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흥의 도구, 공산주의?

중국 공산당 백주년

2021-06-30     장루이 로카 | 시앙스포 교수

중국의 헌법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연맹을 기초로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한 국가의 헌법과 현실과의 간극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중국의 경우 특히 두드러진다. 중국 사회는 자본주의의 변형된 특징을 빠짐없이 드러낸다. 경제의 기반은 상업이며, 소비사회가 사회 안정화를 지탱하고 성장의 원동력 역할을 하고 있다. 교육자본 등을 기반으로 한 사회 재생산 구조에 의해 불평등은 심화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민 계급 대부분은 국가의 지배자로 간주됐던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돼있다.

헌법과 현실의 이런 깊은 간극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특징을 보여준다. 1921년 7월 창당 당시부터 중국 공산당은 발전과 권력유지, 그리고 국가의 변화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꿈꿨다. 20세기 초에 품었던 혁명적 이상대로 중국공산당은 적잖은 국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국가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현대화에 성공했다. 공산당이 누리는 국민적 지지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중국공산당의 수많은 결점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강점인 ‘통제력’은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서 빛을 발했으며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 중국은 실패를 거듭했다. 우선 청나라(1644~1911)를 개혁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했고, 1912년 선포했던 중화민국이 좌초됐으며, 중국 군벌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대다수의 중국 국수주의자들은 일당(一黨)이 다스리는 강한 국가만이 중국을 현대화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에 맞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이런 신념을 강화했다. 소규모 정당이었던 중국 공산당에는 라이벌인 국민당에 없는 강점이 있었다.(1)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 볼셰비즘이라는 모델, 소련이라는 국가의 뒷받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강점을 포기하기도 했다.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이론, 모델 그리고 주요 지원자인 소련(1950년대 말부터)과도 관계를 끊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삼았던 이유

창당 당시부터 이론의 수정이 시작됐다. 중국 공산당의 첫 번째 문제는 노동자 계급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산업화가 미진했기 때문에 1949년 노동자 인구는 전체 인구의 0.5%에 불과했다. 1930년에는 공산당 당원의 8%만이 노동자였고, 그중 2%가 공장노동자였다. 당 지도자 대부분은 부유 농민, 지방의 문인, 사무원 등 교육의 혜택을 받은 중간계급 출신이었다.(2) 1920년대 초, 비밀결사, 지리적 기반의 연대조직, 노조 등 공산당만의 조직체들을 필두로 노동자 계급이 함께 투쟁에 참여했지만, 노동자 계급은 항상 별도의 삶을 살았다.(3) 1949년 이후, 산업화로 노동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1995년에는 약 1억 5천만명에 이르렀다. 노동자는 전체 중국 인구의 8%에 달했으며, 공산당원 중 10%가 넘었다. 

공산당 체제는 평생직장, 사회 보장, 주거지, 집단소비 등 생활과 노동 조건을 향상시켰다. 노동자들은 체제의 모델이자 산업화 정책의 도구가 됐고, 자신들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며 때로는 공산당에 맞섰다. 일례로, 1957년 노동자들은 새롭고 과학적인 노동 방식 도입에 반대했고, 사회주의 중간 간부들의 지배에 맞섰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평등주의를 주장했고,(4) 문화대혁명(1966~1976)동안 자신들의 물질적인 특권은 유지하되 임시 노동자 수를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5)

두 번째 문제는 공산당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단순히 국가 재건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만 여겼다는 점이다. 계급 분석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결집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항일전쟁 기간(1937~1945)과 1945~1950년대 초에는 국가 통일과 권력 쟁탈을 위해서 다른 세력과의 연합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중국 공산당은 매판 상업 부르주아 계급과 (국민당에 매수된) 관료 계급을 숙청하는 동안 국가 부르주아 계급을 중립적인 아군처럼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농민을 당의 중심으로 삼은 것도 이론적인 이유가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1927년 이후 중국 공산당 도시 조직들은 국민당에 의해 파괴됐다. 그리고 1934년 마오쩌둥이 공산당 실권을 잡자, 혁명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농민들로 바뀌었다. 중국의 농촌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에 시달렸지만, 가난하고 농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인 제약들로 인해 좀 더 역동적이면서 교육을 받은 계급인 중위층 농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1950년 토지 개혁으로 농촌의 상황을 개선시키고,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도 되지 않아 농업 집단화로 인해 농민들은 착취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농업을 발판으로 산업화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재정을 마련했다. 결국 공산당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세 번째 문제를 맞이했다. 정치에 의존할 것인가, 경제에 의존할 것인가? 계급투쟁을 할 것인가, 발전을 추구할 것인가? 1956년 사회주의의 적을 제거했다고 선포한 이후 마오쩌둥은 항상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사이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겪고 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체제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쇄도했다. 이런 비판은 공산당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당국의 일탈과 부패에 맞서 투쟁하고, 빈곤한 생활수준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반대파들을 진압하기 위해 공산당은 생산수단 관계가 아닌 ‘가치’를 기반으로 한 계급이론, 즉 권력에 대한 태도 기반의 계급이론을 활용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사라졌더라도 부르주아 정신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침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화대혁명기간 ‘위대한 조타수’ 마오쩌둥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실제 출신과는 무관하게 단번에 ‘진정한 혁명가’로 등극했다. 이런 이론은 경제발전으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됐다. 

 

계급혁명 포기, 기업의 이익 우선 

1970년대 말부터, 특히 1990년대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었다. ‘주자파(走資派)’로 비판받아 권력에서 축출됐던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다시 권력에 복귀했고, 그들은 점진적으로 경제 정책 한가운데에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들여놓았다. 번영의 약속을 토대로 한 새로운 사회적 계약만이 그들에게 중국의 재건과 공산당의 영속적인 지배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지배 방법으로써 계급투쟁을 포기했다. ‘국가의 지배자’는 노동자에서 권리 없이 일만 하는 이주 농민으로 바뀌었다. 2002년 ‘세 가지 대표성’ 이론이 등장하면서 노동자와 지식인의 이익보다는 기업가의 이익을 더욱 우선시해야만 했다. 기업가는 경제 성장과 고용을 촉진시키고, 국력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기업가는 착취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제롬 두아이옹의 기사 참조). 중국은 계급이 없고 중위소득의 임금노동자로 구성된 사회이며, 개인은 국가의 위대함과 번영에 기여해야한다. 물론 공산당 반대자가 있지만, 그 반대자는 사실상 국가의 반대자인 셈이다.(6)

이런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상을 ‘포기’하고, 더 나아가 이를 ‘배신’한 중국 공산당의 여정을 분석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 공산당이 외쳤던 사회주의는 시작할 때부터 목적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세계의 중심에 재진입하기 위해, 튼튼한 경제를 가진 통일된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새로운 지도 계급은 엘리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됐고, 모든 권력을 공유했다. 많은 실패와 악습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경제적, 군사적 대국이 됐다. 또한 많은 국민들이 열망하던 소비사회로의 진입을 실현시켰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평균 기대수명과 생활양식은 프랑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기이하게도 국제 언론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가치’는 ‘서구의 가치’와 반대라고 설명했지만, 거의 이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조화로운 사회’ 또는 ‘중국의 꿈’은 결국 (효율적인 관료제, 분쟁 예방 등) 고전적인 관리방식을 따른 좋은 통치, 법치강국 등 서구의 오랜 사상과 집단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부한 기준들을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시진핑의 사상은 레닌주의(“모든 조직들은 당의 지도를 따르라”), 계몽주의(“과학을 장려하고, 인류를 위한 운명 공동체를 만들라”), 인본주의 연설(“인간의 삶과 복지를 개선시켜라”)에서, 그리고 오늘날 모든 국가들이 공유하는 사상(“자연과 조화롭게 살자”)에서 끌어왔다.(7)

 중국 공산당이 배신하지 않고 충실히 지키고 있는 원칙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계급 없는 사회의 신화를 유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와 공산당을 혼동해 생각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이는 평등사회를 만들려는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작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상당히 여유를 갖게 되고 가난이 사라진 순간부터 소득 격차의 큰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런 목적은 많은 국민들에게 국가의 이익과 조직체를 우선시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변화의 막다른 길목에 몰리다 

1980년대에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추천하고, 고유한 의미 그대로 ‘인민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를 추천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고 중국 공산당이 진정한 대안적 제안들을 마주한 적은 없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사항은 선거를 감추는 것보다 경제 불안정의 요인들이다.(8) 국민 대다수의 정치적 태도는 어떨까? ‘투표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것이 현재 중국 국민 대다수의 생각이다. 이러한 보수성은 영구불변적인 정치계 인사 속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체제의 초기 혁명자들과 같은 계급, 즉 고위공직자의 자녀와 인척들, 고급 전문 직종 종사자들이다.(9)   

그러나 사회적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국가와 공산당을 더 이상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중국 공산당은 다음 세기를 기약할 수 없다. 성장을 촉진해야 중국 내부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외국 자본과 저가 상품 수출에 의존해 성장할 수는 없다. 공산당은 앞으로 내부 수요와 외국에 대한 투자, 기술 혁신에 기대야 한다. 경제적 국수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다른 지배적인 강국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지난 10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안전성을 지키는 방법은 전세계에서 획득한 수익을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다. 미국과의 갈등에서 잘 드러났듯, 이는 중국공산당을 약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글·장루이 로카 Jean-Louis Rocca
시앙스포(Sciences Po, 파리정치대학) 교수, 국제연구소(CERI) 연구원. 주요저서로 『The Making of the Chinese Middle Class : Small Comfort and Great Expectations 중국중산계급의 형성: 작은 위안과 큰 기대』(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17)가 있다.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1912년 창당된 중국 국민당은 국수주의 정당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으나, 일본의 식민지 점령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당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국민당은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후퇴했다. 국민당은 대만에서 무력으로 집권했다. 이후 선거로 2000년 3월까지 집권했다. 
(2) James Pinckney Harrison, 『The Long March to Power : A History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1921~72』, Praeger, New York, 1972년.
(3) Gail Hershatter, 『The Workers of Tianjin, 1900~1949』,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년.
(4) Mark W. Frazier, 『The Making of the Chinese Industrial Workplace : State, Revolution, and Labor manage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년.
(5) Elizabeth J. Perrry & Li Xun, 『Proletarian Power : Shanghai in the Cultural Revolution』, Westview Press, Boulder(Colorado), 1997년.  
(6) The Making of the Chinese Middle Class, op. cit.
(7) John Garrick & Yan Chang Bennett, 『La pensee de Xi Jinpong 시진핑의 사상』, Perspectives chinoises, n˚2018/1-2, Hongkong, 2018년.
(8) Emilie Frenkiel, 『Parler politique en Chine. Les intellectuels chinois pour ou contre la democratie중국 정치를 말하다. 민주주의를 찬성 혹은 반대하는 중국 지성인들』,  Paris, 2014년
(9) David S. G. Goodman, 『Class in Contemporary China』, Polity Press, Cambridge, 2014년.

 

 

 

숫자로 본 중국 공산당

- 1921년 7월 23일 중국 공산당(CCP) 창당
- 2019년 당원 수 9,194만 명(중국 전체인구의 6.6%)
- 시진핑 국가주석 선출 후 전체 공산당 가입 신청자 중 12.3%만 가입승인. 
   후진타오 국가주석 시절(2002~2012)의 가입승인 비율은 14.5%
- 여성 당원 비율 27.9%(2000년에는 11.2%)
- 전체 당원 중 30세 미만 13.6%, 31~40세 20.4%, 41~50세 19.5%, 51~60세 17.6%, 61세 이상 28.9% 
- 고학력 엘리트 당원 비율 50.7%(2000년에는 21.1%) 
- 전체 당원 중 노동자 및 농민 34.8%,(1) 기술자 및 간부 26.7%, 공무원 8.4%, 학생 7.7%, 퇴직자 20.3% 
- 소수인종 출신 당원 비율 7.4%(2000년 4%). 소수인종은 중국 전체인구의 9% 차지

 

 

글·제롬 두아이옹 Jérôme Doyon 
프랑스지정학연구소(파리8대학) 지리학 박사과정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농민공(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노동자) 일부는 ‘농민’으로 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