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없이는 민주주의 없고, 토론 없인 진리 없다

사라지는 공적토론의 장

2021-04-30     안세실 로베르 | 기자

‘선’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에 따른 사고의 변화, 사상의 진보에 따라 새롭게 규정돼 왔다. 그런 만큼 ‘공익’의 개념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 사회적 권리는 18세기와 특히 19세기에 걸쳐 점차 쟁취됐다. 이는 공익이라는 개념이 우발적인 요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화와 함께 ‘공익’은 민중의 염원에 더욱 부합한 개념이 돼야 했다.

이런 목적에서 공익은 공적토론 과정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그 공정성은 보통선거를 통해 심판했다. 국가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른바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면, 모든 가능성과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조금 더 폭넓은, 다시 말해 한층 더 공정하고 진실에 가까운 현실관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진리’다. 만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규정하는 공익의 개념도 그저 한낱 사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 즉 거짓된 공익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투명성’을 지켜야 할 정부의 책무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항상 진실이 투명성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두 개념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가령 독재정권은 극도의 투명성을 준수하면서도,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충분히 복무하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보여준 것처럼, 공식언어 대신 냉소적인 말투로 능수능란하게 투명성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것은 결코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태도는 철저히 일방적인 성격을 지니며, 모든 실질적인 사회적·지적 교류를 철저히 배제한다. 즉, 투명한 정부도 거짓된 정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금융기구가 개도국에 강요한 각종 구조조정프로그램은 ‘훌륭한 거버넌스’를 위해 필수적인 경제대책과 규정임을 표방했다. 특히 그들은 정부의 투명한 감시(규제기관의 감시하에 정부의 재정지출을 엄격히 관리할 것)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철저히 지킨 국가들에서는 결국 정부와 국민의 골만 깊어졌다. 그리고 쿠데타, 또는 선거 후 각종 폭력사태(아프리카 국가만 봐도 코트디부아르, 케냐, 말리) 등에 시달렸다. 이 경우 극히 불평등한 사회질서도 투명한 관리 시스템에 근거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투명성’은 민생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투명성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표현의 자유, 공론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양식 있는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진리를 결정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만 한다.

정치의 기능 중 ‘용어정립’의 역할은 매우 까다로우면서도 중요하다. 길잡이가 될 기준점을 정하고, 모호한 것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용어정립’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명명하고 배열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정치는 대상, 기능, 상황을 규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의 위상을 규정하고, 위계를 정립하며, 현실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갹출하는 ‘갹출금’을 ‘부담금’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어떤 식의 사회질서를 선택했는가에 따른 결과다.

정치지도자는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이런 표현을 선택할 수도, 저런 표현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언론인 베아트리스 쇤베르크처럼 루이 16세에 대해 ‘처형’ 대신 ‘암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군주를 권좌에서 쫓아낸 의회를 범죄를 행한 불법의회로 규정하는 셈이다.(1) 그밖에도 비슷한 예는 무수히 많다.

 

용어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기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대표하는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막강한 권위를 지니기 마련이다. 비록 위정자가 용어를 명명할 권리를 직접 지니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가 합의한 약속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주는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시민·단체·정당의 요구는 일정한 용어의 선택에 의해 표현되는데, 어떤 용어를 사용했는가에 따라 그들이 세계나 혹은 특수한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들은 한 사회가 해당 용어를 채택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으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례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을 향한 폭력의 특수성을 인정받기 위해 ‘여성혐오살인(Feminicide)’이라는 용어를 형법에 반영하고자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당국은 ‘살인(Homicide)’도 충분히 ‘만인(Homme)’에게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이므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반대한다.(2)

특정 용어의 사용이나 정립을 기피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는 그 용어가 담고 있는 불편한 현상을 외면하거나 과소평가하는 행위다. 가령 노동의 ‘고통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아주 놀라운 예를 보여준다. 당시 대통령은 노동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고통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노동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임을 증명한 노동의학 보고서나 사회학 연구서가 넘쳐남에도 말이다.(3) 당시 대통령은 2019년 10월 4일 로데즈에서 열린 공개토론에서 ‘노란조끼’ 운동이 불평등한 사회와 노동계의 현실을 지적한 것에 맞서 이렇게 발언했다. 내무부 장관도 대통령과 다를 바 없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단어”라며 ‘경찰폭력’이라는 용어를 거부했다.(4)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경찰조직과는 별개로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범한 행동은 결코 ‘경찰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분명 클로드 르포르(5)가 훌륭하게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무시’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상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철학적 선택에 매몰된 채, 그들이 자초한 결과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용어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을 교묘하게 부정해왔다.

 

‘탈진실’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

‘탈진실’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진실’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콩도르세가 말한 의미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공론의 장(그래야만 현실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토론까지 벌일 수 있다)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공론의 장은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피상적인 수다만 존재할 뿐, 토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이들은 아예 토론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가 하면 토론을 하자면서도 그저 욕설에 가까운 대화만 쏟아내는 이들도 있다. 현대 사회는 정치의 참혹한 부재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정치의 빈자리는 그날그날 특수한 요구들을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거나, 공공의 공간을 규제하거나, 즉흥적이거나 혹은 잘못된 발상으로 인해 계획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회계 준칙을 실천하는 행위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진단이 통용되는 이유도 바로 그와 같다. 어느새 언어적 요소에 기대는 것은 진실에 대한 철저한 멸시를 보여주는 최종적 형태이자, 동시에 거짓을 냉소적으로 제도화하는 표현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화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의 자멸이다. 악천후를 만난 선원들이 스스로 선체에 구멍을 뚫어 자침하는 것과 같다. 용어를 명명할 권한은 결코 일방적인 제왕적 권한이 아니다. 정권의 손에 마음대로 용어를 정립할 자의적 권한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일정한 언어로 명명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통제하에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모순된 견해나 토론을 용인하지 않는 한, 결코 공동체는 진실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사회적 진리도 정립될 수 없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언론인. 본 기사는 최근 출간한 저서인『거짓말에 관한 최신 뉴스 Dernières nouvelles du mensonge』(Lux, 2021년)에서 일부 발췌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Prise directe(직통 연결)’, France2, 2011년 1월 25일.
(2) 그 밖에도 다양한 논거를 제시했는데, 가령 전적으로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인지를 규명하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3) Christophe Dejours, 『Souffrance en France. La banalisation de l'injustice sociale 프랑스에서의 고통. 사회적 불평등의 보편화』, Points, Essais 총서, Paris, 2014년.
(4) 국회법사위원회, Paris, 2020년 7월 28일.
(5) Claude Lefort, 『이데올로기의 시대 L’ère de l’idéologie』, Encyclopaedia Universalis, Symposium–Les Enjeux, 제2권, Paris,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