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의 부채를 어떻게 탕감할 것인가

대선 앞둔 프랑스와 ‘부유한’ 독일의 재정고민

2021-06-30     르노 랑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치안과 이민 문제, 정체성 논란은 물론 (실체여부도 알 수 없는) ‘이슬람 좌파주의’ 등 그 주제들로 보건대 자칫 단조롭고 맥 빠진 판이 될 뻔한 2022 프랑스 대선 정국이 들썩인다. 특히 좌파진영에서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크게 보도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여러 급진적인 제안이 도출되고 있다. 특히 그 대표적인 사안이 정부 재정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한 ECB 보유 부채탕감 문제다.

 

일단 겉보기엔 꽤 단순한 문제인 듯 보인다. 몇 년 전부터 정부 부채의 가중 문제는 공공 서비스 재정을 줄이고 사회복지 예산을 축소하며 국민이 반대하는 긴축정책을 강요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운용에 부담이 되는 국채탕감과 관련해 지난 2월 경제학자 150인이 내놓은 제안은 응당 좌파진영 모두의 공감을 살 것처럼 보였다. 특히 ‘개혁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호응을 얻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진보진영은 주요 언론매체에서 서로 독설 섞인 논평을 주고받는가 하면 SNS 상에서 서로 조롱하고 힐난하는 등 다시 한 번 내부 분열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는 과연 유감스러운 상황일까?

논란의 시작은 지난해 초, 젊은 박사과정생 밥티스트 브리도노가 공공부채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점이었다. 브리도노는 “각 정부의 부채 비중이 지나치게 높으며, 아주 낮은 금리에도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1) 당시 (경제 부문에의 대대적인 유동성 투입 등) 주요국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한계를 인식한 국제 금융기관은 각국 정부에 재정 부양책을 장려했다. 즉, 지출을 늘려 전 세계적 통화수축 현상을 피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브리도노는 유럽중앙은행(이하 ECB)의 유일한 역할이 연간 2%대의 인플레이션 비율로 물가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라면서 “ECB의 현재 개입수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현재로서는 ECB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이제 ECB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럼 일단 몇 년 전의 상황으로 한 번 돌아가 보자. ECB를 탄생시킨 협약에 의하면, ECB는 유로존 19개 회원국의 재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돼있다. 특히 리스본 조약(2007) 123조에서는 ECB가 회원국 기관에 당좌 대월을 비롯한 신용 대출 일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아울러 각 회원국에 채무 변제 수단 역시 마련해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리스본 조약은 2007~2008년 미국 경제 위기가 유럽에 몰고 올 후폭풍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경기가 침체됨은 물론 투자자들이 일부 국가(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의 채무에 대해 높은 금리를 요구함에 따라 대출금리는 수직 상승했다. 유로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2012년 7월 26일, 당시 ECB 총재였던 마리오 드라기는 국면 전환의 기점이 될 말을 내뱉았다. “현 ECB 체제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유로화를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을 다 할 준비가 돼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할 테니 내 말을 믿어 달라.” 전 세계 금융계는 이 말을 믿고 싶은 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다 할 준비’가 돼있다는 말에만 방점이 찍혔고, ‘현 체제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라는 표현은 은근슬쩍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ECB는 유로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거울 속 세상으로 들어갔다.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보다 몇 년 늦은 2015년 3월, ECB는 처음으로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한다. 급격한 디플레이션에 따른 경제활동 마비와 금리폭등이라는 두 유로존 위기의 난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ECB의 행보를 살펴보면, 당시 ECB는 ‘세컨더리 마켓(2차 시장)’에서 시중은행으로부터 공공부채를 매입했다. ‘세컨더리 마켓’은 국채 유통시장이므로 해당 정부에 직접적으로 거래자금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ECB는 시중은행의 채무를 변제해주고, 이를 통해 시중은행이 기업과 가계, 정부에 더 많은 대출을 가능하게 한다.

 

ECB의 ‘이론적 환상’

이런 ECB의 행보는 일단 독일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유럽연합 내 질서 자유주의 정통파의 우려를 산다. 그런데 이 같은 ‘변칙적인’ 정책이 국채시장의 안정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로존이 ‘구제’된 것이다. 그에 따라 독일 헌재 역시 다시 생각을 바꾸었지만, 경제 전망은 여전히 어두웠다. 기업의 투자는 크게 늘지 않았으며, 가계는 여전히 지갑을 열지 않았고, 경제활동은 계속해서 둔화됐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ECB에겐 뭔가 더 조치를 취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애초에 과잉 인플레이션 위협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에서 경제계의 티라노사우루스 격으로 설립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ECB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의외의 복병, 디플레이션 위기에 봉착했고, 이는 브리도노 말마따나 ECB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역할을 고민해봐야 하는” 긴급 상황이었다.

경제학자 로랑스 스시알롬은 자연과 미래를 위한 니콜라 윌로 재단의 학술 위원이자 (한때 사회당 쪽이었다가 이어 마크롱 쪽과도 가까워진) 진보진영 싱크탱크 테라 노바(Terra Nova)의 금융 규제 부문 책임자다. 브리도노는 그런 스시알롬과 함께 2020년 4월 테라 노바에 의견서를 작성했다.(2) “각 정부에 투자를 강제할 만한 수단을 ECB에 마련해주자”는 제안이었다.

“현재 ECB는 국채 유통 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한다. 채권 만기가 될 경우 발행 국가는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데, 과연 이들이 무슨 돈으로 빚을 갚을까? 바로 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에 빚을 진 회원국 정부에 ECB가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신, 채무 상환금을 다른 부문의 투자로 유도했으면 좋겠다. ‘네가 시장에 진 빚은 내가 탕감해주마. 대신 내게 갚을 돈을 환경부문에 투자해라’는 식의 제안을 하는 것이다.” 브리도노에 의하면 이는 서로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회원국 정부 입장에서는 부채를 늘리지 않으면서 투자를 할 수 있어 좋고, ECB 입장에서는 물가 상승을 규제할 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전, 루소 연구소장 니콜라 뒤프렌과 니콜라 윌로 재단 대표 알랭 그랑장은 『생태 화폐』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3) 2018년 4월 5일, 코로나 대응에 지쳐 예산지원을 호소한 의료진에게 “마법 같은 기적의 돈은 없다”라며 이를 묵살한 마크롱 대통령의 입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중학생이 돼서도 산타 할아버지 타령을 하는 자녀에게, 루돌프와 함께 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할아버지는 없다고 말하며 민망한 미소를 짓는 부모와도 같았다. 하지만 두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돈에는 마법 같은 속성이 있어서, 사회가 돈에 부여하는 신뢰도에 따라 기적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돈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생각이 맨 처음 제기된 건 사실 꽤 오래 전 일이다. 일찍이 독일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1842~1926)가 내놓은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국채 전문가 브뤼도 티넬은 “1930년 발행된『 화폐론』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 이미 케인스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를 언급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말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의 힘을 지닌 돈은 국채에 발목 잡힌 나라들을 해방해줄 마법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경제학자 앙리 스테르디니아크는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했고,(4) 안 이슬라 같은 인물은 한 개론서에서 “돈과 부채는 (역사적으로) 정확히 동일한 시점에 무대 위로 등장한다”고 지적하며 “모든 돈은 곧 부채”라고 주장했다.(5)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을 썼던) 니콜라 윌로의 친구들은 이에 개의치 않은 채, 한 경제사상 조류를 내세운다. 몇 년 전부터 호주와 미국 등지에서 유행하며 민주당 대선 예비 후보 버니 샌더스에게도 영향을 준 ‘현대 화폐화’ 이론이다. 공공 재정 적자는 피해야 한다는 ‘정통 교리’에 대응하는 ‘현대 화폐화 이론’은 경기침체 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면서 전통적인 케인스주의의 한 형태를 재해석한다. 다만 비상금고에 구멍이 뚫리면 안 되는데, 통화자주권을 확보한 정부라면 중앙은행에 대해 스스로 완벽하게 자금조달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대단히 심각한 인플레이션 상황에만 정부 개입이 가능하다.

유로존 정부들이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로 통화주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간혹 깜빡하며 이론에만 매달리는 유럽의 수많은 경제 지도자는, ‘현대 화폐화 이론’을 유럽에 도입하려 애를 쓴다. 따라서 거의 무제한적으로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승한 뒤프렌과 그랑장도 요컨대 “ECB가 보유한 국채를 탕감해 정부의 재정 운용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6) 같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테라노바 측과 뒤프렌-그랑장은 협력하기로 했다.

이어 브누아 아몽의 측근 경제학자인 가엘 지로나, ‘플라스 퓌블리크’(라파엘 글뤼스만이 창당한 신생 좌파 정당) 소속 유럽의원 오로르 랄뤼크, 그리고 금융경제학자 제자벨 쿠페-수베랑도 여기에 가세한다. 그리하여 2020년 6월, ECB 보유 국채탕감을 위한 첫 성명이 발표된다. 참고로 ECB는 유로존 전체 국채의 25%를 보유하고 있으며, 금액으로는 약 3조 유로에 달한다.(7) 좌파에서 이에 호의적인 인물은 일부 서명 참가자와 가까운 브누아 아몽, 아르노 몽트부르, 다소 애매한 입장이긴 하나 좌파연합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원내 대표 장 뤼크 멜랑숑 등이다.(8) 그리고 이후 1년이 채 안 돼 유럽 13개국의 150인 경제학자들이 지지 연대를 결성하며 세계 주요 일간지를 통해 동시에 성명을 발표했다.(9)

이 150인의 성명으로 두 가지 반응이 빠르게 나타났는데, 그 중 첫 번째는 ECB 측의 즉각적인 거부 의사였다. ECB의 현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성명이 발표된 지 48시간도 채 안 돼 150인의 제안은 “고려하지 않는다”며 반대 의사를 못 박았다.(10) 이어 또 다른 반응은 ‘개혁파’ 내부에서의 즉각적인 반발이었다. 2월 27일, 소위 ‘국채탕감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의 제안에 대해 ‘현안을 왜곡하는 이론적 환상’일 뿐이라는 새로운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11) 이후 본격적으로 싸움에 불이 붙었다. 

지속적으로 반론에 반론이 제기됐으며, 누군가 의견을 내놓으면 그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제시됐고, 트위터나 블로그에서도 원색적인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좌파가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밑바닥까지 훤히 드러난 형국이었다. 그런데 좌파 내부의 이 같은 논란은 채무의 성격과 (경제 주체로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그리고 특히 유럽 통합 문제에 관해 좌파 내부에서 서로 간에 크게 입장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제학자 로랑 코르도니에는 일단 “사실상 이미 부채가 다 탕감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 상황에서 굳이 부채를 탕감해줄 필요가 있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여기에서 탕감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세계 경제 구조 속에서의 종속적인 위치로 말미암아 외화 채무가 늘어난 빈국의 채무가 아니다. 즉, (1990년 ‘제3세계 부채탕감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불공정부채탕감위원회(CADTM)’를 비롯한 국제주의 좌파 세력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제3세계의 부채탕감이 아니라 선진국의 채무탕감을 말하는 것이다. 선진국 진영에 속한 유럽 국가들의 경우, ECB의 개입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저렴한 대출금리의 혜택을 보고 있다. 

티넬 역시 EU 내에서의 “대출금 상환은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채권 만기가 되면 정부는 다시 돈을 빌리고, 이로써 소위 ‘돌려막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인 대출 비용은 투자자들에게 지급하는 이자 정도뿐이다.” 즉, ‘국고채 비용’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다. 2020년 프랑스의 국고채 비용은 GDP의 1.3% 수준이었다. 싱크탱크 ‘앵테레 제네랄(Intérêt Général)’의 지적에 의하면 이는 “1981년보다 낮은 수준”이다.(12)

유럽 집행위원회에서는 2022년 프랑스가 지급하는 평균 국채 금리가 0.9% 선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만큼 프랑스 정부의 부채 비용이 더 내려가는 것이다.(13) 로랑 코르도니에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ECB를 걸고넘어지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까? ECB는 이미 제 할 일을 충분히 잘 하고 있지 않은가?”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불공정부채탕감위원회 설립자로서 150인 성명에 동참한 에릭 투생은 “모두가 프랑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의 대출금리가 제로금리에 가까워졌다고 해서 모든 나라의 상황도 그와 같은 건 아니다.” 그리스가 채권자들에 대해 변제해야 하는 지급내역을 시기 순으로 살펴보면, “2022년 그리스가 ECB에 상환해야 하는 대출금리는 5.9%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이 그리스인들에게 그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부채, 구조적 위기? 포근한 이불?

게다가 ECB 보유 국채탕감 성명을 낸 150인은 현재의 자금조달 환경이 지속된다는 법은 없다고 덧붙인다. 만일 (유로존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을) ECB의 중단기적 개입 정책 변화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면 채권자들이 좌시하겠는가? 성명을 낸 150인 중 하나인 피에르 칼파에 의하면 “2021년 봄, 국채 시장에서 있었던 별 것 아닌 공포감만으로도 금리는 경미하게 올랐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또 생길 수 있으며, 특히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ECB 보유 국채를 탕감하는 것은 채무 지표를 유심히 살피는 투자자들에게 있어 긍정적인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쿠페-수베랑의 지적이다.(15)

그렇다면 투자자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 좌파 경제학자로서 바람직할까? 정부의 재정운영 폭을 넓혀야 한다는 점에만 치중한 국채탕감주의자들의 성명은 “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이 높을 경우, 차후 예산운영 폭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면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한 테라 노바의 노골적인 분석과 일맥상통한다. 즉, GDP 대비 정부 부채에는 적정수준이 있고, 그 이상의 채무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티넬은 “이런 논거는 긴축정책 정당화를 위해 우파 진영에서 써오던 오랜 논거”라고 응수한다. 

우파 시각에서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해당 비율의 시대별 차이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예산수혈에 혈안이 된 사람들은 프랑스의 공공부채 상황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좋았을 때도 주사기를 들고 설쳐댔기 때문이다. 1996년 당시 알랭 쥐페 총리가 “전 국가적 위기”라며 호들갑을 떨던 당시에도 프랑스의 공공부채 수준은 GDP의 60%였다(참고로 2020년 프랑스의 GDP 대비 국채 비율은 120%다). 그토록 정통파와 언론의 우려를 자아내는 이 비율은 부채가 재정회계 차원에서 ‘견딜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측의 지표로서 활용된다. 

그런데 사회학자 뱅자맹 르무안(『부채의 질서(L’Ordre de la dette)』, La Découverte, 2016)의 분석에 의하면, 이 비율은 사실상 “다른 국민층을 위한 일부 국민층의 희생과 노력을 동원하는 정부의 사회적 과제 분배 지속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다.(16) 투기꾼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반발 세력은 가장 무의미한 부채를 구조적인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잠재세력이고, 이와 반대되는 순응적 국민들은 빚더미를 포근한 솜이불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싱크탱크 앵테레 제네랄의 계산에 의하면 2020년 프랑스의 전반적인 상황에서는 사실 “공공부채가 (오늘날 일본처럼) GDP의 230% 수준은 돼야 2011년 정도의 이자 비용 부담을 질 것이다.”

 

“부수적 피해자는 없어”

따라서 지금의 급선무는 부채 일부를 탕감하는 게 아니라 현행 대출금리를 통제하는 데 있다. 그런데 로랑 코르도니에의 설명에 의하면 “(ECB가 보유하지 않은) 나머지 75% 국채에 대한 시장의 긍정적 반응을 확보하는 것은 ECB 보유 부채를 탕감함으로써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국채탕감으로써 외려 ‘신용 파산’이라 부르는 현상이 유발돼 투자자들이 ‘위험수당’ 명목으로 대대적인 금리인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에릭 투생의 경우, 이 같은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뱅자맹 르무안은 탕감주의자들의 제안이 순진한 낙관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탕감주의자들은 자본시장이 국채탕감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 어떤 위험수당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한편, 환경부문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면 유럽의 각 기관이 무조건 이를 반기며 아무런 요구조건도 내걸지 않으리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르무안에 의하면, “그간의 부채탕감 역사로 미뤄보건대 채무에 대한 탕감에는 항상 그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채권단은 고삐를 풀어주는 듯하지만, 곧 더 많은 제약을 걸어온다. 본질적으로 계약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일부 정부의 도덕적 해이 현상도 억제돼야 한다고 채권단은 지적한다.” 유럽의 각 기관들도 “내부적인 역학관계를 분석해보면 구조조정이라는 대가 없이 채무탕감 계획에 동참할 것이라 예측하긴 어렵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런 형태의 부채탕감이 그에 상응하는 가혹한 협상을 수반해 사회복지 및 공공부문 지출을 삭감하는 조건을 거는 계약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국채탕감주의자들이 (2015년 그리스 사태 때 드러난 것처럼) ECB의 폐단을 제한하는 방법으로서 내세운 제안이 결과적으로는 ECB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는 것이다. 경제학자 티넬은 “국채탕감주의자들은 부채 자체를 문제로 여기는데, 그게 아니다”라고 분석한다. 2016년에 펴낸 한 저서(17)에서 티넬은 부채가 프랑스 같은 나라의 경제적 난국을 부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1970년대부터 반 인플레이션 정책에 역점을 둔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실업증가를 무릅쓰고 경제 자체를 둔화시키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 결과, 성장이 느려지고 민간부문 투자가 위축되며 예금총액이 쌓여갔다. 

“그런데 거시경제 측면에서 보면 부채와 예금은 동반성장 관계다. 누군가의 부채가 누군가에게는 채권이기 때문이다. 예금도 결국 채권이다. 경제구조 내에 부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예금도 많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바로 투자다. 이에 제동을 거는 건 재정이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이며, 부채는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망치로 못을 박을 수도, 누군가의 머리를 부술 수도 있는 것처럼 부채는 그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르무안은 “부채를 통한 소득배분의 원칙을 세워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만약 부채가 자산 보유자의 세금을 줄여주는 수단으로 작용한다면, 빈자의 소득이 부자의 소득으로 재분배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반면 이 부채가 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적 투자로 이어져 저비용 고효율의 공공 서비스가 마련된다면, 그리고 누진세율 중심으로 세제가 개편된다면, 부채도 충분히 재분배 역할을 하며 정부를 경제부문 투자자로 만들 수 있다.”(18)

따라서 정부는 부채를 활용해 경제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며, 부채는 정부의 자금조달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150인의 국채탕감주의자들은 정부가 국고를 늘리기 위해 금융시장 논리로 빠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르무안은 “채권의 사적 소유권에 대해서는 물론, 투자가 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서 ‘탕감’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날조된 진보”라고 평한다. 국채탕감주의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제안이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만 치중한다. 실제로 쿠페-수베랑 역시 채무탕감으로 해로울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역점을 뒀고,(19) 뒤프렌과 그랑장도 채무탕감의 피해자는 없다고 주장했다.(20)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회계장부 상의 처리로 힘의 역학관계가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라고 반박한다. 

경제학자 자크 니코노프의 경우, “진정 논의의 대상이 돼야 할 부분은 부채가 아니라 통화주권”이라고 지적한다. 통화주권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지닌다. 우선 자금조달 문제로 정부가 예속돼 있는 금융시장에 대한 통화주권이다. 다음으로 EU 내 회원국 활동에 제약이 되는 여러 조약들에 대한 정치적 법률적 차원에서의 통화주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측면에서의 통화주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자크 니코노프의 생각이다. 그에 의하면, 유로체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부채의 족쇄를 풀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채탕감을 위한 150인의 성명을 주도한 경제학자 스시알롬은 이와 반대로 “연방 예산의 부재 같이 유로존의 제도적 미비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보완할 재정립안의 마련”을 주장한다.(21) 요컨대 랄뤼크 의원의 희망대로 “연방 시스템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랄뤼크 의원은 연방차원의 경제통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유럽경제 활성화 노력에 있어 부분적인 수정만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021년 4월 29일, 트위터) 유럽 문제에 대한 개혁파 경제학자 사이의 균열이 국채탕감주의 성명을 낸 150인 사이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채탕감주의자들에게 있어 (회원국의 투표로 구성되지 않는) ECB는 연방제도로의 이행을 위한 동력이 돼야 한다. 브리도노는 이런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ECB에 더 큰 권력을 주는 셈이고, 더 큰 문제는 중앙은행의 취약한 민주적 정당성으로 말미암아 이 기관이 환경부문이나 공공 서비스 부문을 장려하지 않은 채 긴축정책을 부과하고 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경제학자 다비드 켈라는 “오늘날 금리가 어느 정도 통제되고 있으므로 ECB의 개입 자체는 긍정적”이라 보면서도, “정부의 예산운영에 있어 (환경, 복지 등의) 제약을 두는 틀이 마련된다면 그건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이야 정부예산이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자금으로 이용돼야 한다고 얘기하겠지만, 차후에는 사회복지 문제나 혹은 다른 변수로 인해 그 의제가 바뀔 수 있다. 민주적 의사 결정이란 국민이 선출한 정부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ECB나 유럽집행위원회, 또는 주요 EU 회담 같은 주체가 이런 의사 결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22) 

어쨌든 2021년 2월 5일 국채탕감을 위한 성명에 서명한 150인은 통화 문제를 “다시 정치 쟁점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 의하면 “이 같은 논의는 건전하고 유용하다.” 사실 “꽤 오랜만에 통화 관련 쟁점이 공론화 대상이 됐는데, 공동의 논의 없이 정권을 배제하고 자본시장 논리에만 종속된 중앙은행에 통화가 맡겨진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다만 그 같은 조치를 차후에 세부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내부적으로 상당히 의견이 엇갈릴 것이라 예상되지만) 뒤로 밀려났다. 성명에 찬성한 에릭 투생도 “이 서명에 동참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들이 모든 면에서 나와 동일한 목표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몇몇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핵심 사안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면서 기본적인 틀에 있어 원칙적으로 동의하는 성명을 낼 수는 있지 않은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채탕감주의 내부의 동상이몽

성명을 주도한 뒤프렌은 “ECB 보유 국채탕감 같은 조치를 도입하면 기존의 뿌리 깊은 신조를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이는 거의 혁명에 준하는 행위”라고 얘기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프랑스 기관 투자자 연합 회장인 위베르 로다리 같은 인물도 ECB 보유 국채탕감을 지지하고 나선 것에 대해 반색했다. 하지만 위베르 로다리가 이 같은 ‘혁명적 전망’으로 국채탕감을 지지한 건 아니다. 2020년에 펴낸 한 저서에서 로다리는 “서구권 사회 전체가 하나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 적고 있다.(24) 

“우선 20여 년 전부터 일본이 그랬듯, 통제 가능하다고 여기는 채무상황에 익숙해지는 방안이 있다. 이 경우, (…) 원래 기술적이고자 했던 체계는 필연적으로 행정적 체제가 된다. 비효율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자유가 제한되며, 기득권이 유지되는 한편 불평등이 심화된다. 아니면 부채의 상징성을 유지해 정치적·경제적 주체를 규율하고 (기업의) 상업적 불균형이나 (정부의) 예산 불균형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 그러다 보면  부채를 실질적으로 줄이고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다.”

즉, 국채탕감이라는 하나의 조치에 대해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한쪽에서는 유로존 국가들에 국채의 족쇄를 풀어주고 환경부문 투자를 유도하길 바라고, 다른 한 쪽에서는 (로다리의 주장처럼) 구조조정을 통해 채무의 강제력을 세우길 바란다. 로다리에 의하면 프랑스 기관 투자자들의 출자액은 2017년 기준 3조 유로 규모를 넘어섰고,(25) 뒤프렌의 조직에도 수백여 활동 회원이 있다. ECB 보유 국채가 탕감되면 두 사람이 그리는 미래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실현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150인 성명에 동참한 일원인 에릭 투생은 “어찌됐든 그간의 역사로 미뤄보건대 이 같은 탕감안이 받아들여지기 위해 요구되는 정치적 단합은 유로존 내부에서 생각해볼 수 없다”며 한 발 물러섰다. “독일을 비롯해 소위 ‘검소한’ 국가들이 결코 그 같은 탕감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제안은 특히 긴축정책으로 빠르게 회귀하는 현 상황에서 좌파진영의 대선 레이스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우파의 손에 공격 수단만 쥐어줄 우려가 큰 이 같은 발상을 왜 했겠는가?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부편집장. 저서로 『고용된 경제학자들 (Économistes à gages)』(공저, Les liens qui libèrent, 2012)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브리도노와 관련한 인용 내용은 2021년 3월 및 4월에 진행된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한 것이다.
(2) ‘Des annulations de dette publique par la BCE : lançons le débat ECB 보유 국채탕감 논의 시작 필요’, <Terra Nova>, 2020년 4월 18일, https://tnova.fr  
(3),(6),(20) Nicolas Dufrêne & Alain Grandjean, 『Une monnaie écologique 생태 화폐』, Odile Jacob, Paris, 2020. 
(4) Henri Sterdyniak, ‘La monnaie magique encore, une lecture de l’ouvrage : “Une monnaie écologique” 또 기적의 돈 타령인가: 『생태 화폐』 감상문’, Henri Sterdyniak의 블로그, 2020년 11월 7일, https://blogs.mediapart.fr
(5) Anne Isla, 『Histoire des faits et des idées économiques. Le pluralisme des idées 경제사상 및 사건의 역사 : 생각의 다원주의』, Ellipses, Paris, 2021.
(7) ‘La BCE devrait, dès maintenant, annuler une partie des dettes publiques qu’elle détient ECB, 즉각 보유 국채 일부 탕감해야’, <르몽드>, 2020년 6월 12일.
(8) 2021년 3월 22일 국회 연설에서 멜랑숑은 일단 부채가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표명한 뒤, 이어 채무탕감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한다. (‘Dette publique : peur pour rien ? 공공부채, 공연한 불안인가?’ YouTube, 2021년 3월 22일)
(9) ‘L’annulation des dettes publiques que la BCE détient constituerait un premier signal fort de la reconquête par l’Europe de son destin ECB 보유국채탕감, 유럽운명 개척의 첫 신호탄이 될 것’, <르몽드>, 2021년 2월 5일.
(10) ‘L’annulation de la dette Covid-19 est “inenvisageable” 코로나 채무탕감, 고려하지 않는다’, <AFP>, 2021년 2월 7일.
(11) ‘D’autres solutions que l’annulation de la dette existent pour garantir un financement stable et pérenne 채무탕감 외에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재정 확보 위한 방법 존재’, <르몽드>, 2021년 2월 27일.
(12),(13) ‘Dette publique : en finir avec les manipulations 공공부채: 조작과의 단절’, Intérêt général, 2021년 3월, https://interetgeneral.net
(14) Charles Forelle, Pat Minczeski & Elliot Bentley, ‘Greece’s debt due’, 2015년 2월 19일, https://graphics.wsj.com/greece-debt-timeline
(15),(19) ‘Débat : faut-il annuler la dette? 채무, 탕감해야 하나?’, <Alternatives économiques>, Paris, 2020년 10월 17일.
(16),(18)  Benjamin Lemoine, ‘Dette souveraine et classes sociales. Plaidoyer pour des enquêtes sur la stratification sociale et l’ordre politique produits par la dette de marché 국채와 사회 계층: 채무가 만들어낸 사회 계층과 정치 질서에 관한 연구에 대한 옹호론’, in Julia Christ & Gildas Salmon, 『La Dette souveraine 국채』, Éditions de l’EHESS, Paris, 2018.
(17) Bruno Tinel, 『Dette publique : sortir du catastrophisme 공공부채 : 악몽에서 벗어나기』, Raisons d’agir, Paris, 2016.
(21),(23) ‘부채탕감 : 건전한 논의인가, 정치적 덫인가? 경제학자 다비드 케일라 및 로랑스 스시알롬 대담Annuler la dette : vrai débat ou piège politique ? Débat entre les économistes David Cayla & Laurence Scialom’, Quartier général, 2021년 4월 2일, https://qg.media
(22) ‘ECB 보유 국채탕감 논의 시작 필요’, 위의 책.
(24) Hubert Rodarie, 『Effacer les dettes publiques. C’est possible et c’est nécessaire 공공부채의 삭감 : 가능하면서도 필요한 길』, MA Éditions, Paris, 2020.
(25) Sophie Rolland, ‘Les placements des institutionnels dépassent les 3 000 milliards d’euros 기관 출자액, 3조 유로 넘어서다’, <Les Échos>, Paris, 2017년 9월 5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