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비크는 체제의 아들이다

2011-09-08     이유진

지난 7월 22일 발생한 ‘오슬로 시내 폭발’의 현장 모습은, 한 사회의 곪던 상처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지식인 집단에서 한국의 미래상으로 확신하는 ‘그 사회’에서는 계급 간 격차, 타자에 대한 차별, 좌파·우파 간의 정치적 긴장이 지속되어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한국판 제35호)의 ‘노르웨이, 한 테러리스트의 ‘메타포’’는 신뢰와 평등으로 움직이던 사회민주주의 노르웨이 사회에서 왜 이런 전대미문의 테러리즘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고찰한다. 레미 닐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 노르웨이에도 소득과 문화에 대한 계급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좌파 진영의 조롱거리로 여기던, 인종차별주의에 기반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노르웨이 ‘전진당’- 한국에서는 흔히 ‘진보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르웨이어 당명의 뜻은 ‘진보’(Progrssive)가 아닌 ‘전진’(Progress)에 가깝다- 은 2008년 여론조사에서 37%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했었다.

전진당의 비약적인 성장을 다룬 연구서 <전진당 코드: 전진당 성공의 비밀>(1)의 저자 망누스 마슈달에 따르면, 전진당의 성장 기반은 전통적 우파의 지지 계급과는 거리가 먼 생산직 노동자이다. 특히 저임금·저숙련 노동자 집단의 전진당 지지는 청년층으로 갈수록 확고하다. 2000년대 들어 노르웨이의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인 온건좌파 지지 구도가 아닌 온건좌파와 극우파로 양분되었다. 이는 노르웨이 좌파 진영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좌파 진영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할 노동계급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좌파의 천적인 극우파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역설적 사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진행된 좌파 진영의 우경화와 관료화, 엘리트 집단화에서 비롯된 노동계급과의 연대 약화가 주요 원인일 것이다. 온건 혹은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노르웨이 노동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부분적으로 수용해 실시함으로써 전통적 지지 기반이던 노동계급, 특히 그 안에서도 약자로 분류되는 저숙련·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대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좌파 진영의 실책에 힘입어, 조세제도와 기업규제에 불만을 품은 소규모 자영업 집단의 이익단체에 불과하던 전진당은 노동계급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포섭하는 전략을 실행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에 따른 계급 간 격차 심화는 기존 체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신뢰감과 사회 발전 동력으로서의 자부심을 약화하는 동시에, 노동계급의 위상이 강력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전진당은 과거 도덕사회의 복원 및 노동계급과의 일체감을 역설하며 “노동계급의 지지로 집권한 노동당 정치인과 관료들이 노동계급 대신 게으른 실업자와 이민자들에게 국부를 퍼줌으로써 노르웨이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으로 노동계급을 포섭했다.

또한 전진당의 정치적 약자 이미지 설정 전략이 노동계급에게 심정적 지지를 얻어낸 주요 요소였다. 전진당을 사회 불만 세력으로 몰고, 전진당 지지 유권자를 무지한 인종차별주의자로 간주하고 무시하던 좌파 진영은 대중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주류 정치에서 무시당하는 정치적 약자의 이미지를 전진당에 부여했다. 결국 전진당은 세력 확대를 가속화해 현재 노르웨이의 제1야당으로 자리잡았다.

극우 포퓰리즘의 성공은 단지 지지자들의 결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좌파 엘리트 집단과 대중 사이의 괴리감 확대가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다. 결국 극우 포퓰리즘의 성공은 좌파의 실패를 등에 업고 실현되는 것은 아닐까. 1990년대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주의 열풍이 끝난 후, 극우세력 확장이 뒤를 이은 것은 그런 가설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사태 초기에 주류 언론은 이번 사태를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소행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노르웨이 총인구 490만 명의 1.2%에 불과한 이슬람교도 집단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 적잖은 차별, 그리고 노르웨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파병과 리비아 폭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볼 때,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알카에다가 용의선상에 오르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체포된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언론은 일제히 초반의 태도를 버리고, 브레이비크의 비정상성을 부각하며 일반 강력범죄를 보도하듯 ‘광인’과 ‘대량살인’이란 단어를 ‘테러리즘’ 대신 쓰기 시작했다.(2) 사태의 세부적 사실이 계속 알려지면서, <베르덴스강> <아프텐포스텐> 등 노르웨이 언론재벌 산하 양대 우파 일간지는 이번 테러리즘에 대해 재난보도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다. ‘돌발적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에 대한 사연, 총격 속에서 캠프 참가자들을 구해준 우퇴위아섬 주변 주민들의 용기,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증오심과 복수심 대신 민주주의와 개방, 관용으로 노르웨이를 해치려는 폭력에 맞서겠다’는 노르웨이 시민들의 의연함에 대한 보도가 넘쳤다. 한국에도 소개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의 추모연설은 그와 같은 보도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용의자의 배경, 테러 동기, 테러 대상 등을 종합해보면 이번 사태는 명백한 정치적 테러리즘이다. 그럼에도 정계와 언론계의 태도에는 이번 테러에 대한 탈정치적 수사와 담론이 대두되었다. 브레이비크가 한때 적을 둔 전진당의 노골적인 발뺌을 비롯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브레이비크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정리되는 기계적 휴머니즘이 우파 진영에서 주로 보였다. 좌·우 노선을 막론하고, 극우세력의 현실정치 영향력 증대에 대한 노르웨이 정치권의 대처는 무관심 혹은 미약함에 불과했다.

노르웨이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는 총인구의 1.2%에 불과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전범화, 편견, 혐오, 배척, 공포가 뿌리깊다. 노동계급 안에 번지는 삶에 대한 불안과 좌파 진영에 대한 불만을 이용해, 극우세력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슬람 이민자 집단 탓으로 돌리고 있다. 500년 넘게 덴마크와 스웨덴의 군주 통치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당한 역사와 연관 있을, 노르웨이 특유의 내셔널리즘 정서 역시 극우세력에게는 유용한 자원일 것이다.

이번 사태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진영의 우경화가 초래한 계급 간 격차와 노동계급 소외를 바탕으로 성장한 극우 대중추수주의의 극단적 발현인 정치적 테러리즘이다. 극우 담론의 신봉자가 구국의 일념으로 여러 해 동안 준비를 거쳐 극우파의 주적인 노동당 정부의 핵심에 폭탄을 터뜨린 다음, 노동당의 차세대 구성원들을 살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번 사태의 정치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한 광인의 돌발적이자 무차별적 난동에 순수한 노르웨이 국민이 무고하게 희생을 당했다’는 식의 담론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번 사태의 재발 가능성을 우려하게 하는 요인이다.

오슬로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15만 명이 희생자 추모를 위해 시내에 모였다. 그러나 저들 가운데 20%가 넘는 사람들이 올가을의 지방선거와 다음 총선에서 7월 22일 사태 이전과 다름없이 전진당에 표를 던진다면, 뉴스 사이트의 댓글에서 브레이비크의 선언문과 다름없는 내용이 계속 눈에 띈다면 제2의 브레이비크는 이미 그 안에 있다. 노르웨이 사회의 병든 현실을 자각하며 추모로 끝나지 말고, 우리 안의 브레이비크에 대한 반성을 시민들에게 촉구한 작가 안네 홀트의 표현을 빌리면 브레이비크도 한때 그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체포 후 이송되는 브레이비크는 ‘이제는 모든 사명을 다했기에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극우 정서의 보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의 흡족한 표정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서 보일지도 모른다.

글•이유진 (스웨덴 유학생)

<각주>
(1) FrP-koden: hemmeligheten bak Fremskrittspartiets suksess · 2008.
(2) '미디어의 이중 도덕'(Dubbelmoral i medierna), <Dagens Nyheer>, 2011년 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