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오리엔탈리즘
일부의 주장처럼 공화 좌파는 처음부터 식민주의를 옹호했을까? 하지만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장 조레스와 조르주 클레망소, 쥘 게드와 에두아르 바이앙을 비롯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지도자들의 입장과 견해는 매우 다양했고, 수 십 년간 변화를 거듭했다.
“우수한 민족? 열등한 민족? 독일 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과학적’ 근거를 들면서, 프랑스인이 독일인보다 열등한 민족이라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필패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 나는 개인이나 문명을 보면서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중등교육 교과서에 수차례 인용됐고, 식민지 역사를 논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말이다. 급진주의 공화당원이었던 클레망소는 1885년 7월 의회에서 쥘 페리의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다. 쥘 페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인종’에 우열을 둬야 한다고 역설하며 식민지 개척을 거듭 정당화했다.
사회주의와 공화주의의 공조
이 일화는, “좌파 공화주의자(공화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는 이들을 포함)는 모두 열렬한 식민지주의자”라는 일부의 주장을 원론적으로 반박할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에 드러난 것은 조르주 클레망소의 단편적인 면모 뿐이다. 1906년에 총리직(당시의 국가수반)에 오른 클레망소는 지난날의 과감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식민 질서의 옹호자로 탈바꿈했다. 그는 파업 노동자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고, 프랑스 노동총연맹(CGT) 지도부를 기소하고 가두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매우 위대한 프랑스’를 포기할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클레망소가 공화 좌파를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상당수가 사회주의가 공화주의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1885년에 사회주의는 분열에 빠져있었고 세력 기반도 미약했다. 1906년,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가 결성되고 몇 달 후,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당시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자 의원으로는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쥘 게드(Jules Guesde)가 있었다. 이들은 클레망소의 집권에 찬성보다 기권을 택했다. 그렇다고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 새로운 좌파 정부가 미심쩍어도 예단하지 않고 ‘의심의 혜택(Bénéfice du doute, 의심스러운 점을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어느 선까지 공조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 사회적 문제에 관한 견해차는 곧 명확히 드러났다. 식민지 문제도 다르지 않았다. 이 부분은 오늘날 대체로 간과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탓하며 인종 문제에 대한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의 입장 차이를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한 쥘 게드와 장 조레스의 서로 다른 해석은 덮어두고 두 사람이 마르크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만 부각하기도 한다. 훗날 20세기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마르크스의 오리엔탈리즘을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글을 몇 편 선별적으로 분석해 내린 결론일 뿐, 오늘날 더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의 사상이 변화한 과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1850년대에 들어 마르크스는 유럽 중심적 사고를 탈피했고, 말년에는 이런 경향이 더 극명히 드러났다.(1)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식민지 정복의 장점을 칭찬하는 조레스의 어록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젊은 국회의원 시절의 조레스는 쥘 페리를 좋아했고,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을 열렬히 옹호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에 식민주의 질서를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한 것은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마르크스의 사위), 쥘 게드 등 프랑스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에 벌어진 살육과 불명예에 대한 책임은 부르주아 계급에 있다.”(<레갈리테(L’Égalité)>, 1881년 12월 25일자)
프랑스와 독일, 모로코를 노리다
식민제국이 발전한 시기에, 사회주의 조류도 구조화된 조직 형태로 탄생하고 발전했다. 탈 유럽중심적 사고가 당시의 최우선 당면 과제는 아니었지만, 1895년에 프랑스 노동당은 다음과 같이 뜻을 밝혔다. “전력을 다해 식민지 침탈에 맞서겠다. 문제를 인식하는 사회주의자라면, 식민지를 옹호하는 인물이나 계획에 절대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르소시알리스트>, 1895년 9월 15일)
그 사이, 조레스는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그러나 식민지 정책에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189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조레스는 기록보관소에 틀어박혀 『프랑스 혁명사』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1900~1904년 연작으로 출간됐다. 같은 시기 조레스는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옹호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공화주의를 수호하고 나섰다. 아울러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자 서구 열강이 베이징에 병력을 파견했을 때, 프랑스가 연합군 자격으로 전쟁에 가담하자 조레스는 유럽이 ‘문명’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이런 경험과 시대적 상황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역사학자 이브 브노(Yves Benot)가 지적했듯 혁명 가치의 수호자로서 조레스는 “식민지 문제가 혁명에서 비롯된 부차적인 사건이 아니라 혁명의 모순과 우유부단함을 드러내는 결과”라는 점을 간파했다. 혁명의 역사를 다룬 19세기 출판물들은 식민지 문제를 부차적인 사안으로만 취급했었다.(2) 조레스 사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도 알베르 마리우스 소불(Albert Marius Soboul)이나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처럼 혁명 연구로 업적을 남기고 정치적 탈식민화 문제에도 조예가 깊은 역사가들도 산도밍고(현 아이티)의 독립운동과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식민지 문제를 두루 고민했고, 식민지 정책에 점점 더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게 됐다.
이렇게 식민주의가 20세기 초의 쟁점으로 대두되던 시기에도, 프랑스와 독일은 아프리카 대륙의 마지막 독립 국가인 모로코를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모로코 위기가 한창이고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 제국을 뒤흔들던 1905년이 전환기였다. 같은 해 사회주의 운동가 폴 루이(Paul Louis)는 근대적 의미로는 처음으로 ‘식민지주의’와 ‘반식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정의했다.(3) 그는 “노동자 계급은, 병합된 국가 원주민의 보호, 존립, 생존에 필요한 권리를 요구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4)
폴 루이는 쥘 게드, 장 조레스와 함께 프랑스 사회주의의 ‘제3인자’로 불리는 에두아르 바이앙(Édouard Vaillant)의 측근이었다. 바이앙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화주의를 결합해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으며, 식민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지도자로 꼽힌다.(5)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튀니지와 모로코의 식민지 탄압을 강하게 비난한 그의 생각은 틀림이 없다.(6) 1904년 릴에서 열린 프랑스 사회당(이후 통합된 다수의 분파 중 하나) 전당대회에서 바이앙은 모든 의원이 식민지 사업에 반대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의회에서 해당 주제에 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식민지정책, 공화사회주의 가치와 양립이 안돼
하지만 식민지 문제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골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반식민주의자가 아니듯, 공화당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식민주의 옹호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명백한 예가 바로 1912년에 모로코의 ‘사회주의 식민지화’ 계획안을 구상한 사회주의자 뤼시앵 데슬리니에르(Lucien Deslinières)다. 과거 ‘식민지 침탈’이라며 비난했던 쥘 게드도 이 법안을 끝까지 지지했다. 프랑스 제국이라는 조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모로코를 식민지화하는 방법을 이렇게 풀이했다. “모로코는 우리의 것이다. (…) 식민지화를 통해 제대로 된 조직체계를 구축해야 한다.”(7)
이 법안은 결국 폐기됐다. 여러 사회당 의원을 설득해 법안 통과를 저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이앙과 조레스의 동맹이 있었다. 공화주의 신념이 확고한 이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이런 법안이 일견 합당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에 격분했다. 그렇다면 조레스와 바이앙을 타협을 모르는 반식민주의자이자 식민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선구자라고 봐야 할까? 두 사람의 행동방식은 같았더라도, 접근방식은 달랐다. 혁명을 추구했던 바이앙은 혁명을 이루려면 단절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조레스가 제도와 계획을 심층적으로 수정하는 편을 선호했다면, 바이앙과 그 추종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계획을 허무는 식으로 ‘평화적인 침입’보다 더 강력한 개입을 선호했다.
조레스 역시 프랑스의 사회, 정치적 투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역사학자 압델크림 메즈리르(Abdelkrim Mejrir)는 1905년~1912년에 총 9회에 걸쳐 개최된 사회당 전국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가 의제로 다뤄진 것은 1907년 낭시 회의뿐이었지만, 당시에도 의제가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라고 지적했다.(8) 조레스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점을 점차 깊이 인식했다. 설령 ‘오리엔탈리스트’로 불릴 여지가 있다고 해도, 조레스는 비유럽 문화에 대한 경멸과 보호를 가장한 간섭주의를 극복하고 진솔한 관심으로 방향을 반전시키고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았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학살을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그런 발언이 여담이나 빈말이었을까? 극우 민족주의자가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다. “조레스를 죽여라!”
조레스의 죽음을 원하던 이들은, 그가 프랑스 식민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섣불리 비판했다는 점을 못마땅히 여겼다. 조레스는 1914년 8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발표할 제국주의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보고서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조레스는 암살됐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의회 연설과 모로코 식민화에 관한 조레스의 연작과 언론 기고문을 보면 그가 가려던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9) 조레스의 주장은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점차 체계적으로 이끈 공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식민지 정책이 공화 사회주의 가치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장뉘마 뒤캉주 Jean-Numa Ducange
루앙대학교 현대사학과 교수 『Quand la gauche pensait la nation. Socialisme et nationalités à la Belle Époque, 좌파가 국가를 생각했을 때. 벨에포크의 사회주의와 민족』(Fayard, Paris, 2021)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Gilbert Achcar,『Marxisme, orientalisme, cosmopolitisme 마르크스주의, 오리엔탈리즘, 세계시민주의』, Actes Sud, coll. Sindbad, Arles, 2015. <Sindbad>, 아를, 2015.
(2) Yves Benot, 『La R?volution fran?aise et la fin des colonies, 1789-1794 프랑스 력명과 식민주의의 종말』, La D?couverte, Paris, 1988.
(3),(4) Paul Louis,『Le Colonialisme 식민주의』, Bibliothèque sociale, Paris, 1905.
(5) Gilles Candar, Édouard Vaillant,『L’invention de la gauche 좌파의 발명』, Armand Colin, Paris, 2018. L’invention de la gauche, Armand Colin, Paris, 2018.
(6) Mahmoud Faroua,『La Gauche en France et la colonisation de la Tunisie 프랑스의 좌파와 튀니지의 식민지화』, 1881~1914, L’Harmattan, coll. <Creac Histoire>, Paris, 2003.
(7) Lucien Deslinières,『Le Maroc socialiste 사회주의 모로코』, Giard et Brière, Paris, 1912.
(8) Abdelkrim Mejri,『Les Socialistes français et la question marocaine, 1903~1912 프랑스 사회주의자와 모로코 문제』, L’Harmattan, coll. Creac Histoire, 2004. « Creac Histoire », 2004.
(9) Jean Jaurès, 『Le Pluralisme culturel. Œuvres. 문화 다원주의. 전집』, 제17권, Fayard-Centre national du livre, 파리, 2014; 『Vers l’anticolonialisme. Du colonialisme à l’universalisme 반식민주의를 향해. 식민주의에서 보편주의로』, Les Petits Matins, 파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