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팬데믹이 발생한다면, 의료주권은 어디로?

2021-06-30     알랭 가리구 | 파리낭테르 대학 명예교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발생 초기부터 많은 정치적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위급상황에 덮여있던 문제가 더욱 커져 최근 불거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코로나 방역관리와 관련해 어떤 사태가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불편한 사실들이 많다. 그런 만큼, 더 늦기 전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현재 상황이 심각한 만큼, 오류에 대한 두려움, 불완전에 대한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과거 엄격함으로 명성이 높았던 한 정치인(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전 총리)의 말처럼 “통치는 곧 예견하는 일”이라면, 현 정치는 기능저하 상태다. 1980년대 발생한 감염병인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서부터 시작해 광우병,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조류독감 등 각종 보건위기를 계속 겪으며, 전문가들은 머지않아 1918~1920년 스페인 독감과 유사한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고 확언했다. 이것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저희들끼리만 쉬쉬 하는 은밀한 비밀이 결코 아니었다. 전 세계 기자단 앞에서 발표된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필자도 두 눈으로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2019년 말 발병했고, 제법 신속하게 팬데믹으로 공표됐다. 하지만 ‘충분히’ 신속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전 세계, 특히 각국의 정부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넋이 나간 듯했다. 어떤 정책을 취할지 우왕좌왕한 것도 당연하게 보였다. 어떤 정부는 ‘집단면역’을 통한 ‘자연적인 조절’ 현상을 기대했다. 반면 대다수의 정부는 금세 집단면역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백신접종 전략에 뛰어들었다. 백신의 개발과 생산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자, 각국은 백신전략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치인들 역시 보건 분야에서 ‘방임’이 얼마나 위험한지 금세 깨달았다. 수천 년에 걸쳐 국민은 국가가 그들의 삶을 보호할 것을 항상 원했다.

따라서, ‘국민의 죽음을 방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올 위험이 컸다. 먼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이틀 만에 방향을 바꿨다.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던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대통령은 모호한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동시에 백신접종 전략도 함께 추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빅 파르마’는 모조리 미국계 기업들이었다. 반면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만은 기존의 태도를 고수했다. 브라질에 마스크·진단키트·백신이 부족한 현실이 결코 정상 참작의 이유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신제조사 책임자들에게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각 정부가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각 나라가 심각한 의료필수품 부족난의 덫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팬데믹 초기 유통기한이 다 됐다는 이유로, 멀쩡한 재고 마스크가 줄줄이 폐기 처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단순히 정치인이 아닌 행정기관, 즉 국가의 태만에 해당했다. 정부의 무능은 보기 드물 정도였고, 대책은 너무나 더디고 불충분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프랑스에서 보건 부문을 관할하는 기관은 총 13개다. 이 점만 봐도 충분히 부실운영의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비난에 책임자들이 얼마나 정색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항상 핑계가 널려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잘못은 정치인에게 있다” 등등. 하지만 모든 일은 결과로 평가를 받는 법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잘못 중에는 부인행위도 포함된다. 여기서 관련 정치인이나, 수십 년 전 일선에 있었던 행정관료를 심판할 생각은 없다. 이미 일부는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오늘날 소송절차가 진행되는 속도를 지켜볼 때 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될 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사태의 파악, 그리고 재발 방지다. 

마스크 부족, 진단키트 부족, 백신 부족. 어떻게 이런 문제들이 반복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다른 여느 재화처럼 보건도 시장경제에 내맡길 수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였다. 이는 어쩌면 금융자본주의가 저지른 가장 중대한 범죄에 해당할지 모른다. 우리는 군수 부문은 당연히 국가적으로 중대한 분야이므로,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흔쾌히 이해한다. 제약산업도 군수산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말로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도 동맹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국에는 애국주의인 것이, 외국에는 국수주의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그와 비슷한 일이 보건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유럽연합이 백신공급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스트라제네카에게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소식에 살짝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본국인 영국 정부가 금지하는데도 정말 이 기업이 굳게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의 현실에 대해, 법률가와 사업가는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다. 그들은 토마스 홉스의 ‘각자도생’이 아닌, 몽테스키외의 ‘온화한 상업’(이익교환이 제로섬 전쟁을 상호이득을 내는 포지티브섬 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핵심 발상-역주)을 신봉한다. 부유국가, 부유층이 누리는 안락함이 명철한 판단력을 흐린 것일까?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의장은 모든 국가가 자국을 위해 백신을 확보하려는 가운데, 유럽만은 계속 수출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정당한 분노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책임자들에게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백신 위기에 맞서 공적 산업연구체제를 재구축해야

코로나 백신을 글로벌 공공재로 삼자는 의견은 팬데믹 초기부터 제기됐다. 관련 선례도 많다. 19세기 말, 파스퇴르 연구소는 흑사병을 박멸하겠다며 중국과 대영제국의 여러 식민지에 연구진을 파견했다. 당시 백신은 인도까지 무상으로 공급됐다. ‘글로벌 공공재’라는 표현 없이도 말이다. 반면, 오늘날 제약사들은 막대한 지원금을 챙기고도 자본주의적 논리를 들먹인다. 제약사가 이윤을 챙기는 것은 연구능력에 대한 온당한 보수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불과 100여 년 전,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는 오랜 전염병인 흑사병의 치료제를 개발하고, 나아가 1980년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일으키는 레트로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런 영예로운 과거를 볼 때, 지금의 실패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경쟁으로 백신 개발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애석해 하는 이는 드물다. 과연 우리는 실패를 밑거름 삼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국민기업’이라는 명성에 기대고 있는 사기업 사노피(Sanofi)는 자사의 최대 시장인 미국에 우선적으로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애국적 기업들의 허튼소리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러나 정작 백신 개발에 끝내 실패하면서 웃음거리가 됐다. 이 사실을 사노피 측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사실로 인해 경영진이 누리는 천문학적인 수입과 주식에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였다면 책임자가 자결했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기업의 책임자들은 당당하게 연구지원비 축소 등의 이유를 내세웠다. 연구지원비는 그들 자신이 축소한 것이다. 그들이 최대수익을 위해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연구개발비용을 외주기업에 떠넘긴 결과다. 반면 독일은 미국 기업이 RNA 기반 백신 기술의 선두주자로 통하던 자국 기업, 바이오앤테크를 인수하려던 사태를, 정부가 적극 개입한 덕분에 양사가 제휴를 맺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역대 프랑스 정부는 오랜 긴축정책으로 연구개발비가 상당 규모로 축소됐다. 그 결과, 유럽국가들 중 국민총생산(GNP) 대비 연구개발 투자가 가장 저조한 국가로 전락했다. 아마도 오랜 기간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법학·금융 전공의 지도자들이 국정을 운영해온 영향일 것이다. 단순히 이는 국립행정학교(ENA)를 폐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정부는 수십 년째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녔다고 알려진 조르주 퐁피두가 집권한 후 연구원 채용이 중단됐지만, 제5공화국 초기에 드골 장군은 국립과학연구소(CNRS)에 대한 투자를 널리 확대했다(호사가들이 CNRS를 드골의 ‘애인’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드골은 연구개발이야말로 국가의 주권 수호를 위해 중대한 분야라고 여겼던 것이다. 제2의 팬데믹 사태가 발생한다면?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또 다시 자유무역의 법칙과 다국적기업에 굴복한 채, 각자도생을 위해 우왕좌왕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최고의 보호주의론자들과 이기주의자들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다. 기존의 산업을 국영화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교리를 신봉하는 초국적 기관들의 눈에 범죄로 간주될 행위다. 그 대신, 공적 산업연구체제를 재구축해야 한다. 여하튼 국가적인 시스템의 틀이 아직 남아 있고, 어쩌면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지 모른다. 

과연 다음 팬데믹까지 우리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가?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허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