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돈키호테에서 산초 판사까지

2021-04-30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한층 나은 성과를 얻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준 정치 지도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은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온갖 이유를 대며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다. 같은 당 의원 탓, 반대자들의 방해 탓, 단순하지 않은 세상 탓, 이룰 수 없는 약속도 종종 해야 하는 정치계 특성 탓…. 실망스럽게 임기를 마친 정치인이 성과를 끄집어내 자랑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은 변함없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제1권은 오사마 빈라덴을 추격하고 사살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한 후 마무리됐다.(1)

버락 오바마는 이미 회고록 제2권 내용도 장별로 기획해뒀을 듯하다. 그러나 정치 인생을 총평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과장은 어려울 것이다. 완곡한 어법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이유는 오바마 임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외치는 구호 속에서 격동의 선거를 마친 후 2009년 1월 20일, 오바마는 열렬한 환영 속에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8년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그의 임기는 끝났다.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임기 중에 한 일 중에서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점일 것 같다. 가장 현명하고 가장 찬란한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그에 비해, 별 능력도 없는 후임자인 트럼프 대통령의 인상이 미국 역사 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있을 정도다.

오바마는 독자와 함께 자신의 여정과 성취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문한다. “‘그’ 버락 오바마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물론, 권력이다.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다른 이들이 결정한 결과를 관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정계에 입문하기로 했다. 그 후 그는 미국 중서부 주 의회의 소수파 의원보다 국회의원 권력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 되자 그는 백악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주당 경선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힐러리 클린턴을 앞질렀다. 

그리고 감동적이고 유쾌한 선거 캠페인 끝에 조지 W. 부시에 이어 미국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오바마는 거의 매번 적기에 적절한 선택을 했다. 2002년 가을부터 이라크 전쟁에 용감하게 반대했다. 행운도 따랐다. 총선이 있기 몇 주 전, 2008년 9월 금융위기와 함께 공화당 의원들의 신용이 추락했다. 그렇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임무 완성, 여정 끝인가? 그렇게 여기고 싶은 듯하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 그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정치방식을 바꾸겠다”, “국가분열을 막겠다”, “청년들이 공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다” 등등. “변화는 더 빨리 이룰 수 있다”는 의지로 지나친 야심을 정당화했던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변명을 계속 반복했다. 회고록 초반, 사회운동가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버락 오바마는 감격에 차서 말한다. “나는 산초 판사가 아닌 돈키호테였다.” 하지만 백악관에서는 그 정의의 사도는 사라진 채, 메마른 잔상만 남아있었다. 

버락 오바마가 자기 측근들의 선택을 정당화하느라 분주했던 챕터는, 그의 임기가 어떤 식으로 요약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경제위기와 금융위기를 변화의 계기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시스템을 원래대로 고쳐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황이 이미 너무 나쁘네.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길 원하는 사람과 일해선 안 되겠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람 이매뉴얼은 힐러리 클린턴을 지원했고, <월스트리트 저널>과 가깝게 지내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하지 않았던가? 

이때 상황을 오바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경제가 추락할 때, 나의 첫 번째 임무는 세계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큰 규모의 재앙을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위기를 관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 패닉에 빠진 시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사람들은 원래대로라면 지난날의 과오로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오바마 전 대통령은 단순한 자본주의 체제 순응자가 아니었던 당시 재무부 장관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티모시 가이트너 당시 재무부 장관이 “람 이매뉴얼만큼 금융위기를 이해하고 세계 금융 자본가들과 함께 친분을 맺으려면 몇 달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몇 달을 기다릴 수 없었다”라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운 팀이 추진한 은행 구제계획은 평판이 나빴다. 금융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에게 그 위기를 극복할 책임을 부여한 셈이기 때문이다. 정작 위기에서 구해준 은행원들이 감사를 표시하지 않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격분했다. 그 사이 수백만 명의 미국 시민들은 국가의 구제 없이 파산했다. “명백한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는 인정한다. “국가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들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부자다. 이들은 모든 소송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갔는데, 현행법이 정부나 금융 기관의 무책임하고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거짓투성이 조언이 상점 날치기만도 못한 가벼운 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바마는 이 대목에서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은행원들은 경제를 “인질로 잡고”, 자폭할 수 있는 “폭탄 벨트”를 두른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임기 초 몇 개월 동안 한층 과감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라고 말한다. 아마 그래서일까. 8년 동안 오바마 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던 조 바이든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최근, 상대적으로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례로 이들 둘을 비교하면 더 흥미롭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부시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게이츠를 유임시켰다. “공화당원에 강경파, 다른 국가 일에 간섭하기로는 1등 공신”으로 알려진 그를 선택한 이유는 “미국 국방성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잘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직후, 군 지휘부는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전략을 결정하기 전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언론에 흘려 오바마 대통령을 압박했다. 

이에 격분한 오바마 대통령은 군 지휘부를 백악관으로 소환해 지시에 따를 것을 촉구했으나 결과적으로 군 지휘부의 권고를 따랐다.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병력을 파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 바이든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결정이 번복되지 않는 이상, 오는 9월 11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은 완전히 철수하게 될 것이다. 12년을 잃어버린 셈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전에 쓴 책으로 2006년에 출판한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 Thoughts on Reclaiming the American Dream)』이 있다.(2) 이 책은, 신간보다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한층 솔직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세상을 향한 변화의 노력을 할 생각이 없다면, 그런 세상을 주장하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이정민 minuit15@naver.com
번역위원


(1) Barack Obama, 『A Promised Land』, Crown, New York, 2020. 이어지는 인용문은 전부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2) Barack Obama, 『L’Audace d’espérer 담대한 희망』, Presses de la cité, Paris,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