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을 비판한 ‘보 비더버그’

2021-05-31     필리프 페르손 | 기자, 극작가

파업하는 당사자 입장에서 파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주는 영화를 통해 노동운동가 조 힐을 기리며 사랑에 대해 말하려 했던 감독이 있다. 그는 스웨덴식 수사물 영화를 처음으로 찍었을 뿐 아니라, 배우에게 새로운 유형의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연출을 선보였다.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자유롭고 서정적인 표현 방식으로 기성 질서에 고독하게, 때로는 다 함께 대항하는 싸움을 그려낸 영화 연출가, 보 비더버그 감독이다.

 

고전 작품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대부분의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기 전, 영화평론가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거의 똑같은 영화와 똑같은 영화인을 고전과 거장의 반열에 세우고 대중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 제작의 모든 면이 드러나는 시대가 되자 그동안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거나 잊혀졌던 몇몇 영화감독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DVD 제작사 <말라비다(Malavida)>(1)는 스웨덴의 보 비더버그 감독이 만든 15개 영화 중 12개 영화를 재편집한 DVD를 배포했는데, 덕분에 비더버그 감독은 이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 부정의를 신랄하게 고발한 그의 영화는 일반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좋아할 법했으나, 이들도 결국엔 주류 미학 영화에 더 빠져들었다. <벌거벗은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르 가르슈>에 이르는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영화 연출이 당시 주된 미학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누벨 바그’의 가식적 우아함 뒤에 자유분방한 여성을 조명 

보 비더버그 감독의 영화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비더버그 감독은 1930년 노동자의 아들로 스웨덴 수도 말뫼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길게 이어가진 못했으나 작가가 됐다. (1950년대 소설 4개를 썼다.) 그리고 1960년, 스톡홀름의 대형 석간 신문사에서 영화 평론가로 글을 기고했다. 1962년 그는 자신의 영화 칼럼집인 『스웨덴 영화의 시각』에서 “스웨덴 영화가 ‘부자 아버지 후광을 입은 철없는 아들’ 같다”며 부르주아에게 순응적인 영화계의 태도를 비판했다. 1954년 프랑수아 트뤼포가 <레 카이에 뒤 시네마(Les Cahiers de cinéma)> 잡지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써서 프랑스 영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런 파장의 ‘스칸디나비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쟁적인 글 속에 특히 두드러진 것은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에 대한 공격이었다. 보 비더버그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스웨덴 사람들을 내향적이고 예민하게 묘사하여 스웨덴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의 인물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살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고민”이라고 덧붙였다. 

비더버그 감독은 일평생 베리만 감독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유난히 대립각을 세웠다. 그런데도 비더버그는 베리만 감독이 만든 <모니카와의 여름(1953)>에 매료됐으며 한때는 베리만 감독과 공동으로 연극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베리만 감독은 1994년 예테보리 페스티벌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목록을 언급할 때, 비더버그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영화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을 4위로 꼽았다. 베리만은 자신의 젊은 경쟁자이자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 연출가였던 비더버그의 자유로운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배우를 이끄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나 프로 배우와 아마추어, 초보 배우가 뒤섞여서 구별이 안 되는 비더버그 감독 특유의 연출 기법을 부러워했다. 1963년 영화 <침묵>에서는 급기야 비더버그 감독의 처음 두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토미 베르그렌 섭외를 고려하기도 했다. 토미 베르그렌은 보 비더버그 감독의 마스코트 같은 배우로, 영화 <조 힐>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쳐 유명해진 배우다.

비더버그 감독은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자기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1963년 칸 영화제 비평주간에 소개된 그의 영화 <유모차>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초기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고다르 감독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배우 진 세버그가 연기한 여주인공 패트리샤와 달리 <유모차>의 여주인공은 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비더버그가 촬영한 말뫼는 서민의 도시이기 때문에 고다르 감독이 보여준 파리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누벨바그’라는 가식적인 우아함 뒤에서 영화들은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을 그렸다. 그 여성들은 대개 자신을 유혹하는, 사회적 출신이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임신한 채로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가겠다고 결심한다. 

1965년 오스카 영화제 외국어 영화 부문에서 후보에 오른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시적인 연출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문제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안데르는 비더버그와 마찬가지로 말뫼의 하층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제멋대로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비참한 삶을 책임지는 어머니 밑에서 안데르는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때는 1936년이었고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이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40년 장기 집권을 준비하고 있던 초창기였기 때문이다. 젊은 안데르는 국민 대다수를 위한 기회라고 여기며 어머니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았던 비더버그는 자신의 영화가 “비정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강경한 개인주의자 인물을 만들어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인물들의 불행 속에서 어떻게든 공동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는 투쟁,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가끔이라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안데르가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벗어나려는 까닭은 자신의 출신을 잊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은 채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그는 아마 스칸디나비아가 배출한 20세기 최고의 프롤레타리아 출신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에는 이 ‘서민 작가’의 재능을 살려 토리뉘 린드그렌의 대표작인 <뱀의 길>을 각색했다. 덕분에 그의 영화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영화이기도 했는데 1850년 스웨덴 북부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불공정하고 비참한 삶을 그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완전히 방향을 바꾼 듯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사랑 65>(1965년 베를린 영화제 특별언급상 수상작)는 연출 형태가 존 카사베티스 감독의 <그림자들>과 비슷했다. 심지어 배우도 존 카사베티스 감독 영화에 출연한 벤 카루더스를 그대로 데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카사베티스는 영감이 부족하고 자유를 갈망하다 그 늪에 빠져버린 감독으로 영화 스타일이 베리만 감독과 비슷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더버그 감독은 자신의 촬영 방식을 다듬었다. 그동안 그의 촬영 기법은 즉석 촬영을 기반으로 해서 많은 컷을 찍은 후, 스스로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사용하는 필름 양이 엄청나서 매번 문제가 됐다.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위한 대가였다. 그가 이후에 만든 영화 3편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영화들에서 특히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격찬, “미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

<엘비라 마디간>은 비더버그 감독이 만든 첫 컬러 영화로 외부에서 자연광으로 촬영됐다. 게다가 무명 배우인 피아 데게르마르크에게 주연을 맡겼다. 19세기 말에 벌어진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연출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에 맞추어 덴마크 장교와 서커스 줄타기 곡예사 소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서정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 작품 덕분에 피아 데게르마르크는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비더버그는 <아달렌 31>과 <조 힐>에서 두 가지 비극적인 정치사와 그 가운데 벌어졌던 투쟁을 자유롭게 연출했다. 

<아달렌 31>(1969)처럼 관계자 입장에서 파업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아달렌 31>은 파업자들을 평범하고 용감한 시민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싸움이 지속될수록 고용주의 실체와 정부 당국 간의 은밀한 공모를 알게 된다. 영화는 파업 노동자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대체 노동자들의 개입, 마지막에서는 군대를 동원한 참혹한 파업 진압까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비더버그는 군대의 총성보다 흡사 수풀 위에서의 점심 식사에 어울릴 법한 따뜻한 색감을 사용한다. 1931년 아달렌 지방에서 일어난 파업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작품은 비더버그 감독 예술 세계의 정점에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봉 당시 영화평론지 <레 카이에 뒤 시네마>의 까다로운 입맛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이상적인 탐미주의와 고용주의 딸이 파업자의 아들과 동침하는 시나리오 때문에 영화의 아름다운 의도가 훼손된 것이 아쉽다.”(2) 그러나 소설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반대로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답다. 미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날카롭고 설득력이 있으나 억지로 교훈을 주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3) 

 

미국노동운동가의 투쟁을 그린 영화 <조 힐>

2년 후 비더버그 감독은 다음 영화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영웅, 스웨덴 사람으로 본명은 조 힐스트룀, 나중에 조 힐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스웨덴 출신 미국 노동운동가의 삶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조 힐은 떠돌이 노동자로 혁명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적 인물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삶이 어떤지 알게 된 후 그들 편에서 싸웠고, 민중가요를 써서 노조에 제공했다. 몇몇 노래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의 민중가요처럼 활기찬 영화 <조 힐>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조 힐은 살인죄로 구속되고, 조작된 재판으로 인해 사형을 당한다.

조 힐의 사형 집행은 미국 가수이자 인권운동가인 조안 바에즈가 연주한 노래로 시작하고 끝나는데, 이는 소외됐던 그의 삶을 더 부각한다. 영화 <조 힐>은 할리우드가 베트남 전쟁에 관한 대학생들의 비판을 묻어버리는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회 문제는 더 이상 유행이 아니었다.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허수아비>에 이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마피아 영화가 관심을 끌고 있었다. 비더버그 감독은 1974년 스웨덴 영화 <톰 풋(Tom Foot)>으로 다시 돌아왔다. 6살 축구 천재 어린이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서 꽤 성공을 거뒀다. 축구 천재인 아이가 어른들과 함께 국가 대표팀에서 축구를 하다가, 결국 읽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해서 경기를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다음 영화인 <지붕 위의 사나이>(1976)의 경우엔 스웨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국제 평론가들은 비더버그 감독이 장르물에 합류한 것을 보니 그의 야심이 약화한 것 같다며 유감을 표했다. <지붕 위의 사나이>는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쓴 소설『 세플레의 못된 남자』를 각색한 영화이다. 경찰 마르틴 베크가 주인공인 수사물인데, 스웨덴 최초의 수사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프렌치 커넥션> 스타일을 차용해서 모든 서정적 표현을 포기하고 더욱 수사·장르물에 가깝게 연출했다. 비더버그 감독은 경찰에 대해서도 자문했는데, 사회 민주주의 모델이 부진해지자 ‘시민으로서의’ 그의 사명이 바뀐 셈이었다. 비더버그 감독은 1984년 부패한 장관의 정치 스캔들을 보고 영감을 얻은 영화 <마이오르카에서 온 남자>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복지 국가의 뒤를 이은 자유주의 사회의 부작용을 드러내는 데 ‘스웨덴 수사물 영화’를 긴요하게 이용한 사람은 비더버그 감독이 처음일 것이다.

비더버그 감독은 <지붕 위의 사나이>로 스웨덴 영화계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재난 영화의 한계 속에서 스릴러를 만들어 냈다는(도심지에서 헬리콥터가 박살났다)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감독의 일하는 방식에 진력이 난 제작자들은 그와 인연을 끊었다. 로니 스벤손과 마르쿠스 스트렘크비스트의 다큐멘터리 <조준선에 있는 리얼리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영화의 기법은 세심하고 완벽했다. 그러나 그 당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친 야심으로만 보일 뿐이었다.(4) 

<마이오르카에서 온 남자> 이후 비더버그는 영화 2편을 제작하고 다시는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대신 드라마나 연극 연출에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모두 썼다. 우리는 영화 <뱀의 길>을 기억한다. 그의 사회적 재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95년 <아름다운 청춘>은 1940년대 교사와 청소년 사이의 열정적 사랑을 그려낸 영화로, 치밀한 묘사를 통해 감명을 주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구식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이 작품들이 오늘날 영화인들에게 영감의 근원이 되기를 바란다. ‘영화 고전 작품’이라며 케케묵은 리스트를 들이미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전통을 파괴하는 보 비더버그의 영화가 고전 작품 목록에 추가된다면 이 리스트가 더 활기를 띨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글·필리프 페르손 Philippe Person
기자, 극작가, 연출가, 배우. 전 뤼세네르 극장(Théâtre Lucernaire) 감독.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언급한 모든 작품들을 정가 13유로에 DVD 구매 가능하다. Malavida, Paris.
(2) Pascal Bonitzer, ‘Adalen 31 (Bo Widerberg)’, <Les Cahiers du cinéma>, n° 213, Paris, 1969년 6월.
(3) Simone de Beauvoir, 『Tout compte fait 이럭저럭』, Gallimard, Paris, 1978 (초판: 1972).
(4) Ronny Svensson, Markus Strömqvist, <Le Réalisme en ligne de mire 조준선에 있는 리얼리즘>(2006), Malavida, <Un flic sur le toit 지붕 위의 사나이> DVD 안의 보너스 트랙으로 시청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