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이 연금술을 만났을 때
‘연금술’의 꿈은 결코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 화학의 발달로 납을 금으로 바꾸겠다는 초보적 단계의 연금술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연금술 자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연금술의 핵심은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의 물질- ‘철학자의 돌’, ‘생명의 엘릭시르(Elixir·영약)’, ‘금단’(金丹) 등- 을 찾아내 그것으로 세상 만물을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바꾸고, 우리 몸 또한 영생불사의 법신(法身)으로 바꾸고, 종국에는 아예 우리 존재 자체를 신으로 바꿔버리는 것에 있다. 그런 신비의 물질 중 ‘만물 용액’(Alkahest)이란 게 있다. 세상 만물을 모두 녹일 수 있는 신비의 용액으로서, 파라켈수스는 이것을 신비의 ‘철학자의 돌’이라고 믿었다.
여러 개의 저축은행들이 무너졌다. 저축 ‘은행’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1%라도 높은 이자를 받아보려고 돈을 맡겼던 많은 동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와 건설 경기 하락, 이에 따른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실패가 원인이라고 신문에서는 떠들지만, 어르신들은 황당할 뿐이다. 월스트리트니 건설업이니는 고사하고 하물며 집 한 채도 없는 처지인데 그들의 알토란 같은 쌈짓돈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상당 부분의 해답은 바로 앞에서 말한 만물 용액을 이용한 21세기식 연금술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금융행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와 성격에 따라 여러 부문으로 철저히 나뉘었다. △노후의 연금을 해결해달라는 돈을 맡은 기관이라면 그에 맞는 방법으로 돈을 불려야지, 위험천만의 자산에다 단타매매를 하는 식으로 굴려서는 곤란하다. △국가경제의 산업구조을 개선하는 것이 목표인 돈을 굴리는 은행이 일수 찍는 사채꾼처럼 채무자를 매일 닦달하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상장이나 인수·합병 등 여러 위험이 따르는 금융활동에 종사하는 기관이 사람들의 쌈짓돈을 예금으로 받아 돈을 조달해서 안 된다 등. 또한 이런 각각의 활동들이 뒤섞여 혼란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 부문 사이에 튼튼한 ‘칸막이’를 만들어놓았다. 각 영역에 칸막이를 넘나들지 못하게 하는 여러 규제가 있고, 심지어 이자율까지 규제했다. 저축 은행의 전신인 상호신용금고의 경우 동네 주민과 영세상인의 돈을 받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기관이었기에 먼 지역의 대도시나 위험사업 등 아무 지역, 아무 곳에나 대출할 수 없었다. 돈으로 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 처지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돈이면 다 똑같은 돈이지 어째서 이 칸의 돈은 저 칸으로, 저 칸의 돈은 이 칸으로 못 움직인다는 것인가? 저 칸에서 큰 판이 벌어져 떼돈을 버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이 칸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하는 돈의 처지에서는 그 칸막이가 ‘웬수’ 같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칸막이를 없앨 수 있는 만물 용액을 개발했다. 다종다기한 금융행위를 ‘수익률’과 ‘리스크’라는 두 요인으로 환원해 적절한 자산 가격이 붙은 ‘금융상품’으로 바꿔버리는 금융공학 기술이다.
금융상품이라는 만물 용액
영세 상인 돈줄에서 투기 자본으로
금융공학과 자본화(Capitalization) 공식이라는 만물 용액을 이용하면 다양한 금융행위들은 이론적으로 하나의 시장으로 통일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금융 부문을 막아놓은 칸막이가 사라지고, 그 내부를 칭칭 얽어맨 규제도 대부분 철폐된다. 이것이 1970년대 중반, 특히 80년대부터 영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로 확산된 금융 탈규제화의 배경이다. 앨런 그린스펀의 말대로, 모든 금융행위자들은 ‘탐욕’과 ‘공포’에서 발군의 존재들이니 기대되는 수익이 얼마인지, 거기에 숨은 위험이 어떨지는 알아서 합리적으로 계산한다. 금융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존재다. 규제 따위는 필요 없다. 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하고, 금융시장을 통일시킨다.
그다음의 단계가 있다. 만물 용액으로 모든 금융행위를 하나의 뭉글거리는 액체 덩어리로 녹여버렸으니 그 액체 덩어리에서 실제로 금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파라켈수스가 만물 용액에서 다시 금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금융시장에서는 아주 단순명쾌하다. 액체 덩어리의 크기를 지속적으로 한없이 불려나가는 것이다. 금융시장이 비록 칸막이 없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해도 금융시장 전체의 크기가 불어나지 않는다면 투자대상도 투자자금도 그 양이 똑같으니, 어느 쪽에서 ‘대박’이 터진다고 해도 제로섬게임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시장의 크기를 키우려면 두 종류의 조처를 취해야 한다.
돈 되면 룸살롱에 1천억 대출
첫째, 들어오는 자금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조처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금융시장 바깥에서 움직이던 다양한 돈의 채널을 모두 금융 및 자본 시장으로 돌려버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 있던 많은 행위들이 ‘금융화’된다. 1970년대부터 연기금이 본격적으로 주식시장에 뛰어들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된 각종 뭉칫돈이 자본시장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내는 대학 등록금의 상당액은 ‘대학 펀드’가 되어 주식시장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동네의 상호신용금고도 저축 은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활동 지역과 활동 내용에 대한 제한이 대폭 축소됐고, 스스로의 재량으로 리스크를 판단해 수익률만 높으면 거의 무슨 행위든- 심지어 룸살롱에 1천억 원 대출까지, 나는 그 룸살롱의 사업 내용이 더 궁금하다-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저축은행이 약속하는 고금리는 동네 서민들의 쌈짓돈을 싹 빨아들였고, 저축은행은 높은 수익을 위해 이 돈을 건설 PF 대출 등의 분야에 부어댔다.
둘째, 그렇게 불어난 돈으로 투자할 대상도 불어나야 한다. 즉, 금융행위의 종류와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줘야 한다. 그래서 이전에는 언감생심 대출이나 투자 유치 등으로 돈을 조달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사회적 행위들이 각종 규제 완화와 적극적인 ‘금융화’ 정책을 통해 금융 및 자본 시장의 일부로 들어오게 된다. 들어오는 자금과 투자할 대상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가 일단 한번 ‘선순환’ 관계를 맺으면 만물 용액에 녹은 액체 덩어리는 이제 자기 동력으로 커나가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자본 및 금융 시장의 팽창은 이 두 가지 과정이 결합됐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팽창 속도는 놀라웠다. 커져만 가는 지구적 금융시장에서는 매일같이 도처에서 ‘대박’ 소문이 나고, 이렇게 되면 아무 생각 없던 이들도 벽장 속의 꼬깃꼬깃한 지폐까지 털어서 각종 자산시장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만사 무엇이든 ‘수익의 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로 고치는 조처와 정책은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모든 이들의 축복 속에 실현된다. 그렇게 될수록 사방에서는 더 많은 대박의 소문이 생겨나게 된다. 이하 무한 반복.
그리스의 감세에 부산 할배가 쪽박
대략 이런 과정이 우리가 1980년대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목격해온 만물 용액의 연금술이었다. 컴컴한 작업실에서 온갖 지저분한 물질을 만날 찌고 삶고 하던 찌질한 옛날의 연금술은 우아함에서도 효과에서도 감히 견줄 바가 못 된다. 아무리 봐도 원금 상환은 물론이고 이자도 제대로 낼 수 없을 것 같은 주택대출도 이 현대 연금술의 현란한 기술에 걸리면 순식간에 AAA 알짜 자산으로 둔갑해 대박을 친다. 이들은 옛날처럼 군주들의 비위를 맞추는 위치가 아니라, 아예 전세계의 정치·경제 구조를 호령하는 주인의 위치에 올라선다. 그 과정에서 액체 덩어리는 계속 팽창하고, 지구 곳곳의 별의별 사회적 활동들도 모두 금융상품으로 바뀌어 연결돼갔다. 그리스 부자들이 세금을 안 내면 프랑스의 은행들이 흔들리고, 그러면 다시 미국의 노동자들이 허리끈을 조여 매게 돼 한국의 건설업이 타격을 받고, 이 때문에 부산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의 쌈짓돈이 날아간다…. 다소 황당한 인과 사슬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최근 들어 예전처럼 금융체제 규제를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당분간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정치가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때문이다. 만물 용액은 파라켈수스가 사는 시대에서도 중대한 논리적 문제를 안고 있었으니, 그것을 ‘담을’(Contain), 즉 막아서서 통제할 그릇이 없다는 점이었다. 현대적 금융시장을 이용한 대박이라는 꿈이 현대 문명의 온갖 제도와 사유 관습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한, 사람들은 그 연금술을 불가능하게 하는 금융 규제에 선뜻 동의할 수도 없다. 몇 개의 저축은행들이 무너진 뒤에도 전체 저축은행 예금액은 거의 줄지 않았다. 눈앞의 위기를 보면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 1% 남짓한 저축은행의 ‘고금리’에 목매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피 지수가 크게 떨어지고 기관 투자가들까지 투매에 나섰건만, 그럴수록 ‘개인’들은 저가 매수라는 ‘대박’의 꿈을 안고 대규모로 주식을 사들인다.
만물 용액은 그릇까지 녹인다
러시아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을 답답해하지만, 아무도 감히 그것을 바꾸거나 떠나버릴 용기를 내지 못한다. ‘금융은 돈을 불리는 연금술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매개해주는 효율적인 사회적 기술일 뿐이다’는 말에 귀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다. 따라서 금융을 다시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성격과 목적에 부합하게 작용하는 제도로서 ‘묻어둬야 한다’는 정책 조처도 당분간 큰 지지를 얻기 힘들 것이다. 최소한 벚꽃나무숲의 나무가 몽땅 베어져 없어질 정도의 큰 위기가 닥칠 때까지는 말이다. 아, 그건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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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기빈
문화방송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2008), <자본주의>(2010) 등을 쓰고,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