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독점의 딜레마에 빠진 유럽 에너지 공동체
유럽연합은 천연가스 소비량의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입은 계속 증가 추세다. 가스가격 불안정과 러시아 일변도의 수입원 문제로 고심해 온 유럽연합은 가스공급원 안정과 다변화를 원해 왔다. 지난 11월 13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호세 마누엘 바로소 위원장은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러시아 역시 수출다변화를 시도하며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고, 가스 파이프라인을 통제하고 있다. 유럽위원회가 경제공동체내에서 대규모 공기업을 장려하기보다 이전의 사업자들을 와해시키는 쪽을 택하고 있는 마당에 에너지공동체로서의 유럽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전력과 가스에서 유럽연합(EU)내 단일시장이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려면 가격 인하, 공급 안전성 보장,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환경 문제에도 유익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EU위원회가 발간한 '2006년도 공동에너지정책 동향 보고서'(일명 '그린 북')1)의 이런 문항을 보면 EU위원회가 에너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대로라면, EU공동시장이 에너지 가격 인하, 에너지 의존도 탈피, 환경 보호 등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처럼 보인다.
사실 EU 입장에서 경쟁 강화 그 자체는 수단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EU 전력 및 가스 분야 위원회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EU가 정해 놓은 에너지 요금이 너무 저렴해서 새로운 경쟁자의 시장진입을 막고2) 있으므로 가격 자유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에너지조정위원회(CRE)는 전력 공급 가격에 관한 법안에서 EU 의회와 장단을 맞춰 "요금 인상은 정부가 제시한 가격보다 더 높은 수준이 되어야 할 것"3)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경쟁 확대를 위해 가격을 인상하고 이것이 다시 가격인하 효과를 갖게 된다. 따라서 경쟁 강화는 가격 상승의 매개체가 되고, 공급 보장을 개선시키는 이상적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외국산 석유와 가스에 의존해 온 유럽은 수입국 다양화와 가격 불안정문제를 두고 고심해왔다.
가스발전 증가, 수입 의존율 급증
시장 조사 기관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1997년 45%이던 유럽의 대외 에너지 의존율4)은 2006년에 54%로 증가했다. 이렇게 높아진 이유는 1997년 이래 유럽의 에너지생산이 9% 감소한데다 2007년까지 1차 에너지5) 소비량이 계속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10년 동안 에너지 순수입량은 29% 증가했다. 이런 수치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EU의 화석 연료 생산량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가장 많이 소비되던 1차 에너지였던 석탄은 오늘날에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뒤를 이어 3위에 머무르고 있다. 광산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매장량도 점차 소진되고 있다. 현재의 생산 추세대로라면, 매장량은 8년 내에 고갈될 것이다.6) 그 때문에 EU는 러시아나 중동, 알제리, 노르웨이 등 공급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천연가스 수요는 최근 15년간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유럽의 천연가스 추출량은 1969년 이래 계속 감소하고 있다. 2007년 EU국가들은 EU 가스 생산량의 2배 반을 소비했다.
이렇게 가스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전력 생산과 관계가 있다. 1990년대 이래 유럽의 원자력 발전 생산량은 변동이 없고, 석탄과 석유를 사용하는 화력발전은 감소 추세에 있다. 반면 가스 발전소는 3배 증가했다. 이제 유럽은 가스 에너지의 수입가 변동에 민감하게 됐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EU는 가스를 이용한 발전소로 인해 가스 수급의 안정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상황은 단순하다. EU는 천연가스의 83.4%를 러시아, 알제리, 노르웨이에서 파이프라인(가스수송관)을 통해 수입한다. 수입국들은 경제적,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당연히 공급원 다변화를 모색하고, 액화가스 수송선 같은 새로운 수송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LNG 대체 수단으로 급부상
1985~2000년에 가스가격이 하락하면서 20~30년 장기 공급 계약이 많이 체결되었고 수많은 파이프 라인이 건설됐다. 최종 소비자에게 이르는 판매 가격은 보장되었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입국은 수출국에 얽매이게 되었다. 결국 가스 관련 산업 자유화 방안의 하나로 단기 계약을 늘리는 방안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강자의 시장 진입을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내 가스 생산은 더 이상 늘어날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의 에너지 수입 의존성을 감소시키기보다 공급자를 다양화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석유와 달리 가스 시장은 지역권을 형성하고 있다. 파이프 라인 관련 인프라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는 서로간에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액화천연가스(LNG)가 부상7)하면서, 가스 시장 국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LNG는 기체보다 부피가 6배나 적고, 액화가스 수송선을 이용한 수송과 저장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이는 단기계약을 체결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나이지리아, 카타르(보유량 세계 3위), 트리니다드 토바고(주로 미국에 공급)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처럼 LNG에 기대를 걸고 있는 나라들에게도 좋은 기회다.
LNG는 2005년 세계 가스 거래량의 22%를 차지했고, 2020년에는 38%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경쟁 체제를 원하는 EU는 2003년도에 오퍼레이터(민영화되기 이전의 독점 운영권자)에게 제약을 가했다. 즉 제3자의 LNG 수송기지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단기수입계약…'수요독점'현상도
단기계약들은 유럽위원회의 희망대로 이뤄졌다. 수요와 공급의 만남이 용이해졌고, 수요 공급원칙에 따라 가스 시장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시장 자유주의는 불완전한 것이다. 시장 가격은 유가지수와 연동되어 있고, 유가가 불안하기에 구매자들이나 수출국들에게 불확실성은 더 심해진다.
관련당사자들은 이런 상호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사실 유럽의 에너지 의존문제를 단순히 고객의 관점에 국한시켜 접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생산국의 입장에서 보면 역학 관계가 생각보다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수출량의 거의 대부분을 유럽에 판매한다. 러시아나 알제리산 메탄의 80% 이상이 유럽의 가스 수송기지로 모여들고, 노르웨이산 가스도 거의 전량이 유럽으로 향한다. 가스 생산국에 대해 EU가 거의 유일한 소비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요독점'이라 불리는 보기 드문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경기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몇몇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수출량 일부를 다른 곳(특히 중국)으로 돌리거나, 최종 배급자가 되기 위해 유럽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EU의 주요 가스공급원으로서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을 유럽에 공급하는 러시아의 가스업체 가즈프롬은 유럽 대기업과 함께 파이프라인을 건설해서 EU 국가들이 건설한 파이프라인과 경쟁한다.
독자 파이프라인, 동맹 등 '수출국 파워'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스 스트림 파이프라인은 2010년 완공 예정이며, 독일의 에너지기업 이온(EON)과 바스프(BASF), 그리고 네덜란드 가스 수송업체 가스유니(Gasunie)가 합작 건설한다. 러시아에서 유럽 남동부로 이어지는 사우스 스트림 파이프 라인은 이탈리아 국영기업 에니(ENI)의 지원을 받아 2013년에 완공될 예정이며, 이란에서 터키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이어지는 나부코 파이프 라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나부코 파이프 라인 역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재정 부족 위기에 처해있다. 프랑스의 에너지 기업 가즈 드 프랑스(GDF)가 참여 의사를 보였지만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인종 학살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터키 측이 이 제안을 거부했다.
공급자에서 배급자로 변신하고 있는 러시아 가즈프롬도 프랑스에서 GDF-수에즈와 경쟁하게 될 것이다. 결국 거대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소비되는 천연가스의 10%를 직접 판매9)하기를 원하고 있다. "가즈프롬이 유럽 가스 배급시장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 훨씬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자신들이 생산하는 가스를 최종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동시에, 경쟁자들에게는 더 비싼 가격으로 가스를 판매함으로써 상대 경쟁자의 가격을 전략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10)
이와 함께, 가스 수출국들은 동맹을 모색할 수도 있다. 수출국들의 속셈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카르텔 가능성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주요 가스수출국들이 OPEC처럼 결집해 가격을 상승시키거나 생산량을 줄일 수도 있다. 적은 매장량에 비해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 노르웨이는 다른 '카르텔 가능' 국가들에 비해 조기에 자원이 고갈될 위험을 안고 있다. 러시아, 알제리, 리비아, 나이지리아가 함께 카르텔을 맺으면 러시아가 '지배 대기업'이 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유럽의 에너지 자유화는 물 건너간 셈이 된다. 생산 이전 단계에서 수출국들이 생산가와 생산량을 정하게 되고, 하위 단계에서 기업들이 경쟁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EU의회가 권장하는 해결책, 즉 수출국들의 상호 경쟁을 유발한다는 해결 방안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유럽위원회는 제3국들과의 협정이 "시장개방과 투자, 경쟁, 규제 공조에 관한 대책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토피아적 발상일까? 아니 강박관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제교류 네트워크 통합도 구상
자유경쟁의 존중과 확대에 집중한 나머지 유럽위원회는 경제가 세계화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EU의 에너지 의존성보다 재생 불가능 에너지의 국제 교류를 경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이다.
EU는 역내 에너지 자원 강국들이 생산 단위에 투자하면서, 역외 생산국들과의 대화를 하기보다는 독점을 파괴하는 쪽을 택했다. EU의 독단주의는 '고객'으로 변신한 '사용자들'보다는, '주주들'을 위한 서비스에 더 신경을 쓰는 사기업들의 소수 독점을 초래하게 됐다.
현재 EU 의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또 다른 정책은, 유럽의 공공 서비스를 보장하는 단일 에너지기업을 창설하는 것이다. 시장 개입을 장려하지 않는 전문가들조차 현재 네트워크가 자연 독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단일 조직에 의해 관리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민간 원자력, 재생 가능 에너지 개발, 천연가스 수입원 다변화 등을 외면하고, 유럽 EDF-GDF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공적 독점을 가정하는 것은 이 기업이 운송과 배급, 유럽에너지 생산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비용 절감과 온실가스 배출 감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이 계획이 구체화되려면, 또 다른 유럽이 생겨나야 할 것이다.
경쟁·개방, 시장 독점만 심화 2004년 8월, 프랑스의 국영 전력공사(EDF)와 가스공사(GDF)는 각각 주식회사로 민영화되었다. 많은 직원들은 동요했다. 이들 공기업 노조들은 '공공서비스 강화'를 위해 두 그룹 합병을 제안했다. 그러나 재정부와 EDF 및 GDF 경영진은 한 목소리로 이 제안에 반대했다. 합병은 불가능하고, '막대한 사회적?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유럽위원회가 지분 양도나 공급 계약 같은 막대한 대가를 요구할지 모른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1) <라트리뷴>, 2004년 9월 24일자. |
천연가스 단기계약, 가격 불안정 초래 2000년대 이후 대부분 EU국가들의 에너지 가격은 상승하고 있다. 2006년에만 일반용, 산업용 전기요금이 세전(稅前)가격 기준으로 유럽 평균 9% 정도 올랐다. 같은 시기에 가정용 가스요금은 16% 올랐다. 전기요금 규제 덕분에 대폭 인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기는 힘들다. 요금 규제가 사라지고 경쟁적으로 개혁이 이루어지면 가격 폭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4~2006년에 사용량이 적은 시간대의 시간당 메가와트 전기 요금은 평균 28.1유로에서 49.3유로로, 사용량이 많은 시간대 요금은 37.5유로에서 69.3유로로 올랐다. |
* 에브리 대학 경 제학과 교수
1) '확실하고 경쟁력 있으며 지속적인 에너지를 위한 유럽 에너지 정책', 유럽위원회,
COM(2006) 105 final, 브뤼셀, 2006년 3월 8일.
2) 유럽위원회, COM(2006) 851 final, 2007년 1월 10일.
3) 에너지조절위원회, 파리, 2008년 8월 11일.
4) 에너지 의존율은 수입에서 수출을 뺀 차이를 총 소비량으로 나눈 것이다.
5) 1차 에너지란 변형되기 이전 상태의 자연에너지(석유, 원자력, 풍력 등)를 말한다. 2007년 유럽의 1차 에너지 소비량은 2.2% 감소했다.
6) 매장량/생산량 비율은 현재 7.8이며, 새로운 매립층이 탐사되고 화석연료추출기술 혁신이 이루어짐에 따라 매년 증가하고 있다.
7) 천연가스를 영하 161℃에서 냉각시키면 액화된다.
8) 2003/55/CE 지침서에는 가스시장 설립을 위한 공동규칙이 정해져 있다.
9) '가즈프롬, 자신의 법을 강요하다', <경제적 선택>, 2008년 9월. 가즈프롬에 대해서는 조나단 P. 스턴, <러시아 가스와 가즈프롬의 미래>, 에너지학 연구소, 옥스퍼드, 2005년.
10) E. 바란, F. 미라벨, J.-C. 푸두, '프랑스 가스의 위험한 결별', <레제코>, 3권, 200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