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헌사

2021-07-30     마틴 스코세이지 | 영화감독, 프로듀서

예전에는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존 카사베츠의 최신작이 개봉되면, 영화팬들은 이런 영화를 보기 위해 열광적으로 극장에 몰려들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영화가 영상 엔터테인먼트가 되면서 그 마법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바치는 이 헌사를 통해 스코세이지 감독은 우리가 잃어버린 펠리니를 되찾고자 한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어깨에 논스톱 모션으로 설정한 카메라를 메고 그리니치빌리지의 번화한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한쪽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른 쪽 손에는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뉴욕 지하철 무료 신문)를 한 부 들고 있다. 청년은 약국, 식료품점, 아파트를 지나 코트 차림에 모자를 쓴 남자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자들, 쇼핑카트를 미는 사람들, 손을 잡은 커플들, 시인들, 음악가들, 술주정뱅이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간다. 

이 청년의 목표는 단 하나. 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Shadows)>과 클로드 샤브롤의 <사촌들(Les Cousins)>을 상영하는 예술극장에 가는 것이다. 그는 기억을 따라 5번가, 서점, 음반 가게, 녹음실, 신발 가게를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8번가 플레이하우스에 이른다. 이곳에서 <학은 날아가고(The Cranes Are Flying>와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가 곧 상영될 예정이다.

우리는 이 청년이 6번가에서 왼쪽으로 꺾어 여러 식당과 술집, 신문 가판대, 담배 가게를 지나 길을 건너, 안제이 바이다의 <재와 다이아몬드(Ashes and Diamonds)>를 상영하는 웨이벌리 극장 앞에 이를 때까지 계속 그를 주시했다. 청년이 워싱턴스퀘어 남쪽에 있는 ‘케틀 오브 피시(Kettle of Fish)’ 뮤직바와 저드슨 기념 교회를 지나 4번가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자, 남루한 차림새의 한 남자가 아니타 에크버그의 사진과 “브로드웨이 대극장에서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개봉! 지정석 티켓 사전 판매!”라는 문구가 인쇄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청년은 라과디아 광장까지 걸어가서 ‘빌리지 게이트’와 ‘비터 엔드’를 지나,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À travers le miroir)>, <피아니스트를 쏴라(Tirez sur le pianiste)>, <스무 살의 사랑(L’amour à vingt ans)>이 상영되고 있는 ‘블리커 스트리트 시네마’에 다다른다. 게다가 이 극장에서는 <밤(La Notte)>이 3개월에 걸쳐 상영 중이다! 청년은 트뤼포의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빌리지 보이스>의 영화 섹션을 펼쳐든다. 

그러자, 엄청난 보물들이 튀어나와 청년을 둘러싸고 빙글빙글 돈다. <겨울 빛(Winter Light)>… <소매치기(Pickpocket)>… <세 번째 사랑(L'oeil du malin)>… <더 핸드 인 더 트랩(La mano en la trampa)>… 앤디 워홀 특별전… <돼지와 군함(Pigs and Battleships)>… 케네스 앵거와 스탠 브래키지의 필름 아카이브 엄선작… <밀고자(Le Doulos)>… 그리고 이 보물들 중에서도 빛나는 것은 조셉 레빈이 소개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8½)>! 청년이 영화 섹션을 보는 동안 카메라는 흥분의 파도를 타고 오르듯, 청년과 줄을 서서 기다리는 군중들 위로 솟아오른다.

 

‘콘텐츠’에 밀린 영화 예술

오늘날 영화 예술은 조직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소외되고, 비하되면서 ‘콘텐츠’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축소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형식’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의미로만 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미디어 회사를 인수하면서 점차 ‘콘텐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콘텐츠’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고양이 동영상, 슈퍼볼 광고, 슈퍼히어로 시리즈, 드라마 에피소드 등 모든 영상 매체에 적용되는 비즈니스 용어가 됐다. 아마존이 오프라인 매장을 추월한 것처럼,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하기보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관람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지면서, ‘콘텐츠’는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보다는 가정 내 시청(Home-viewing)과 연관되는 단어가 됐다. 

이런 변화는 나를 포함한 영화 제작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미 시청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다음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이런 제안이 단일 카탈로그나 장르에 제한될 경우, 이는 영화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큐레이팅은 비민주적이지도 ‘엘리트주의적’(이 말은 이제 의미가 퇴색된 듯하다)이지도 않지만, 좋아하는 것과 영감을 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은 너그러운 행위다. <크라이테리언 채널>이나 <무비> 같은 최고의 스트리밍 플랫폼과 TCM 같은 기존 매체는 큐레이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실제로 큐레이팅되고 있다. 알고리즘은 시청자를 소비자로 취급하는 계산법을 기초로 작동된다.

1960년대에 ‘그로브 프레스(Grove Press)’의 아모스 보겔 같은 배급자가 선택한 방법은 단순히 너그러운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극장주이자 프로그래머였던 댄 탤벗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 베르톨루치의 <혁명 전야(Prima Della Rivoluzione)>를 배급하고자 ‘뉴요커 필름스’를 설립했다. 그 영화를 배급하는 것은 확실히 안전한 배팅은 아니었다. 이런 배급사들, 큐레이터들, 극장주들의 노력 덕분에 미국으로 수입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놀라운 순간을 선사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을 제공하는 압도적인 장소에서부터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공통의 열망에 이르기까지, 그 특별한 순간을 가능케 했던 상황은 이제 옛말이 돼 버렸다. 

내가 그 시절을 자주 언급하고 회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내가 그런 시절에 살았고, 그 시절에 젊었고, 그 모든 것에 열려 있어서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언제나 ‘콘텐츠’ 그 이상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 세계에서 그런 영화들이 개봉되고, 사람들이 서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매주 예술의 ‘형식’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곤 하던 그 시절이 바로 그 증거다. 본질적으로, 이 예술가들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끊임없이 씨름했으며, 다음 세대 영화에 그 질문의 답을 넘겼다. 어느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단절된 채로 작업하지 않고, 모든 이가 다른 모든 이에게 반응하면서 서로에게 자양분을 줬다. 

장 뤽 고다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잉마르 베리만, 이마무라 쇼헤이, 니콜라스 레이, 존 카사베츠, 스탠리 큐브릭, 아녜스 바르다, 그리고 앤디 워홀은 각각 새로운 카메라 움직임과 새로운 컷으로 영화를 재창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손 웰스, 로베르 브레송, 존 휴스턴, 루키노 비스콘티 등 더욱 유명한 영화감독들은 주위의 넘치는 창의력 덕택에 더욱 활기를 얻어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펠리니적인’이라는 수식어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의 감독, 영화의 대명사이자 영화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한 예술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곧 어떤 스타일,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를 즉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사실상 그 이름은 하나의 형용사가 됐다. 이를테면 파티, 결혼식, 장례식, 정치적 집회의 이상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아니면 지구 전체의 광기를 묘사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그저 ‘펠리니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60년대에 페데리코 펠리니는 영화감독 이상의 존재가 됐다. 채플린과 피카소, 비틀즈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존재였다. 그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모든 영화는 은하계를 가로질러 하나의 웅장한 몸짓으로 결합됐다. 펠리니의 영화를 보는 것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거나 로렌스 올리비에의 연기, 누레예프의 춤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의 영화에는 심지어 <펠리니의 사티리콘>, <펠리니의 카사노바>등의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 그에 필적할 유일한 존재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었으나, 브랜드나 장르가 완전히 달랐다. 펠리니는 영화의 거장 그 자체였다. 

이제 펠리니가 떠난 지 30년이 다 돼 간다. 그의 영향력이 모든 문화에 스며든 것처럼 보이던 때는 오래 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해 스트리밍 플랫폼 <크라이테리언>이 펠리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시한 박스 세트인 <이센셜 펠리니(Essential Fellini)>가 더더욱 반갑다.

펠리니의 절대적 시각 기술은 1963년 <8과 1/2>로 나타났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연기한 펠리니의 분신 ‘귀도’의 감정 변화와 내밀한 생각에 맞춰지며 현실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맴돌고, 떠다니고, 날아다닌다. 내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본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은 볼 때마다 이런 의문을 선사한다. 이걸 어떻게 해냈지? 작은 움직임, 몸짓, 돌풍이 어떻게 이처럼 전체 그림에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모든 것이 꿈에서처럼 기이하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모든 순간이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을까?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사운드가 큰 역할을 했다. 펠리니는 이미지만큼이나 사운드를 활용하는 데도 창의적이었다. 이탈리아 영화관은 해외에서 수입된 모든 영화의 이탈리아어 더빙을 의무화한 무솔리니 시대에 시작된 ‘논싱크(Nonsync)’ 사운드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이탈리아 영화에서, 심지어 몇몇 위대한 영화에서마저 사운드와 실체가 분리된 느낌은 관객들로 하여금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펠리니는 이런 방향 감각 상실을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소리와 장면은 서로 보완하고 강화해, 영화적 경험 전체가 음악처럼, 혹은 하나의 거대한 두루마리처럼 펼쳐진다. 

오늘날 우리는 최신의 혁신 기술과 그런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매료된다. 그러나 가벼워진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스티칭, 디지털 모핑 등 ‘제작 후 기술’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체 그림을 만들어내는 감독의 선택이다. 펠리니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모든 요소가 중요하다. 만일 펠리니 시대에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가 있었다면, 그가 열광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펠리니의 미적 선택의 엄격함과 정확성이 가벼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펠리니가 ‘네오리얼리즘’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펠리니는 여러 측면에서 극과 극을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런 선택은 흥미롭다. 펠리니는 그의 멘토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네오리얼리즘을 창안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전율이 인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전 세계 많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특징짓는 창의성과 탐험 정신도 그 바탕이 된 네오리얼리즘이 없었더라면 번성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네오리얼리즘은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순간에 반응한 영화예술가들을 일컫는 말에 가깝다. 20년간의 파시즘이라는 잔인함과 공포와 파괴를 겪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로셀리니, 데 시카, 비스콘티, 자바티니, 펠리니의 영화에서는 미학과 도덕과 영성이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얽혀 있어 전 세계인의 눈앞에서 이탈리아의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펠리니는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 <로마(Roma)>, <무방비 도시(Open City)>, <파이사(Paisa)>를 공동집필했다(일설에 의하면, 로셀리니가 아팠을 때 펠리니가 이 영화의 피렌체 촬영분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적(The Miracle)>은 공동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까지 했다. 이후 펠리니는 로셀리니와 다른 길을 갔지만, 두 사람은 애정과 상호존중의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펠리니는 사람들이 ‘네오리얼리즘’이라 부르는 것이 로셀리니의 영화에만 존재했다고 말한 바 있다. 

 

13세 소년에게 다가온 충격, <라 스트라다>

펠리니가 한 말은 로셀리니가 단순함과 인간미에 대한 깊고 끈질긴 신뢰를 보여준 유일한 감독, 삶 자체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삶 자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한 유일한 감독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물론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Bicycle Thieves)>과 <움베르토 디(Umberto D.)>, 비스콘티 감독의 <흔들리는 대지(La Terra Trema)>는 예외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반면 펠리니는 스타일리스트이자 우화 작가, 마술사, 이야기꾼이었지만, 로셀리니로부터 물려받은 살아있는 경험과 윤리의 기초는 그의 영화 정신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나는 펠리니가 예술가로서 성숙하면서 한창 꽃을 피우던 시기에 자랐다. 그런 만큼, 그의 수많은 영화는 내게 매우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13세 때 떠돌이 차력사에게 팔려간 젊은 여인의 이야기인 <라 스트라다(La Strada)>를 봤다. 그 영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내게 충격을 줬다. 그 영화는 전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중세 발라드처럼, 혹은 더 멀리 고대 세계에서 온 것처럼 전개됐다. <달콤한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파노라마에 가깝다는 점, 현대 생활과 영적 단절의 장대한 퍼레이드라는 점만 빼고. 1954년에 (그리고 2년 후 미국에서) 발표된 <라 스트라다>는 대지, 하늘, 천진함, 잔혹함, 애정, 파괴 등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한, 한 폭의 우화였다.

이 영화는 내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라 스트라다>를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으로 처음 봤다. 내 조부모님은 이 영화가 고국에서 겪었던 고난을 보여주는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하셨다. <라 스트라다>는 이탈리아에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의 배신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당시 많은 이탈리아 영화들이 네오리얼리즘을 기준으로 평가됐다). 또, 우화의 틀 안에서 그런 가혹한 이야기를 설정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었다. 

어쨌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정말로 펠리니다운 영화였다. 펠리니는 이 영화를 찍을 때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공을 들인 듯했다. 촬영 대본은 6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상세했고, 극도로 어려운 제작 과정을 마칠 때쯤 펠리니는 심리적으로 쇠약해져 생애 첫 정신분석을 받아야 했다. 이 영화는 펠리니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마음에 가장 소중하게 남아있던 영화이기도 하다.

로마의 한 매춘부의 삶을 담아낸 환상적 시리즈 <카비리아의 밤(Nights of Cabiria)>은 펠리니가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밥 포스의 영화 <달콤한 자선(Sweet Charity)>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영화다. 이 영화로 펠리니의 명성은 확고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출현한 작품이 <달콤한 인생>이다. 이 영화가 막 개봉됐을 때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에서 그 영화를 관람한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달콤한 인생>은 1961년 아스토르 픽쳐스에 의해 배급돼 브로드웨이의 한 대극장에서—마치 <벤허Ben-Hur)> 같은 성서적 서사를 개봉할 때처럼—우편으로 사전 예약을 받는 고가의 좌석 지정 티켓이 있어야 관람할 수 있는 갈라 스크리닝으로 상영됐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조명이 꺼지고 장엄하고 어마어마한 영화의 프레스코가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인식의 충격을 체험했다. 

여기에 핵 시대의 불안을, 그리고 무엇이든 누구든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표현한 한 예술가가 있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지만, 한 편으로는 영화 예술에 대한, 그리고 결국 삶 자체에 대한 펠리니의 사랑을 목도하면서 짜릿함도 느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로큰롤에서는 밥 딜런의 첫 번째 일렉트릭 음반과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White Album)>, 롤링 스톤스의 <렛 잇 블리드(Let It Bleed)>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불안과 절망에 관한 작품들이지만, 스릴있고 초월적인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우리가 10년 전 로마에서 <달콤한 인생>의 복원을 발표했을 때 베르톨루치는 특별히 참석을 약속했다. 당시 베르톨루치는 휠체어를 타고 다닐 만큼 몸이 불편했음에도, 꼭 참석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베르톨루치는 내게 <달콤한 인생>은 자신이 처음으로 영화계에 눈을 돌리게 만든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그런 사실을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달콤한 인생>은 문화의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는 충격파와도 같은 짜릿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므로.

 

<비텔로니(I Vitelloni)>와 <8과 1/2>

펠리니의 작품들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작품은 <비텔로니(I Vitelloni)>와 <8과 1/2>이다. <비텔로니>는 나 자신의 경험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매우 현실적이고 소중한 무언가를 포착한 영화며, <8과 1/2>은 영화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재정립하게 만든 영화다.

1953년 이탈리아에서 개봉됐고 3년 후 미국에서 개봉된 <비텔로니>는 펠리니의 세 번째 영화이자 진정으로 위대한 그의 첫 영화였다. 이 영화는 또한 펠리니의 가장 사적인 영화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펠리니가 자란 도시인 리미니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20대의 다섯 친구의 삶이 일련의 장면들로 펼쳐진다. 알베르토 소르디가 연기한 알베르토, 레오폴도 트리에스테가 연기한 레오폴도, 프랑코 인테르렝기가 연기한 펠리니의 분신 모랄도, 펠리니의 친동생인 리카르도 펠리니가 연기한 리카르도, 그리고 프랑코 파브리지가 연기한 파우스토. 이 다섯 친구는 포켓볼을 치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사람들을 놀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원대한 꿈과 계획이 있다.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부모들도 이들을 그렇게 대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들은 내 삶의 일부이자 내 이웃의 일부였다. 심지어 나는 그들에게서 같은 바디 랭귀지와 유머 감각을 알아봤다. 사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는 모랄도가 느끼는, 탈출하고픈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펠리니는 미성숙함과 허영심을 보이고, 지루함과 슬픔을 느끼고, 그 다음에 금방 기분 전환할 거리를 찾고, 그 다음에는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그들의 그 모든 감정과 태도를 아주 잘 포착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따뜻함, 우정, 농담, 슬픔, 절망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서정적이고 씁쓸한 영화 <비텔로니>는 내가 찍은 <비열한 거리(Mean Streets)>에 핵심적 영감을 준 영화다. 이 영화는 또한 고향에 관한, 누구나의 고향에 관한 훌륭한 서사다.

<8과 1/2>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절 내가 알고 있던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모두 터닝 포인트, 즉 각자의 시금석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는 <8과 1/2>이 그런 영화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당신 같으면 세계를 강타한 <달콤한 인생> 같은 영화를 만든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모두가 당신의 말 한마디에 매달리고 당신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밥 딜런이 1960년대 중반 자신의 일곱 번째 앨범 <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를 발표한 후 겪은 일이기도 하다. 

펠리니와 딜런은 같은 상황에 처했다.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 이들을 이해한다고 믿는 사람들, 심지어 이들이 자신의 소유라고 믿는 사람들까지. 그 결과 이들은 압박을 느꼈다. 대중의 압박, 팬들의 압박, 비평가들과 적들(팬들은 종종 적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의 압박. 더 많이 생산해내야 한다는 압박. 더 나아가라는 압박.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압박. 자기 자신에 대한 압박.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딜런과 펠리니가 찾은 해답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딜런은 토마스 머튼이 말한 영적 단순함을 추구했고, 우드스탁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 그것을 발견했다. 우드스탁에서 딜런은 <더 베이스먼트 테입스(The Basement Tapes)>를 녹음하고 존 웨슬리 하딩의 노래를 썼다. 펠리니는 1960년대 초반의 자신의 상황에서 시작해 자신의 예술적 우울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펠리니는 미지의 영역인 자신의 내면세계로의 위험한 탐험을 시작했다. 영화에서 펠리니의 분신인 귀도(Guido)는 영화감독에게 있어서 ‘작가의 벽’과 같은 슬럼프를 겪고 있는 유명 감독이다. 

귀도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평화와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나선다. 그는 호화로운 스파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 그곳에서 그의 내연녀, 아내, 영화 제작자, 배우 지망생들, 제작 스태프, 팬들, 행인들, 스파 고객들이 그에게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들 중 한 평론가는 귀도의 새 대본에 “핵심 갈등이나 철학적 전제가 없다”라며 그 대본은 “일련의 불필요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압박감은 점점 심해지고, 어린 시절의 기억, 열망, 환상이 밤낮 없이 그를 괴롭히는 가운데, 그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왔다 사라지곤 하는 자신의 뮤즈가 “질서를 창조”하기를 기다린다.

 

<8과 1/2>은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표현

<8과 1/2>은 펠리니의 꿈으로 짠 태피스트리다. 꿈에서처럼,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견고하고 또렷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떠다니고 일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톤은 계속 거칠게 바뀐다. 펠리니는 실제로 관객을 놀라게 만들고 경계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냈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바로 ‘창작과정 자체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기본적으로 펠리니가 관객의 눈앞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펠리니가 이뤄낸 것에 근접한 이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창조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이미지의 유연한 속성을 모든 것이 잠재의식 수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지점까지 확장시키는 대담함과 자신감을 보였다. 가장 중립적으로 보이는 프레임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명이나 구도에 귀도의 의식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잠시 후, 관객은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 꿈속에 있는 것인지,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평범한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려는 시도조차 멈춘다. 그리고는 펠리니 스타일의 권위에 굴복하면서 펠리니와 함께 길을 잃고 방황하고자 한다.

영화는 귀도가 목욕을 하다가 추기경을 만나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장면은 마치 신탁을 찾아 지하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 우리 모두의 기원인 진흙으로 돌아가는 장면과도 같다.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불안해하고, 최면에 걸린 듯 떠다니면서, 줄곧 피할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하려는 듯 귀도가 욕탕으로 한발 한발 내려간다. 우리는 계속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그의 시선에서 본다. 어떤 이는 추기경의 환심을 사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어떤 이는 청탁을 하기도 한다. 그는 증기로 가득 찬 대기실에 들어가 추기경에게 다가간다. 그가 옷을 벗는 동안 추기경의 수행원들은 모슬린 베일을 펼쳐 그를 가려준다. 우리는 그를 그림자 윤곽으로만 볼 뿐이다. 

귀도가 추기경에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간단명료하고 잊을 수 없는 대답을 한다. “왜 행복해야 하나요? 당신의 임무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누가 말했나요?” 이 장면의 각 샷과, 카메라와 배우 사이에 있는 무대적, 안무적 요소들은 매우 복잡하다. 펠리니가 그런 결과를 얻고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스크린에서 그 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만큼 매끄럽게 처리됐다. 내게는 그 추기경과 함께 관객도 <8과 1/2>의 놀라운 진실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펠리니는 음악으로도, 소설로도, 시로도, 춤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오직 영화로만 존재할 수 있는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8과 1/2>의 개봉 당시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고, 그 여파는 매우 강렬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했고 몇 시간이고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는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는 못했다. 꿈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꿈의 논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영화에는 확실한 결말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난감해했다. 고어 비달은 펠리니에게 “프레드, 다음번에는 꿈은 좀 줄이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8과 1/2>에서는 결말이 없는 것이 맞다. 예술적 과정에도 결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 해냈다고 생각되는 순간, 시지프스처럼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시지프스가 깨달은 것처럼, 바위를 계속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뿐이다.

<8과 1/2>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폴 마주르스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릭스(Alex In Wonderland)>에 큰 영감을 줬는데, 펠리니는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우디 앨런의 <스타더스트 메모리즈(Stardust Memories)>, 밥 포시의 <올 댓 재즈(All That Jazz)>,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Nine)>도 <8과 1/2>의 영향을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8과 1/2>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봤다. 그리고 그 영화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일일이 말할 수조차 없다. 펠리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술가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예술을 창조해야 할 엄청난 필요성을 보여줬다. <8과 1/2>은 내가 아는 영화들 중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영화다.

 

‘무솔리니 시대 이탈리아 삶의 초상화’

<달콤한 인생>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어려운 일이다. <8과 1/2>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펠리니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중편 영화 <토비 대밋(Toby Dammit)>—이 영화는 <죽음의 영혼(Spirits of the Dead)>이라는 3부작 옴니버스 영화의 마지막 편이다—으로 자신의 환각적 이미지를 면도날처럼 예리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 영화는 지옥으로의 본능적 하강을 보여준다. <펠리니의 사티리콘(Fellini Satyricon)>에서 그는 전례 없는 어떤 것을 창조했다. 바로 펠리니가 “반전의 공상과학 소설”이라 불렀던 고대 세계의 프레스코화다.

파시스트 시대 리미니를 배경으로 한 펠리니의 반자전적 영화 <아마코드(Amarcord)>는 그의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덜 대담하긴 하지만 비범한 비전으로 가득 찬 작품으로(나는 이탈로 칼비노가 이 영화를 ‘무솔리니 시대 이탈리아의 삶의 초상화’라고 예찬한 것이 마음에 든다), 지금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영화로 꼽힌다(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펠리니 영화들 중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마코드> 이후 펠리니의 모든 영화에는, 특히 <펠리니의 카사노바(Fellini’s Casanova)>에는 번득이는 파편이 있었다. 이 영화는 단테의 가장 깊은 지옥의 원보다 더 차가운, 얼음처럼 차가운 영화이며, 놀랍고도 과감하게 양식화돼 있지만 진정 금지된 경험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펠리니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은 나를 포함한 전 세계 많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전환점인 듯했다.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우리 모두가 느꼈던 동지애가 무너지는 듯했고, 모두가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자신만의 섬이 된 듯했다.

나는 페데리코를 친구라고 부를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70년, 내가 영화제 발표작으로 선정된 단편영화 몇 편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갔을 때였다. 나는 펠리니의 사무실에 연락했고 30분 가량의 시간을 배정 받았다. 그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친절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첫 로마 여행의 마지막 날을 그와 시스티나 대성당에 할애하기로 했다고 말하자 그는 웃었다. 옆에서 그의 조수가 말했다. “이것 봐요, 페데리코. 당신은 지루한 기념물이 됐어요!” 나는 그가 결코 지루하지 않은 사람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라자냐를 잘하는 레스토랑이 어디 있냐고 묻자 그가 훌륭한 레스토랑을 추천해줬던 기억이 난다. 펠리니는 어느 곳이든 최고의 레스토랑을 알고 있었다.

몇 년 후, 나는 한동안 로마에 머물기로 결정하면서, 펠리니를 꽤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쇼맨이었고 그의 쇼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영화감독으로 영화를 찍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한 번에 수십 개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여인의 도시(City of Women)> 세트장에 모시고 갔다. 그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달래고, 애원하고, 연기하고, 조각하고,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아주 작은 세부사항까지 조정해가면서, 그 논스톱 모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해나갔다. 우리가 촬영장을 떠날 때 아버지는 “펠리니와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사진 찍으셨어요!”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진행돼서 부모님은 사진을 찍은 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펠리니의 말년에 나는 그가 미국에서 그의 영화 <달의 소리(La Voce Della Luna)>를 배급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작자들과 온갖 문제에 부딪혔다. 그들은 펠리니적인 화려하고 과장된 것을 원했지만 펠리니는 그들에게 훨씬 더 명상적이고 어두운 것을 줬다. 어떤 배급사도 그 영화에 손대려 하지 않았다. 나는 뉴욕의 주요 독립극장을 포함해 어디에서도 그 영화를 상영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을 받았다. 오래된 영화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작한 마지막 영화는 새 영화였다. 그 후 나는 펠리니가 계획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자금 조달을 도왔다. 배우, 촬영 감독, 프로듀서, 로케이션 매니저 등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초상화 시리즈였다. (나는 이 에피소드의 초안에서 내레이터가 야외 촬영장을 찾을 때 확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세트장에서 대형 레스토랑이 얼마나 가까운가’  라고 설명하던 것을 기억한다.) 

 

펠리니의 영화는 ‘시네마’

안타깝게도 펠리니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그와 전화 통화를 했던 때가 기억난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희미했다. 나는 그가 소멸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놀라운 생명력이 소멸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슬펐다.

모든 것이 변했다. 영화도, 영화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물론 한때 신처럼 우리의 위대한 예술형식을 지배했던 고다르, 베리만, 큐브릭, 펠리니 같은 예술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영화를 돌보기 위해서 더 이상 오늘날처럼 영화산업에만 의존할 수 없다. 대중오락산업이 된 영화산업에서 강조점은 언제나 ‘비즈니스’라는 단어에 있으며, 영화의 가치는 언제나 주어진 자산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르나우의 <일출(Sunrise)>에서 펠리니의 <라 스트라다>를 거쳐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의 위대한 걸작들은 이제 동결 건조돼, 스트리밍 플랫폼의 “예술 영화” 수영 레인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다. 영화와 영화의 역사를 아는 우리들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들의 현재 법적 소유자들에게 이 영화들이 ‘이용당한 다음에 창고에 처박히는 단순한 재산’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이 영화들은 우리 문화의 가장 위대한 보물 가운데 하나며 따라서 그에 맞게 취급돼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영화이고 무엇이 영화가 아닌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에 있어 페데리코 펠리니는 좋은 출발점이다. 펠리니의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펠리니의 영화는 ‘시네마’라는 것이다. 펠리니의 작품은 예술형식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마틴 스코세이지 Martin Scorsese

뉴욕 출신의 영화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 <셔터 아일랜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등 20여 편의 영화와 10편 이상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택시 드라이버>(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디파티드>(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미국의 대표적 영화감독이다. 최근작으로 <아이리시맨>(2019), <도시인처럼>(2020) 등이 있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