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진보주의자들의 ‘뒤틀린 노멀’

트럼프 이후 히스테리적 음모론의 여파

2021-07-30     토머스 프랭크 | 역사학자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임기는 끝났어도, 그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호명하는 등 후폭풍이 여전하다. 이 전직 부동산업자의 반대자들은 트럼프를 히틀러에 비유하며, 그를 지지하는 행위는 미국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런 극단적인 비유의 의도는 무엇일까?

 

대체 도널드 트럼프는 얼마나 나쁜 대통령이었을까? 이는 지난 5년 동안 미국문화를 광기로 뒤덮은, 히스테리적 언어들을 분석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그는 형편없는 지도자였다. 대통령의 직분에 대해 무지했으며, 편견과 자기도취에 빠져 공감 능력이 결여된 나르시스트였다. 또한, 뻔한 거짓말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선동가였고 노동자를 위하는 척했다. 미국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은 물론 지지자들의 부를 늘렸다. 민간 사업자들이 자기들 원하는 대로 규제법을 만들도록 용인했다. 선거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지지가 패배할 경우, 무조건 부정선거의 결과물로 간주했다.

사실 트럼프의 언행은 지난 50년 동안 무대에 올랐던 많은 정치인들의 언행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대통령 직위를 이용해 파괴적 일탈 행위를 일삼았던, 트럼프보다 더했던 이들도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대공황 이후 설립된 금융규제 시스템을 무력화시켰고 독과점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는 노조의 힘을 빼앗고, 심지어 미국의 대외정책을 민간업자들에게 맡기려 시도한 적도 있다. 조지 W. 부시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근거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고, 내국인을 상대로 한 감시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리처드 닉슨?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공화당이 오랜 시간 꿈꿔왔던 목표를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그들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 반면, 이에 반해 트럼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능했다. 이해하지도 못한 자신의 권한에 대해 화를 낸 바보였다. 자신의 세금부담을 줄이고자 의회를 움직였고 재임 중 수많은 공화당 배경의 연방 판사들을 임명했다. 

하지만 막강한 권한을 가진 최고책임자들이 만들어냈던 전통적인 결과물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실체적 국가위기를 가져온 코로나19 전염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020년 여름 미국의 각 도시에서 저항의 물결이 시작되자 그는 고작 언론을 탓했다. 표현의 자유에 적개심을 품었던 트럼프였지만, 정작 그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다가 결국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검열되는 수치를 당했고, ‘영구 계정 퇴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트럼프를 비난한 책만 1,200여 권

이런 모든 상황을 포함해, 지난 5년 동안 미국에서 나타난 정치적 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2016년부터 올해 초까지 미국의 수많은 지성인들은 책과 각종 라디오 및 TV 채널을 통해 다음과 같이 트럼프를 묘사했다. 권위주의적 독재자, 폭군, 핵에 미친 전쟁광, 파시스트, 나치 그리고 히틀러 이래 최악의 국가지도자. 과장된 측면이 있는 이들의 평가는, 마치 주도권 다툼하듯 자극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지난 5년의 상황에 대해 정통 좌파적 입장을 취하거나 다른 해석을 내린다는 것은 용인될 수도 없었고, 그런 행위는 앞날을 가로막는 일이었다. 그 과장과 흥분, 지성인으로서 광풍처럼 불어닥친 ‘히스테리’를 거부하는 것은 침묵과도 같았다.

‘이 히스테리 세상’을 특징짓는 뉴스 스토리를 살펴보자. 바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에 러시아 정보기관의 공작, 러시아 스파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언론사들 중 대다수는 한 번 이상 트럼프를 “꼭두각시 후보(Manchurian Candidate)”라고 다룬 적이 있다. 모두 히스테리의 결과물이었다. 러시아의 미국대선개입이라는 음모론적 시각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탈레반 측에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죽이라고 했다는 기사도 오보였다.

반(反)트럼프 시각의 여타 기사들도 엄중하게 잘못된 것들이 수십 가지에 달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맷 타이비는 이렇게 지적한다. 트럼프의 폭탄성 발언은 말도 안 되는 뉴스거리였지만 빠르고 연속적으로 등장했다. 그 하나하나의 스토리가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관중에게는 트럼프 히스테리로 작동했다. 시시비비를 가릴 틈도 없이 빠르게 잊혔고, 다음날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스토리들이 다시 이어졌다. 이것이 트럼프 시대가 가져온 뉴스 매체의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지켜야 하는 것’이 돼버린 ‘노멀’

지난해 8월,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재임 중 그를 비난하는 내용의 책이 1,200권 이상 출간됐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4년 동안 그는 주류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케이블 뉴스 채널들은 트럼프의 망동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으며, 또 자국 내에서 지명도가 좀 떨어지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취재는 더더욱 무시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언론사들에 극렬 트럼프 지지단체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매우 흡족한 사건이었다. 트럼프에 반기를 드는 것이 뉴스 매체의 일상적인 목적이 돼버렸다. 트럼프 시대 인터넷 풍자(meme)가 그런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노예, 유대인 학살이 있었던 시대, 민권운동 시대를 떠올렸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와의 전쟁은 세상을 단순화했고, 모든 것을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윤리 문제로 덮었다. 아마존 독자 리뷰에 나온 것처럼 언론사들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진실공방전”에서 최전선의 영웅처럼 대접받았다. 정치를 다루는 언론매체에는 성공적인 상품 출시의 기회였다. 트럼프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책, 신문, TV 광고들이 속속 팔려나갔다. 트럼프 백악관 대변인실이 발표한 성명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정밀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반면 진보진영측의 히스테리(과장과 흥분) 현상은 거의 걸러지지 않았다. 트럼프 시대를 기록한 문화사적 측면으로 볼 때, 트럼프의 히스테리만큼이나 진보진영의 히스테리도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 진보진영의 히스테리, 그들의 생각과 우려가 뉴욕의 큰손들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됐다. 그들은 미국을 주도하는 사회계층의 생각과 걱정을 대변했다. 이들은 부유하고 교육의 혜택을 받은 전문가 그룹이다. 지난 수십 년, 어려움 없이 살아온 수백만 명에 속하는 특권층이다. 트럼프는 무대를 떠났지만, 그를 경멸했던 이 화이트 컬러 계층은 승리에 취해있다. 오늘날 그들은 실리콘 밸리와 금융계, 학계, 언론계, NGO,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에 동참해온 기업들에 퍼져있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관이 주도하는 세상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히스테리가 야기한 문제는 더 중대하다. 트럼프 시대는 속칭 서민의 편이라는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환멸로 시작됐다. 이들이야말로 고학력 엘리트들의 말을 외면하고 미국의 권위주의를 몰고 온 장본인들이다. 결국 싸움은 전문직 계층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힘 있는 기업은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자신들이 얼마나 유색인종을 고상하게 떠받드는가를 알리고 있으며, 뉴스 미디어는 앵무새처럼 사실만을 전달하는 객관주의 보도관행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 다른 계층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정치적으로 일이 조금만 잘못되면 사람들이 해고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우리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4년 전 트럼프주의자들의 권위주의를 걱정하던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미국 내 “극단주의”를 우려한다는 명분으로 슬그머니 정부의 감시권한을 허용하는 것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우려감이 결국 진보주의자들의 권위주의를 새롭게 창출했다.

월가 출신이며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였던 애미 시스킨드는 트럼프에 대한 우려를 진작에 감지했고, 2016년 11월 트럼프의 승리가 확정되자,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 시스킨드는 이 상황에 대해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트럼프와 관련된, 충격적이거나 “비상식적”인 모든 뉴스들을 총체적으로 기록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시스킨드는 “권위주의의 전문가들이 (당신)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변화를 (주 단위) 목록으로 기록함으로써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스킨드의 목적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평상의 민주주의로 되돌아가는 지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국의 나락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상황은 웹페이지 부제처럼 “민주주의 종식”이라고 할만 했다. 

시스킨드의 목적은 “노멀”을 공격하는 트럼프의 억지를 의식적으로 기록 및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 중대한 뉴스를 검색 및 정리해 게시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우려되는 헤드라인 기사들의 폭주를 주목했다. 2016년 11월 프로젝트 시작 첫 주에 9개의 기사를 게재했던 것이 2020년 12월 단 한 주에 370꼭지의 백과사전 분량의 뉴스로 증가했다. 시스킨드의 프로젝트는 인기를 얻었고, 후에 『권위주의 리스트: 트럼프 대통령 1년의 결산(The List: A Week-by-Week Reckoning of Trump’s First Year)』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어쩌다 ‘노멀’이 지켜야 하는 것이 돼 버렸을까? 이는 진보진영에서 가장 우려하는 문제다. 시스킨드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던 그 ‘변화’들을 살펴보자! 러시아와 공모한 것으로 보이는 천박한 사건들은 차치하자. 그럼에도 비중 높은 사건은 아니지만 공무원들의 연속 사임 사태, 또 정치적 역행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는 트럼프가 연방 상원의 필리버스터 규정이 오랜 관행이기 때문에 싫다고 비난한 것도 포함된다.

 

이가 깨진 것도 “독재 때문”

시스킨드의 창조적 프로젝트의 목적은, 갈 때까지 간 언론매체가 뿌려대는 연속적인 기사에 맞서려는 것이었다. 또 트위터, TV쇼 등 그녀가 의존했던 모든 매체들이 사실 전달 외에 어떤 의제도 설정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맞선 몸부림이었다. 경천동지할 기사거리가 쌓여가면서 독자들은 시스킨드를 팔로우했고 그녀의 웹사이트는 트럼프 히스테리가 몰고 온 패닉과 공포의 저장고로 부상했다.

이런 광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진보진영의 히스테리는 전문 지식인들과 손을 잡는 형태로 나타났다. 시스킨드의 작업은 “권위주의 전문가”에 의한 훈련이었다. 시스킨드가 “노멀”이 비참하게 깨지는 정치지형을 관찰하는 사이, 그녀의 사이트에는 온갖 전문가들이 나타났다. 트럼프식 경멸 전문가, 트럼프식 언어도단 입증 전문가 등등. 이들은 독재와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나선 병사들이었다. 의료 전문가들조차 한번 사람을 보면 폭군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판이었다. 시스킨드는 이가 깨져 치과에 갔을 때, 치과의사는 그녀에게 “독재가 원인”이라며, “꿈속에서 비명을 지르다가 이가 깨진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전문가들에게 트럼프의 부상은 그들 계급의 포기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싸움은 계급 전쟁과 같았다. 진보 히스테리를 이끌던 한 그룹은 신기하게도 동유럽 전문가들이었다. 나치와 소련에 정통한 예일대 소속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는 2017년 자신의 베스트셀러 『폭정』을 통해 트럼프와 히틀러의 언어를 비교했다. 히틀러는 “투쟁”이란 단어를 좋아한 반면, 트럼프는 “승리”를 좋아했다. 나치는 언론을 미워했고, 트럼프는 “가짜뉴스”라며 공공연히 언론을 비난했다. 이 부분에서 스나이더는 여섯 쪽을 할애하며 트럼프의 혐오적 언론관을 설명했고, 유대인학살 사태까지 끌어들여 비유했다. 그는 “트럼프의 슬로건인 ‘MAGA’에서 그 ‘Again’이 뜻하는 시점이 언제인가”고 질문한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의 ‘Again’이 레이건 대통령의 “Never Again”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스나이더는 저명한 교수다. 하지만 『폭정』은 사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익숙한 장르의 인문서적이며, 각 챕터는 트럼프가 정책을 구사할 때의 대처법을 다루고 있다. ‘윈스턴 처칠처럼 못된 사람과 대적하라’, ‘폴란드 공산당 치하에서처럼 친구들을 만들라’고 제안하며 기자들을 존중하고 믿자고 말한다. 물론 민주당 관리들의 이메일을 다룰 때는 제외다. 스나이더는 그런 기자들을 포르투갈의 전체주의자들로 간주한다. 

그는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나치와 동일시하며 싸구려 정치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스나이더 교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트럼프 시대에는 모두가 그래야 했다. 또 『폭정』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통찰력이 담긴 저서였다. 2017년 스나이더 교수가 미국이 “시도 때도 없는 비난 문화”에 빠졌다고 한 경고는 맞다. 다만, 온라인에서 그 “시도 때도 없는 비난 문화”에 빠져 있었던 것은 트럼프가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극렬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표현의 자유가 보류”되는 상황에 대한 스나이더의 예견은 맞았다. 그러나,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한 곳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니라 모노폴리적인 소셜미디어 상에서였다. 

『폭정』에서 스나이더 교수는 전문가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의 사회계층이고 “일종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층임을 제시했다. 이런 종류의 제안은 사실 히스테리 집단에서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권위주의’를 끝낼 유일한 방법은, 한 사회의 전통적 권위를 소유한 집단의 권력 자체를 강화하는 것, 말하자면 권위자들에게 권위(권력)를 주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고급 교육을 받은 집단, 해설할 수 있는 집단, 교수, 엘리트 저널리스트, 금융전문가, 의사, 법대교수, 테크 천재 등등이 그 대상이다. 히스테리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처럼 권위를 가진 그룹에 의한 권력행사는 겁낼 게 없다. 검열과 감시를 이용해서라도 위임받은 권위로 사람들을 압박해도, 이는 진행과정에서 참을 수 있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진보의 히스테리 

이런 아이디어들이 트럼프 시대에 수많은 방법으로 제시됐다. 우리가 권위를 의심할 때 트럼프 같은 이들이 출현하며, 이는 권위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 이런 주제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포인트로 집약된다. 

잘난 사람들을 존중하라!

의로운 엘리트들이 쫓겨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앤 애플봄의 저서 『저무는 민주주의(Twillight of Democracy)』(2020)에 잘 표현돼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인 가운데 트럼프가 그 상징으로 부상한 사태는 엘리트 지도층에게 일종의 종말적 사건이었다. 애플봄은 지성인들이 함께 협력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세계화와 시장주의의 선한 목적에 동의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최고조의 즐거움을 만장일치로 만끽했다. 하지만 오늘날 “지성인들과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저자 자신의 친구들까지 포함한 일부가 “지성인들과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 맞서고 있다. 

잘못된 사상이나 비정통 엘리트에 관한 문제는 복잡미묘한 일이다. 애플봄은 1927년의 베스트셀러에 등장한 두 개의 단어로 이 문제를 묘사했다. 첫째는 “반역(Treason)”, 둘째는 “배반(Betrayal)”이다.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뜻을 달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또 중대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성시돼온 “능력주의(Meritocracy)”와 관련된 문제임은 분명하다. 한 사회가 엘리트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고 우리가 그 엘리트를 믿는 것은 애플봄의 믿음과 똑같다. <워싱턴 포스트>에 등장하는 논설을 얼마든지 찍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애플봄은 지성인들이 1999년 호황의 행복감이 아닌 다른 것을 신봉한다면, 지성인으로서 능력주의의 소명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내가 인용한 히스테리에 찌든 이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나 변화의 기류, 이로 인해 사람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1) MAGA에 관한 저술활동이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활발했고, 지난 4년간의 전반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주로 ‘트럼프 지지자들은 백인 노동자계층이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이었다. 트럼프 세력에 대한 분석은 TV 뉴스만 틀어도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들이었다. 따라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트럼프 지지자를 심각한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왜 문제인가, 필자가 주장하는 반트럼프 히스테리 정서가 폭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보진영의 히스테리는 현실을 반영한 히스테리가 아니었다. 트럼프 시대 진보진영이 가졌던 두려움의 특징은 판타지 소설과 같았다. 러시아의 우위, 검열과 독재시대의 도래 등등. 트럼프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나르시시즘과 무능력이었지, 교활한 책략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스스로 재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 자리에 다른 정치인이 있었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그런 기회였다. 한편 다수의 대형 신문사들은 트럼프 시대에 더 발전했다. 이들은 뉴스의 객관성을 자랑스럽게 포기하는 것으로 진실이 더욱 드러난다고 믿었다. 또 진보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의 감시국가 체제를 용인했고, 주류가 아닌 정치적 시각을 철저히 외면했다.

민주당 지도자들은 지지자들 사이의 히스테리를 말뿐인 것으로 여기고 결코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또 트럼프 재임기간 중 지나치게 방만한 국방예산을 승인했다. 그들은 트럼프가 제2의 홀로코스트를 획책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자살 행위 같은 소리를 그만하라고 했다. 의사당 주변에 담벼락을 쌓는다든가 경찰력을 늘린다든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민주당은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권위주의 태동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양당 합의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업의 돈줄을 퇴출시키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재미·돈·혼란·동기… 히스테리의 ‘효용’

히스테리의 사회적 기능, 또는 효용은 무엇인가? 왜 미국은 때때로 히스테리적인 사건을 겪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히스테리는 재미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문명의 마지막 세대가 될 때, 또는 레지스탕스가 될 때, 나치처럼 잔악한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해야 할 때 영웅이 된 것처럼 느낀다. 둘째, “히스테리는 돈이 된다.” 베스트셀러가 계속 출간되며, 정치 그룹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사람들은 TV에서 종일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CNN>이나 <폭스뉴스> 같은 매체를 통해 급진적으로 변한다. 셋째, “히스테리는 혼란스럽다.”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잃는다. 개인주의자들의 나라에서 연대를 배웠지만, 연대를 위한 판단이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넷째, “히스테리는 동기를 유발한다.” 양쪽 다 세상의 종말을 설파하는 가운데, 2020년 대선은 1900년 이후 최다 유권자 투표를 기록했다.

이런 이유로, 히스테리는 오늘날의 선거전 양상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전투의 방법을 깨닫는다. 결국 재미는 없고 나이만 많은 중도파가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줬지만, 열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조 바이든을 백악관에 보낸 것도 히스테리다. 하지만 바이든은 트럼프보다 나은 대통령이다. 그래서 나 역시, 계속 파시즘을 두려워하는 과장된 문화에 감사한 마음도 든다.

내가 말하는 히스테리는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TV광고에 의한 현상만이 아니다. 꽤 사려 깊은 사람들의 현상이기도 하다. 그 히스테리적 두려움에 따른 실체적 악몽의 구성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무지함이 유행처럼 번진다는 두려움,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상태, 사회기관 및 엘리트 집단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졌다는 두려움, 하위질서에서 시작된 권위주의의 유혹이 문명국가를 위협한다는 두려움 등이다. 이미 벌어진 것처럼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덮쳤다. 그리고 금융계, 언론계, 학계 종사자들 그리고 백인 엘리트들 모두 타오르는 히스테리의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같은 현상은 너무나 자명해서 굳이 이해를 위해 독일 나치를 연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저서 『문제는 사람들이 아냐(The People, No)』에서 묘사했듯, 이미 벌어졌던 두 번의 히스테리 사례를 참조하면 알 수 있다. 노동계층의 오만함과 더 정확하게는 포퓰리즘에 대해 미국이 공황적 발작을 보였던 이유도 히스테리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사례는 1896년 여름에 찾아온 히스테리다. 당시 노동자를 위한 정당으로 창설된 인민당(Populist Party; 인민주의를 파생시킨 정당)은 엘리트주의를 배격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지지했다. 믿음이 가는 좌파후보는 아니었지만 인민당과 민주당의 연합전선이 마련되면서 브라이언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매우 커보였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밑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개혁하겠다며, 미국의 금본위제도 탈퇴를 공약으로 내세워다. 숨죽이는 상황이 초래됐고 드디어 히스테리가 나타났다. 당시 언론계, 금융계, 학계가 한목소리로 “이제 미국은 무정부 상태와 지불거부 상황에 직면했다”라며 야단을 떨었다. 이들은 브라이언을 악마처럼, 혁명 전사처럼, 자코뱅 당원처럼 묘사했다. 또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시골촌뜨기들을 상대로 한 인기영합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브라이언을 후보로 선택한 민주당 내의 고위 지도자들도 브라이언을 반대했다. 동부 엘리트들 또한 만장일치로 브라이언을 미워했다. 이유는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정통금융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1930년대 중반에 되풀이됐다. 당시 미국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중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2년 대공황의 와중에 당선되면서 실직자들에게 직업을 제공했고, 월가를 규제했으며, 노조를 합법화시켰다. 또 미국은 금본위제도에서 탈퇴했다. 미국의 기득권들에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히스테리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언론계, 금융계 등의 법률 및 경제 엘리트들이 힘을 합쳐 대통령에 대해 고소장을 이어갔다. 그들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이자 미치광이 선동가였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자유와 그들이 향유해온 위대한 ‘노멀’, 즉 미국의 자유기업 시스템을 파괴한 사람이었다. 루스벨트가 속한 민주당 리더들도 비난에 동참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대통령을 반대하기 위해 공포감을 조장하며 1936년 대통령 선거일이 임박한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X일 남았다”는 제목의 전면 광고를 매일 게재했다. 

 

미국 특권층의 강력한 히스테리

물론, 도널드 트럼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아니다. 천박함을 경멸하고 뉴욕의 부동산업자들을 싫어했던, 신앙심 깊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들 세 정치인들을 반대했던 세력은 모두 미국 특유의 영구적 패턴을 보인다. 아주 미미한 짓거리까지 똑같다. 상류계층의 만장일치 문화, 노멀 파괴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전통에 대한 우려, 외세에 대한 두려움, 끝없는 과장, ‘적의 적은 내 친구’라는 동지애 등이다. 

왜 이런 히스테리가 반복되는 것일까? 이런 히스테리가 터져 나올 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극단적인 불평등 위에서 언급한 각기 다른 두 시대의 재미나는 현상은 미국 내 가장 막강한 특권계층이 가장 강력한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과거에는 언론사주, 업계 지도자, 기업 법률가 등이 그 특권층이었지만 지금은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 집단이 미국의 미디어와 “지식” 산업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특권층이다.

내가 묘사한 이 엘리트들은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자신들의 지위에 가장 위협적인 일로 인식하고 있다. 브라이언, 루스벨트 같은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인들을 위협세력으로 보는 것은 명백하다. 트럼프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부자들의 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고소득자의 세율을 내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무지하고 자아도취와 자만에 빠진 인물이다. 또한 1990년 이래 특권층의 핵심 세계관을 보여주는 세계화를 비난하며, 실리콘 밸리와 월가를 상대로 무자비한 언어폭행을 저질렀다. 트럼프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미국의 군사 동맹 시스템을 반대했다. 비록 그는 성취한 게 거의 없는 대통령이었지만, 수백만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나타났다. 이 노동자들은 바로 1960년대 이후 편안하게 안주해 온 엘리트들에 의해 파멸을 맞은 계층이다.

내가 인용한 트럼프 반대론자들은 자신들과 그 친구들이 주역을 맡고 있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평범한 미국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을 경멸하는 것도 알고 있다.

왜일까? 2016년 이전부터 미국 중서부 지역을 분노케 한 아편류 진통제의 유행을 살펴보자. 그 진통제는 대형 제약사와 의료 전문가들의 산물이었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됐음에도, 제약사는 성분만 조절해 새로운 이름의 같은 진통제를 다시 내놓았다. 또 중서부 지역의 산업 기반이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 유명한 자유무역 협정의 결과다. 2007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를 유발했던 금융권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도 기가 막힌 사건이다. 미국의 위대한 수학 및 금융 천재들이 벌여 놓은 ‘업적’이었으나,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은 군산복합체 및 정보기관이 창조한 가짜 증거를 토대로 이뤄진, 미국 대외정책 최대의 파티를 상징한다. 2017년 이후 미국인의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자성해야 할 미국 진보주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트럼프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한쪽에서는 설교하고 꾸짖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를 삼키며 침묵하고 있다. 모두들 인종차별 선동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병든 이 사회임을 알고 있다. 미국이 결국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뉴욕이나 워싱턴 같은) 동서 해안지대 엘리트들에 의해 문화적 상징과 생산물들이 무선전파를 통해 퍼져나간다. 그 해안선 사이에 놓인 중서부 지역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늘에서만 보인다는 ‘플라이오버 지역(Flyover Country)’으로 전락했다”라고 아누사르 파루키(Anusar Farooqui)는 말한다. “소비행위라는 일방통행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중서부의 노동자들은 구경만 하는 처지다.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지역주민들은 말을 잃었다. 침묵을 강요받는 문화 속에 파묻히고 있다.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분노는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두 가지 제시해 본다. 하나는 진보주의자들이 이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명백한 물질적 구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첫째,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경찰시스템과 형사법체계를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다시 노조가 만들어지고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빚을 걱정하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7월 훈령을 통해 독과점금지법을 다시 적용하겠다고 한 것은 구조적인 계층문제 타개를 위해 진일보한 결정이었다.

둘째, 진보주의적 권위에 몰두해야 한다. 미국식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자성해야 한다. 사악한 미국의 온갖 발언들을 검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세상을 위한 비전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트럼프에 맞선 히스테리는 진보적 발전, 좌파 정치의 재탄생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또 진보주의적 권위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난 4년 동안 트럼프 히스테리는 진보주의자들을 상대로 절정이 됐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사악한 나라다. 경제개혁은 바보들의 게임이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권위에 의한) ‘단련’이다.

오늘날 전문가 그룹의 독재를 염원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 진보적 믿음을 강화해야 하지만 또한 이를 위해 진보적 권위주의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오늘날 미국을 보라. 잘 나가는 변호사들은 표현의 자유를 혐오한다. 금융계와 방산업계는 피해자 행세를 하며,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한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진보적 의원들은 소셜미디어의 검열을 추진 중이다. 백인들과 노동자 계층의 악역도 필요하다는 믿음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엘리트의 관점이다. 수백만 명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나온 생각이다. 

진정한 ‘노멀’은,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상에 오를 때 나올 것이다. 

 

 

글·토머스 프랭크 Thomas Frank 
언론인이며 역사학자. 1965년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의중이며, 미국의 <네이션>, <하퍼스 매거진>,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진보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언론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한 『하늘아래 유일한 시장』(One market under God), 『왜 가난한 자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등 문제작의 저자이기도 하다. 특히 『왜 가난한 자들은…』는 2004년 출판되자마자 세계 각국에서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다. 

번역·이정필
번역위원


(1) 통상적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컬럼니스트 맥스 부트 같은 이의 주장은 구조적인 불평등의 존재를 인식하긴 하지만, 기술발전에 의한 “오토메이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도 있다. 즉, 정치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