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지역, 우리는 원치 않아!’
프랑스 지방행정체제 개편의 피로감
2015년, 프랑스 지방행정체제 개편으로 새로 탄생한 신규 레지옹(Région, 프랑스의 광역지자체 단위. 프랑스에서는 지방행정개편에 따라 22개 광역자치단체인 레지옹을 13개로 통합·개편하는 동시에, 기초자치단체 단위인 코뮌들의 연합을 통해 광역권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역주)은 처음에 온갖 칭송을 받았다. 가령 효율성과 경쟁력은 물론, 지역정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어찌해야 할까! 새로 개편된 레지옹들은 탄생 6주년을 맞아 제5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 기권율을 기록했다. 이 민주주의의 실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어느새 프랑스인들은 유럽연합만큼이나 지방에 대해서도 불신이 깊어진 것일까? 지난 6월 20일, 프랑스는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최악의 기권율을 기록했다. 2010~2015년 대비 무려 15%p 증가한 사상초유의 기권율이었다. 투표장에 오지 않은 유권자는 3,000만 명 이상으로 전제 유권자의 약 2/3였다. 사상 처음으로 지방 선거 참여율이 평소 유권자가 관심을 갖지 않기로 소문난 유럽의회 선거보다도 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전진하는 공화국(LREM)’의 스타니슬라스 게리니 대표는 지역정치를 향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올릴 묘안을 찾아냈다. 인터넷 투표를 허용하자는 것이다. 시민들이 게을러서 투표장을 찾지 못하는 것이니,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투표를 할 수만 있다면 분명 시민의 의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역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 바로 지난 10년 간 계속된 개혁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다. 시민들은 계속된 개혁으로 의원들과 점점 더 거리감을 느끼고, 지방행정체제에 대한 이해도는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2015년 지역민주주의를 활성하기 위해 시행한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은 시민의 관심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지방선거 2차 투표 이후, 제5공화국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 참여율만 기록했다.
마린 르펜은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향토성을 내건 자신의 과거 전략을 재활용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그녀는 파리가 만들어낸 ‘관료주의 괴물들’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년 전부터, 국민연합(RN) 대표는 사회당 출신의 대통령이 추진한 레지옹 통합 정책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는 자신이 당선된다면 과거 행정구역을 부활하고, 22개 레지옹(현재는 13개) 체제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피카르디인에게는 피카르디를, 알자스인에게는 알자스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6월 8일, 뫼르트에모젤 락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이렇게 선언했다. 마린 르펜은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충실도나 우리의 뿌리, 역사 등을 고려할 때 크나큰 문제점을 제기하는 상당히 기술관료적인 개혁”이라며 거세게 몰아세웠다. 그러면서 ‘이미 풍부한 다양성을 갖춘 고국’을 논거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그녀는 “프랑스는 이미 다양한 차이들을 풍족하게 갖추고 있는 나라로, 굳이 다양성을 이유로 이민을 받아들일 필요가 단 한 번도 없었다”라며, “다채로운 지역어와 말투,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 향토음식” 등을 줄줄이 열거했다.
시민들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는 레지옹
르펜의 말만 들으면 흡사 개편 이전의 레지옹들이 루이 9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향토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만 같이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개편 전의 레지옹 역시 최근에 형성된 것은 마찬가지다.(1) 또한 역사상 어떤 레지옹도 시민의 관심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론조사를 보면, ‘레지옹’(지역, 광역자치단체 단위-역주)은 ‘코뮌’(읍면, 기초자치단체 단위-역주)보다 더 프랑스인에게 홀대받는 지자체이며, ‘데파르트망’(도, 중역자치단체 단위-역주)과 인기가 없기로 거의 쌍벽을 이룬다.(2) 지방선거에 시민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 역시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정치학자 에마뉘엘 네그리에가 지적한 것처럼(3), 사람들은 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시스템에 갑작스러운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개혁안은 르펜이 모든 역량을 집중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가령 그녀는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이슈로 자신이 평소 애착을 가진 단골주제들, 가령 의원과 시민들 간 거리감, 지역실세들의 자잘한 뒷거래, 행정기관의 관료화, 공공예산의 낭비, 향토에 대한 애착, 근접성에 대한 욕구 등을 줄줄이 꺼내놓고 있다.
지역행정체제는 그동안 숱한 개혁으로 인해 각종 부호와 법률이 복잡하게 뒤섞인, 전적으로 기술적인 사안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언론 또한 지방행정체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특히 전국 단위 언론의 경우, 수도권 주민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방행정 문제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흔히 언론은 너무 난해하고 지루한 주제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고, 또한 이 문제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공론화될 위험이 적으니, 지역행정 개편 관련 법률들은 손쉽게 줄줄이 제정되는 것이다. 올랑드 대통령은 5년 재임 기간 동안, 대규모 지역행정 개편안을 최소 4개 이상 통과시켰다.(4) 어떤 개편안도 공약에 포함된 적은 없었지만, 21세기 초 이후 통과된 15개 개편안에 더해 새로운 개편안을 줄줄이 통과시켰다. 지역 중심도시(수도)의 역할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 도시에서 지역의원이나 주민들이 결사반대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레지옹 통합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된다.
지방행정 개편, ‘노란조끼 운동의 잠재적 씨앗’ 비판도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는 각각의 개편안은 그동안 프랑스 지방행정체제에 크나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연합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국가 권력 보다는 지역 권력을 더 중시하는(‘다양한 지역들로 이뤄진 유럽’이라는 유명한 꿈과도 일맥상통한다) 유럽연합은 지역 통합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이 새로운 법률들로 인해, 프랑스 일부 지역의 경우 정치와 맺고 있는 관계 자체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지리학자 제라르 프랑수아 뒤몽 등 일각에서는 올랑드의 대대적인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노란조끼’ 운동의 잠재적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5)
2012년 10월 5일 파리 연설에서 올랑드 대통령은 ‘지방분권 제3막’을 선언하며, “더 가까이서 시민의 의사결정을 경청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활성화하며, 기존의 관행을 새롭게 바꾸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더 높은 근접성과 민주성”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을 실현해줄 것이라던 법률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재단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개편안은 지역의원들과의 협의 과정 없이 정부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됐다. 이러한 사실은 지자체를 무시한 독선적인 중앙집권주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응축해놓은 결정체다. 또한 그것은 이중적인 메시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권한과 운영이 불투명한, 거대한 레지옹과 코뮌간 협의체를 만들어내면서, 과연 ‘더 가까이서 시민들의 의사결정을 경청’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레지옹 통합 전, 님므 소재 단체의 책임자가 지방의회에 가서 출자자를 만나기를 바랄 경우, 지역급행열차(TER)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30분쯤 지나 랑그도크루시용의 수도인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제는 옥시타니(랑그도크루시용과 미디피레네를 통합한 레지옹-역주)의 새로운 지방관청 소재지인 툴루즈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무려 3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지역행정개편안의 영향을 연구한 브뤼노 케스텔과 라파엘 셸렌베르제 두 하원의원은 지역그물망 확대가 “근접성을 잃게 하고 거리감뿐만이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불공정하다는 불만을 야기하기도 한다. 시민들이 직접 사용하지도 않는 기반시설에 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두 의원에게 해당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지리학자 사뮈엘 데프라즈는 시민들이 불만을 갖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분석했다. “근접성은 단순히 킬로미터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근접성은 단순히 디지털화 같은 기술적 진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객관적인 서비스 이용 횟수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접성은 지역의 잠재성을 상징한다.”
개편안, “그물망을 확대하라”
“다시 말해,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느낌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지역그물망 확대는 상실감이나 더 나아가 상징적 차원의 폭력에 해당한다. 공간을 이용하는 실질적인 관습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국토에 대해, 삶의 방식에 대해 느끼는 어떤 사회적 상징성을 파괴하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6)
‘그물망을 확대하라.’ 올랑드 대통령이 추진하고, 에마뉘엘 마크롱 후임 대통령이 묵인한 프랑스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안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요약하는 말이 있을까. 프랑스에서는 ‘국토공공사업의 현대화와 메트로폴 확정에 관한 법’(일명 MAPTAM법, 2014년)에 따라, 인구 40만 명이 넘는 모든 ‘대도시공동체(CU)’가 ‘메트로폴’의 지위를 획득했다. ‘메트로폴’은 본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계획한 것으로, 당시만 해도 그다지 야심차게 추진된 계획은 아니었다. 가령 메트로폴 지위를 획득한 도시는 니스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재는 자발적 참여의 원칙이 폐기되고 ‘메트로폴’의 권한도 확대됐다. 그 결과 수십여 개 도시를 묶은 코뮌간 협의체가 어느새 ‘코뮌’, ‘데파르트망’, ‘레지옹’에 속했던 권한을 하나 둘 잠식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모두 21개 ‘메트로폴’이 설치되어 있다. ‘신지역조직법’(일명 NOTRe법, 2015년)은 모든 코뮌이 코뮌간 협의체(코뮌공동체(CC), 대도시공동체(CU), 중도시공동체(CA), 메트로폴 등)에 참여하도록 의무화했다. 코뮌간 협의체는 반드시 주민 수가 1만 5,000명(과거 5,000명)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농촌이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의 경우, 무려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마을들을 서로 묶은 상당히 광범위한 규모의 연합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참다운 의미의 ‘지방분권’이 무색하게, 정부가 레지옹이나 코뮌간 협의체의 몸집 불리기에만 열중하는 현상은 이미 30년째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는 ‘통합 열풍’(금융계에서는 ‘합병 붐’(Merger Mania)으로 부른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민간부문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이 현상은 어느새 공공분야로까지 확대됐다. 둘 다 목적은 명확하다. 통합은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과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가령 병원을 서로 통폐합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사부아에서는 모단느와 생장드모리엔느, 알리에에서는 네리스레뱅과 몽틀뤼송, 알프드오트프로방스에서는 포르칼키에와 마노스크, 론느에서는 생로랑드샤무세와 몽 뒤 리요네 병원을 각각 통합했다).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의료서비스와 멀어지는 것쯤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세계 대학 순위를 높이겠다며 대학들 역시 통폐합 열풍에 가세하고 있다(스트라스부르의 루이 파스퇴르·로베르 슈만·마르크 블로크 대학, 엑상프로방스·마르세유 대학, 파리5대학·파리7대학이 통합됐다).(7) 심지어 올랑드 정권에 이르러서는 레지옹 역시 통폐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통합이 초래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
올랑드 전 대통령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유럽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통합의 이유로 제시했다. 가령 ‘NOTRe법’에는 “중대하게 부과 받은 역할을 최적화된 수준에서 수행하는 한편, 우리 이웃국의 지자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수 있도록, 프랑스의 지방들도 적절한 ‘임계크기(critical size)’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차마 눈뜨고 봐주기 힘든 기술관료주의 용어로 줄줄이 도배된 이 주장은 심지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어떤 연구보고서나 통계자료를 봐도, 지방의 성공이 지방의 규모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가령 독일의 경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그에 비해 각기 인구수가 3배, 10배나 더 작은 헤센 혹은 함부르크에 견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더 적다.(8)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안달루시아는 규모는 크지만 가난하고, 나바라는 크기는 작지만 재정이 풍족하다. 더욱이 표준화된 지역 규모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수많은 나라들도 크기가 작은 지방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이탈리아의 발레다오스타나 몰리세, 스페인의 리오하나 칸타브리아, 독일의 자를란트 등), 그렇다고 작은 지방들을 서로 통폐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역동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과연 ‘임계크기’는 비용 절감을 가능하게 해주는가? 사실상 사회당 정부는 그렇다고 주장했다. 가령 2016년 브뤼셀에서 발표한 ‘국가개혁프로그램’에는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비용 축소 항목으로 분류됐다. 당시 국토개혁 담당 정무차관이던 앙드레 발리니는 다양한 지자체개혁이 결국 연간 120~250억 유로를 절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훗날 그는 이것이 그저 ‘단순추정치’에 불과했었다고 시인했다.(9)
실제로 2019년 감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10), 레지옹 통합은 연간 수백만 유로의 비용을 발생시켰다. 심지어 손을 대지 않은 레지옹에 견줘 새로 개편된 레지옹에서 더 많은 지출이 발생했다. 과거 지방관청의 소재지였던 지방의 주요도시(수도)의 경우, 기차이용료, 유류비, 숙박료 등 지자체 간 협력에 필요한 비용이 한층 더 증가했다. 또한 소프트웨어를 통합하거나 컨설턴트를 채용하는 문제 등도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주민 수에 따라 의원들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기계적으로 인상됐고, 지자체 공무원들이 받는 상여금도 일괄적으로 상향조정됐다. 심지어 일부 광역단체에서는 통폐합으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가령 옥시타니에서는 도의회의원 158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회의실을 구하지 못해, 결국 회당 14만 유로를 주고 몽펠리에 전시관을 대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보고서가 발표되자, 국민연합(RN)은 즉시 ‘참을 수 없는 연쇄적 혈세 낭비’를 비판하는 담화를 내놓았다.
지역 개성을 잘 드러내지 못한 코뮌 이름들
코뮌간 협의체는 그다지 눈부신 성과를 자랑하지 못한다. 코뮌간 협의체의 불투명한 운영은 오히려 정치적 상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11) 공동 이용 서비스를 ‘상호 부담’하기로 하면서, 재정이 풍족한 코뮌 수준으로 비용 부담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2018년 1월 1일, 생길렘르데제르 마을은 발레 드 레로 코뮌공동체(CC0)(28개시 참여)에 수도 관리를 위임한 이후 서비스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수도 이용료만 2.7배 늘었다. 생길렘 시당국은 새로 부과된 수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관광객과 등산객의 많은 사랑을 받던 무료 분수대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12) 2018년, 상하수도 관리를 코뮌간 협의체로 이관한 코뮌은 이미 전체 코뮌의 약 60%에 달했다. 이 경우 가격은 시의회의 다수당이 주축이 된 코뮌간 협의체에 속한 의원들에 의해 결정됐고, 이는 일부 지자체가 박탈감을 느끼는 원인이 됐다. 사실상 코뮌간 협의체에 속한 의원들에게 다른 도시의 공약 실천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과연 가격 인하를 공약으로 내건 시장을 선출하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관련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코뮌간 협의체에 대해 그다지 큰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2명 중 1명 이상이 코뮌간 협의체는 본인과 무관하다고 느낀다(모든 지자체를 통틀어 최하 수준). 또한 같은 비율의 국민이 코뮌간 협의체 의장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13) 코뮌간 협의체의 명칭도 조직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요인이다. 리브 뒤 오알리에, 플렌느 코뮌, 바생 다르카숑 쉬드(혹은 노르), 포르트 뒤 쥐라, 플렌느 발레, 알티튀드 800, 아르크 쉬드 브르타뉴, 트르와 포레, 트르와 리비에르, 빌르 쇠르, 쉬드 테리트와르 같은 코뮌간 협의체의 명칭은 통폐합으로 새로 탄생한 지역들의 명칭(그랑 에스트, 오드프랑스, 옥시타니 등) 만큼이나 지역의 개성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흡사 여행사무소의 홍보책자에나 등장할 법한 이름들로만 들릴 뿐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명칭들이 종종 수 세기의 역사가 서린 유서 깊은 코뮌의 이름을 대신하며, 급기야 인위적으로 지역 정체성이 지워지는 현상에 이르러 많은 이들을 절절한 향수에 잠기게 했다.
너무 높아진 피로감 속에 박탈감까지
2020년 7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실험적인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지금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국토를 관리해야 한다며 ‘새로운 지자체의 미래’를 열어가자고 호소했다. 아직 준비 단계에 불과한 이 미래의 법률은 아직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미 이 법률에 붙일 별명은 등장했다. ‘지방분권(Décentralisation)’, ‘차별화(Différenciation)’, ‘지방분산(Déconcentration)’, 이 세 단어의 앞글자를 딴 일명 ‘3D’다. 이 법률은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한 수많은 개혁의 뒤를 잇게 될 것이다. 그동안 프랑스인들은 점수제 연금개혁에서 ‘디지털 공화국’ 개혁, 실업보험 개혁에서 공무원직 개혁, 사법 개혁에서 지방세 개혁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를 바꾸겠다’는 목표 아래 수많은 개혁을 감내해 왔다. 그 결과 개혁에 대한 피로감이 너무도 높아졌다. 가령 모든 것이 쉴 새 없이 바뀌기만 하고, 끊임없이 더 전문화된 시스템에 적응해만 한다는 기분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은 박탈감이 전부일 뿐이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편집장, 역사학 박사.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순전히 행정적인 차원의 지역 구분인 ‘지방활동구역’이 1960년 법령에 의해 탄생했다. 이 ‘지방활동구역’은 1981~1983년 지방분권법에 의해 비로소 고유한 권한을 지닌, 보통선거로 의원을 선출하는 오늘날의 지자체로 발전하게 된다. 최초의 지방선거는 1986년에 개최됐다.
(2)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VIPOF)와 프랑스시장협회의 의뢰를 받아 IPSOS가 실시한 여론조사’ 참조, 2016년 4월.
(3) Emmanuel Négrier, Vincent Simoulin, ‘Une fusion régionale sans effusion : l'Occitanie 출혈 없는 지방통폐합 : 옥시타니’; Clément Arambourou 감수, 『Politiques de la fusion. Organisations, services, territoires 통합의 정책들. 조직, 서비스, 국토』, LGDJ, Droits et société 총서, Issy-les-Moulineaux, Paris, 2021년.
(4) 첫 번째는 도의회, 시의회, 코뮌간협의회의 의원 선거와 관련한 개혁안(2013년), 두 번째는 ‘국토공공사업의 현대화와 메트로폴 확정에 관한 법’(MAPTAM법, 2014년), 세 번째는 신규 지방 구획에 관한 개혁안(2015년), 네 번째는 ‘신지역조직법’(NOTRe법, 2015년)이었다.
(5) Gérard-François Dumont, ‘Les régions en France. Géants géopolitiques, mais nains politiques? 프랑스의 지방들. 지정학적 거인인가, 아니면 정치적 난쟁이인가?’, <Les Analyses de Population et avenir>, 제4권, 제8호, Paris, 2019년.
(6) Bruno Questel, Raphaël Schellenberger, ‘NOTRe법 영향 평가(Evaluation de l'impact de la loi NOTRe)’, 정보보고서 제2589호, 프랑스 의회, Paris, 2019년 12월 18일.
(7) Christelle Gérand, ‘Aix-Marseille, laboratoire de la fusion des universités 통합·폐지, 엑스-마르세유 대학의 세계 순위 집착증’,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6년 9월호.
(8) Philippe Subra, ‘Quel bilan tirer de la nouvelle carte régionale? 지방행정체제 개편의 성과는?’, <Vie publique>, 2021년 4월 14일, www.vie-publique.fr
(9) ‘Envoyé spécial’, <France2>, 2019년 3월 28일.
(10) ‘지역공공재정(Les finances publiques locales)’, 감사원, Paris, 2019년 9월.
(11) Fabien Desage, David Guéranger, 『La Politique confisquée. Sociologie des réformes et des institutions intercommunales 몰수당한 정치. 코뮌간협의체와 개혁의 사회학』, Editions du Croquant, Savoir/Agir 총서, Vulaines-sur-Seine, 2011년.
(12) Frédéric Ville, ‘Réformer la réforme territoriale 국토개혁을 개혁하라’, <Population et Avenir>, 제747호, Paris, 2020년.
(13) Laurent Dupuis, ‘Les Français aiment-ils leurs collectivités territoriales? 프랑스인들은 지자체를 사랑하는가?’, <La Croix>, Paris, 2015년 3월 17일 ; ‘Les Français et l'intercommunalité : vagues 2018 프랑스인과 코뮌간협의체 : 2018년 경향’, IFOP·ADCF, 201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