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주권회복에 다시 주목받는 두 영화

우주 시대의 개막을 위해 눈여겨 보아야할 ‘아폴로 11호’의 패러독스

2021-05-31     지승학 | 영화평론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이을 수 있는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두 감독 모두 ‘아폴로 11호’를 영화 속에서 ‘불쑥’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샤이닝>에서는 그것이 스웨터 일러스트 ‘이미지’로 나타난 반면, <인터스텔라>에서는 프라모델 ‘형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 탓에 두 영화는 아폴로 11호의 이미지와 형상이 부여하는 어떤 ‘해석’의 경향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경향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큐브릭 감독은 아폴로 11호 이미지의 의미를 침묵으로써 극대화(<샤이닝>)하고, 놀란 감독은 아폴로 11호의 정신을 형상을 통해 깨달음으로써 강조한다고(<인터스텔라>).

 

의미의 과잉, <샤이닝>

<샤이닝>에서 아폴로 11호 이미지의 의미를 ‘침묵’으로써 극대화한다는 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이미지가 주는 어떤 의미를 스테디캠과 같은 설명적 시선으로 풀어내며 과히 넘치게 한다(과잉). 실제로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외지에서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고립감’을 경험하는 과정을 주로 미장센으로 제시한다. 가령 잭(잭 니콜슨)의 아들 대니(대니 로이드)만이 볼 수 있는 소위 말하기 싫어하는 유령, ‘토니’가 보여주었던 ‘피가 쏟아지는 엘리베이터 신(Scene)’은 피의 과잉으로, 곧 ‘의미의 과잉’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지가 주는 의미의 과잉은 이 영화에서 만큼은 항상 ‘경악의 얼굴’로 나타난다. 의미의 과잉이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경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대니의 침묵은 바로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토니라는 유령이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설정, 그리고 영화 제목으로 사용되는 ‘샤이닝’이 ‘말없이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여기에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대니와 잭 그리고 웬디(셜리 듀발)가 피의 엘리베이터 장면을 목격하지만, 그것은 토니가 보여준 장면일 뿐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님에도 공유될 수 있는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침묵하라는 듯 하다, <샤이닝>은 그렇게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미장센의 의미를 경악과 침묵으로써 극대화한다.

 

<인터스텔라>의 ‘폴터가이스트 현상’

<샤이닝>의 잭에게 아들 대니가 있듯, <인터스텔라>의 쿠퍼(매튜 맥커너히)에게도 딸 머피(매켄지 포이)가 있다. 그리고 대니가 그러했듯 머피 역시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한다. 머피가 경험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샤이닝>에서의 ‘샤이닝’(말없이 대화나누기)의 또 다른 버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적이지 않은 이 현상의 신호를 과학적으로 해독하면서부터 <인터스텔라>의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게다가 <인터스텔라>에는 사실 그런 과학적 접근과는 사뭇 다른 배경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아폴로 11호 달 착륙성공’을 체제 경쟁 탓에 탄생하게 된 ‘조작극’으로 보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과학적 사고를 신봉하는 머피는 그 속에서 아빠 쿠퍼처럼 ‘아폴로 11호’ 착륙을 진실이라 믿는다. 조작극으로 알려진 사건을 과학적 성취라고 믿는 이런 설정은 머피와 쿠퍼의 기를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북돋운다. 급기야 쿠퍼는 이런 믿음 덕에 우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개척정신’마저 들먹이기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인터스텔라>는 과학과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는 패러독스로써 개척정신을 강조한다. 

 

두 영화의 의미 : 이미지와 형상의 거울관계

그렇다면 <샤이닝>의 스탠리 큐브릭은 아폴로 11호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과잉을 말하려하고,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폴로 11호의 형상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남기려하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샤이닝>의 잭을 이해해야 하는데, 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잭 니콜슨)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정신병동에서 자유를 꿈꿨던 맥머피가 미국사회 내의 억압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결말은 <샤이닝>에서 잭이 겪고 있는 ‘살인충동’과 대비된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맥머피가 자유를 찾아 탈출할 수도 있었던 창문을 두고도 끝끝내 탈출하지 않았던 이유는, 곧 <샤이닝>에서 잭이 도끼로 문을 부수는 장면과 묘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잭 니콜슨의 맥머피 이미지를 통해 ‘강압과 해방’이 지닌 이중적 성격을 반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만약 강압과 해방이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면 이 역시 의미의 과잉을 초래할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폴로 11호의 형상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남기고자 하는가. 이를테면 지구에만 집착하다가 지구를 망가트렸다면 무엇부터 되돌려 놓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 이것이 전하는 깨달음은 먼저 이제부터라도 우주로 시선을 돌리라는 명령이었다. 이 영화에서 우주로 향하는 기술력은 이미 갖춰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니, 사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기까지의 결단(머피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초반부 거의 전체를 이 결단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그렇게 머피와 쿠퍼는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시간의 어긋남을 확인한다. ‘상대성 이론’이라는 시간의 어긋남은 부모 자식 간의 이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개척정신’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쿠퍼를 사로잡은 이 개척정신은 결국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됐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 깨달음을 얻은 결정적 순간에 ‘아폴로 11호’ 형상이 부서진다. 따라서 주인공 쿠퍼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인간의 개척정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아폴로 11호’에 의한 깨달음이란 바로 시작과 끝으로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잭과 쿠퍼는 자기 자녀들과 무언가를 공유한다. 잭은 아들 대니와 ‘시각’을(아들 대니는 잭의 살인장면을 모두 지켜본다), 쿠퍼는 딸 머피와 ‘시간’을 공유한다. 시각과 시간. 앞서 말했듯이 이 공통점은 ‘아폴로 11호’에 대한 이미지와 형상에 정확히 대응된다. 다시 말해서, 시각은 이미지(영화 속 미장센)와, 형상은 시간(쿠퍼의 손목시계)과 연결돼 있다. 이미지와 형상의 이런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폴로 11호’는 마치 거울 앞에 놓인 관계(형상-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영화를 거울 보듯 마주하게 할 때 ‘아폴로 11호’는, 어쩌면 거울 위에 구축돼 있는 ‘실제와 허구’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거울에 비춰보면 ‘살인’(murder)이 되는 ‘레드럼’(Redrum)처럼(<샤이닝>), 또한 거울을 바라보듯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외치는 쿠퍼의 모습처럼(<인터스텔라>). 웅대한 꿈은 언제나 강박과 해방의 싸움 속에서, 실제와 허구의 관계 속에서 개척되기 마련이다. 

 

미사일 주권회복에 즈음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샤이닝> 곳곳에 ‘아폴로 11호’와 관련된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재미있는 선택일 뿐, 어떤 음모론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관련 의혹은 이제 모두 허구임이 드러났다). 앞서 <샤이닝>의 잭이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영화적 정당성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떠나 실제와 허구의 층위로도 충분히 공감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의 ‘개척정신’을 말한 이유 역시 ‘아폴로 11호’의 형상으로써 과학적 진위 여부를 떠나 어떤 진취적 깨달음을 통해 오히려 더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패러독스는 의미의 강조점을 더할 뿐이다.

<샤이닝>과 <인터스텔라>의 영화적 주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두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관계에 주목하려는 이유는 이것이 품고 있는 의미가 지금의 한국 사회가 꿈꿔야 하는 일과 일견 부합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폴로 11호로 상징되는 우주시대의 개막은 주변국의 강압과 해방의 이슈가 아니라 이제 우리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실질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미사일 주권 회복은 필연적인 것이 됐다. 조금 성급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도 미래 우주개발의 성공이 성큼 도래해 그 성취가 여러 영화에서 변용되고 각색돼 새로운 정신과 그에 따른 감동을 전할 수 있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단호하게 말해서, 이제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