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대학살을 둘러싼 아프리카의 기이한 침묵
르완다의 투치족 약 80만 명의 죽음을 방치한 ‘국제사회’의 패인 분석이 1994년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아프리카 정부와 지식인이 대학살 사태에 침묵으로 일관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 학살에 가담한 주동자들은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 도처에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 약 80만 명이 학살당할 때, 국제사회는 왜 그들을 구하러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유엔 책임론이 수시로 제기된다.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 총사령관을 맡은 캐나다 로메오 달레르 중장이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유엔은 지원군을 비무장 인력으로 축소해버렸다. 당시 달레르 중장은 후투족 극단주의 집단 ‘후투 파워’(Hutu Power)의 한 탈영병으로부터 내부 소식을 소상히 파악한 후, 학살의 진행을 막기 위해 5,000명의 지원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유엔은 파병군 2,300명조차 270명의 비무장 감시 인력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학살을 방치한 유엔의 수장이 바로 두 아프리카인이었다는 점이다. 르완다 대학살 당시 유엔 사무국은 이집트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사무총장과 가나 코피 아난 부사무총장이 맡고 있었다. 코피 아난 부사무총장은 유엔 평화유지군 부서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에게 의사결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르완다 대표부와 다수의 비공식 회담이 진행됐음에도, 사무총장과 부사무총장 두 사람이 학살 사태를 제지하고자 노력한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매일 1만 명이 죽어간 ‘르완다의 100일’
아프리카 언론과 정부는 부타레와 키부예, 기타라마 등지에서 학살당한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이 무심함을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참극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그나마 면죄부를 찾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투치족에 대한 학살은 무려 100일에 걸쳐 벌어졌다. ‘르완다의 100일’(1)이란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즉, 모잠비크나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등의 국가에서 미처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해도, 상황을 만회할 시간이 석 달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학살을 강건너 불구경하듯했다. 학살이 극에 달했던 1994년 6월, 아프리카 단결기구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튀니지에서 연례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르완다 사태는 안건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회의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투치족 백만 명을 학살한 르완다 임시 정부가 태연히 르완다 대표로 참석했다. 물론 그 당시 아프리카 대륙의 주관심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긴 시간의 싸움 끝에 인종차별 정책은 이제 막 종결된 참이었다. 따라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이 기구는 튀니지 정상회의에 참석한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을 통해 그 같은 승리를 자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그나마 아프리카의 양심을 보여줬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남아공 최초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안건에서 제외된 르완다를 언급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현재 르완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르완다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당시 일을 책으로 남긴 제라르 프뤼니에(2)는 만델라의 이 발언이 파리에 미친 파장에 대해 언급했다. ‘파쇼다의 망령’(3)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만델라든 누구든 영미권 진영에서 우리 일에 참견하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라고 응수했다.
당시 사회당 국제사무국 소속이었던 프뤼니에는 가까이에서 이 상황을 지켜본 1인으로서, ‘터키석 작전’(학살중단, 양민보호라는 미명하에 유엔 결의안을 통해 프랑스 병력이 동원된 군사작전으로, 실상 학살 가해자인 후투족에 힘을 실어줬다)이 물망에 오를 때도 수차례 조언했었다. 프뤼니에의 눈에 이 작전의 목적은 영미권 진영인 남아공 군대가 오기 전에 선수를 치려는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군사 및 인도주의적 지원을 명목으로 외형상 다국적군인 병력을 투입했으나, 다른 구 식민지 국가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어권의 우호 동맹으로서 유엔에서 대외적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세네갈조차 약 30명의 병참인력만 지원했을 뿐이다.
르완다 문학회에서 만난 르완다 학살자
아프리카 단결기구는 뒤늦게나마 르완다 대학살 관련 보고서 작성을 지원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했다. 이 보고서 작성에는 보츠와나 전 대통령 쿠에트 마시레의 지도하에 아프리카 각국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참여했다. 그중에는 나중에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되는 엘런 존슨설리프 UNDP 지역 담당부장, 올로프 팜 스웨덴 총리의 미망인이자 심리학자인 리스베 팜, 캐나다의 스티븐 루이스 유니세프 부대표, 말리 대통령을 역임한 아마두 투마니 투레 장군도 있었다.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소상하게 정리한 이 보고서는 2000년 7월 완성됐으며, ‘르완다 대학살, 멈출 수 있었던 참극’이라는 의미심장한 타이틀로 게시됐다.(4) 보고서 229쪽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아프리카 단결기구 고위 관계자는 “르완다의 참극을 멈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프리카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망령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자성의 목소리였다. 물론 아프리카 사회의 침묵 아래 100일 동안 매일 1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던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부질없는 반성이지만, 그나마 진정성은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각국은 이 보고서를 통해 딱히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자국 내에서 버젓이 활보하는 것을 묵인한 것이다. 이는 가해자들의 뒤를 봐주는 국가가 벨기에와 프랑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국제 사법재판소에 소환될 잠재적 피고인들은 오늘날에도 남아공, 케냐, 짐바브웨,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심지어는 신분을 감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령 ‘대학살 자금줄’로 통한 펠리시앵 카부가 역시 오랜 기간 짐바브웨와 케냐 정부의 보호를 차례로 받다가 프랑스로 가서 가족과 상봉한 후, 2020년 5월 파리 근교 아니에르쉬르센에서 체포됐다.
프랑스의 구 식민지 지역은 도주 중인 학살 가담자들의 1순위 행선지다. 특히 가봉이나 카메룬 등의 국가에서 이들을 수용했다. 2008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반인륜범죄 판결을 받은 대학살 주범 테오네스트 바고소라 대령이 붙잡힌 곳도 바로 카메룬이었다. 2000년 차드의 수도 은자메나에서는 ‘르완다, 기록의 의무’를 주제로 문학회가 열렸다. 그런데 학회에 참석한 필자와 동료들은 이야기를 나눴던 토론 참가자 중 한 명이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수배자라는 사실을 행사가 끝난 뒤에야 알게 됐다. ‘무람비의 도살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알로이 심바 대령이 2001년 11월 체포된 곳도 다카르에서 약 60km 떨어진 소도시 티에스였다. 국제인권연맹 소속인 국가인권기구 비호하에 숨어 지냈던 것이다. 카를라 델 폰테 검사의 집요하고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에 심바 대령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로 인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력하게 요청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외면하고픈 참극, ‘앎에 대한 두려움’
이렇듯 르완다 문제에 관해 아프리카 국가들은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 이유가 냉소적인 지도자의 그릇된 처신 때문이라고, 특히 프랑스어권 국가의 경우 엘리제궁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위안이 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르완다 문제의 ‘최종 해법’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도처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에는, 전후 민주적 질서 수립이 장려되는 분위기 속에서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 무대가 자유로이 개방된 상태였다. 신진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대중에게 상황을 제대로 전달했다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가 확보된 지금도, 기자들이 외국에서 직접 취재를 감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외 상황에 대해서 아프리카 언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외 통신사(<AFP>, <AP>, <Reuters> 등)의 속보를 받아쓰고 있다. TV에서도 해외 뉴스는 말미에 프랑스 TV(<TF1>, <France2>)의 논평이나 자료 화면을 내보내는 수준에 그친다. 르완다 대학살 기간에 특히 침묵했던 민영 라디오는 지금도 르완다에 대해 철저히 함구한다. 따라서 유일한 정보원은 <BBC>, <RFI>, <VOA> 등 주요 국가들의 방송국 채널뿐이다. 물론 모든 정보가 왜곡 없이 전달되는지도 알 수 없다.
오늘날 르완다 학살에 대해 “몰랐다”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르완다 대학살은 현재 그 어떤 세계사적 비극 이상으로 소상하게 연구된 소재이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서적, 문학작품, 영화, 연극이 넘쳐나며, SNS에서도 활발하게 자료가 공유되고 있다. 즉, 지난 27년간 아프리카에서 이 문제를 외면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세네갈, 케냐, 모잠비크 등의 국가에서 르완다 사태는 인종주의 논리에 따른 잔혹한 인종 간 살육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냐바롱고 강에 버려지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썩어가는 수십만 구의 시신, 배가 갈라진 임신부나 화장실에 버려진 갓난아기, 시신을 먹는 개…. 이런 참상이 담긴 자료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나머지 학살을 외면한 게 아닐까? 르완다 소설가 욜랑드 무카가사나는 이를 ‘앎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다.(5)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에티오피아, 말리 사태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요 분쟁에서는 이런 태도가 목격된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서로 너무나 멀어졌다. 게다가 이들의 머릿속 ‘국경’은 식민지 시기 그어진 선으로 개념이 잡혀 있는 상태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적 혼동으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은 국경 밖 상황에 공감하기 어렵다. 투치족 학살에 대한 지식인들의 해석 또한, 카가메 대통령의 암묵적인 적개심으로 왜곡된 경우가 적지 않다.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죽이고, 투치족이 후투족을 죽이고 있다.”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가장 극심했을 때 당시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갈리가 내뱉은 말이다. 학살 이후 비아리츠에서 처음 아프리카-프랑스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기자회견 자리에 나선 미테랑 대통령도 짐짓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다들 알다시피 한 나라의 국민이 서로 자멸하는 것을 국제적 차원에서 막아 줄 대안은 없다. 게다가 현지 지도부가 단호하게 총검을 들이밀거나 마체테(벌목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물론 프랑스라는 일개 국가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로부터 이틀 후 미테랑 대통령은 한 기자에게 이런 질문도 던졌다고 한다. “어떤 학살?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학살을 말하는 겁니까, 후투족에 대한 투치족의 학살을 말하는 겁니까?”
이렇듯 유엔 사무총장이나 프랑스 대통령이나 인종차별주의적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식이기도 하다. ‘내전은 부족 간의 싸움’이라는 이런 인식으로 인해 20세기 최후의 대학살은 무려 100일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일에 걸쳐 약 80만 명의 희생자를 낸 학살사건의 원인이 현대사에서 종종 벌어지는 ‘제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부바카르 보리스 디오프 Boubacar Boris Diop
세네갈 소설가. 저서로 『Bàmmeelu Kocc Barma』(Ed. EJO, Dakar, 2017)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이부카 희생자 가족 및 생환자 협회에서 주최한 관련 전시도, 비슷한 표현으로 전시 제목을 정했다. www.ibuka.be
(2) Gérard Prunier, 『르완다 대학살(Rwanda: le génocide)』, Dagorno, Paris, 1998.
(3) 현재의 수단 남부에 위치한 파쇼다는 과거의 이집트 전초 기지로, 1898년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지역이다. 이는 심각한 외교 갈등으로 이어져 양국의 민족주의 경쟁을 초래했다. 파쇼다 사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 대 앵글로 색슨 진영 간의 극심한 식민지 경쟁을 상징한다.
(4) ‘Le génocide qu’on aurait pu stopper 르완다 대학살, 멈출 수 있었던 참극’, 르완다 시민조사위원회 사이트에서 조회 가능. http://cec.rwanda.free.fr
(5) Yolande Mukagasana, 『N’aie pas peur de savoir 앎을 두려워하지 말라』, Robert Laffont, Paris, 1999.
미디어의 혼란
“터키옥 작전은 그 모호한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인권단체들과 몇몇 언론인의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언론사 대부분은, ‘프랑스 군인들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로 추방당한 르완다인들의 구세주’라는 신화 제작에 가담했다. 이 신화 속에서, 학살당한 80만 투치족은 뒤로 묻히고, 후투족 민간인이 주된 피해자로 떠오른다. 그 ‘피해자들’은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가 난민수용소에 창궐한 콜레라 전염병에 맞서 싸웠다. 신화는 프랑스의 인명구조 임무를 부각시키며 마무리된다. 이런 언론의 지배적 담론은 1) 피해자들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의혹을 심고, 2)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고 있다. 집단학살을 종식시킨 RPF를 가해자로, 집단학살을 자행한 후투족은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3) 게다가, 프랑스 정치 지도자 및 군인의 역할을 영웅화하고 있다. 이는 사실에 대한 공통의 기억(역사)을 가공(왜곡)한다.” - 프랑수아 로비네(1994~2015, 르완다에서 프랑스의 역할: 새로운 기억 전쟁의 중심에 있는 프랑스 언론인), <Le Temps des medias 미디어의 시간>, 26호, 파리, 2016년 봄. |
“위장작전”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사무총장은 터키옥(玉) 작전에 대한 OAU의 여러 유보적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2차 유엔 르완다지원단(UNAMIR) 결성을 결정했을 때, 프랑스는 무슨 이유에서 그런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것일까? 왜 아프리카 군대에 병참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왜 프랑스는 제2차 유엔 르완다지원단에서 복무할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을까? 프랑스가 제안한 이니셔티브가 실제로 6개국 파견대를 포함한다면, 그 이니셔티브는 왜 유엔의 국제 병력에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일까?”
“1990년 10월부터 프랑스는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 정권의 일탈, 특히 1994년 4월 이전의 집단학살 행위를 지지해 왔다 (...). 이 정권이 RPF와의 전쟁에서 프랑스에 많은 빚을 졌음에도, 프랑스가 이 정권에 자제를 촉구한 적은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결정권자들이 투치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전쟁을 종식시키려 시도한 증거도 전혀 없다. 이 같은 지지의 결정과 지속은 ‘집단학살의 준비와 실행에서 프랑스의 진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 <1994년 르완다에서 자행된 집단학살에 프랑스 정부의 개입 증거 수집을 담당하는 독립 국가위원회 보고서>(뮈시오 보고서), 키갈리, 2007년 11월 15일.
“르완다의 위기는 르완다에는 재앙으로, 프랑스에는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프랑스를 투치족 집단학살의 공범으로 볼 수 있을까? 이것이 집단학살 계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뜻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조사한 아카이브에서 이를 입증할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인종차별적 대학살을 조장한 정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프랑스는 이 정권의 가장 급진적 구성원들이 준비한 집단학살 계획에 눈을 감았다. 프랑스는 하브자리마나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후투족을 적대하는 동시에, 르완다 애국전선(RPF)으로 대표되는 ‘우간다 투치족’도 적대시하는 이중 전략을 택했다. 집단학살 당시, 프랑스는 학살을 자행하는 과도정부와의 결별에도 더뎠고, 계속해서 RPF의 위협을 가장 큰 우려로 꼽았다.” - <프랑스, 르완다, 투치족 대학살(1990-1994)>, 르완다 및 투치족 대학살과 관련된 프랑스 아카이브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뒤클레르 보고서), 파리, 2021년 3월 26일.
“지난 25년간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에서의 과거를 은폐하려는 전략을 펼쳤다. 프랑스 언론과 르완다위원회가 르완다 문제, 특히 집단학살에서 프랑스 정부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보고서를 발표한 후, 프랑스 정부는 집단학살 주동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편향된 조사로 대응했다. 르완다 국내법원과 국제법원이 집단학살자들을 법정에 세우려 할 때도, 프랑스 정부는 수많은 사건들을 수십 년간 해결하지 않았다. 집단학살 발생 후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의 전 영부인 아가테 칸지가 하브자리마나를 포함해 집단학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 레비 파이어스톤 뮤즈 보고서 <예측할 수 있었던 집단학살: 르완다의 투치족 집단학살과 관련한 프랑스 정부의 역할>, 키갈리, 2021년 4월 19일
“우리가 알기로는, 몇 주 동안 다른 르완다인들을 죽인 것은 르완다인들입니다. 집단학살이 발생했을 때, 프랑스는 이런 폭력의 발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미 3개월 전 주둔군을 기술 지원병 24명으로 감축했습니다. 1993년 8월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프랑스는 유엔에 바통을 넘겼습니다. 폭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학살을 종식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유엔과 협정 감시군입니다.” - 1998년 12월 15일, 파리 의회에서 열린 르완다 진상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 발표 중 폴 퀼레스 국회의장의 발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