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에 맞설 대안의 힘은 어디에?

좌파의 우경화 바람

2021-06-30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철학자

다음은 베르나르 프리오와의 대담집 마지막 부분을 발췌해 재구성한 글이다. 라 디스퓌트(La Dispute) 출판사의 아멜리 장메와 마리나 시모냉이 엮은 이 대담집은 10월 출간 예정이다. 최근 사건들 때문에 해당 부분을 앞당겨 발표한다.

 

우리 사회는 파시즘 사회가 돼 버렸을까?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파시즘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회 전체가 격변하고 있다. 이는 레닌이 혁명의 조짐을 보이는 위기상태에 관해 논하며 사용하던 표현으로, 그람시가 제창한 ‘유기적 위기(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가 어려운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경우-역주)’ 단계와 궤를 같이한다. 사회 각 계층에서 이 두 가지 위기는 각각의 고유한 주기로 구분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가속화되며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한다. 

2년 전만 해도, “헌법이라는 장애물을 건너뛰자”라는 군경들의 글이 매체의 오피니언 면에 게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글은 정계 각층에서 환영받았다. 이렇게까지 파시즘화 된 <C뉴스>와 <유럽1> 같은 대형 언론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를 따르는 <LCI>와 <BFM>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공공기관에서 다뤄선 안 될 부적절한 화제를 다루고, 최악의 논객에게 발언권을 줬다.(1) 극우파 주간지 <발뢰르 악튀엘(Valeurs Actuelles)>은 일련의 다른 주간지들(<르푸앵>, <렉스프레스>, <마리안>)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정부 부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슬람 혐오로 가득한 망상을 쏟아내며 공개적으로 대학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려 한다. 정치판에 극우 좌파(마뉘엘 발스와 ‘공화국의 봄’ 운동)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2년 전에 이 모든 것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파시즘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곧 “아랍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는 시위대를 볼 수도 있다.

 

분노에 휩싸인 프랑스

자본주의의 폐해로 이득을 보는 쪽은 왜 늘 극우파인 걸까? 답은 극우파의 주장이 지닌 본질적인 폭력성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기적 위기’ 상황에서 극우파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실제로 혹은 상상 속에서 개개인이 품고 있던 폭력성, 가학성, 원한, 굴욕과 같은 모든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사조로 정계에 합법적으로 등록된 극우파는 이런 정서들의 집합소다. 사람들은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해결책으로 폭력적인  정치 성향을 찾는다. 내면에 쌓인 스트레스를 터뜨릴 곳이 필요하다.

모든 타락의 구조적 원인으로 꼽히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경영자의 시각은 기발한 발상을 낳았다. ‘분노의 방(Fury-room)’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분노의 방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관리자들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부술 수 있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이다. 식기류나 사무용품 등 부술 수 있는 물건도 선택할 수 있다. 목적은 물건을 파괴함으로써, 내면에 쌓인 화를 비우는 것이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한 파괴행위는 화를 방출한다는 장점만 있을 뿐, 무력함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행위다. 

사람들은 이 가짜 사무실에서 상사의 사진이나 사무용품을 부순 후, 결국 진짜 사무실로 돌아간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장악하지 못한 개인은, 자신의 상황과 전적으로 무관한 물건에 화풀이를 하며 강한 폭력성을 외부로 터뜨린다. 화가 자신의 몸 안에서 폭발하면 정신적 고통은 궤양 등 다양한 신체질환으로 드러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낳은 분노의 방은 전국적인 현상이 됐다. 헬스클럽 등으로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직면한 유기적 위기로, 나라 전체가 분노의 방으로 변해 버렸다.

분노가 우리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다. 파시즘화 때문만이 아니다. 이를 막을 방법이 전무할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거대한 지진해일의 최전선을 상상해보자. 파도가 저 멀리서 시작돼 육지를 덮치기까지 시간은 걸리지만 피할 방도가 없다. 숙명이다. 변화의 진행과정도 이와 같다. 단단히 무장한 파도 앞에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파도는 점점 커져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혁명(Révolution)’이라는 단어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반추한다. 혁명은 원래 ‘공전’이라는 천문학 용어에서 유래했다. 행성의 궤도를 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천체의 회전을 일컫던 단어는 돌연 완전한 정치적 단절이라는 의미를 띠게 됐다. 

아렌트는 단어의 천문학적 어원에 불가피성 또한 내재해 있다고 설명한다. “폭동이 일어났는가”라고 묻던 루이 16세에게 라로슈푸코-리앙쿠르가 했던 대답,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에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우리는 ‘혁명’이라는 정치용어가 진보주의나 해방가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던 바다. 나치즘도 일종의 혁명이었지 않은가?

 

암흑 속에서 다가오는 내란, 봉기

오늘날 우리는 암흑 속으로 한걸음 내딛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고 우려한다. 벗어날 방도는 단 한 가지, 이 어둠을 모조리 누비고 갈 데까지 가서 신물이 날 정도로 즐거움(정신분석학적 의미로 쾌락이나 향유를 일컫는 ‘주이상스(Jouissance)’)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두려움 속에서 잠식됐던 사회는 깨어난다.

지금 언론은 2022년 대선을 르펜 대 마크롱의 구도로 만들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어느 한 편을 단호히 지지하지 않고 때로는 파시스트적 열성을, 때로는 그저 평소 같은 어리석음을 보인다. 1930년대처럼 최악의 ‘자유 언론’들은 현 상황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선거에서 누가 이길지, 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한번 예측해보자. 르펜이 이긴다면, 내전이 일어날 것이다. 마크롱이 이기면 ‘진흙투성이’ 봉기가 일어날 것이다. 

르펜이 이기면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 국가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구조적으로 숨겨진 차별이 아닌, 공개적인 차별 말이다. 특히 이슬람교도를 겨냥한 차별이 공공기관에서 성문화될 것이다(이는 마크롱 정부가 이미 접어든 노선이다). 193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차별받는 이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2005년에 일어난 ‘폭동’(정치성을 배제하려고 일부러 평가절하된 용어가 선택됐다)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인종차별로 뜨겁게 달아오른 나라에서 이런 저항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흥분한 언론은 끊임없이 인종차별을 부르짖고, 경찰은 자신들의 차별의식을 숨길 필요가 없어져서 기뻐할 것이다. 또한 무장한 군대가 동원되면서 알제리 전쟁이 재연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적군의 요새가 알제리가 아닌 파리 근교 라쿠르뇌브에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프랑스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다. 이 난장판의 중심에 놓인 국민들은 광기와 히스테리에 빠지고,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앞에 닥친 해일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크롱이 승자가 될 경우, 속도는 느리겠지만 전개는 비슷할 것이다. 주기가 달라지면서 전개 과정에도 차이가 생긴다. 이 경우 봉기, 그것도 ‘진흙투성이’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노란 조끼 운동가들과 결집했던 젊은 투쟁가, 분노한 노동자, 온갖 종류의 불안정한 상황에 내몰린 이들 바로 옆에서 제무르-드빌리에(에릭 제무르, 필립 드빌리에: 각각 극우 언론인, 정치인-역주) 지지자 <발뢰르 악튀엘>에 실린 글에 서명한 장군, 무장폭동을 선동하는 극우파 경찰,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 아래 뭉친 집합체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대조적인 세력이 한데 뒤섞여 진흙투성이 몰골을 한 봉기가 되는 것이다. 정치적 낭만주의가 확산되고, 타결책을 마련할 생각을 하면 골치가 아파온다. 르펜이라는 돌파구를 선택해 첫번째 가정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확실한 타결책이 있어야 한다.

 

극우가 우리를 떠미는 분노의 방

이 같은 미래를 면할 일말의 기회를 잡으려면 분석적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밀려오는 파시즘 해일의 최전선을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폭력적인 대안에 있다. 폭력과 대안, 모두 의미심장한 단어다. 먼저 폭력에 대해 논해보자. ‘유기적 위기’의 시기에 극우파가 던지는 충동적인 대안은 엄청난 비교 우위를 점한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검증이나 중재를 거치며 돌아갈 필요 없이 자신들의 사상을 관철할 지름길이 생긴다. 완전히 신기루일 뿐이라 해도 상관없다. 쉽게 찾을 수 있는 명분 한 가지를 골라 이에 집중하며,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해결책이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늘 가장 단순한 방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충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경우다. 이렇게 극우파는 즉각적, 독재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정책안을 유기적으로 구성할 힘을 끌어낸다. 하지만 아직 이 정도 수준의 카타르시스로는 대안이 나오기에 충분치 않다. 

바로 이때, 그들은 우리를 ‘분노의 방’으로 떠밀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뿐인 출구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제안, 새로운 대안이다. 그럴듯하며 전체를 아우르는 대안이다. 밀려오는 해일에 맞서 종신 임금이나 전 국민 생활보장 같은 공산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과연 터무니없는 짓일까? 다수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충분히 성공할 만한 안이다. 새로운 의미와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고용불안의 경험은 종신 임금으로, 노동의 가치 파괴를 겪었던 경험은 영리 재산을 해체하고 생산자에게 주권을 돌려줌으로써 승화된다. 이 같은 제안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사회조건이라 할 수 있는 노동조건과 직접 맞닿아 있다. 따라서 강력한 사회 원동력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대안은 보편적인 대의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큰 틀에서 정치적 재통합을 가져온다는 특성이 있다. 역사의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사회적 삶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극우파의 대안은 사회가 겪고 있는 무질서 상태 속에서 세를 불리고 있다. 기존의 가치가 해체되면서 사람들은 불명확한 질서를 따르길 거부한다. 원인 모를 사회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생긴다. 극우파의 대안은 이같이 모호하지만 갈급한 열망을 향해 손을 내밀며 진정제 역할을 한다.

그다지 새로울 일이 아니다. 극우파는 본래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위기상황에서 활짝 피어난다. 위기의 본질적 기원이 무질서이기 때문이다.(2) 도덕적 가치 전반을 받쳐주던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다. 보편적 가치를 지닌 정치 대안으로 무게중심을 다시 잡아줘야만 파시즘의 해일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따라서 급진좌파 진영의 인물들은 삼가는 미덕을 보여줄 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특히 특정 ‘방향’을 가리킬 만한 발언은 일체 피해야 한다. 이는 너무 독선적이고 앞서간 행동이기 때문이다. 좀 더 친숙하고도 예술적인 표현을 빌려오자면, 이는 자신들의 ‘몸짓’에 과도하게 도취한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제스처, 즉 몸짓이란 순수하고 자발적인 움직임,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가 없는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여겼다. 정치의 미래가 이와 비슷한 듯하다. 아감벤은 세상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고통받았고 온갖 권력이 집권할 채비를 마련했다며, 그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행동하자고 말한다.(3) 권력과 정부 기관에 관심을 끊자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의견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은 파시스트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같은 종류의 미학과 정치철학 때문에 급진좌파는 여러 방면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4) 현 시국에서 우리가 정치사상이 지닌 힘을 겉보기로만 판단한다면, 진실의 시간이 다가올 날이 머지않았다. 파시즘에 맞서는 ‘몸짓’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려는 파시즘적 해결책과 파시즘의 본질적 기원에 맞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반대 대안을 찾는 길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반자본주의적이며 반파시스트적인 사상의 본질, 바로 공산주의다.

 

대선을 앞둔 증오에 찬 언론공세

모두 좋은 생각인 듯 보이지만, 오늘날 이런 혁명이 일어날 조짐은 ‘몸짓’이 가져오는 효과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버린 만큼 더욱 그렇다.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2022년 대선에서부터 방향 전환을 시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좌파의 나라 프랑스를 사로잡은 광기 속에서 이 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상황은 곧 명확해질 것이다. 우경화된 좌파는 이미 대선에서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그들은 극우파 르펜이 집권하더라도 임기동안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일보 직전이다. 물론 “끝까지 가게 된다면” 5년의 임기는 빨리 지나갈 것이다. 1981년 공화국연합(RPR)이 미테랑에게 투표할 것을 은밀히 호소하며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우경 좌파는 멜랑숑이 실패하도록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좌파 총연합’을 촉구하는 순진한 이들이 있다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 자도, 이달고, 포르, 그리고 바이든을 프랑스 공산당(PCF)의 명예 당원으로 만든 루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모두가 우파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경찰의 파시스트적 위협 시위에 굽신거리며 치욕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우파 인물들과 함께 좌파 연합을 만든다는 것은 논리에 대한 도전이다. 좋든 싫든 간에 좌파에 남은 후보는 멜랑숑 하나다.

어쩌면 ‘성녀 니노’의 고난 같은 것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동방박사 사절단은 우리를 구하러 와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저명한 언론들은 그 발치에 웅크릴 날만을 기다린다. 그래도 선거에서는 질 것이다. 정당도 없이 홀로 탄 배일지라도 난파된 모든 우경 좌파를 잊지 않고 건져 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1구(다수 테러가 발생한 곳으로 바스티유 광장이 11구에 있다-역주)를 위해 시를 지어봤자 시골에서도, 노동자 계층에서도 반향을 일으키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은 우선 제쳐 두고, 경찰 시위가 거센 물줄기로 현장을 쓸어내자 이제 상황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됐다. 좌파 연합이나 단일 후보는 확실한 종말을 맞이했다. 멜랑숑이 대선에서 혼자 싸운다면, 그에 맞선 반(反)멜랑숑 총연합이 지배하는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연합의 일원으로 극우파(국민 연합), 우파(약진하는 공화국, 공화당), 우경 좌파(갈수록 우경화되는 사회당과 유럽 생태녹색당), 극우 좌파(발스, 공화국의 봄), 그리고 무엇보다 매체가 그곳에 있다. ‘가능성’이 있는 ‘좌파’라는 이중의 죄를 진 후보를 지독히 혐오하는 매체들은 1년 내내 계속되는 함정을 준비한다. 

지금부터 증오에 찬 언론의 공격을 주의하라! 선두에 나서는 것은 사기업보다 지독한 공공매체다. 자신들이 ‘좌파’라는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적어도 <프랑스 앵테르>, <프랑스 퀼튀르>의 경우는 그렇다. <프랑스 앵포>는 완전히 인사부와 소상공인, 경찰의 차지다). 그런데 멜랑숑은 이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이므로 언론의 증오에 찬 공격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할 것이다. 상황은 명백해졌지만 열기를 띠기엔 충분치 않다. 선거에서 거둘 성과를 떠나서, 멜랑숑이 할 말과 행동의 간극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다. 그 틈이 최소가 될지라도 불만을 품을 만한 이유가 생길 것이고, 우리는 그의 선거 캠페인을 가슴 졸이며 지켜볼 것이다. 그 길에 놓인 추락의 위험이 있는 수많은 장애물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위험으로 우리의 시야는 일시적으로 급격히 좁아졌다. 그리고 그사이 파시스트 연합이 등장했다. 국민 연합(RN), 공화당(LR), 그리고 약진하는 공화국(LREM), 이 세 정당은 이미 한데 뭉친 상태다. 대선을 준비하면서 동맹이 찢어진다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하나다. 한 토론에서 다르마냉은 르펜이 ‘이슬람 문제’에 대해 무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크롱은 다르마냉을 칭찬한다. 무른 태도란 ‘충분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사회당(PS), 유럽 생태녹색당(EELV)과 프랑스공산당(PCF)은 이데올로기 붕괴가 극에 달해 구조를 상실한 상태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이번엔 자신들이 뭉칠 차례라는 열망을 품은 채다. 누가 이 납땜질을 피해갈 것인가? 그것으로 이득을 볼 수는 있을까? 최악을 피할 다른 해결책이 있을까? 아직 대답하기 어렵다.

반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대위기의 시기에 늘 그랬듯, 역사는 후세의 기억을 남길 자리를 마련한다. 좋은 자리와 나쁜 자리가 있을 것이다. 자리 배분은 이미 시작됐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책임자, 유럽사회학연구소(CSE) 연구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La Malfaçon. Monnaie européenne et souveraineté démocratique 결함. 유럽 통화와 민주적 주권』(2014), 『D’un retournement l'autre 또 다른 전환을 향해』(2011), 『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Marx et Spinoza 자본주의, 욕망과 종속. 마르크스와 스피노자』(2010) 등이 있다.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경찰 시위 다음날, <프랑스 앵포>에 조르단 바르델라(국민 연합), <프랑스 퀼튀르>에 파트릭 뷔송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2) Frédéric Lordon, 『La condition anarchique. Affects et institutions de la valeur 무질서의 조건. 가치에 대한 정서와 제도』, Seuil, Paris, 2018.
(3) Giorgo Agamben, 『Karman. Court traité sur l’action, la faute et le geste 카르만. 행동에 대한 소론, 책임과 행동』, Seuil, 2018.
(4) Frédéric Lordon, 『Vivre sans? Institutions, police, travail, argent… 제도, 경찰, 노동, 돈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La Fabrique,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