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대학, 불안과 희망 사이

2021-05-31     알랭 가리구 |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위기의 대학’. 어떤 문구가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위기에 처해있다. 순전히 대학이 비난받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도 그렇고, 대학의 기능장애와 불균형을 지적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여기서 ‘대학’이라 함은, 성직자가 아닌 지성인과 정부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19세기 무렵 유럽 전역에 세운, 중세대학을 계승한 현대식 교육기관을 뜻한다.

 

‘위기(Crise)’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됐던 의학용어다. 다른 교육기관들은 겪지 못한, 대학만이 겪은 길고 깊은 변화의 과정을 모두 담아내기엔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단순한 정치적 에피소드 그 이상이었던 1968년 5월 학생혁명은 사실 대학을 변화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고, 이미 진행 중이던 변화가 밖으로 표출된 결과였다. 특권층을 위해 만든 19세기 대학을 그대로 계승한 대학은, 교수에게 부여된 특권과 대형 강의 위주 교수법의 권위적 성격을 이유로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드골 체제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자들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되던 참이었다. 그렇게 혁명 정신이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났다. 한편에는 베이비붐 세대 대학생들이, 다른 한편에는 정부의 교육비 삭감으로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던 조교 및 전임 강사들과 자신의 특권과 희소성을 유지하려는 교수들이 있었다.

 

68혁명 이후의 혁신, 그리고 한계

68혁명은 대학 간의 권위적 관계(특권 지식층이 특혜와 진급을 좌지우지하는 사장격인 관계), 대학과 학생 간의 권위적 관계(특권 지식층이 사장, 아버지, 관료 격인 관계)를 끊어냄으로써 몇 년에 걸쳐 특권 지식층을 붕괴시켰다. 눈에 띄는 변화로는 강의 중에 교수가 가운을 입지 않게 된 것과, 비록 법과대학에서는 느리게 적용되기는 했지만 단과 대학의 관리인을 없앤 것이었다. 나비넥타이는 1968년 전후에 교수로 임용된 이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고수하려 했던 액세서리였다. 당시 나비넥타이는 신세대 지식인의 느낌을 줬다. 제복을 갖춰 입고 금색 체인을 두른 관리인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교수를 계단식 강의실로 안내하고 교수를 위해 의자를 뒤로 빼주는 역할은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 관리인들이 은퇴하자 이런 관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학 공간에서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도심지의 단과 대학을 한꺼번에 없앨 수는 없었다. 낡은 건물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기 전까지 일부 학과는 일단 도심에 남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넓은 캠퍼스로 이전했다. 넓은 부지는 대개 도심지에서 떨어진, 풀과 버섯 냄새가 가득한 지역에 있었다. 벤치형 나무 의자와 문 달린 책장이 있던, 200여 명용의 계단식 강의실은 초대형 현대식 강의실로 대체됐다. 

이런 강의실에서는 교수가 학생 개개인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수업태도가 불량한 학생에게 주의를 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교단에 서서 강의만 하는 교수에게는 사실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잡담은 주로 강의실 맨 뒤쪽에서 이뤄졌고, 교수는 모르는 척하면 됐다. 이는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도 바꿔놓았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은 당시 유행하던 정치적 용어를 빌리면 ‘민주화’되고 있었고, 수치와 관련된 좀 더 객관적인 용어를 빌리면 ‘대중화’되고 있었다(물론 이런 상황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칼로레아 시험의 80%에 달하는 합격률이었다. ‘교육의 민주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교육의 민주화는 당시를 지배하던 생각이었고, 증가하는 실업률에 고통 받던 청년들을 다독이던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작 당사자는 쏙 빠져 있는 수사문구였다. 즉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과 그들의 추종자, 그리고 정책의 실행자들이 주창한, 겉만 번드르르한 수사문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교육의 민주화’는 신속히 진행됐다. 프랑스가 대학 입학의 문을 활짝 연 계기는 68혁명이 아니라, 그로부터 20년 후 적용된 교육정책이었다. 결국, 대학생의 수는 과거의 4배 이상 증가했다. 대학생 수의 증가는 대학생의 사회계층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세대 대학생은 부르주아 계급, 1960년대 이후의 2세대 대학생은 소시민 계급이 대부분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의 3세대 대학생은 노동자 계급도 있었다. 출신이 다양해지고, 학생 수가 급증했다. 그러자 다른 교육기관들은 나름의 학생 선발 기준을 마련했지만, 대학교는 여전히 성적과 무관하게 입학생을 받아들였다. 바칼로레아의 선발방식은 유지하면서,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한 시험의 합격률을 대폭 낮췄다.

이런 인구학적 및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는 점점 더 수평적으로 변했다. 대부분 권위적이던 초등학교 교사를 포함해 공화국 시대의 교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익숙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교사들을 지지했다. ‘격의 없다’, ‘수평적이다’라는 뜻의 ‘Informalisation’은 1960년대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자발성, 편안함, 직접적이고 진실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든 단어였다.

그러나, 교수법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계단식 강의실에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소수 학생들을 교육하는 방식은 무려 3세대에 걸쳐 이어져 온 대학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그 전형이 바로 강의였다. 워낙 오랫동안 지속돼 온 만큼 강의 방식의 변화 속도는 굉장히 더뎠다. 나이 많은 교수들의 오랜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웠지만, 극소수의 인원을 위해 높은 수준의 지식을 전달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기도 쉽지 않았고, 또한 지식을 가진 교수와 그것을 배우려는 학생 간에 이미 형성돼 있던 권력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도 문제였다. 그 학생들이 다시 교수가 돼 다음 세대에게 강의할 무렵에야, 비로소 변화는 완성될 것이었다.

강의는 여전히 지루했지만, 탁월한 수준의 교수가 명강의를 펼치는 경우가 늘면서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학생들과 더 많은 대화와 상호작용을 원하는 교수도 늘었다. 동시에 구조주의, 구성주의, 기호학 등 다양한 과목과 새로운 접근법이 소개되면서 학계의 유명인사들을 강의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신구(新舊)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신세대는 구세대의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차 없이 비난했다. 

또 다른 변화는 연구 활동(리서치)의 등장이다. 신세대 교수들은 연구 결과를 무한 신뢰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온갖 지식이 폭발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교수들이 수업보다 연구를 선호했다. 한편 대학생들은 기존 학파(에콜)에 대한 반감을 토대로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대학 내에 만연하던 자기도취적인 분위기 속에서 종종 서로에게 등을 돌리기도 했다. 특권 지식층과 ‘다소 건방진’ 신세대 간의 껄끄러운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부드러워졌다. ‘수평적 문화의 대학’이라는 새로운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런 시기는 길지 않았고 3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불과했다.

 

귀족주의에 맞서, 처우개선을 요구

대학생의 증가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또한, 높은 실업률에 지친 청년들의 마음을 달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에 당시 고등교육부 장관이던 드바케는 대학별 입학기준을 마련해 학생들을 선발하자는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대학생들의 거센 시위로 첫 번째 동거 정부의 시라크 내각은 위기를 맞았다. 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야 고등 교육기관들을 만족시킬 새로운 대학정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수 출신의 리오넬 조스팽 신임 총리가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결국 수십 년 만에, 교원들의 처우개선과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를 위한 광범위한 계획이 수립됐다. 정부는 대학 정원이 급증한 현실에 맞춰 대응책을 마련했다. 전반적으로 모두에게 바람직한 정책이었다. 당시 교수들의 근무시간은 거의 2배로 늘어, 연간 128시간에 달했다. 그러나 교수라면, 연구와 집필을 위해 추가근무를 한다는 대학의 오랜 귀족주의 전통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 변호사를 겸하는 법대 교수나 실무를 겸하는 의대 교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겸임 교수들은 이미 많은 추가근무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 추가근무가 수당이 거의 없는, 무료 봉사였다는 점이다. 1988년 50프랑(현재 기준 8유로 미만)이었던 수당이 약 6배로, 대폭 상향됐던 것이다. 결코 작지 않은 변화였다. 

이제까지 거의 무료나 마찬가지였던 추가근무는 행정, 책임, 관리, 연구 등으로 세분화해 지급하는 새로운 수당체계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됐다. 관리·연구 업무는 비용절감과 학생복지 증진을 위해 대부분 DEA(석사 취득후 1년제 교육과정)와 DESS(석사 취득후 1년제 전문가 양성과정) 에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할당됐다. 한 마디로, 정부는 교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지급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반긴 이 정책에는 역설적인 측면이 있었다. 정부는 보상을 통해 교수들이 ‘귀족정신’을 포기하게 했고, 교원들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부추겼다. 

이미 개혁은 시작됐고 이것을 오래 지속시켜야 하는데, 재정이 부족했다. 교수들에게 1989년 수당 체계에 따른 보상 없이 행정업무를 맡기기 위해, 학부 경영진은 자원자들에게 행정업무를 분담시켰다. 얼핏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행정업무에 자원한 교수들이 이 업무를 정규시간이 아닌 추가시간에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교재준비는 동료 교수에게 부탁할 수 없고, 추가근무 수당이 없으면 월급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관료주의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화는 강화됐다. 게다가 강의와 연구를 모두 담당하는 교수들의 수가 3배로 늘면서 행정업무도 늘었다. 교원의 충원 없이 계속 증가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기존 인원이 교육 이외 업무를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교원의 추가선발이 필요했는데, 역시 문제는 비용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궁여지책은 다름 아닌 ‘계약직’이었다. 

청년들에게 대학 업무를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괜찮은 임시방편이었다. 단, 이 계약직이 안정된 고용으로 이어질 때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직 교원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구직활동을 하는 가운데, 연구활동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래야만, 처우도 열악한 전임강사 자리라도 얻을 수 있었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40세 전후 전임강사의 수입은,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교원 수입이 가장 낮았다. 게다가 교수 임용률도 낮은 편이었다. 그 후 약 40년, 대학 계약직들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은 68혁명을 촉발했던 문제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고, 조교 제도는 아예 폐지됐다.

교수들의 정치적 급진화가 이 프롤레타리아화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일까? 과거 소시민 계급 출신 교수들의 정치적 활동은 청원서 서명 등의 고전적인 형태로, 사회적 투쟁에 연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이 위기를 맞으면서, 교수들의 투쟁은 독특한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학계의 급진화는 교수들이 기존의 학문적 지식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한때 ‘부르주아 학문’이 비판을 받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학문과 정치의 지나친 구분이 화두가 됐다. ‘정부를 지지하는 지식인’에 반대하고 학문과 정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반대편에 서서, 교수들은 학문과 피지배자 보호를 동시에 부르짖으며 학문에 정치적 요소가 섞여 있던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한편, 학계의 투쟁은 정규직 자리를 보장받으려는 사회적 운동의 양상도 보였다. 진급기회가 미미한 교수사회에서는 치열한 자리다툼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군에서는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가운데, 교수들은 ‘학계쇄신’의 야심으로 물질적 혜택을 거부하고 이데올로기적 승화 전략과 그릇된 믿음을 택했다. 혹시 모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교수들의 급진화는 쌍방을 존중하는 학문적 토론을 중시하던 교수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는 세대교체를 원하는 쪽과 전통을 고수하려는 쪽으로 나뉘어 ‘신구 갈등’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위기를 직접 겪은 3세대 교수들은 학계를 극심하게 분열시켰으며, 교수 사회의 모든 관행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학문적 자유의 중요성을 경시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 지식층이 똘똘 뭉치면 그 어떤 낙관주의도 당해낼 수가 없다. 막스 베버는 프롤레타리아 지식층을 두고, “물질적 불안과 이데올로기적 희망으로 대표되는 사회 계급”이라고 정의했다. 대학의 위기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이미 궁지에 몰린 정치 계급이 최소한의 이해심과 행동력마저 잃어버리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러운 점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