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의 교묘한 기술

나폴레옹에서 미얀마 군부정권까지

2021-05-31     도미니크 팽솔 l 역사학자, 보르도-몽테뉴 대학교 조교수

지난 5월 19일, 프랑스 내무장관은 의회 앞에서 형법 강화를 요구하는 경찰관 집회에 참석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사건이 있기 전에는, 극우 군인들이 마크롱 정권의 유화적 자세에 분노를 표출하며 쿠데타 전통을 옹호하는 서명 청원서를 두 차례 제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국가 쿠데타보다는 미디어 쿠데타가 쉬울지 모른다. 시사잡지 <발뢰르 악튀엘(Valeurs actuelles)> 4월 21일자에 실린 퇴역 장성 20여 명의 호소문에 대한 칼럼이 이를 증명했다. 특히 (가장 유명한 쿠데타의 주역인)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과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군사 쿠데타 60주년을 기념하는 시기, 미디어 쿠데타는 어렵지 않다. (“인종 전쟁”과 이슬람주의, “교외의 무리들”, 폭력배에 대한) 극우의 편집증적 집착을 종합한 그 호소문의 모호함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명자들은 정부에 “내전”을 막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문명적 가치를 보호하고 우리 영토에 있는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위험한 임무에 대한 우리 동지들의 참여”(1)라는, 온갖 해석이 가능한 난삽한 표현으로 군사 쿠데타의 위협을 암시했다. 극우가 강세에 있고, 2017년 사임한 전직 국방참모총장(피에르 드 빌리에 장군)이 “프랑스를 바로잡고 싶다”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일어난 이 사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군대의 특정 집단에서 나온 이런 입장은, 군의 정치개입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군사 쿠데타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긴급조치가 필요할 만큼 엄중한 상황은 존재한다. 17세기에 쿠데타가 정당화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주권자는 국가의 이익과 공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폭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때로는 사용해야 한다. 1639년에 이 문제를 다룬 논문을 펴낸 도서관 사서 가브리엘 노데는 그런 극단적 수단이 유효하려면, 항상 예외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희귀성이 발하는 광채와 빛깔은 자주 사용할 경우 사라져버린다. (…) 만일 왕자가 그런 관행을 이용하는 데 신중을 기한다면 쉽게 비난하지 못할 것이며, 폭군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그런 관행을 이용하는 자들에게는 신뢰도 긍정적인 평가도 줄 수 없다.”(2)

프랑스 혁명과 함께, 쿠데타는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불법적인 권력 장악’으로 그 의미가 변질됐다. 이와 관련해 브뤼메르 쿠데타(1799년 11월 9~10일)는 새로운 모델을 제공했다.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은 혁명이 세운 공화정을 종식시켜버렸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가 누렸던 영광은 19세기에도 “좋은” 쿠데타에 대한 보나파르트적 전설의 자양분이 됐다. 그런 전설의 혜택을 입은 이가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이다. 1851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제2공화국 헌법을 위반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신임을 얻은 후 제국의 회복을 앞두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프랑스는 알고 있다. 내가 법을 어긴 이유는 오로지 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쿠데타와 구별되는 ‘프로눈시아미엔토’ 

1931년 발간된 『쿠데타의 기술(Technique du coup d´État)』의 저자인 이탈리아 작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브뤼메르 쿠데타의 그림자가 그의 시대의 파괴적인 음모에 계속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했다.(3) 특히 독일에서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 시도가 실패했다. 민족주의자 볼프강 카프가 공화국 전복을 기도했다가 1920년 3월 대규모 총파업에 직면해 물러난 카프 폭동과 1923년 아돌프 히틀러를 감옥으로 보낸 뮌헨 폭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말라파르테는 1917년 10월 혁명이 새로운 반란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볼셰비키주의자들은 발전소, 방송국, 전신국, 전화국 등 산업사회에 필수적인 기반시설들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이탈리아 파시스트들 이전에) 처음으로 간파한 인물들이었다. 정치적 조작으로만 간주되던 권력이 그때부터 기술이 됐다. 

그 같은 반란의 물질적 차원은 세계가 산업화되면서 점점 강화됐다. 이 주제는 1968년 신보수주의 역사가 에드워드 루트왁이 펴낸 쿠데타 설명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졌다.(4) 그 후 탈식민화의 맥락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저작물은 더욱 늘어났다. 1946~1964년 총 88명의 저자가 이 주제를 다뤘으며 이 중 62명은 매우 성공적인 저작물을 펴냈다. 루트왁의 저서는 (권력 찬탈을 뜻하는 것만은 아닌) 스페인어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와 (군대의 일부만 동원하는) ‘푸취(Putsch)’와 (민간인과 군인, 어느 쪽도 일으킬 수 있는) ‘쿠데타(Coup d’État)’를 구분하며 초보 쿠데타 선동자가 지켜야 할 규칙들을 다소 도발적인 방식으로 열거했다. 

루트왁의 조언은 이렇다.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싶다면 인구 대부분이 정치생활에 접근할 수 없는 경제적 저개발국을 선택해야 한다. 파루크 왕을 몰아낸 1952년 이집트 혁명처럼, 어떤 사회적 폭발은 때로는 틈새를 벌려 군대 개입을 가능케 한다. 1964년 프랑스군에 의해 쿠데타가 진압된 가봉의 경우처럼 외국의 감독에 너무 의존해 있는 국가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주로 군대에 많이 있는) 장비를 갖춘 훈련된 요원들과 경찰 및 보안국 요원들을 모집하라. 그런 다음 작업을 개시할 수 있다. 각 팀은 정부가 전체 계획을 파악하지 못한 틈을 타 최대한 빨리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해야 한다. 통신,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 교통망을 통제하라. 가장 위험한 반대 세력(당, 노조, 종교 지도자 등)을 즉시 무력화시켜라. 마지막으로, 핵심 충성 인사들을 억류시켜라(가급적 총기 사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정부가 포위당하고 통치자들이 체포되면 방송 성명을 통해 권력 장악을 공식 선언하라.

이 모델은 오래되긴 했지만, 미수로 끝난 (군대에 초점을 맞춘) 2016년 터키 쿠데타의 준비 미비와 2021년 2월 1일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소셜 네트워크까지 통제한 미얀마 군부 정권의 암울한 결과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루트왁은 “제3세계” 국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일부 서구 선진국들도 경제위기가 장기화되거나 군사외교적 실패 혹은 만성적 정치 불안이 발생할 경우 주요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58년 인도차이나에서 패배한 뒤 알제리 전쟁에 휘말린 프랑스의 경우가 그렇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가장 급진적 옹호 세력들은 르네 코티 프랑스 제4공화국 대통령이 자신들을 저버렸다고 비난하면서 알제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는 군대도 동참했다. 1958년 5월 13일 ‘공안위원회’가 구성됐고 자크 마쉬 장군이 의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의 목표는 1946년 1월 임시정부 총리직을 사임한 샤를 드골이 대통령직을 맡도록 다시 소환하는 것이었다. 드골은 대통령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드골은 1958년 5월 19일 알제리 장교들에게 ‘선동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기자들에게 말했다. “통상적으로 국가의 도구인 군대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존재해야 합니다.”(5)

코티 대통령은 법적 절차를 모두 존중하면서, (5월 24일 낙하산 부대가 코르시카를 장악한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던 군대의 압력에 굴복했다. 코티 대통령은 1958년 6월 1일 드골을 총리로 지명하면서, 드골이 대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정부기관을 개편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역사학자들이 아직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끝에 마침내 1958년 10월 4일 헌법 공포와 함께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6)

이 같은 성격의 반란 성공 여부는 매우 많은 요소들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란을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1958년 5월 13일 반란이 있은 지 3년 후인 1961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알제리에서 권력을 잡은 “퇴역 장성 군단”(드골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표현)은 성공할 수 없었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확고한 수호자들과는 별개의 집단인 이 쿠데타 음모자들은 군대 내부로부터도, 그리고 민간인들로부터도 고립됐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민주정권 내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로써 ‘무기에 의한 권력 장악’으로 인식되던 쿠데타가 ‘무력(無力)한 폭력’의 연극적 표현이 됐다. 1981년 2월 23일, 마드리드에서 하원 의사당 TV가 중계되는 가운데 치안경비대원 200여 명이 하원을 습격해, 하원의원 350여 명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1975년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이래 이뤄진 스페인의 민주적 전환을 종식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인질 납치극은 몇 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범주가 겹치는 부분이 있으므로, 정치 쿠데타 및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수치는 무장 부대가 법을 어기고 자신들에게 할당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1814년부터 1982년까지 스페인에서 발생한 ‘프로눈시아미엔토’ 55건 중 13건만 성공했다.(7) 루트왁의 기록에 의하면, 1946년과 1964년 사이 세계에서 군부에 의해 시도된 ‘반란’과 ‘폭동’은 5승 40패를 기록했다. 유럽에서 1960년과 2000년 사이 시도된 쿠데타 중 성공한 경우는 단 한 건(1967년 그리스 군사 쿠데타)에 불과하며, 나머지 7건은 무력화됐다.(8)

 

저명한 하이에크, 피노체트의 쿠데타집권을 지지

실패 요인 가운데, 정권을 전복하려는 세력을 설득력 있게 낙인찍는 집권세력의 능력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본래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 이 분야에서는 유리하다. 자유에 가장 헌신한다고 내세우는 이들이 때로는 정치적 폭력에 잘 적응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분야에서 있어서만큼은 이점을 갖고 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독재를 정당화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우가 그렇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하이에크는 1981년 두 번째 칠레 체류 중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독재정권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과도기에 필요한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 없는 민주정부보다는 자유주의 독재자를 더 선호합니다.”(9) 

그리고 최근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이슬람과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2013년 7월 이집트에서 압둘 파타 칼리 알-시시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를 지지한 바 있다. 이런 정당성은 정치적으로만 의미가 있다. 법학자의 관점에서, 법은 1789년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명시된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원칙은 너무 모호해서 이에 대해 정확한 법적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엄격한 법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의 무력 찬탈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좌파세력이 직면하게 되는 비판은, 혁명적 유산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진영의 선동적 호소는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는 정치적 행위인 만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다. 배후에 군이 있을 때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예상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군부의 모든 정치적 약속이 질서와 반동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다. 1810년대와 1820년대에 비밀 결사체 ‘카르보나리’의 자유주의자 장교들은 이탈리아에서 절대 군주제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 19세기 스페인에서는 자유주의의 진전에 기여한 (페르디난도 7세에게 1812년 카디스 헌법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 1820년 라파엘 델 리에고의 반란을 포함해) 여러 ‘프로눈시아미엔토’가 일어났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는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로 시작된 ‘카네이션 혁명’이 40년 이상 지속된 살라자르 독재정권을 끝내고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이뤄냈다.

법에 뭐라고 명시돼 있든, 모든 반란(군사 반란 포함)이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글·도미니크 팽솔 Dominique Pinsolle
역사학자, 보르도-몽테뉴 대학교 현대사 조교수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Pour un retour de l’honneur de nos gouvernants”: vingt généraux appellent Macron à défendre le patriotisme “우리 위정자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장성 20명이 마크롱에게 애국주의 수호를 촉구하다’, <Valeurs actuelles>, Paris, 2021년 4월 21일.
(2) Gabriel Naudé, 『Considérations politiques sur les coups d’État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고찰』, Le Promeneur 총서, Gallimard, Paris, 2004.
(3) Curzio Malaparte, 『Technique du coup d’État 쿠데타의 기술』, Les cahiers rouges 총서, Grasset, Paris, 2008.
(4) Edward N. Luttwak, 『Coup d’État, mode d’emploi 쿠데타 매뉴얼』, Opus 총서, Odile Jacob, Paris, 1996.
(5) Grey Anderson, 『La Guerre civile en France, 1958-1962. Du coup d’État gaulliste à la fin de l’OAS 1958~1962년 프랑스 내전. 드골파의 쿠데타에서 군사비밀조직의 종말까지』(La Fabrique, Paris, 2018)에서 인용.
(6) Patrick Lagoueyte, 『Les Coups d’État, une histoire française 쿠데타, 프랑스의 한 역사』, CNRS Éditions, Paris, 2021.
(7) Matthieu Trouvé, ‘La culture du pronunciamiento en Espagne 스페인 프로눈시아미엔토의 문화’, <Parlement[s], Revue d’histoire politique> 12호, Paris, 2009.
(8) Aaron Belkin et Evan Schofer, ‘Toward a structural understanding of coup risk’,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47권 5호, Thousand Oaks, CA, 2003.
(9) Grégoire Chamayou, 『La Société ingouvernable. Une généalogie du libéralisme autoritaire 다스릴 수 없는 사회.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의 계보』, (La Fabrique, Paris, 2018)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