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인연, 그 시베리아와 만나다

2011-09-08     주강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평화연구소)과 한겨레신문은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베리아횡단열차 대장정 ‘동해에서 바이칼까지-남·북·러 협력의 길을 찾아서’라는 여행과 전문가 포럼을 결합한 행사를 치렀다. 민속학자이자 해양학자로 여러 번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이번 행사에도 참여한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왜 지금 시베리아인가?’를 묻고 답하는 글을 보내왔다.

‘동해에서 바이칼까지’라는 슬로건은 지향하는 바가 명료했고, 선견지명까지 있었다. 곧바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똑같은 노선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울란우데까지 갔다. 정상회담이 열린 울란우데에서 우리도 기차에서 내려 시베리아의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사진도 찍었다. 남·북·러 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유서 깊은 이르쿠츠크대학에서 열린 ‘분단을 넘어 대륙으로’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은 철도·가스 같은 이번 북-러 정상회담의 주제와 대부분 일치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일정 겹쳐

우연의 일치일까? 충분히 예견된 일들이다. 남북관계가 혹한처럼 동결됐지만, 역설적으로 시베리아 들판에서부터 훈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남방으로 길을 뚫어야 하고, 특히 만주·북한·남한·일본이 교차하는 동해로 출구를 확보하려 한다. 남한은 두말할 것 없이 섬이다. 북한을 거치지 않고는 시베리아의 자원이 올 수 없다. 그도 아니면 배편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같은 엄연하고도 현실적인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북-러의 가스관 북한 통과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리라.

게다가 시베리아는 우리에게 어떤 장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한민족이 시베리아와 맺은 인연법은 몇 번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 신화시대에 이루어졌음직한 북방에서 한반도로의 민족 이동과 문화 전파를 주목한다. ‘샤머니즘의 메카’인 올혼섬의 신비롭고 장엄하기까지 한 풍경은 우리가 잃어버린 고대적 DNA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길목마다 서 있는 세르게이의 오색천은 서낭당과 다를 바 없다. 브리야트족의 샤먼 의식과 노래, 춤, 구비서사시에서 우리의 무형적 고전을 발견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한국 문화의 DNA라는 호사스러운 별칭은 결코 과잉 수사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종족은 우리의 상고사와 관련을 맺는다. 나나이족·유가키르족 같은 소수민족은 우리 역사의 부여·고구려·발해·여진족·말갈족 등과 무관할 수 없다. 몽골시대에 초원에서 습래해 제주도까지 거느렸던 엄청난 초원의 파동까지 생각한다면! 연해주로 넘어간 한말의 조선인들이 함께 살았던 사람들도 바로 시베리아 소수민족이었다. 국민국가와 무관하게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공생공존하면서 시베리아에서 살아갔다. 그런 질서와 공생 원리를 깨부순 것은 역시 러시아 제국주의였다.

오늘의 시베리아는 정확히 표현하면 ‘러시아제국의 시베리아’이자 부인된 역사, 매몰된 역사다. 시베리아는 정복당했다. 제국에 의해 강제로 ‘발견’당한 것이며, 엄연히 다양한 민족들이 살아온 땅이 ‘버려진 땅’으로 치부됐다. 서구 열강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 신대륙과 섬을 ‘발견’하고 도륙을 냈듯이, 러시아제국 역시 동일한 궤적을 걸었다. 시베리아에서 고아시아계 황인들의 스러져간 족적을 밟아나감은 북미 인디언의 궤멸사와 다를 바 있으랴. 노엄 촘스키가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고 했을 때, 그 논법은 고스란히 오늘의 시베리아에도 부합된다.

차르 시대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을 통한 시베리아 식민화와 남방정책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가 탔던 횡단열차도 바로 러시아-시베리아 성립을 의미하는 제국의 열차였던 셈이다. 서구에서 온 러시아 손님들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중국, 일본, 미국 등과 교접하는 중이다. 점차 줄어드는 시베리아의 러시아인, 늘어가는 중국인, 북한과의 협력관계와 남한과 예상되는 가스관·철도 협력 등 극동시베리아에서 아시아인들이 해야 할 과제가 수두룩하다.

잃어버린 고대적 DNA가 그곳에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아시아 시베리아로의 전환은 사실 오래전부터 아시아계가 살던 땅임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서구 러시아로서는 아시아 시베리아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역사란 그렇듯 제국이 1천 년 가게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근 1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개발된 극동의 재편에 한인들이 두루 개입돼 있었던 게 현실이다. 조선 후기에 이미 많은 한인이 연해주로 올라갔고, 아무르강을 건넌 이가 많았다. 한말 및 일제강점기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치타, 이르쿠츠크로 망명과 탈출, 유랑이 반복됐다. 그러다가 스탈린에 의한 한인 동포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열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한인들은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스텝(Steppe·온대 초원)까지 흘러갔고, 이 노선은 과거에 칭기즈칸이 지배하던 영역과 대체로 겹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거쳐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곳곳마다 한인의 근현대적 맥락이 숨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시베리아를 찾아간다는 것은 분단으로 말미암은 남북의 대립과 단절을 뛰어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건 시베리아열차와의 교접을 통해 대륙적 동맥을 잇는 소통의 길을 모색하는 루트다. 시베리아와 바이칼을 생각하면서 울컥 치밀어오름은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북방의 꿈, 단절된 대륙에의 비원, 분단돼 섬이 된 남한 땅덩어리에 대한 반동 따위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다시 아시아의 품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열차는 반드시 달려야 한다. 휴전선에서 끝나버린 열차가 기필코 북녘을 가로질러 시베리아로, 바이칼로 내달려야 한다. 거꾸로 북방의 문화와 자원도 남쪽으로 흘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돌아오고 난 다음, 동해 표기가 문제가 되었다. ‘일본해’인가 ‘동해’인가, 그 알량한 논쟁을 보면서 미처 우리 곁의 동해를 챙기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러시아는 일찍이 극동에서 동해로 나오고 있었으며, 중국은 나진에 진을 치고 북한과 합작해 동해로 진출해 시베리아와 연결지었다. 일본은 건너편에서 줄곧 기다리는 상태다. 안쓰럽게도 우리는 고성 휴전선 근처에서 스톱된 상태다. 동해적 인식에서 오호츠크해까지 나아가는 지정학적 상상력, 그리고 다시금 동해에서 바이칼까지,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가는 전 지구적 사고력을 복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 지구적 사고력 복원 위한 통로

동해는 남한이란 좁은 섬에 갇혀 사는 우리가 북방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의 북방 해양 루트다. 추후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까지 나아가서, 베링해에서 알래스카를 연결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가 연결되는 상상력이 현실화할 것이다. 바로 그 연결점은 시베리아 고아시아족이 빙하시대에 북미 대륙으로 건넜던 루트이다.

횡단열차에 스쳐가는 풍경과 바이칼의 원대하고도 웅혼한 바다 같은 호수, 호수 같은 바다가 도시문명에서 뛰어든 일행을 압도한 것은 당연했다. 장엄하다고나 할까.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의 사고’가 이런 것이리라.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질, 샤머니즘의 시원적 동굴이라는 올혼섬 가는 길의 자작나무 숲에서 어린아이들이 소풍 나오듯 도시락을 단체로 먹었다. 그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흡사 문명이란 이름을 하고 있지만 야만의 도시에서 잠시 외출 나온 이들이 야생의 들판에 몸을 담그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시베리아의 자연미는 인간의 손으로 착취되고 약탈된 결과일 뿐이다. 코자크족을 비롯한 모피 사냥꾼은 시베리아를 도륙냈고, 담비를 비롯한 고귀한 동물들이 멸종당했다. 유럽 귀부인들의 몸을 감쌀 모피를 위해 시베리아 눈밭이 피바다로 변한 슬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상처받은 땅과 사람, 이제 치유할 때

사회주의 민족정책도 새삼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다수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은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해 왜곡해 서술했고, 원주민을 문명과 교화라는 이름으로 집단화하면서 생존 근거지를 파괴했다. 시베리아 식민지의 자원은 무한 약탈당했고, 부패하면서도 중앙에서 통제받지 않는 관료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워갔다. 오늘날 원시림이나 가스, 석유, 광물 등을 개발할 때, 우리는 그 땅에 사는 원주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샤먼들은 정교회에서 공격한 것과 달리,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이들은 소수민족의 지도자였고, 평소 약재를 갈무리해두었다가 치료해주는 치료사였다. 샤먼들은 대체로 가난한 삶 속에서도 공동선을 위해 살아간 선한 인간이었다. 샤먼은 대부분 학살되거나 숲으로 내쫓겼다. 동부 시베리아의 거점인 사하공화국의 야쿠트족 볼셰비키 지도자들 역시 학살당했고, 민족어 사용이 금지됐다. 사할린과 캄차카의 소수민족도 대부분 죽거나 동화돼 혼열화됐다. 이런 비극의 실체를 인식한다면, 같은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인들이 왜 느닷없이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버려졌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베리아 벌판에는 야생화가 만발했다.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여름이 짧은 것만큼,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꽃들의 투쟁도 처절한가. 인간의 투쟁이 자못 불온하다면 꽃들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눈과 꽃, 혁명과 열차, 보드카와 아름다운 풍광,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시베리아 야생화만큼이나 짧지만 강렬한 여운이 이 순간까지 넘쳐흐른다.

글/사진•주강헌
민속학자, 해양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