 ‘적’에게 분노를 퍼부을 수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농장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면, 분노를 퍼부을 상대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50대의 낙농업자 스테판 르스쿠아르네크는 2년 전, 곡물창고에서 일하다가 사다리에서 추락했다. 몸의 여러 곳에 골절상을 입고 6개월 동안 누워있던 그는 농장 운영을 지속할 수 없었다. 빚을 갚고자 땅과 농장 설비, 가축, 그리고 농장 건물 일부를 팔아야만 했다. “가족을 볼 면목이 없는 참담한 실패” 앞에 그와 동료들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진다. 우유를 만드는 건 이제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곧 가격이 더 싼 동유럽의 우유를 수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르스쿠아르네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얼마 전까지 자신의 가족 소유였던 밭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최근 이 마을에 정착한 낭트 출신 젊은 부부의 역마 네 마리가 있었다. “이제는 저들이 돈을 번다….” 르스쿠아르네크의 어머니도 거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후 역마를 쓰지 않는다. 다들 트랙터를 사용한다. 그게 훨씬 더 편하다.” 아빠가 다녔던 농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르스쿠아르네크의 딸은 말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 절반은 농민의 자녀고, 절반은 관광객들이다.” 농촌 출신이 아닌 학생들을 관광객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교양 없고 편협한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들이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귀여운 송아지를 쓰다듬고 싶어서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업학교의 교장인 시릴 트로아데크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인근 도시와 일반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업학교로 온 경우도 종종 있다. 만약 우리가 재래식 농업만 이야기한다면 그 학생들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기농업만 말한다면 재래식 농업인들이 자녀를 우리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친환경 (집약)농업을 다룬다. 더 적은 생산요소로 더 많이 생산하는 농업을 말한다.”

 

“만일 모두가 직거래를 했다면…”

역시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치즈 장인 아발랭의 딸도 학교에서 편견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유기농업인’들은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아발랭은 이렇게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 유기농 방식으로 농업을 하는 이들은 그랑제콜에서 농학을 전공한 젊은 엔지니어들이다.” 전자공학 엔지니어였던 아발랭의 지식은 풍력 터빈, 태양광 패널, 빗물 수집 등을 이용해 농장의 에너지 시스템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발랭의 농장에는 농장의 운영 시스템에 감탄하거나 보호종인 젖소들의 생산 관련 데이터를 얻으려는 대학생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나 역시 농촌 출신이 아니다. 이른바 신(新)농민인 셈이다.”

50대의 낙농업자 프랑수아즈 마세와 브뤼노 마세 부부도 다른 농민들과 상황이 다르다. 이들은 지금껏 해온 대로 단순히 기업들에 우유를 공급하는 대신, 얼마 전부터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가족 농장에서 직접 판매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즈는 “예전에는 대출이 많았지만, 이제 다 갚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생산방식도 유기농으로 바꿨다. “유기농이 수익을 더 많이 가져다준다. 같은 노동력을 들여도 유기농 우유는 30% 비싸게 팔 수 있다. 우리는 유기농업의 새로운 고객과 수요, 부가가치를 발견했다. 이곳에는 여름에 관광객이 많으니, 그 점을 활용해보자고 생각했었다.”

8km에 이르는 해변가에 들어선 호텔, 캠핑장, 별장 등과 인접하고, 선돌이 있고 지역 생산품 시장이 열리는 최적의 장소에 자리 잡은 부부는 신속하게 성공을 거뒀다. 이제 그들은 농장이나 시장에서만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식당에도 납품한다. 게다가 관광안내소의 지원을 받아, 농장 견학 프로그램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유기농은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단골 고객층이 두텁다. 관광객들은 이곳을 다시 찾는다.” 치즈와 지역 특산품을 파는 축사 옆 작은 가게의 냉장 진열대 뒤에 선 프랑수아즈가 말을 이었다. 부부의 아들인 30대의 뱅자맹 마세도 부모님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했다. “사업이 잘되고, 고객들이 늘어나는 걸 보며 아들도 같이 하겠다고 했다.” 그의 아들은 “해야 할 것이 정말 많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세 부부에게 유기농으로 전환하고 유통과정을 대폭 줄이는 일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다. 다른 곳에서 유기농을 적용하는 방식을 보고 왔기 때문에, 우리는 유기농을 선택했다.” 그들은 건너편의 ‘재래식’ 낙농지를 가리키며, “저들은 너무 폐쇄적”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대화 끝에, 단순한 ‘선택의 문제’는 결국 필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세 부부는 공장과 계약한 우유 생산량을 맞출 수 없어서 계약 수량을 줄였다. 이 때문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생겼지만, 곧 이 타격은 기회로 탈바꿈했다. 납품량을 줄인 만큼,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들은 종종 견학을 다녀왔다. 

야니크 모르방은 말했다. “우리는 기존에 하던 것, 배운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판매도 내 성격에는 맞지 않는다. 고객들을 우리 농장으로 오게 하는 것도, 너무 불편해서 할 수 없다.” 건축 공부를 마치고 염소 치즈 제조에 뛰어든 아르튀르 수셰의 말처럼, 지금 이대로가 나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직거래에 뛰어든다면 시장은 포화상태가 되고, 가격은 급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 연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당제는 말했다. “대안 농업이나 신농업 프로젝트에 뛰어든 사람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게 힘들 줄 몰랐기 때문이다.” 

2020년 봄 봉쇄기간, 사업의 최대번창기를 누렸던 아발랭은 “눈에 띄어야 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발랭은 역마 한 마리가 끄는 옛날 마차에 제품들을 싣고 동네를 달렸다. 지역 언론에서는 그에 대한 많은 기사를 냈고, 그 기사들은 농장의 성공에 도움이 됐다. “새로운 성공을 거둔 농부의 얼굴”은 사실, “저항하는 농민”의 얼굴이나 최근 <르몽드> 기사에 흑백사진으로 실린 “코탕탱(Cotentin)의 양들과 사랑에 빠져 친환경 운동가 목동이 된 파리의 옛 여성 감독”(8)의 얼굴처럼, 언론이 좋아하는 모습이다. 

<르몽드>에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건 위기로 인해, 땅과 자신의 지역사회 가까이에서 자연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자연에 맞서지 않고 매일 자연과 함께 일하는 장인들이 부상했다.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눈길을 끈다. 일반적인 ‘프랑스 농업계’와는 반대로, 땅을 혹사시키지 않고 땅을 재생시키며 경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숭고한 농민들’은 인류를 먹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발랭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봉쇄조치가 끝난 이후 사람들은 우리를 잊었다. 고객들 중 약 10%만 남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들의 소비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게 아니었다. 잠시 지나는 유행이었던 것이다.” 

한편, ‘유기농’과 짧은 유통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그리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2004~2019년, 유기농 제품 판매 협동조합인 비오콥(Biocoop)의 대표를 지낸 클로드 그뤼파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 연합의 유기농관련 법규를 위반하지 않고도, ‘수천 마리의 젖소들’을 키울 수 있는 기업형 농장과 유사한 유기농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노동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대량 생산방식으로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 ‘유기농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9) 

오래전부터, 농업관련 산업이 점령한 프랑스 유기농 시장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2010년 37억 유로에서 2019년 120억 유로로 성장).(10) “그러나, 유기농업도 재래식 농업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라고 모르비앙의 농민연맹 대변인 모르간 오디가 매우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더 많이, 더 싸게. 이 분야에서도 경작지 경쟁이 존재한다. 브르타뉴에도 로봇착유기와 짧은 유통방식을 이용하며, 400헥타르에 달하는 대규모 유기농장들이 여럿 존재한다.”

 

긴 유통 단계의 이점

모르간은 짧은 유통방식에 대해 경고했다. “봉쇄조치가 시행되고, 짧은 유통방식에 대한 붐이 일었다. 그래서 농산업 종사자들과 대형 유통업체들도 이 방식에 깊숙이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짧은 유통방식이 가치 약탈에 대한 보호막이 될 수는 없다.”

사회학자이자 국립 농업·식품·환경 연구소(Inrae) 소장인 유나 시폴로는 “짧은 유통의 공식적인 정의는, 생산방식이나 생산자에 대한 보수가 아닌, 오직 중간 유통업자의 숫자, 허락된 단 하나의 중개인만 가리킨다. 이 짧은 유통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다. 늘 대형 유통업체가 초기 조건을 결정한다. 게다가 일반 유통업자들이 제안하는 것과는 반대로, 대형 유통업체들은 영세 농민들보다는 품질 기준을 충족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규모 농장이나 중견 농장들과 주로 일한다.”(11) 

모르간은 이렇게 덧붙였다. “직거래가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직거래 역시 빠르게 포화상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긴 단계를 거치는 방식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브르타뉴에서는 콩테 치즈를 만들거나 토마토를 키울 수 없다. 그래서 이 제품들은 다른 곳에서 들여와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외국에서라도 말이다.” 자코뱅의 설명에 의하면, 문제는 농민연맹처럼 현재 농업 분야에서 지배적인 긴 생산·유통 단계를 비판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대안 분야만 다루려고 할 뿐, 재래식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연맹의 회보에서 언급하는 것도 항상 혁신적인 유통 방법으로 직거래를 하는 사람들뿐이다. 이것은, 다른 농민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셈이다.” 

자신이 가입한 FNSEA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야니크 모르방은 “농민연맹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시장에서 자기가 만든 소소한 물건들을 팔지만 프랑스를 먹여 살리지는 못하는 유기농업민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셰는 이렇게 말했다. “유기농업민들은 농업 회의소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곳은 재래식 농업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래식 농민들과 마주칠 일은 없다.”

이렇듯, 서로를 비판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글·마엘 마리에트 Maëlle Mariet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La course infernale des producteurs de lait 낙농업민들의 지옥 같은 경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2월호. 
(2) 고등 기술자 자격증
(3) 2020년 2월, 브르타뉴 지역 관광위원회가 해당 지역 별장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함.
(4) Jean Molinier, ‘L’évolution de la population agricole du XVIIIe siècle à nos jours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농촌 인구의 변화’, <Économie et statistique 경제와 통계> n° 91,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 1977년 7~8월.
(5) ‘Emploi, séries longues sur le marché du travail 고용, 노동 시장 보고서’, Insee, Paris, 2020년 6월 23일.
(6) 브르타뉴에서 2000년에 등록된 농장 중 1/3이 2010년에는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3.9%의 감소세다(출처: ‘브르타뉴 농업 도표’, 브르타뉴 식품·농업·산림청, 2016). 2010~2016년에는 해당 지역 내 농업인 감소율이 12%에 달했다.
(7) 농업사회공제조합(MSA)에서 2019년 7월 발표한 보고서 ‘비용과 생산, MSA 2020’에 의하면 2015년, 농민 372명과 농업 임금 노동자 233명이 자살한 것으로 집계돼, 농업 분야가 자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직업 분야가 됐다.
(8) Camille Labro, ‘Fermiers urbains, bergers militants, maraîchers bio…, les visages du renouveau paysan 도심 소작농, 활동가 목동, 유기농 채소 재배인…, 새로운 성공을 거둔 농민들의 얼굴’, <르몽드>, 2020년 12월 11일.
(9) Claude Gruffat, 『Les Dessous de l’alimentation bio 유기농 식생활의 이면』, La Mer salée, Rezé, 2017.
(10) 출처: 프랑스 유기농업 개발 진흥청
(11) ‘Local’, ‘éthique’ : ces nouveaux filons qui rapportent gros ‘로컬’, ‘윤리’: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수단, <뤼마니테(L’Humanité)>, Saint-Denis, 2019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