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분열하는 아랍의 거울

2021-06-30     킬리안 코강 | 기자

2011년부터 아랍의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 터키를 피난처로 삼았다. 반정부인사들은 정치적 자유를 찾아 터키로 망명한다. 어떤 이들은 지중해 남동부에서도 상위권에 머무는 터키의 전도유망한 경제모델에 이끌린다. 그러나 그들의 피난처인 터키는 외교전략을 재정비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터키 정부의 영향력 하에 놓인 아랍공동체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마흐무드 다르위시, 나기브 마푸즈, 니자르 카바니…. 아랍 문학계의 고전으로 가득한 책장. 벽에는 아바시드 왕조 시대의 시인인 알무타나비를 기리는 캘리그라피가 걸려있다. 홀에서 젊은 이집트 작가가 자신의 최신작 몇 부에 헌사를 쓰는 중이다. 파티 지구 중심에 자리한 서점 알샤카바 알아라비아(아랍 네트워크)는 이스탄불 아랍 지식층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매주 전 세계에서 온 교민과 망명자들이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모국의 운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지식인이자 편집자인 나와프 알쿠데미가 창립한 이 서점은, 이스탄불이 흩어진 아랍 민족들의 요람이 됐음을 보여준다. 2011년부터 이스탄불은 아랍혁명으로 발생한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양한 아랍인들의 집합소

시리아 내전으로 50만 명이 넘는 시리아인들이 이스탄불에 자리 잡았다.(1)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공동체로 편입됐다. 오늘날 터키에는 수십만 명의 이라크인, 3만여 명의 이집트인, 그리고 수만 명의 리비아, 예멘, 팔레스타인, 요르단,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출신들이 살고 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스탄불에 정착했다. 반정부인사, 난민, 이민자들 사이로 작가, 학생, 혹은 단순한 관광객들이 혼재한다. “이스탄불은 이토록 다양한 아랍 국적자들이 모여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시앙스포 액스(Sciences Po Aix) 박사과정에 있는 누란 가드가 강조한다. 이 분야에서 흔치 않은 전문가다. 

“아랍 공동체의 다양성에 있어서 이스탄불은 먼 옛날 카이로와 베이루트의 위상을 넘어섰습니다.” 베이루트에서 출판사도 운영하는 알쿠데미가 덧붙인다. 1950년대 자말 압델 나세르 정권 시절 이집트에서는 아랍 문화권 콘텐츠 제작이 활발했고, 아랍권 전체에서 가수와 배우가 몰려들었다. 범아랍주의 정권 시절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비할 데 없이 자유로운 곳이었고, 지식층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1975년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20년 넘게 이웃나라의 작가, 예술가, 편집자들은 베이루트 서쪽에 카페를 차렸다.(2)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몇 번이고 위기가 찾아왔음에도, 레바논은 아랍출판계의 중심지 자리를 지켜냈다. 

알쿠데미는 “출판의 중심지는 베이루트지만, 지식인들이 거주하며 글을 쓰는 곳은 이스탄불”이라고 말했다. 2018년,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의 하수인들에게 토막 살해당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체제 언론인 고(故) 자말 카슈끄지도 이스탄불에 살면서 그곳에서 글을 썼다. 기자이자 학자였던 카슈끄지는 201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터키 출신인 그는 이스탄불 소재 아파트를 매수했고, 정기적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나들었다.(3) 

“카슈끄지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서점에 자주 왔었죠.” 알쿠데미가 고백한다. 카슈끄지처럼 알쿠데미도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에 쫓기는 몸이다. “정치 추문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알쿠데미는 3년이 넘도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해외 출국이 금지됐고,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뿐 아니라 쿠웨이트나 요르단, 이집트 입국도 금지된 몸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형제들’, TV채널 설립

터키가 ‘자유의 안식처’라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서구의 관점에서 ‘방황하는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인권침해와 언론탄압 의혹에 의문을 제기하면, “터키 내정은 당신들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한결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고관대작 사이에서는 이스탄불에 르네상스가 도래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11년부터 일어난 민중혁명의 물결이 아랍세계를 집어삼켰을 때, 정의개발당(AKP)은 혁명가들의 당이었다. 전 외교부 장관 아흐메트 다우토울루(그 후 불명예스럽게 실각했지만)의 비호 아래, 터키는 이스탄불에 투자를 재개했고 반정부 운동, 특히 ‘이슬람 형제들(les Frères musulmans)’의 다양한 분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4)

민중혁명이 실패하고 독재정치가 부활하면서 ‘이슬람 형제들’은 이스탄불에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이곳은 그대로 베이스캠프가 됐다. 2013년 7월,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육군 원수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 이후, 이집트 ‘형제들’에 가해진 탄압으로 운동은 국외로 망명을 떠났고, 이스탄불 근교에서 다시 공고해졌다. 2020년 봄, ‘친형제파’ 예멘 야당 알이슬라가 새로운 당수를 임명한 장소도 이스탄불이었다.(5) 시리아의 친 ‘형제파’ 야당의 경우 터키 정부의 명령에 직접 응한다.(6)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형제들’은 자신들의 TV채널을 설립했다. 이 경우 대부분 카타르가 연관된 일이다.(7) 카타르는 2017년 외교 위기 이래로 터키의 우방국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와 바레인이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하며 카타르를 봉쇄하려 했는데, 이때 터키 정부는 카타르를 경제·외교·군사적으로 지원했다. TV 덕분에 이집트 ‘형제들’은 메카멜렌과 와탄 TV 등의 채널을 통해 자신들의 운동을 계속 설파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멘 샤밥 채널은 예멘의 ‘형제들’ 운동에 우호적인 내용을 방영했다.(8)

그렇지만 올해 초부터 터키-카타르 진영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관계에서 아주 약간의 진전이 보인다. 여러 선택지 중에서 이집트는 터키-카타르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대신, 자국을 비판하는 방송을 멈추고 각국으로 망명한 ‘이슬람 형제들’ 소속 범죄자를 자국으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터키와 카타르는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이집트 망명자 상당수를 자국으로 귀화시켰다. 그러나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터키 정부는 지난 3월 이스탄불에 자리한 이집트계 언론사들에 시시 장군에 대한 비판 완화를 요청했다.(9) 이집트 채널 중 어떤 프로그램은 방영이 정지됐고, 이제 유튜브로 직접 방송된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있는 아랍 채널들이 모든 카타르계 형제운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반정부 TV채널 텔레비전 수르야는 2014년 카타르 기업이 팔레스타인인 아즈미 비샤라의 영향을 받아 설립한 알아라비 알자디드 네트워크와 관계가 있다. 카타르의 자유·진보주의 진영을 대변하고 알자지라 채널의 ‘친형제파’ 시각과 경쟁하는 것이 목적이다.(10) 이처럼 현대적 시각을 지닌 채널로 벨키스가 있다. 예멘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에 맞선 투쟁가이자, 201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타우왁쿨 카르만이 소유주인 채널이다.

오늘날 이스탄불에는 약 15개의 아랍 TV채널이 있다. “터키 정부는 자국에 자리 잡은 아랍인들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지난 11월, 이집트 반정부인사이자 자유주의 정당 알가드의 창립자 아이만 누르는 이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이스탄불에 방영되는 여러 TV채널의 소유주인 그는, 지난 3월초부터 터키 정부가 방송 프로그램 편성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했다.(11) 

 

“억압받는 전 세계 무슬림의 수호자”

 

터키 정부는 이집트와의 관계 개선 및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서도 노력 중이다. 4월, 터키 대통령 대변인 이브라힘 칼린은 사우디아라비아 재판소가 자말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내린 판결을 “존중한다”며, 2018년에 있었던 카슈끄지 사망 사건에 대한 비난을 중단했다. 청신호의 조짐일까? 몇 년 전부터 터키 정부는 카이로, 다마스, 리야드와 아부다비 같은 지역 정권들과의 정면충돌도 불사하며 해당 지역에 전에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터키의 군사개입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리비아에서 터키 정부는 트리폴리에 설립돼 칼리파 하프타르 국군 사령관의 무력에 대항하는 리비아 임시정부(GNA)를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시리아에서는 반군 단체들을 지휘하며 사실상 북부지역을 장악했다. 터키 국기가 휘날렸고, 터키 화폐가 통용됐다. 다른 이들의 눈에 터키는 자국이 품은 아랍 ‘디아스포라’들을 영향력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터키에서 아랍 사회의 존재감을 구축하려는 여러 단체들 때문일까? 일례로, 850명이 넘는 언론인을 규합하는 아랍 언론 연합의 회장 투란 키슬락시는 아랍세계에 터키의 목소리를 중계하고자 2010년 설립된 공영방송 TRT 아라비의 수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친정부 언론인 메틴 투란과 리비아인 동업자 무스타파 타르후니는 “터키에 있는 아랍 디아스포라들을 대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2019년 봄, 아랍 공동체 연합을 창립했다. 그들은 터키 정부를 “억압받는 전 세계 이슬람교도의 수호자”로 여긴다.(12) 터키 영향력의 또 다른 중심지는 고등교육기관이다. 2010년 도입된 정책을 통해, 터키 정부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수혜자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와 근동지역 학생들이다. 또한, 이스탄불 소재 사바하틴 자임 대학 등 여러 터키 대학들에서 완전히 아랍어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박스기사 참조) 

게다가 2000년대 여러 걸프만 국가들처럼, 터키 당국은 아랍 문화행사 다수를 후원한다. 5년 전부터 프랑스 대통령이 주관하는 아랍 도서 및 문화의 날 같은 행사도 이에 포함된다. 이런 행사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 ‘야신 악타이’다. 아랍어 사용자이자 정의개발당(AKP)의 일원인 악타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측근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스탄불 내 아랍 사회와 터키 정부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터키인들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 많은 아랍인이 이곳에서 살기로 한 것은 서구에 존재하는 탈식민주의적 멸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범아랍주의 채널 알히와르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는 팔레스타인-요르단계 여성 에스라 샤이크가 단언한다. 알히와르는 런던에 자리 잡았지만 몇 년 전에 이스탄불 지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아랍 민족주의를 공고히 해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역사 재검토를 주저하지 않았다. “터키와의 역사에서 아랍세계는 실보다 득이 더 컸습니다. 유럽 식민주의와는 정반대로요.” 샤이크가 덧붙인다. 몇몇의 인터뷰이들은 과거의 오스만 제국에 원한을 품기보다 그 화려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과거 이집트나 시리아 연속극의 위상을 제친 터키 TV 드라마에서 배경이 되는 오스만 제국 시대가 대중들을 매혹한 것처럼 말이다.(13)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구권에 맞선 대항세력이자 팔레스타인의 수호자라는 영광을 이상화한다. 무기력한 아랍 군주들이 오래전에 놓아버린 영광이다.

 

모두에게, 민병대에도 열린 나라

최근 이뤄진 경제발전과 국제적인 위상 덕분에 터키는 수많은 수니파 이슬람교도들, ‘이슬람 형제들’ 운동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자랑거리로 통한다. 이스탄불에 휴가차 방문한 60대 튀니지 남성 라시드 D.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휴가 계획에서 카밀카 모스크는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이는 2019년 개관한 건축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버뮤다 팬츠 차림의 한 관광객이 취재에 응했다. 그의 눈에 카밀카 모스크는 터키가 이룬 기적의 상징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지어진 모스크가 술탄들의 유산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몇 세기 후 이 사원을 에르도안 모스크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경탄을 표했다.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아랍 디아스포라들이 모두 ‘터키 이슬람 드림’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이 터키행을 택한 이유로는 특히 높은 생활수준(일자리가 있을 경우)과 비교적 무난한 정치 상황, 비교적 취득하기 쉬운 체류증 때문이다. 이런 장점들 덕택에, 이스탄불은 망명지로 종종 선택된다. 어떤 식으로든 터키 정부와 친분을 유지하려는 반정부인사, 피난민, 언론인 등 이스탄불은 모든 불운한 이들을 받아준다. 수니파, 시아파, 이슬람주의자,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말이다. 

유명 소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14)의 저자 아흐메드 사다위는 자신이 태어난 모국 이라크를 떠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2019년 10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뒤흔든 저항운동에 가담한 후, 동료 투쟁가들이 살해당하거나 시아파 민병대에 체포됐다. 어느 날 정부에 줄이 닿아있는 한 소식통이 “그가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터키는 그에게 적합한 피난처였다. 

“서구권은 이라크인에게 열려 있지 않아요. 레바논은 비자를 발급해주긴 하지만 헤즈볼라(시아파 이슬람 무장투쟁 조직) 조직원들이 우글거리죠. 그들은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와 한통속입니다!” 작가이자 운명론자인 사다위가 말을 서슴없이 쏟아낸다. 그는 마르마라해 해변 카페에서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사다위는 더 안전한 지방으로 옮기길 원했다. 이스탄불은 이라크 정보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다. “이스탄불에 별장을 보유하고 주기적으로 오가는 정부 인사를 몇 명 압니다. 터키는 모두에게 열려있어요. 민병대도 나를 찾으려면 금방 찾아낼 겁니다.”

2018년에 도입된 법 덕분에 25만 달러 이상에 상당하는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은 터키 여권을 취득할 수 있다. 이라크인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이라크인들은 2019년 터키 부동산 최대 투자자에 등극했고, 2020년엔 이란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2위를 차지했다. 부동산을 매입하려는 부유한 아랍인들의 수요는 출신국을 막론하고 끝이 없다.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부동산 시장과 의료관광 덕분에 터키는 기회의 땅이 됐다. 

터키어를 조금만 알면 중개인으로 활동하며 괜찮은 수입을 누릴 수 있다. 32세의 알제리인 아미르 Z.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자칭 “코디네이터”다. 그처럼 부동산을 매입하려는 이들, 혹은 모발이식을 받으려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중개업체는 이스탄불에 수백여 개가 있다. 시디 벨 아베스 출신의 아미르에게 “정직하게 일한다”라는 것은, “가짜 약과 위조 증명서”가 넘쳐나는 불법 클리닉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저도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마그레브(아프리카 서북부)와 마슈리크(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인근) 지역 출신 정치 망명자들과 사업가들 사이에서, 이스탄불은 전대미문의 범아랍적 상호교류의 장이다. 하지만 국수주의와 지역 간 경쟁의식이 이를 위협하고 있다. 30세의 모로코 탕헤르 출신 가수 함자 T.는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멀쑥한 차림의 함자는 가수로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이스탄불에 왔다. 그는 6개월간 카바레와 아랍 결혼식을 돌며 공연했다. 쿠르드계 시리아인 가수 오마르 술레만도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는가? “쉽지 않았어요. 시리아와 이라크 사람들은 모로코인을 쓰지 않아요.” 탁심 광장에 자리한 예멘 식당에 앉은 함자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아랍 디아스포라들도 망명지에서 외국인 혐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느 정도 동정을 사고 있지만, 시리아인들은 터키 사회 전체에서 눈총의 대상이다.

다수의 이민자는 터키를 친숙하고 관대한 나라로 여긴다.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장발의 압둘아지즈 D.는 25세의 이집트 청년이다. 그는 유순해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2년 전만 해도 거친 ‘이슬람 형제들’ 중 하나였다. “이슬람 형제들을 제 가족처럼 생각했어요.” 압둘아지즈는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시시 장군의 감옥에서 1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가석방된 그는 이스탄불로 피신했다. “친구들은 이미 모두 와있더군요.”

소속단체에서 거주지를 마련해주는 등 도움을 줬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이스탄불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술과 담배에 입을 대고, 젊은 여성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수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그는 활동을 포기했다. “이스탄불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어요. 한편에 모스크, 다른 한편에는 나이트클럽이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사람을 변화시켜요. 이제 저도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 같은 사람들은 많아요. 이곳에 온 이집트 ‘형제들’은 전과 달라요. 이스탄불에 오면 시각이 완전히 바뀌거든요.” 지금 이 시각에도 카이로에 있는 그의 친지들은 여전히 “이스탄불에서 송출되는 ‘형제들’의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TV 시리즈 속 ‘환상적인 터키’

압둘아지즈는 “TV 시리즈를 보며 터키에 대한 환상을 품은” 이집트인들을 대상으로 여행사를 차렸다. 네덜란드와 캐나다에서 연속으로 비자 발급을 거절당하자, 그는 체념하고 이스탄불에 남기로 했다. 이집트인 교민사회의 다른 이들처럼 그 또한 터키-이집트 외교 분쟁으로 체류증 갱신이 안 될까, 혹은 자신의 귀화신청이 거절될까 걱정이다. 아랍 디아스포라들은 이스탄불에서 한창 팽창 중이지만, 지정학적 균형이라는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 놓여 있다.

아울러 이스탄불은 마그레브 출신 유럽인들을 끌어당기는 중심지이기도 하다. 브뤼셀에 사는 수학과 학생 야스민 G.는 이스탄불에서 살기를 원한다. 22세의 모로코계 벨기에인 야스민은 여태 터키어 문법 교본을 모아뒀다. 야스민은 “졸업하면 바로 터키로 가서, 1년만 살아볼 생각”이다. 야스민은 “벨기에에서 무슬림으로 사는 것이 좋지는 않았지만, 내면의 서구적인 면을 부정할 수 없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중압감에 짓눌린 모로코와는 달리, 터키는 이슬람과 현대성이 이상적인 균형을 이룬 곳처럼 보인다”라고 야스민은 말했다.

다수의 마그레브와 근동지역 출신들처럼 야스민도 터키 TV 드라마, 크반치 타틀르투와 부락 외즈치빗 같은 터키 인기배우에 빠졌다.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터키 스타일을 섞은 ‘무슬림 시크’ 풍의 인스타그램 스타들도 좋아한다. 이스탄불에서 유학하는 터키-모로코계 보르도 출신 여성의 ‘아씨아티크(Assiatique)’라는 계정은 팔로워가 12만 명이 넘는다. 마그레브계 유럽인들 사이에서 터키가 뜨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프랑스 래퍼 술킹(Soolking)과 랄제리노(L’Algérino)는 노래에 터키어 후렴구를 넣었다.

북아프리카계 유럽인들에게 터키는 두바이, 아부다비, 도하 같은 걸프만의 주요 도시에 정착하려다 실패한 이들의 실망감을 달래주는 곳이다. “10년 전에 남편과 함께 카타르로 떠났어요. 하지만 저는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학력이 떨어졌고, 그래서 급여가 형편없었어요.” 33세의 미리암 Q.가 털어놓았다. 부르고뉴 몽소레민 출신의 프랑스-알제리인인 그녀는 이스탄불로 이주해 섬유 수출입 회사를 차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라드 가즐리처럼 이미 행동에 나선 이들도 있다. 그는 자크 시라크가 창당한 공화국연합 (RPR)과 대중운동연합(UMP), 민주독립연합(UDI)에서 활동했던 전직 정치인이자 프랑스-알제리인이다. 2016년 UDI에서 방출되고 일 년 후, 가즐리는 터키 알라니아에 자리 잡고 이슬람 관광업에 뛰어들었다. ‘할랄 관광’은 신속하게 성장 중인 업계다. 일정은 이슬람 사원 주변으로 짜여있으며, 특히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남녀가 분리된다. 이 같은 관광상품은 유럽 무슬림의 수요가 높은 편이다.(15)

 

서구권을 움직이는 유일한 이슬람 국가

가즐리는 SNS를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랍세계의 유명인사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럽 마그레브 사회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서구권이 귀 기울이는 유일한 이슬람 국가가 터키입니다. 같은 무슬림으로서 존경스러워요.” 발랑스 출신 프랑스-알제리인 29세의 셀마 아잠이 말한다. 핀으로 고정한 검은 베일을 머리에 두르고 약한 남프랑스 억양을 구사하는 셀마는 이스탄불에 살면서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운동가로 활동한다. 이곳에서 그는 친정부 언론들과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프랑스에서는 제가 베일을 쓰는 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떠났어요.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셀마의 아버지는 발랑스의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딸은 6세로, 프랑스 학교의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물론 셀마는 딸을 동네 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터키 정부에는 이런 일화가 희소식이다. 팔레스타인 보호에 앞장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불신에 맞서며 “탄압받는 소수 유럽 무슬림”의 운명을 규탄한다. 몇 년 전부터 터키 정부는 이슬람 혐오에 대한 포럼과 토론회를 열며 이런 현상을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유럽 평의회,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친정부 싱크탱크 SETA는 2015년부터 ‘유럽 이슬람 혐오 보고서’라는 제목의 연구를 발표해왔다. 유럽 국가들이 행하는 반이슬람 행위를 망라하는 보고서다.

터키는 유럽과 연을 끊은 이슬람교도들의 피난처일까? 2020년 11월, 프랑스 행정부가 이슬람 비정부기구 바라카시티를 해산시킨다고 발표한 후, 바라카시티의 회장 이드리스 시아메디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트위터에 “무분별한 언사”를 올리기 전이었다. 마찬가지로, 2020년 10월에 다비드 비제라는 인물의 주도로 페이스북 그룹 ‘터키로 이민가기’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다부드 파샤’로 불리는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프랑스인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열성적인 추종자다. 이 그룹 페이지는 프랑스-무슬림의 상부상조를 위한 것이며, “평화로운 종교생활을 위한 이주를 돕는” 곳이다. 현재 가입자 수는 2,000여 명이다.

터키는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와는 상황이 다르다. 카타르, 아랍에미리트는 석유와 가스, 외국인력 수요가 존재한다. 그러나 터키에는 석유도 가스도 없으며 외국인력 수요도 불확실하다. 실제로 터키에 정착하려 할 경우, 정체성을 고심하는 유럽-마그레브인들은 터키의 현실, 어려운 경제상황, 정치적 불확실성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글·킬리앙 코강 Killian Cogan
프리랜서 기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Ariane Bonzon, ‘Ces indésirables réfugiés syriens 터키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시리아 난민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5월호·한국어판 2020년 12월호.
(2) Robyn Creswell, 『City of Beginnings: Poetic Modernism in Beirut』, Princeton University Press, Oxford et Princeton, 2019.
(3) Bryan Fogel의 다큐멘터리 <The Dissident>, 2020.
(4) Hamit Bozarslan, ‘Heurs et malheurs de la politique arabe de Turquie 터키 아랍정책의 행운과 불운’, 인용 저서: M’hamed Oualdi, Delphine Pagès-El Karoui et Chantal Verdeil (연구 책임자), 『Les Ondes de choc des révolutions arabes 아랍혁명의 충격파』, Presses de l’Institut français du Proche-Orient (IFPO), Beyrouth, 2014.
(5) Mohanad Hage Ali, ‘Exiles on the Bosphorus 보스포루스 해협의 망명자들’, <Carnegie Middle East Center>, Beyrouth, 2020년3월10일.
(6) Amberin Zaman & Dan Wilkofsky, ‘For Syria’s opposition activists, Turkey’s “best of the bad”’, <Al Monitor>, 2020년 9월 10일, www.al-monitor.com
(7) Franck Mermier, ‘À Istanbul, une scène médiatique sous influence 영향력 아래 놓인 언론계’, <Orient XXI>, 2021년 1월 4일, https://orientxxi.info
(8) Laurent Bonnefoy & Khaled Al-Khaled, ‘La télévision yéménite en temps de ramadan 라마단 기간의 예멘 텔레비전’, <Orient XXI>, 2019년 5월 24일.
(9) ’Turkey asks Egyptian media to limit criticism: TV channel owner’, <알자지라>, 2021년 3월 19일.
(10) Franck Mermier, 『Les fondations culturelles arabes et les métamorphoses du panarabisme 아랍문화의 기반과 범아랍주의의 변화』,<Arabian Humanities>, 2016, www.openedition.org
(11) ‘Turkey asks Egyptian media to limit criticism : TV channel owner’, op. cit.
(12) Haberler.com, 2020년 2월 1일 (터키어).
(13) Timour Muhidine, ‘Les écrans du Bosphore 터키 보스포루스 해협의 영화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7월호. Cf. Jana Jabbour, ‘An illusionary power of seduction?’, <European Journal of Turkish Studies>, 2015.
(14) Ahmed Saadawi, 『Frankenstein à Bagdad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Piranha, Paris, 2016.
(15) Marion Fontenille, ‘En Turquie, les hôtels “Muslim friendly” font le plein de touristes 관광객으로 가득한 터키 “친무슬림” 호텔’, <Slate.fr>, 2018년 7월 18일.

 

 

추방된 언어의 화려한 귀환

 

코란의 언어, 신성한 언어인 아랍어는 터키에서 양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 아랍어는 지역어나 학술용어 등 터키어에 여러 방면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 소속 엘리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가 섞인 ‘오스만 터키어’를 구사했다. 아랍 문자로 쓰인 언어였다. 종교적인 특성을 떠나 아랍어는 페르시아어처럼 고전어였고, 서구에서의 그리스어나 라틴어처럼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언어였다.(1) 이런 특별대우는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사라진다. 터키를 서구 문명처럼 근대화하려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어에서 아랍어의 잔재를 없애는 일련의 언어 개혁을 단행했다. 

1928년, 터키어 표기에 쓰이던 아랍 문자는 라틴 문자로 대체됐고, 아랍어, 페르시아어 표현은 터키식으로 순화됐다. 또한 1924년, 아랍어를 가르치는 고등교육 기관이었던 종교 학교를 폐교하고 정규교육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과목을 없앴다. 반면 같은 해에 종교부 산하의 종교 관련 인력을 양성하는 ‘이맘 하팁(Imam hatip)’ 학교가 생겨 코란을 배우는 아랍어 수업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32년,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기도시간을 알리는 문구인 ‘에잔(ezan)’을 터키어로 도입했다. 이슬람 세계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케말주의를 추종하는 엘리트들은 터키어로 번역된 코란을 근간으로 터키어로 쓰인 기도문을 보급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아랍어는 계속 사용됐고, 보수파 대통령 아드난 멘데레스 정부가 1950년부터 전통적인 아랍어 기도를 재도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소수 아랍어 사용인구는 주로 하타이나 마르딘 같은 남부지방에 분포한다. 이들은 쿠르드족이나 체르케스인처럼 터키어를 쓰지 않는 다른 소수민족과 더불어 1930년대 초 전국적으로 시행된 언어동화 정책의 대상이었다.(2)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인들이 규탄하던 아랍어는 점점 잊혀졌다. 오늘날 수천여 개의 단어만이 터키어에 산재한다. 종교 생활을 실천하는 이슬람교도와 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코란의 장을 달달 외운 경험 덕분에 아랍어가 어느 정도 친숙하다. 2002년 이슬람 보수파 정당 정의개발당(AKP)이 집권한 후 아랍어는 과거의 위상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케말주의와 결별한 현재 보수파 엘리트들은 이슬람식 아랍어 표현이 가득한 문집을 꺼내, 과거 오스만 제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주기적으로 “젊은 세대가 선조의 비석에 적힌 문구를 읽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다.(3) 지난 1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심지어 1928년 언어 개혁을 “역사 말살”이라고 평가했다. 아랍어는 곧 반계몽주의라고 여기던 과거의 비종교적 지도자들과는 반대로, 정의개발당의 몇몇 간부는 자신의 아랍어 실력을 과시한다. 영부인 에민 에르도안이나 대통령의 각별한 고문 야신 악타이를 제외하면 터키 남부의 아랍어권 소수민족 출신은 전무하다. 나머지는 외국 유학시절 아랍어를 익혔다.

지난 몇십 년간 폭발적으로 수가 늘어난 종교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2016년부터 공립학교에서도 아랍어 수업이 다시 생겼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도 아랍어권 관련 학부가 다수 설치됐다. 신학, 이슬람 재정학, 국제관계학 등의 교육과정을 제공하며 아랍 학생과 터키 학생 모두 모집대상이다. 아랍세계, 특히 요르단과 수단의 대학들과 제휴를 맺었다.  종교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랍어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최근 터키와 아랍세계 간 활발해진 상업 및 문화 교류 때문이기도 하다.

 

글·킬리앙 코강 Killian Cogan
번역·정나영


(1) Johann Strauss, ‘Modernisation, nationalisation, désislamisation: la transformation du turc au XIXe-XXe siècles 근대화, 국영화, 반이슬람화: 19~20세기 터키의 변화’, <Revue des mondes musulmans et de la Méditerranée>, n° 124, Aix-en-Provence, 2008년 11월.
(2) Soner Cagaptay, ‘Race, assimilation and kemalism: Turkish nationalism and the minorities in the 1930s’, <Middle Eastern Studies>, vol. 40, n° 3, Abingdon-on-Thames, 2004년 5월.
(3) ‘Erdoğan: Young people cannot read their forefathers’ gravestones’, <Bianet>, 2021년 1월 21일, https://biane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