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을 수 없는 좌파 시온주의의 쇠락

자기모순에 빠진 이념

2021-05-31     토마 베스코비 | 현대사 독립학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대항하는 야당은 최근 2년 동안 벌써 네 번이나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야권이 다수를 차지했음에도, 정당 간 성향이 판이한 이유로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당과 메레츠당의 현재 의석은 120석 중 13석에 불과하다. 이 두 정당이 행사해온 좌파 시온주의 헤게모니(정치 패권)는 과거지사로 남을 전망이다.

 

2019년 4월 이후 이스라엘은 네 번의 총선을 치렀다. 선거가 끝날 때면, 언제나 민족주의자와 종교계의 연대로 노동당의 영향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좌파 시온주의의 이상향인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유대국가 건설’은 실패한 듯하다. 하지만 좌파는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도맡아왔다. 1948년 건국 당시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고, 건국 직후 3년에 이어 1992~1996년과 1999~2000년에도 좌파는 크네세트(Knesset, 의회)에서 이스라엘 정치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최근 몇 차례 선거에서 연이어 역대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면서 정치무대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2020년 3월 선거에서는 총 120석 중 7석, 올해는 13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좌파 시온주의’라는 용어의 모순

좌파의 쇠락 이유와 과정에 대해 설명하려면, 좌파 시온주의의 기원과 모순을 되짚어봐야 한다. 유대인 지식인들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원래 이 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다. 원래 동화정책을 지지했던 그는 1894년 파리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고, 1897년에는 반유대주의자 카를 뤼거가 기독사회당 후보로 빈 시장 선거에 출마해 선출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그때부터 헤르츨은 동화정책이 해결책이 아닌 위협이며,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말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학살이 그 직접적인 사례였다. 유럽 사회에 통합되려는 의지는, 종교와의 분리와 공동체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또한 유럽 통합주의 전략은 반유대주의가 확산해 유대인들이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헤르츨은 유대인이 중심이 돼 안전하게 살아갈 정치적 집합체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즉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었다.

하지만 시온주의 운동은 일원화되지 않은 채, 여러 분파로 나뉘어 일어났다. 한편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이 자유주의 유대인 국가를 옹호하며, 서구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외교적 지지와 지원을 요청하던 헤르츨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와 결부된 시온주의 운동이 진행됐다. 이들은 소외된 유대인들이 생산적인 노동자, 일꾼, 소작농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봤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노동 시온주의’로 알려진 이 좌파 시온주의가 건국 운동을 이끌었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창시자들은 유대인의 주권을 넘어 자신들이 소수(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5%에 해당)에 해당하는 땅에 정착해 살 수 있는 권리도 인정받고자 했다. 서구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제국을 세우던 시기에 시작된 시온주의 프로젝트는 식민주의 이념에 동화됐다.(1)

좌파가 된다는 것은 보편주의적 접근을 강조하며, 만인이 평등한 사회 정의나 자유 같은 기본원칙을 수호한다는 의미다. 이런 좌파의 기본 이념과 유대인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시온주의는 그 시작부터 다르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급진좌파도 이런 모순을 크게 비판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원칙을 목표로 내세우며, 유대인들이 해방되는 길은 혁명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투쟁지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민족주의와 민족 종교의 관점을 따르는 일은 계급투쟁과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공동체가 아닌 사회적 조건에 따라 개개인을 단결시키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조직들은 ‘유대인 국가’ 건국을 반대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를 경험하고, 일상에서 수모를 당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들로서는 실현 여부도 불투명한 혁명을 그저 인내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결국 식민주의보다는 진보와 혁명적 이념에 익숙한 좌파 활동가들 사이에 시온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농민 비중이 높고 전통적인 정치 모델에 익숙한 아랍 인구의 터전인 팔레스타인에서 여러 좌파 시온주의 운동 조직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머나먼 땅에서 싸우는 혁명 투사’로 여겼다. 시온주의 부르주아들처럼 이들 조직은 공정하고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자신들의 계획이 아랍인들에게도 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억압을 벗어나고자 다른 민족을 억압한 이스라엘

하지만 이런 생각은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무너지고 만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영토 박탈과 영국 위임통치에 반발해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947년 유엔이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는 분할안을 채택했으나, 제1차 중동전쟁 발발로 이행되지 못했다. 중동전쟁 기간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점령했고, 1948년 그 자리에 이스라엘 국가가 들어섰다.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각각 세우도록 한 유엔 결의안의 틀 안에서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건국 직후부터 유엔 결의안을 불이행했다. 이런 정책을 처방한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좌파 정당이다. 노동 시온주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국경 안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게 유대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에서 존엄을 지키고 자유롭게 살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 시온주의에는 진보성을 잃고 ‘보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특징’만 남았다. 진보적이고 평등한 국가를 꿈꾸며 팔레스타인에 당도한 혁명 유대인의 비전은 이제 상상 속의 정책이 돼버렸다. 과거 수십 년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유럽인들은 키부츠(Kibbutz) 공동체와 그 개척자들을 보며 이스라엘의 사회주의 모델을 찬양했다.(2)

키부츠 공동체는 이상적인 구상에서 탄생했지만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그 의미가 쇠퇴했다. 키부츠 운동이 더는 사회, 경제의 균형에 높은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운동으로 이스라엘의 정치 현실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식민주의적이고 억압적이며, 신자유주의 억지 논리가 깊이 뿌리내린 정책을 펴는 이스라엘은 멕시코의 뒤를 이어 국제협력 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국가에 해당한다. 여기에 악화된 정치 풍토도 한몫했다. 여러 지식인과 언론인이 2000년대 이후로 이스라엘이 ‘우경화’됐다고 평가한다. 노동 시온주의가 힘을 잃으면서 이스라엘이 ‘파쇼’ 국가가 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디지털 황금의 땅’이 된 가나안

이스라엘 건국 초기부터 수십 년에 걸쳐, 세속주의와 유대 노동자 간의 연대라는 원칙으로 건설한 노동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서구 자본주의에 완전히 통합돼 신생 디지털 기술 기업들의 ‘황금의 땅’이 됐다. 사회 내에서는 1980년대에 불어온 경제개혁의 물결이 공동체 정신을 개인주의로 대체했고, 종교 민족주의와 달리 사회주의적 가치는 시대에 동떨어진 산물로 인식된다. 예컨대, 2019년 9월을 기준으로 세속주의 공립학교 입학비율은 41%에 불과해 그 나머지 비율을 사립이나 종교 학교가 차지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군사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메사르보트(Mesarvot, ‘거부자’라는 뜻) 협회에 의하면, 고교생의 50%가 병역을 꺼린다. 스스로를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면서 철학적·정치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례는 매년 10여 명에 불과하다. 그밖에는 종교적(초정통파)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기도 하고, 직업 활동(병역의무 이행이 필수인 직업도 있지만)을 이유로 예외를 인정받기도 한다.

이스라엘 정부가 ‘유대민족’은 하나라고 강조하지만, 다양한 유대인 집단(아슈케나짐, 팔라샤, 미즈라힘, 스파라드, 러시아어권 유대인 등)이 국가의 주요 요직을 놓고 경쟁하는 가운데, 민족 갈등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3)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비율은 국가의 30%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이들이 시온주의 좌파 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한다. 모로코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사업가로 활동하다 2019년까지 이스라엘 노동당 대표를 역임한 아비 가베이(Avi Gabbay)는 2017년 당 대표 선거에서 전통적으로 우파 성향을 띠는 동부 유권자들의 지지를 별로 얻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가베이 전 대표는 팔레스타인 점령지가 ‘시온주의의 참된 면모’를 보여주며, 그간 좌파가 유대인의 정체성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보수파와 종교계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역시 모로코 출신으로 가베이의 뒤를 이어 2021년 1월까지 당 대표를 역임한 아미르 페레츠(Amir Peretz) 전 대표도 선거에서 전임자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무지, 동력 상실, 그리고 고립

좌파 시온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인은, 이들이 대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서민들의 생활상을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학자 일란 그레일세머(Ilan Greilsammer)는 이스라엘의 좌익 정당 메레츠(Meretz)를 비롯한 노동 시온주의 노선의 정치계 전체가 “민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4)라고 지적하면서 “이들 정당의 지도자들은 가자지구 인근 스데로트(Sderot)나 네티보트(Netivot)를 방문하기는커녕 지나친 적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의 사상과 견해가 어떻게 텔아비브의 특권층이 결국 자신들을 위해 고안해 낸 ‘엘리트주의’의 제안으로 인식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서민층(아랍계 인구 제외)은 좌파보다 우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2019년 4월 선거 다음 날 이스라엘 언론 <메론 라포포트(Meron Rapoport)>는 소득이 가장 낮은 37개 유대인 거주 도시의 유권자 1백만 명의 투표 결과를 분석했다.(5) 해당 도시에는 주로 미즈라힘과 러시아어권 유대인이 많았다. 이스라엘은 비례대표제로 의원을 선출하기 때문에 평균 60%에 달하는 투표율은 곧 30석의 의석을 뜻했다. 시온주의 좌파는 해당 구역에서 3.25% 득표로 겨우 1개 의석을 확보했다. 빈곤한 유대인들, 특권층 아슈케나짐 외의 유대인들은 노동당, 메레츠당 후보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한편, 이들 도시에서 민족주의 우파가 획득한 의석수는 22석에 달하고, 그중 12석은 리쿠드(Likoud)당이 차지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대표하는 리쿠드당뿐 아니라, 동맹 정당들도 이런 변두리 지역을 텃밭으로 삼아 지역의 아동 자선단체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집중 공략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 노동조합 히스타드루트(Histadrut)를 중심으로 전개됐고, 노동당이 취약 계층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밖에도 시온주의 좌파는 오랫동안 국가와 국가 기관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키부츠 출신 지도자 양성 기능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에 키부츠 공동체는 의무 군복무 제도처럼 활동가들에게 정치 교육을 제공하면서 노동 시온주의 운동의 토대가 됐고, 그 핵심 간부들은 한때 이스라엘의 엘리트를 대표했다. 오늘날에도 250여 개의 키부츠 공동체가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사유화됐다. 이들 공동체는 대부분 넓은 부지에 공동주택이나 종합 위락시설을 조성하고 더 건전한 생활환경을 찾는 젊은 부모들을 대상으로 운영된다. 평등한 임금, 공동체 생활 등 집산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끝으로, 대다수의 시온주의 좌파가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무지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군사 봉쇄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시온주의 좌파는 아미라 하스(Amira Hass)나 기드온 레비(Gideon Levy) 같은 언론인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의 현실을 보도하는 기사를 쓰더라도, 그들을 팔레스타인의 입장에만 귀를 기울이는 좌익, 패배주의자, 비관론자로 매도할 뿐이다. 그밖에도 브첼렘(B'Tselem), 브레이킹 더 사일런스(Breaking the Silenc, 침묵 깨기), 예슈딘(Yesh Din) 같은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경시하는 노동계의 무관심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 단체는 이스라엘 사회가 더는 주목하지 않는, 혹은 주목하지 않으려 하는 점령지역의 현실, 불편한 진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상황을 폭로하면서 평화주의 진영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자처한다. 

하지만 주요 좌파 정치 지도자들은 정작 이런 단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거주하는 66만 정착민의 표심 얻기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이들 단체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활동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즉, 고립 상태에 빠져있다. 시온주의 좌파는 한때 정치 기반으로 삼았던 지지층과 스스로 결별한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타냐후 총리가 내세우는 식민주의나 극단적 안보주의 같은 선동 정치에 맞서 대안적 담론을 제시할 만한 동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 셈이다. 

 

※이 글은 토마 베스코비의 저서 『L’Échec d’une utopie. Une histoire des gauches en Israël 실패한 유토피아-이스라엘 좌파의 역사』(La Découverte, Paris, 2021)에서 발췌했다. 

 

 

글·토마 베스코비 Thomas Vescovi
현대사 독립학자. 저서『L’Échec d’une utopie. Une histoire des gauches en Israël 실패한 유토피아-이스라엘 좌파의 역사』(La Découverte, Paris, 2021), 『La Mémoire de la Nakba en Israël 이스라엘 나브카의 기억』(L’Harmattan, 2015) 등이 있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Gilbert Achcar, ‘La dualité du projet sioniste. Un peuple, une colonisation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이중성. 하나의 민족, 하나의 식민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157호, 2018년 2월~3월.
(2)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자발적 농업공동체를 말한다. 키부츠 공동체 구성원은 키부츠니크(kibbutznik), 복수형은 키부츠니킴((kibboutznikim)이라고 칭한다. 
(3) 미즈라힘(Mizrahim, 미즈라흐 유대인)은 중동, 캅카스 및 기타 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을 지칭한다.
(4) Chloé Demoulin, ‘La gauche israélienne se cherche à droite… et ne se trouve pas 우익에서 길을 찾다 갈 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좌파’, <Mediapart>, 2018년 6월 8일, www.mediapart.fr 
(5) Meron Rapoport, « Israel’s left lost a million votes in the last polls. Here’s how they get them back », Middle East Eye,  2019년 8월 19일, www.middleeastey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