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당, 녹색당의 도전을 받는 기민련

16년만의 권좌에서 물러나는 메르켈 이후…

2021-07-30     라헬 크네벨 | 기자

기독교민주연합(CDU, 이하 기민련)의 차기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가 지난 7월 역대 최악의 홍수 현장에서 경망스러운 행동을 보여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기민련은 큰 타격을 입고 조용히 9월 26일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16년 동안 독일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선거일을 기점으로 총리직에서 퇴임한다. 그동안 보수파의 입김과 중도파의 압력 사이에서 힘들게 중심을 잡아 온 기민련은 언제나처럼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 치알로는 사무실에서 우리에게 포스터 하나를 보여줬다. 기민련이 1957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용했던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에는 둥근 얼굴에 금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검정 넥타이에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모습과 ‘모두를 위한 번영’ 슬로건이 있었다. “이 슬로건이야말로 현재의 기민련을 보여주는 핵심 문구입니다.” 9월 26일에 치러지는 독일 총선거에 기민련 대표로 베를린에서 출마하는 이 50세 남성이 말했다. 

그러나 치알로는 평소에 넥타이를 매지 않고, 노트북을 무릎 위에 놓고 작업하는 모습을 선거용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적인 음반 회사에서 뮤지션들의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치알로는 사진 촬영 일정과 ‘아티스트와의 긴급 회동’ 일정 가운데 우리를 만났다. 치알로는 탄자니아 외교관의 아들로, 부모가 동아프리카의 여러 신생 국가들을 전전하는 동안 독일 쾰른 인근에 위치한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2016년에 기민련 당원이 됐다. “학생이었을 때는 녹색당 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녹색당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탈퇴했습니다. 물론 기후 문제에 대해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높게 사지만요. 기민련은 상당히 실용적인 정당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요.”

기민련을 다룬 한 도서는 기민련이 “총리 생산 공장”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1) 독일연방공화국의 72년 역사 중에(1990년까지는 서독, 그 이후에는 통일 독일) 기민련 출신의 총리가 통치한 기간은 무려 52년에 이른다. 메르켈 총리는 전임자인 헬무트 콜 총리와 마찬가지로 16년 동안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6번째 선거에서 사회민주당(SPD)에 패배하면서 총리직을 내려놓은 콜 전 총리와는 달리, 메르켈 총리는 자발적으로 퇴임을 결정했다. 9월에 치러질 총선거에서는 아르민 라셰트가 기민련 대표로 나설 예정이다. 라셰트가 (자매 정당인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과 공동으로) 내세운 슬로건은 ‘안정성과 쇄신을 위해’로, 기민련 특유의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일례로, 기민련은 그리스가 경제 위기를 겪던 2010~2015년 당시에는 까다로운 협상자였지만, 2015년에는 수만 명의 난민을 자국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수십 년간 여성의 역할을 주부로 한정하는 전통적인 가족상을 지지했지만,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를 탄생시켰다. 

 

외부적으로는 유연하나, 내부적으로 여전히 경직

2005년에 메르켈 총리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이 탑재된 ‘세탁기(베를린 빌리 브란트가 1번지에 위치한 총리 관저를 의미함)’에 자리를 잡았다. 기민련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최저임금제를 2014년 모든 직업군에 도입했다. 메르켈은 2011년 징병제를 폐지했고(2년 전 기민련의 선거 공약에는 없었던 내용이다), 같은 해에 탈원전을 선언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이후에 내려진 이 결정은, 불과 1년 전에 독일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 연장을 발표했었던 만큼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2017년 동성혼의 합법화와 함께 기민련은 가족 중심적인 보수주의를 포기했다. 물론 2005~2009년까지, 그리고 2013년에 다시 한번 사민당과 대연정을 꾸렸던 것이 기민련의 이러한 결정들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콘라드 아데나워(독일 초대총리-역주)를 배출한 기민련 내부에서도 소수이기는 했지만 동성혼을 지지하는 등의 진보주의적 의견이 많아지고 있었다. “저는 동성혼 합법화 투표일에 연방의회의 토론회에 참여했었습니다. 우리는 발언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와 서로를 포옹했습니다. 그리고 혼인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20년 넘게 기민련을 지지해왔으며 기민련 당내 그룹인 레즈비언게이연합(LSU)의 대표 알렉산더 보그트는 회상했다. “당내에서 우리의 의견을 주장하기가 최근 몇 년 들어 한결 쉬워졌습니다.” 사실 기민련 의원의 2/3 이상은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했다. 그러나 사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FDP)이 이에 찬성했고 서로 연합을 결성할 움직임을 보이자, 메르켈 총리는 총선을 2개월 앞두고 동성혼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변화하지 않는 정당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탈원전을 결정하고 징병제를 폐지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기민련의 보수주의 정신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력 생산 방식과 징병은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정치적 가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1982년 기민련에 입당해 2013년부터 베를린 의원으로 있는 클라우스 디터 그롤러가 말했다. “메르켈이 총리일 당시에 기민련이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2009년부터 연방의회의 프랑크푸르트 의원인 마티아스 치머가 설명했다. “사회가 변화하는 흐름에 몸을 맡겼던 것이 주효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부 당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호시절’이란 1950~1970년대, 그리고 길게는 1980년대까지로, 당시 기민련은 거의 남성 당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이민에 적대적인 입장이었다.

 

전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국민 정당

“오랫동안 기민련은 이민자 출신 당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터키 출신으로 2013~2017년까지 의원직을 역임한 체밀레 기우주프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우주프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기민련의 독일-터키 토론회를 통해 2000년대에 기민련에 입당했다. 당시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통합부 장관이었던 라셰트는 후에 주총리를 거쳐 기민련 대표가 됐다. “2013년에 저는 이민 노동자 가정 출신의 무슬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연방의회에 기민련 의원 자격으로 입성했습니다.” 기우주프는 말했다. “아르민 라셰트는 독일 사회에 이민자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라셰트의 행동은 여러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과 비슷했지요.” 오늘날 독일 서부에서 기민련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인 세라프 귈레르도 터키 출신으로, 라셰트 곁에서 경험을 쌓았다. 주 통합부 장관의 조력자로 일한 뒤 지역 의회에 선출되었고, 지금은 레버쿠젠 선거구 대표로 연방의회 총선거에 출마한 상태다. “기민련 내에서 라셰트의 별명은 ‘터키인 아르민’입니다.” 이에나 대학교의 정치학과 교수인 토르스텐 오펠란트가 강조했다. 

기민련의 새로운 대표 라셰트는 연설이나 대담에서 기민련을 ‘중도파’ 정당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2009~2019년까지 독일 동부 작센주의 의원이었고, 연방의회 총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제바스티안 피셔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중도파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라셰트는 제가 활동하는 작센주의 정반대 편에 위치한 엑스라샤펠 출신입니다. 그곳의 조건과 이곳의 조건은 완전히 다릅니다. 저 역시도 중도파라고 할 수 있지만, 우파 쪽으로 치우쳐 있는 중도파입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민련은 이 세 가지의 기본 토대에 적극적인 범대서양주의를 추가했다. 지역마다 그리고 당대의 흐름에 따라, 기민련의 당원들과 대표들은 서로 다른 토대를 지지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블랙록 자산운용사 감시위원회 위원장직을 지내고, 기민련 대표 선거에서 메르켈에 밀려 두 차례나 고배를 마신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확실하게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쪽이다. 반면 치머는 사회주의자에 가깝다. “기민련 내에는 언제나 다양한 흐름이 있습니다. 활기가 넘치죠.” 기민련 당내 여성 그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베를린의 한 부촌에서 활동하는 바르바라 바움바흐가 설명했다. “국민 정당 기민련이 흥미로운 이유입니다.”

 

당원 절반 이상이 60대인 문제점

‘국민 정당(Volkpartei)’. 기민련의 활동가들은 바로 이 점을 지속적으로 내세운다. 본 대학교의 정치학과 교수인 프랑크 데커는 “국민 정당이란 광범위하고 실용적인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모든 계층의 국민에게서 지지를 받는, 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정당”이라고 정의했다.(2) 기민련은 창당 시점부터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적대적인 그룹들을 통합하고자 했다. 기민련이 탄생한 1945년은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 미국, 영국, 프랑스가 각각 점령한 4개의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 기민련은 19세기 말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까지 존재했던 가톨릭 정당 중앙당(Zentrum)의 정신을 이어받아 창당됐다. 기민련은 독일 북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더 보수적인” 개신교도들을 포용했다고 포츠담 대학교의 현대사학과 교수인 프랑크 보쉬는 설명했다.(3) 아데나워가 총리이던 1950년대에 기민당은 극우파 정당들과 연정을 추진했다.(4) “아데나워는 그들에게 직책까지 제안하면서 당시 서독의 우파 정당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대가도 따랐습니다. 극우파의 의견까지 존중해야 했으니까요. 독일이 오랫동안 난민들에 대해 아주 엄격한 정책을 펼쳤던 것도 일부는 정당 내부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이 통일되던 시점에 콜이 이끌던 ‘국민 정당’은 동독의 기독교민주연합까지 흡수했다. 동독의 기민련은 독일민주공화국의 정당으로, 집권당이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가능한 한 광범위한 우파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열망과 집권당으로서 보낸 수십 년의 경험 사이에서, 기민련은 “계획 측면에서는 언제나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보쉬는 평가했다. “기민련은 계획이 아닌 총리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메르켈이 총리였던 기간에 추진된 개혁 대부분은 당의 로드맵에는 없었던 것들입니다. 모두 정부의 실행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기민련이 최초로 야당이 되었던 시기인 1970년대 말까지는 실질적인 계획이 없었고, 단지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5) 그러나 기민련을 지탱하는 기본 축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바로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신념, 친기업 정책, 콜이 주장한 예산 집행 원칙주의이다. 예산 집행 원칙주의는 2009년 기본법 개정 시에 ‘채무 제동장치’를 도입하면서 현실화됐고, 2009년 연방의회 총선거 때도 등장했지만 2020년부터는 코로나 위기 대응을 이유로 적용하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아데나워가 주창했던 범대서양주의를 고수했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과 NATO 회원국들과의 돈독한 관계 유지는 라셰트의 계획에서도 재확인되었다. 1966년 이래 외교부를 장악한 적이 없는 기민련은 언제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했다.(6) “외교 정책에 관해서는 기민련 내부적으로 갈등이라 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인권을 중요시하는 이들과 경제적 이익을 앞세운 외교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 간에 의견 차이는 존재합니다. 현재는 라셰트가 포함된 후자가 지배적입니다. 러시아와 적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까요.” 데커가 분석했다.

기민련을 지탱하는 또 다른 토대는 바로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이다. 기민련 당원 40만 명(1990년에 78만 9,000명 이상이었다가 그 이후 감소하는 추세다) 가운데 52%가 가톨릭교, 38%가 개신교, 1%가 기타 종교를 믿고 있고 10%만이 무교이다.(7) 기민련의 기독교적 기반은 유권자층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선거 결과가 가장 나빴을 때도 기민련은 가톨릭교도 신자의 절반과 개신교도 신자의 1/3에 해당하는 표를 가져왔다. 기민련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직업적 구성을 살펴보면 농업 종사자들이 가장 많다(기민련 지지자들이 대도시보다 지방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연한 결과다). 심지어 2000년대에는 기민련 당원의 7%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선거에서는 사민당보다 오히려 기민련에 더 많은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8) 자유 직종 유권자층도 절반 이상이 기민련을 지지한다. 또한 인구 고령화와 노년층의 선거 참여율 증가도 기민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현재 기민련 당원의 절반 이상은 60대 이상이다.

2018년에 실시된 한 조사에서는 이민자 출신 유권자들의 마음이 사민당에서 기민련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응답자의 40% 이상이 사민당보다 기민련, 또는 자매 정당인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을 선호한다고 답했고, 25%가 사민당을, 10%가 좌파당 또는 녹색당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상황은 터키 이민자들의 (사민당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탓이 크다”고 조사는 결론지었다. 2년 만에 “사민당의 지지율은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9) “독일의 일부 도시에서는 이민자 출신 비율이 40~50%에 이르기도 합니다.” 기우주프가 지적했다. “우리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민주적으로도 그리고 선거 결과 측면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주의 정당인 기민련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다양성이 부족하다. 연방의회에서 기민련과 기독교사회연합 의원 246명 중에 단 7명 만이 이민자 출신이다. 비율로 보면 3%가 채 되지 않으며, 이는 의회의 모든 정당 중에서 가장 낮은 비율이다.(10)

 

지켜지지 않는 여성할당제 

기민련은 또한 굉장히 남성 중심적인 정당이다. 연방의회 내 여성 의원의 비율이 녹색당과 좌파당은 절반이 넘고 사민당은 44%인데 반해, 기민련은 22%로 의원 200명 중에 44명 만이 여성이다. 기민련은 1996년에, 정당의 요직 및 선거로 임명되는 직책의 1/3에 여성을 앉히겠다는 비강제적인 여성할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11) “제가 사민당에 처음 입당했을 때는 강제적인 여성할당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원칙 없이도 자연스럽게 여성의 비율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고, 젊은 남성 의원들은 설득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1997년 기민련에 입당했으며 현재 작센안할트주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자비네 볼퍼가 털어놓았다. “자원봉사 업무에서는 중요한 직책을 쉽게 맡을 수 있었지만, 임기가 있는 자리의 후보로 나서자 유리 천장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기민련 당내의 여성 그룹은 2년 전부터 강제적인 여성할당제와 선거 후보자들의 남녀 비율을 엄격하게 일대일로 정하는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12)

6월 초에 우리가 작센안할트주에서 기민련 당내 여성 그룹과 만났을 때, 그들은 여성할당제보다는 독일대안당(AfD)의 지지율 상승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6월 6일에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은 2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5년 전과 비교해 몇 퍼센트포인트 떨어지기는 했지만, 1위인 기민련(37%)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고 사민당을 크게 앞질렀다. 작센안할트주의 이전 주정부에서도 기민련은 독일대안당을 견제하기 위해 사민당 및 녹색당과 대연정을 구축해야 했다.(13)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도 같은 이유로 사민당과 연정을 결성했다. “우리의 유권자들을 독일대안당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보수적인 노선을 택하는 동시에, 극우 정당과는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할레시 지역 지부에서 활동 중인 교원 크리스티아네 디엘이 설명했다.

디엘은 일부 당원들의 일탈 행위를 우려했다. 2년 전 작센안할트주 지역 의회의 기민련 의원 두 명이 독일대안당과의 동맹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황급히 파기되기는 했지만 내부 문서를 통해 이 두 의원은 “사회와 민족의 화해”를 권고했다.(14) ‘민족사회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게다가 기민련은 독일대안당이나 좌파당과는 어떠한 협력도 없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불과 몇 개월 전에 채택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의 두 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했고, 심지어 지난 6월까지 무려 네 번의 임기를 채웠다.

작센안할트주와 마찬가지로 과거 동독의 영토였던 튀링겐주에서도 또 다른 기민련 의원 한 명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역 지부에서 연방의회 후보로 지명된 한스 게오르그 마센이었다. 독일 헌법수호청(BfV) 청장이었던 그는 퇴직 후에 정계에 진출하고자 했다. 그는 난민 수용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사를 밝혔고, 독일대안당과의 협력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또한 2017년에 만들어진 기민련 당내 극우파 그룹인 가치 연합(Werte Union)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그룹의 ‘보수주의 성명서’는 독일대안당의 계획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지난 5월부터 가치 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는 막스 오테는, 몇 개월 전부터 독일대안당과 가까운 정치 재단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재단의 이사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가치 재단의 회원 수는 약 3,900명이다. “우리 회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앙겔라 메르켈의 끔찍한 좌파적 환경 보호론입니다.” 오테는 말했다. “메르켈은 기민련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사민당이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으니까요. 이제는 기민련을 환경 보호 정당으로 만들려는 모양인데,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라이벌은 극우 정당과 녹색당, 부정부패 

“제가 속한 지부의 당원 몇 명도 가치 연합의 회원입니다.” 작센주에 속한 인구 2만 명의 도시 그로센하인의 선거 운동 사무실에서 제바스티안 피셔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직업이 요리사인 그는 스위스, 노르웨이, 프랑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요리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작센주의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난민 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빵 껍질이 부서지는 순간처럼 갑자기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피셔는 2019년에 독일대안당을 상대로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의회에서 세 번째 임기를 노리고 있다. 이번에도 그가 속한 연방의회 선거구에서 극우당인 독일대안당 후보가 라이벌이다.

반면 서부 지역에서는 “녹색당”이 기민련의 경쟁자라고 치머는 말했다. 치머는 자신의 선거구 경선에서 더 보수적인 당원에게 패배했다. 치머는 미국 공화당의 티파티 운동과 비슷한 움직임이 기민련 내부에서도 포착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티파티 운동에 앙겔라 메르켈의 16년 집권에 대한 불만, 포퓰리즘, 신자유주의적 의견이 섞이고 있습니다.” 치머는 가치 연합과의 “확실하고 빠른” 결별을 촉구했다. “서부 지역의 연방의회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민련이 독일대안당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면서 점점 더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면, 서부의 유권자들은 우리가 아무리 극우파와는 다르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서부의 대도시에서는 녹색당이 이미 제1당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로서는 걱정이 큽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대도시들이 독일 정치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3월에 기민련은 독일 남서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지방 선거에서 역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승리자는 녹색당이었다. 녹색당이 제1당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보수 정당들은 2016년부터 이어온 연정 파트너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기민련이 활동하지 않는 바이에른 주에서는 자매 정당인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1957년부터 변함없이 제1당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방의회에서 기독교사회연합과 기민련은 연합을 형성하고 있으며, 두 정당은 연방 정부에서 함께 활동한다. 예를 들어 2018년부터 메르켈 정부의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는 호르스트 제호퍼가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이다.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에서 총리 후보를 낸 적이 두 번 있었다. 1980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2002년 에드문트 슈토이버이다. 그러나 이 둘은 사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올해에도 기독교사회연합의 현 대표인 마르쿠스 죄더가 라셰트의 경쟁자로 기독교사회연합-기민련 연합 경선에 나섰었다.

극우 정당, 녹색당에 이어 기민련은 올봄에 네 번째 라이벌을 맞았다. 바로 부패 스캔들이다. 기민련과 기독교사회연합의 의원들이 코로나19 방역 마스크의 공공 발주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중개료를 개인적으로 챙긴 것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관련된 두 명의 기민련 대표는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우리는 지방에서 정당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마스크 스캔들 같은 사건이 베를린에서 터지다니…” 바덴주의 한 활동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민련은 1990년대 말에 부패 스캔들로 이미 한 번 휘청했었던 만큼, 기업인들이 기민련의 장점으로 꼽는 친(親)재계 성향이 유권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글·라헬 크네벨 Rachel Knaebel
기자. 공저로 『La révolte de la psychiatrie 정신의학계의 저항』(La Découverte, 2020)이 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Volker Resing, Die Kanzlermaschine : Wie die CDU funktioniert, Herder, Fribourg-en-Brisgau, 2013. 
(2) Frank Decker & Viola Neu (지도), Handbuch der deutschen Parteien,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Bonn, 2018.
(3) Frank Bösch, Macht und Machtverlust : Die Geschichte der CDU, Deutsche Verlags-Anstalt, Stuttgart-Munich, 2002 ; Frank Bösch, Die Adenauer-CDU : Gründung, Aufstieg und Krise einer Erfolgspartei (1945-1969), Deutsche Verlags-Anstalt, 2001.
(4) 독일당(Deutsche Partei)과 추방자 및 권리박탈자 연합(BHE, 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이 포함된다.
(5)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사회민주당(SPD)은 자유민주당(FDP)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 집권했다.
(6) 연립 정부에서 외무부는 일반적으로 소수당이 담당하기 때문에, 1966년부터 자유민주당(FDP)과 사회민주연합(SPD)이 번갈아 외무부를 맡았다.
(7) 독일에서는 교회 소속 여부가 행정 자료이다. 왜나하면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 교도는 세무 당국에 종교세를 납부하기 때문이다. 독일 인구의 27%는 가톨릭 교도, 25%는 개신교 교도, 39%는 무교, 5%는 이슬람 교도, 4%는 기타 종교 신자이다(출처 : 독일세계관연구소(Forschungsgruppe Weltanschauungen in Deutschland), 2019년 수치).
(8) Frank Decker & Viola Neu (지도), Handbuch der deutschen Parteien, op. cit. ; Frank Decker, ‘Wahlergebnisse und Wählerschaft der CDU’,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Bonn, 2021년 2월 15일 ; Oskar Niedermayer, ‘Die soziale Zusammensetzung der Parteimitgliederschaften’,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20년 8월 26일.
(9) Henriette Litta & Alex Wittlif, ‘Parteipräferenzen von Zuwanderinnen und Zuwanderern: Abschied von alten Mustern Kurzinformation’, Sachverständigenrat deutscher Stiftungen für Integration und Migration, Berlin, 2018.
(10) ‘Abgeordnete mit Migrationshintergrund’, Mediendienst Integration, Berlin, 2017년 9월 28일.
(11) ‘Bericht zur politischen Gleichstellung von Frauen und Männern’, CDU, Berlin, 2021년 1월 15~16일.
(12) Mariam Lau, ‘Die CDU und die Frauen’, dans Norbert Lammert (지도), 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 Beiträge und Positionen zur Geschichte der CDU, Siedler Verlag, Munich, 2020.
(13) 작센안할트주 주정부의 새로운 연정은 본지가 발간되는 시점에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14) Ulrich Thomas et Lars-Jörn Zimmer, ‘Denkschrift : Erste Analyse der Kommunal- und Europawahl für Sachsen-Anhalt’, CDU, 내부 문서.

 

 

기민련의 내부 조직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에는 여성 연합, 시니어 연합, 청년 연합, 개신교 연합 등 다양한 인구 카테고리를 위한 내부 조직이 있다. 이 단체들은 당을 통합하고, 당원을 모집하고, 특정 주장을 대변하고,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흐름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주의 쪽은 전통적으로 기독교민주노동자협회(Christlich-Demokratische Arbeitnehmerschaft, CDA)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경영인과 재계 인사들로 구성된 중소기업과 경제연합(Mittelstands- und Wirtschaftsunion, MIT)이 부상하면서 이전보다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일부 단체들은 기민련의 공식 산하 조직에 포함되지 않는다. 회원 10만 명의 청년 연합이 그 예이다.

2021년에 기민련은 9개 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98년에 만들어진 레즈비언게이연합(Lesben und Schwule in der Union, LSU)은 다음 정당 회의에서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가치 연합(Werte Union, 본 기사 참조)과 2012년에 출범한 베를린 연합과 같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보수주의 단체들은 공식 산하 조직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올 초에 기민련 당원들은 기후를 위한 연합도 만들었다. 이 연합의 회원들은 2030년까지 원자력의 도움 없이 100%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전력을 생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글·라헬 크네벨
번역·김소연

재계의 목소리

명칭은 ‘독일 기민련 경제 위원회(Wirtschaftsrat der CDU)’이지만 기민련의 공식 산하 조직은 아니다. 1963년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정치, 행정, 대중 앞에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스스로를 정의한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 경제 정신에 기반한 경제 및 사회 정책을 고안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회원들에게 제공한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1950년대에 이름을 날린 경제부 장관으로, 우파가 전후 ‘경제 기적’의 아버지라고 치켜 올리는 인물이다.

단체명에 ‘기민련’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단순히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련과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독일의 NGO ‘로비 컨트롤(Lobby Control)’은 올 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경제 위원회는 사실상 기민련의 산하 조직처럼 활동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1) 또한 위원회는 기업을 위해 보수파 정치인들과의 특별 만남 자리를 주선하기도 한다. 2020년에도 위원장이 페터 알트마이어 경제부 장관을 12차례나 만났다. 기민련 출신의 유명 인사들을 내부로 영입하기도 한다. 현 부위윈장은 기민련의 대표직 후보였던 프리드리히 메르츠다. 집행 위원회의 구성원에는 도이치 방크와 공항 운영 기업 프라포트(Fraport)의 이사회 회장, 자동차 제조 기업 다임러(Daimler)의 이사회 회원도 포함되어 있다.  
 

 

글·라헬 크네벨
번역·김소연


(1) Christina Deckwirth, ‘Der Wirtschaftsrat der CDU’, Lobby Control, Berlin-Cologne, 2021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