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속의 예술은 단지 카이로스인가?

2021-05-31     미카엘 포주르 | 국제미술평론가협회원

대학에서는 ‘줌’으로 수업을 하고, 직장에서는 화상회의에 참여한다. 금융 및 행정 업무를 영상통화로 처리하고, 친구들과는 화상모임을 가진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봉쇄령과 통행제한조치가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이제 모두 디지털 라이프에 완전히 젖어 들었다. 유례없이 많은 이들이 눈앞에 놓인 스크린을 통해 함께 일하고, 교류하고, 가르치고, 식사하고, 논의해왔다. 심지어는 스크린 너머의 이성을 꼬드기기도 했다. 아마존 매출액은 계속 늘고, 넷플릭스 가입자 수는 폭등했으며, 비디오 게임 판매량도 크게 증가했다. 예술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0년 6월 14일, 프랑스 일간지 <라크루아>에 실린 한 기사 제목처럼 디지털 기술은 그야말로 “봉쇄령이 낳은 가장 큰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드라마, 영화, 게임 등의 분야는 거리두기로 인해 기존의 상황이 더욱 강화되는 반면, 현대예술 분야의 경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다. 조형예술작품은 본질적으로, 직접 ‘대면’을 통해 감상해야 하는 것이다. 실상 ‘대면’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 반대 개념인 ‘비대면’ 경험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일반화되면서 확산되었다. 봉쇄령이 반복되고 통행제한이 내려지자 갤러리, 미술관, 예술전, 전시회 등은 줄줄이 폐쇄, 취소, 연기, 축소 등의 운명을 맞았다. 결국 관객과 고객들을 대거 잃은 예술업계는 마침내 온라인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소셜 미디어에 각종 게시물을 업로드하고 나아가 온라인 전시를 연 것이다. 실제로 2020년 한 해 동안 유명한 주요 아트페어 중 하나인 ‘아트바젤’(아트바젤은 지난해 스위스 바젤과 미국 마이애미, 홍콩 등 세 도시에서 50주년 기념전을 개최할 예정이었다)은 물론 ‘런던아트위크’, ‘파인아트파리’ 등의 미술행사와 다수의 유망한 갤러리들 역시 급등하는 ‘가상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나는 격변의 배경에는 코로나 봉쇄령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그저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역주)라고, 즉 다른 분야들도 그렇듯 그저 디지털 기술이 예술 분야로 파고들기에 시기적으로 적절했을 뿐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기술을 매개로 한 예술과의 만남

사실 역학적인 여건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이미 수십여 년 전부터 예술 분야의 기술 사용이 계속 늘고 있었다. 특히 영상, 로봇공학, 몰입 및 상호작용적 전시환경, 3D 프린터, 디지털 프로젝터 및 애니메이션 기법 등이 활용되고 있다. 작가들, 판매업자들, 갤러리스트들이 소통을 위해 소셜 미디어(특히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모여들었다. 수집가, 애호가, 비평가, 기획자 등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예술계의 트렌드를 좇고 있다. 또한 아동용 놀이 애플리케이션이나 성인용 교육 애플리케이션, QR코드, 증강현실 전용 안경(특히 역사박물관의 경우) 등 전시방문 그 자체는 물론 전시작품들과의 연결관계에도 다양한 기술적 매개가 사용되고 있다.

공동 에세이집 『지배를 위한 엔터테이닝(Divertir pour dominer)』에서 ‘예술, 특히 미술관에서의 가상에 대해’를 쓴 티에리 방데뉴웸브루크는 이렇게 썼다.(1) “예술 전시에서의 스크린 사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20년 만에 ‘저항’에서 ‘끊임없는 갈망’으로 급변했다. 디지털 기술은 예술의 개념에 새로운 주체(컴퓨터, 네트워크, 디자인, 인간공학, 정보보안 등)들을 도입했고 서술의 주체도 바꿨다. 그리하여 미술관에 대한 담론을 미술관 밖으로 끌어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기술이 매개에 대한 필요성에 맞춰 적용돼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이 사용자 중심으로 형성돼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디지털 장치들이 일반화되는 그 순간, 이 장치들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기술적 혁신’이라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또한 우리와 예술의 관계, 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위험이 생긴다.”

티에리 방데뉴웸브루크는 신경생물학적 분석에도 무게를 실으며, “우리의 뇌는 예술작품을 접하면 마치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작용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기술을 매개로 한 작품 감상은 직접 작품을 감상할 때 얻는 자발적이고 직관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중략) 관조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인 시각이 생기게 된다”라면서, 미술관이 “정보통신기술을 위한 거대하고 순전한 실험실인 동시에 그 기술을 허락하는 도구”가 된다고 봤다.

자유주의자이자 기술비판주의자였던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엘륄(1912~1994)도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자크 엘륄은 1988년 저술한 『기술 담론의 허구(Le bluff technologique)』에서,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기술 발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양면성이다. 즉 기술의 발전에는 긍정적·부정적 요소들이 뒤섞여있다. (중략) 기술과 관련된 모든 현상들 속에서, 우리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 건 아니다. 방향결정에 있어 기술 장치 그 자체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심리적인 적응을 거듭하며 그 기술의 능숙한 사용자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게 됐다. 이제 인간은 여러 사물들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가 아니다. 기술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제 인간과 기술 장치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제 인간은 ‘기술의 세계 속에 놓인 존재’다.”(2)

 

미적 경험의 부재

이런 기술의 양면성은 이번 봉쇄령 기간에 완전히 명확하게 드러났다. 같은 맥락에서, 인터넷은 코로나19 사태의 보완책으로 떠올랐지만, 동시에 ‘미적 경험의 부재’라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 기술적 매개의 일반화에 일조했다. 발터 벤야민(1892~1940)이 1930년대 저술한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bilité technique)』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3) “가장 완벽한 복제일지라도 늘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예술작품의 ‘지금’과 ‘여기’, 즉 작품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존재의 유일성이다. (중략) 그래서 복제품은 본래의 이미지(즉 작품)와는 구별된다. 이미지는 유일성과 지속성의 긴밀한 연결관계를 보여주는 반면, 복제품에는 순간성과 반복성만이 담겨 있다.” 

‘온라인 예술활동’이 물론 본래의 예술활동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이 예술의 특성을, 보다 정확히는 미적 경험의 특성을 얼마나 침해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반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얻는 미적 경험은 세상의 열기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이 돼버린 자신과의 대화도 회복시킨다. 한편 발터 벤야민은 이 예언적인 에세이를 통해 “예술적 기능이 (중략) 시간이 흐른 후에는 부차적인 것처럼 치부될 위험이 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처럼 예술이 입은 피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특히 엔터테인먼트화를 내세운 ‘디지털 아트센터’들의 발전을 꼽을 수 있다.

 

무덤, 포럼, 피난처?

2012년, 프랑스의 에너지 기업 ‘엔지’(구 프랑스가스공사)의 자회사 ‘퀼튀르에스파스’는 레보드프로방스 지역에 ‘빛의 채석장’이라는 이름의 전시관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마르크 샤갈,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 등의 작품들을 거대한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해 눈을 즐겁게 하는 몽환적인 몰입형 전시가 펼쳐졌다. 빛의 채석장은 눈부신 성공(첫해 관람객 23만 9,000명, 누적 관람객 77만 명)을 거두었고, 이에 퀼튀르에스파스는 2018년 파리에 ‘빛의 아틀리에’와 한국에 ‘빛의 벙커’를, 뒤이어 2020년 6월에는 보르도에 ‘빛의 수조’를 개관했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디지털 아트센터로 손꼽히는 빛의 수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사용하던 옛 유보트 잠수함 기지를 활용했다.(4) 이처럼 거대한 규모와 디지털 장치, 그리고 ‘펀(Fun)’한 몰입형 전시 등은 기술자본주의와 엔터테인먼트가 예술을 매개로 결합한 결과물이다. 퀼튀르에스파스는 전통적인 형태의 예술(미술관, 갤러리)이 거부했던 기술의 격변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최근 낭트 미술관 내 성당 건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설치 예술가 토니 아워슬러의 몰입형 전시에서도 이런 기술들을 살펴볼 수 있다.(5) 디지털 프로젝터를 통해 성당 내부 벽면이나 천장, 그리고 낭트미술대학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다양한 설치물에 작품들을 투사하는 이 전시는 놀이요소를 포함한 몽환적인 황홀경을 선사한다. 이는 현대미술에 심취해 있는 이들에게는 놀이공원 같은 존재지만, 앙리 미쇼가 말한 ‘먼 내면’의 탐험과는 거리가 멀다.

박물관을 ‘무덤’이라고 칭했던 미래파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부터 벽을 넘어 예술과 삶의 ‘융합’을 갈망하는 전위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을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명상과 묵상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는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의 크리스틴 마셀 수석 큐레이터가 ‘글로벌 저항(Globale Résistance)’이라는 제목의 새 전시 카탈로그에 “미술관을 하나의 포럼으로 만들겠다”라는 포부가 담긴 글을 적기도 했다. 즉 사회를 향해, 그리고 유행에 맞서는 사회의 투쟁을 향해 문을 열라는 것이다.

기술자본주의와 디지털이 우리의 삶에 파고들었다. 이제 간섭이나 놀거리 없이도 작품 그 자체가 안겨주는 느림, 집중력, 자의식, 이타성 등을 경험하게 해주는 ‘피난처’로서의 미술관은 사라질 것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미술관의 사명이 무너진다면, 미술관은 ‘현대화’에 굴복하는 셈이 되는 것일까? 예술계 역시 오래된 전위주의적 개념을 멋대로 현대화해 예술과 삶, 즉 예술과 디지털 라이프의 융합을 구현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수많은 자료들이 뒷받침하듯 조악한 인지적·환경적 효과를 지닌 디지털 기술 자본에 굴복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용이성, 수동성, 순간성, 쉽게 매혹당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저항이 예술에는 본질적으로 녹아있다. 그렇기에 현재 예술이 겪고 있는 상황은 위기가 아닐까? 

 

 

글·미카엘 포주르 Mikaël Faujour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회원. 자크 엘륄의 『L'Empire du non-sens. Art et société technicienne 무의미의 제국: 예술과 기술사회』(2021년 재출간)의 서문을 썼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1) 『Divertir pour dominer 2. La culture de masse toujours contre les peuples 지배를 위한 엔터테이닝 2: 여전히 대중과 대립 중인 대중문화』, dirc. Cédric Biagini & Patrick Marcolini, L'échappée, 2019.
(2) 『Le Bluff technologique 기술담론의 허구』(1988), 재출간, Fayard/Pluriel, 2010.
(3) 『Œuvres III 작품집 제3권』, Walter Benjamin, Folio Essais, 2000.
(4) 퀼튀르에스파스는 2021년 두바이와 뉴욕에도 전시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5) 전시기간은 올 여름까지, 자세한 사항은 낭트미술관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