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강’이라는 어떤 사유

2011-09-08     안영춘

‘모래’라는 우리말 발음은 정처 없거나 불안하게 들린다. 그 질감은 모호하다. ‘숲’처럼 상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바위’처럼 우뚝하지도 않다. 앞소리 ‘모’는 모나게 들리지만, 뒷소리 ‘래’는 여리면서도 어질게 들린다. 마주치는 두 소리는 한쪽이 덤비고 다른 한쪽이 맞아들이며 마찰과 조화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잡는 듯하다.

얼마 전, 내성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사로잡혀 사는 이들 몇이 머리를 맞댔다. 내성천 답사 코스에 이름을 지어 붙이기로 한 것이다. 처음 제안된 이름은 ‘모랫길’이었는데, 곧 기각됐다. 실제 본 적도 없는 광막한 사막이나 봄마다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황사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모래는 그 발음만큼이나 물질로서 홀로 불완전하다. 필요한 건 ‘물’이었다. 모래는 물과 어울려 비로소 완전해진다. 모래와 물이 만났을 때,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사태다. 내성천은 그 이치의 현전이다.(1) 그래서 답사 코스의 이름은 ‘모래강길’이 되었다.

<모래강의 신비>(글·사진 손현철, 민음사 펴냄)는 그 모래와 물을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은 영상을 하는 이(한국방송 다큐멘터리 PD)가 내성천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적인 모래강들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그 기록을 다시 종이 위에 펴낸 것이다. 같은 제목의 프로그램이 먼저 두 차례 전파를 탔는데,(2) 그나마 두 달째 편성에서 밀리다 가까스로 빛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신비로움’에 대해서조차 공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고, 그것은 지금 한반도 강들의 처지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기록하는 이는 고단했을 터이다.

시간을 따라 흐르는 영상은 물과 같고, 활자로 내려앉은 글은 모래와 같다. 지은이는 모래와 물이 만나는 사태를 ‘신비’라고 형용했지만, 이 책은 그 비의(秘儀)를 전하는 책이기 전에 모래와 강에 관해 한국 최초로 다룬 책이기도 하다(개발 이전 한국의 강이 대부분 모래강이었던 걸 감안하면 너무 늦었다). 하지만 책은 ‘최초’라는 수사 앞에서 가붓하다. 300쪽이 채 안 되는 부피도 그렇거니와, 수십 장의 크고 작은 사진과 그림, 약도들은 구성이 다소 헐겁게 느껴지게 한다. 맘만 먹으면 책 쥔 손 한 번 내려놓지 않고 독파할 수 있을 만하다.

그러나 무겁지 않되 다양하다. 책은 모래강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지형학적 참고서이자, 미학적 세묘와 사료 고증에 몰입하는 답사기이며, 열차 시간 같은 구체적 정보까지 담은 안내서이기도 하다. 나아가 처참하게 파괴되는 현장을 급박하게 부감(俯瞰, High-angle)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책의 다양성은 각각이 고유하되 서로 품거나 기댄 다양성이다. 바위처럼 개체로 자기완성을 이루지도 않고, 흙처럼 몰개체로 전체의 완성을 이루지도 않는다. “강은 산에서 쓸려온 모래를 품고, 모래톱은 강물을 머금는다.”(3)  모래강의 품성을 본떠 모래강을 다루려는 책의 양식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이 성취한 양식이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가? 즉답하기 어렵거나, 파편적 이유를 대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4대강 반대운동은 환경 파괴에 맞선 생태운동인가, 혈세 낭비를 막으려는 경제투쟁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인가. 이런 물음 자체가 4대강 문제에 핍진하지 못하다는 방증은 아닐까. 이 책은 모래강 준설에 따른 하도 침식과 교각 등 구조물 위험, 수질 악화, 지하수 고갈 등 우리 삶과 맞닿은 수많은 문제들을 모래 입자의 결정(結晶)처럼 저널리즘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모래강은, 그리고 4대강 문제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또한 분석보다는 종합과 맥락으로써, 명징한 직관과 더불어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이 책은 넌지시 일러준다. 이를테면 ‘유서 깊은 서원들은 왜 하나같이 모래강을 굽어보는 곳에 서 있을까’라는 의문을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나에게 서애 유성룡의 문집을 인용해 보여준 뒤, 모래강의 수많은 물굽이와 도학의 이념을 견줘 얘기를 풀어놓는다. “모래강, 모래톱이 보이는 곳에서 (중략) 마음을 다스리고 우주의 이치를 깨치려는 도학자들이 치열하게 사유를 펼쳤다.”

강은 물(만)이 아니다. 우리가 내성천을 내성천이라 부를 때, 그것은 물줄기의 이름뿐 아니라 모래의 이름, 거기에 깃들여 사는 뭇 생명의 이름이다. “강은 사람에게 물만 주지 않았다.” 내성천은 억겁의 세월 동안 물과 모래가 빚어놓은 충적토에서 마을을 이루고 땅을 붙여 살아온 사람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병산서원 같은 사유의 장소와 하회마을 별신굿 탈놀이 같은 문화의 장소도, 모래강은 자신의 유역으로 거느리고 있다. 4대강 사업은 그 강에서 물만 남기고 모래와 뭇 생명, 사람, 정신, 문화를 증류해버리는 일이다.

모래강에서 물과 모래를 분리하면 물은 배고파지고 모래는 사막으로 변한다. 더는 품을 것이 없는 ‘배고픈 물’(Hungry Water)은 역행침식 등으로 주변의 것들을 포악하게 쓸어가는 위험한 물로 돌변한다. 물에서 쫓겨난 모래는 지금 ‘농경지 리모델링’이라는 이름으로 비옥한 논밭을 불모의 사막으로 만들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구미, 칠곡, 왜관 구간에는 거대한 모래산들이 솟아올라 한겨울에도 황사 먼지를 일으킨다. 서로가 서로를 품고 머금을 수 없는 물과 모래 앞에서 우리 정신과 문화의 앞날을 묻는 일은 무참하다.

<모래강의 신비>는 이에 관한 한 권의 환유다. 하지만 그 상징은 콘크리트 둔치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만을 강으로 알고 살아온 이들에게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온전히 읽으려면 책을 들고 모래강에 가서 직접 걸어봐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영영 사라지기 전에.

글•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각주>
(1) 안영춘, ‘내성천에 들어 산 것들을 만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6월호.
(2) 1편 ‘모래강의 신비’, www.kbs.co.kr/1tv/sisa/environ/vod/1735563_1151.html. 2편 ‘침묵의 강’, www.kbs.co.kr/1tv/sisa/environ/vod/1736613_1151.html.
(3) 이 글의 모든 직접 인용 부분은 책 <모래강의 신비>에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