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의 폐지, 그 다음은 시앙스포인가?

2021-06-30     알랭 가리구 |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프랑스 엘리트주의 상징으로 정계, 재계, 정부, 교육 등을 독점해온 국립행정학교(ENA)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폐지 명령에 따라 설립 76년 만에 사라진다. 이는 2019년 노란조끼 시위 이후 마크롱 정부가 약속한 사회개혁의 일환이다. 마크롱은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8명 중 4번째 ENA 출신이다.

 

국립행정학교(ENA) 폐지는 사회통념사전에 ‘ENA: 폐지돼야 하는 곳’으로 등재해야 할 만큼 잊을 만하면 등장하지만, 그런 만큼 무의미한 제안이다. 그런데 2021년 4월 7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ENA를 폐지하고 이를 대체할 공공서비스학교(ISP)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조치가 개혁의 물타기라며, ‘눈 가리고 아웅한다’느니 ‘바람 잡는 소리’라느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느니 하는 비난이 쇄도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 발표가 불러일으킬 상징적 파급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ENA라는 단어의 폐기가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나면, 사회 곳곳에 ‘개혁’ 바람이 일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에나르크(군주라는 뜻으로, ENA 출신 고위 공직자를 일컫는 말)’나 ‘ENA 동문’과 같은 말은 사라질 것이며, 이에 필적할 다른 명칭을 찾지 않는 한 그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발표했다고 해서 곧바로 실시되는 것은 아니며, 개혁의 효과를 평가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훗날 이 조치의 현실성과 진정성은 서류에 명시된 목표보다는, 그 조치가 나오게 된 배경과 변화에 기여한 구체적인 방법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ENA, 그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시앙스포(Sciences Po, 파리정치대학)를 잇는 탯줄을 고려하지 않고 ISP라는 새 기관의 개혁 실효성을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두 기관이 동시에 위기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란조끼’ 운동이 한창일 때 에마뉘엘 마크롱이 폐교를 언급하면서 ENA는 압박을 받아왔다. 시앙스포의 경우, 국립정치학연구재단(FNSP) 이사장인 올리비에 뒤아멜이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이어서 정치대학(IEP)의 프레데리크 미옹 총장도 물러났다. 리샤르 데쿠앵의 죽음(2012년 IEP 총장 재임 당시 뉴욕의 한 호텔에서 알몸으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역주)이 또 다른 성범죄와 연관된 것처럼, FNSP 이사장의 도덕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위기는 사적 관계의 문제로 변모했다. 그들만의 공고한 지배체계 안에서 은밀한 공모에 따라 돌아가는 문화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한 기관의 수장이 무너지면 기관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들이 아직도 공식 문서에 따른 제도적 메커니즘이 아닌 사적 관계에 매여 있다는 것은 권력이 처한 잔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몇 가지 사건들에서는 시앙스포와 ENA의 불가분의 관계가 부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둘의 관계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명료함에 대한 관심이 능사는 아니란 점을 밝힌다.

 

국가 엘리트 양성소로 급성장한 영광…

끊이지 않던 비난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다뤘듯이, 사립정치학교(ELSP)는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와 파리코뮌에 대한 반동으로 1872년에 에밀 부트미가 설립했다. 유능한 엘리트 계층이 프랑스 재건에 앞장서야 한다는 취지였다. 파리 7구에 세워진 이 학교는 정부에서 일할 국가 엘리트 양성소로 급부상했다. 이보다 더 간단한 복제 시스템을 상상하긴 어려울 것이다. 학교와 인접한 파리의 부유층 출신을 사회에 투입하고, 직장이나 거주지가 인근에 있는 고위 공직자들이 학생들을 미래의 행정가로 준비시킬 수 있으니, 마을학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40년 ELSP의 파행은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페탱주의와 대독협력에 대한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파리 출신 및 명문가 자제 채용, 국가적 의무 불이행 등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프랑스 해방 이후, 고위 공직자 특별 채용 방식의 일환으로 국립행정학교가 출범했고, 동시에 ELSP도 국립대학으로 바뀌었다. 이 합의는 드골 임시정부 대표이자 ELSP 출신인 미셸 드브레, 장마르셀 잔느네 측과 앙드레 시그프리드, 로제 세이두 측의 거래로 성사됐다. 앙드레 시그프리드는 아브르 시장 및 장관을 역임한 쥘 시그프리드의 아들이며, ELSP 설립 당시 금융 및 재정 담당이자 이 학교의 지적 토대를 마련한 자크 시그프리드와는 사촌지간이다. 또한 로제 세이두는 ELSP의 총장을 역임했으며, 레지스탕스라는 타이틀을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에 속했다. 이들은 이공계 출신의 물리학자이자 공산주의자인 교육부장관 폴 랑주뱅의 개입을 막았다. ELSP의 국립화는 타협이었다. 예전의 사립정치학교는 정치대학(IEP)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시앙스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시앙스포는 ELSP의 교직원과 방침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IEP 지방 캠퍼스 설치 요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0월 9일 행정명령은 국가가 “국립행정학교(ENA)와 제1 파리정치대학(IEP)을 조직함으로써 정부-대학 간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기이한 법적 조치는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민간재단을 설립함으로써 훗날에 대비했다. 이 재단이 시앙스포를 운영 및 감독했는데, 재단은 (국유화할 수 없는 도서관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구실로) 유산 소유권을 보유했고, 운영이사회의 10여 개 직위는 ‘기부자 대표들’에 위임했다. 위원장은 이들 중 한 명이 맡아야 했다. 앙드레 시그프리드는 인종문제에 집착을 드러내는 악서(惡書)들을 출간했음에도 이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 됐다. 이러한 화해의 시기에 취해진 이 같은 조치는 결국 협력주의의 백지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시앙스포는 정치대학이라는 학교 자체와 FNSP라는 두 집단을 지칭하게 됐다. 단, 시앙스포 지방 캠퍼스는 해당 지역 이름을 표기하는 조건으로만 시앙스포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반면 지역 이름 없이 시앙스포라고만 했을 때는 파리정치대학(IEP)을 의미했다. ENA 설립 초기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인사들을 선발했으나, 이후 새 시앙스포 혹은 파리 IEP(국립화된 명칭)는 고위 공직자 채용에서 신속하게 실질적 통제권을 회복했다. 운영 방식은 기존의 ELSP와 동일했다. 학생은 파리의 고급 주택가 거주자 중에서 선발하고, ENA가 고위 공직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교수진은 ENA 출신을 더 많이 기용한 것이다. 곧 에나르크들이 점차 심사위원회의 요직을 차지했다. ENA는 30여 년간 시앙스포 부지에 있었는데, 정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두 기관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뭐든지 관통하는) ‘통과 la traversée’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특정 계층의 ‘포섭’은 공공연히 재개됐다. 에나르크들은 관계 부처, 특히 졸업 성적순(우등 졸업생을 ‘장화’라고 부른다)으로 고위 공직을 독점했다. 그러나 공직자 겸직 금지 규정이 통용되던 제3공화국 시절과 달리, 이들은 정당과 정부 부처에 점점 더 많은 ENA 출신들을 임명하고, 그 다음에는 공기업에 이어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공화국 대통령, 총리, 다수의 장관들, 내각의 수장 및 책임자들, 대통령 및 총리의 비서실장 등이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주목을 끌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트 편중과 이들의 사회 진출, 학업 내용이나 정치적 책임에 대한 비난도 만만찮다. 지금까지 개혁 운운한 것은 좋게 말해 희망사항이었고, 대개는 말뿐인 공약에 불과했다. 개혁 발표를 한 당사자들 대부분은 시앙스포나 ENA 출신이었고, 상황이 어떻든 이들은 얼마 안 있어 내부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개혁이 된다 해도 많은 특권은 그대로 존속 

마크롱 대통령의 발표 이후, 덮어놓고 비판부터 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도 뜬금없이 개혁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득이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조용히 있었다면 누가 개혁이란 말을 꺼내겠는가? 물론 대선을 의식한 조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만약 아무 발표도 하지 않았다면, 또한 대선을 의식해 ENA를 포기하겠다는 속셈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것은 누가 봐도 미끼일 뿐이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서둘러 걱정할 이유가 있을까? ENA 폐지가 프랑스에 해가 된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그러나 ENA가 그만큼 제 역할을 잘해왔는가? 여기서 우리는 앨버트 O. 허시먼이 주장한 ‘반동의 수사학’의 반복 논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무용(無用) 명제(개혁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역효과 명제(개혁은 예기치 못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위험 명제(심지어 개혁은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를 말한다.(1)

이미 1945년에 몇몇 사람들은 ENA 설립이 시앙스포의 부활을 견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의 상황을 보면 그들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절반의 국유화(공금, 사학경영)가 진행되면서 이 새로운 학교는 정부 부처의 공직자 선발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국가 권력의 새 직위에 동문들을 배치함으로써, 이 기관들은 분에 넘치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따라서 현재 개혁의 실효성과 진정성은 시앙스포가 ISP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1945년의 전례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거나 아니면 되레 빈틈을 보여줄 수 있다. 국유화가 완료됐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전례가 얼토당토않게 보일 수 있다. 확실히 국유화는 FNSP를 위한 방안은 아니다. 

올리비에 뒤아멜 사임 이후의 사태만 봐도 이 기관들의 관계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FNSP 이사장 선출은 시앙스포 차기 총장 선출의 선결조건으로, 시앙스포 총장은 재단 이사장 직권으로 결정된다. 학생 및 교수진 5인, 재단 관계자 5인을 포함한 이사회 소속 10명 이상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이사회에 후보 1인을 추천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르노 전 회장이자, 재단 관계자 대표인 루이 슈바이처 주재로 이사회가 소집됐다. 1차 선발에서는 시앙스포에서 모든 경력을 쌓은 노나 마이에르가 유력한 여성 후보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녀를 ‘이슬람 좌파주의’로 몰아세우는 악의적 루머 공세 이후, 그녀는 ‘후보 자격’이 있음에도 선발되지 못했다. ‘그 집’ 사정에 훤한 인사가 짐작한 대로 깜짝 후보가 등장할 차례였다. 바로 시앙스포의 미술사학과 교수 로랑스 베르트랑 도를레악이다. 그녀는 선발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등판을 예상하지 못했다! 위원회는 그녀가 출마할 수 있도록 그녀를 해임했다. 법에는 저촉되지 않지만 확실히 페어플레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도를레악은 만장일치로 선발됐는데, 절차의 민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위원회 위원들은 시앙스포 커리큘럼에 이미지 분석을 포함시키자는 그녀의 제안에 감명을 받았고, 이들이 자신 있게 강조한 것처럼 이 후보자는 분명히 많은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는 해당 분야에서 오래 일해 온 초등학교 교사들이 부정하지 않을 교육법이었다. 그러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의 발전과 확산을 도모할” 목표로 설립된 재단의 지도자로 여성 미술사학자를 임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FNSP를 거쳐 간 일부 이사장들은 시앙스포 총장과 FNSP 중역에 실권을 위임하고 자리만 지키는 데 만족했다. 르네 레몽에 이어 장클로드 카사노바, 그 다음으로 리샤르 데쿠앵이 FNSP 이사장직을 역임했는데, 르네 레몽은 주관이 없어 보인다는 비판을 감수했고 장클로드 카사노바는 예산징계법원에 출두할 위험을 무릅썼다. 지방 IEP 이사회의 당연직 위원들은 그들의 지도력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권위에 호의적인 수호자로 비치길 바랐다. 이와는 반대로 올리비에 뒤아멜은 최근의 관행에 개의치 않고, IEP 지도부 후보에 찬성표나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권위를 행사했다. 그는 정부의 지식인, 정치적 중도파, 지적 정통파였으며, 사회학적 접근 방식을 고집하는 대학교수들에게는 한결같이 매우 적대적이었다.  

정계, 출판계, 그가 속한 그룹의 인맥을 통해 입지를 다진 올리비에 뒤아멜은 전임자들에게 있던 도덕적 양심이 없었다. 프랑스 정치과학협회(AFSP)는 이례적으로 노나 마이에르(AFSP 전임 회장)를 지지했는데, 이는 자율성에 대한 요구를 표출한다.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마이에르의 입후보가 거부되고 나서, 국무위원들과 대기업 사장들이 대학의 규율을 감시하는 것에 대한 학계의 저항이 요즘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시앙스포에 대한 ENA의 장악이 기정사실화된 극히 예외적인 관계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공모, 포섭, 학연 및 공조 같은 메커니즘이 계속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FNSP가 없는 시앙스포는 일개 학교, 혹은 이름만 대학인 존재로 축소돼, 지난 사반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국무회의가 아니라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대학의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기관은 학생 선발, 다른 대학보다 월등히 높은 재정지원(시앙스포 학생 한 명에게는 일반 대학생 한 명보다 10배 이상의 비용이 든다) 등 많은 특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과거의 자화자찬이나 특권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자유롭게 빛을 발해야 할 것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Albert O. Hirschman, 『Deux siècles de rhétorique réactionnaire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Fayard, Paris, 199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