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에 대한 벨기에의 무거운 책임

2021-07-30     콜레트 브랙만 | 기자

1920년에서 1962년까지, 벨기에는 르완다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이 식민지 개척자들(선교사들)은 인종본질주의적 이념에 빠져, 1994년 투치족이 학살된 땅에 ‘민족’이라는 분류를 강요했다.

 

르완다 학살의 책임에 대해, 프랑스에 화살이 돌아가면서 벨기에의 책임은 뒤덮였다. 그러나 르완다 식민통치의 책임은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간 지속된 문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던 두 나라, 르완다와 부룬디의 위임 통치를 벨기에에 맡겼기 때문이다. 벨기에인들은 낯선 작은 두 나라를 원거리에서 통치하면서, 우선 간접행정을 시행했다. 그 다음 해당 지역의 시스템에 의존하기로 했다. 르완다의 경우, 신권을 가진 음와미(Mwami; 군주를 뜻함-역주)가 지배하는 봉건체제가 그런 시스템이다. 레오폴드 2세가 지배했던 거대한 콩고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를 지배하는 데 있어 비용을 부담하기 싫었던 벨기에는, 복음화가 식민지배의 요소이자 동시에 ‘발전’의 요소가 될 수 있도록 아프리카의 백인 성직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벨기에인들은 ‘인종’의 분류와 차별에 전념한 당시의 과학, 인류학을 맹신했다. 그리고 속칭 ‘함족(Hamites)’ 이데올로기를 채택했다. 즉, 체형을 보면 투치족은 함족이나 닐로트족에서 유래한 종족으로, 양떼를 먹일 목초지를 찾아 중앙아프리카에서 르완다로 와서 ‘반투족(후투족)’ 농민들과 르완다의 원주민인 트와족(피기족)을 제압한 목축민들이라는 것이다.(1) 이웃나라 부룬디처럼 왕정의 합법성이 민족적 기반보다는 종교적 기반 위에 있던 이 나라에서, 식민주의자들과 선교사들은 르완다의 음와미 무싱가(Musinga)를 1931년 폐위시켰다.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일한 신이자 부족을 응집시키는 구심점인 이마나에 대한 숭배는 가톨릭 종교로 대체됐고, ‘귀족’으로 통하는 투치족은 선교사들의 모든 관심의 대상이 됐다.

1930년대에는 물 분사 세례법으로 대규모 개종이 이뤄졌고, 1950년에는 르완다가 복음화의 모델이 돼 그리스도 왕에게 봉헌됐다. 투치족 귀족들은 벨기에 덕분에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는 대신, 식민통치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투치족 귀족들이 강제 노역과 처벌의 집행을 맡고 벨기에인들이 후투족 지도자들을 해고하면서,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적대감은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후투족은 점점 더 무거운 노역을 감당해야 했고, 몇 차례의 기근에도 시달렸다. 교육차별도 있었다. 특히 르완다 남동부 부타레 지역의 아스트리다 학교(Groupe scolaire d’Astrida)에서는 식민화의 조력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이 이뤄졌다. 벨기에인들은 르완다 사회를 결속하는 또 다른 요소들, 땅과 가축과 군대를 각각 관장하는 세 추장에 의존하는 전통 시스템을 파괴했다. 1930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식민지 개척자들과 선교사들은 르완다의 ‘씨줄날줄’을 해체하고자 르완다 국민들에게 ‘부족’이 명기된 신분증을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르완다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투치족 엘리트들이 당시 아프리카에서 확산되던 독립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유엔이 신탁통치 종식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하자.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벨기에인들(진보적 기독교민주당원들을 포함한)은 후투족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투치족에 비해 유순해보이고, 수도 더 많은 후투족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벨기에인들이 인식하면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스위스 출신의 교황청 대사 앙드레 페로댕은 자신의 젊은 비서 그레구아르 카이반다로 하여금 1957년에 ‘바후투 선언’을 발표하게 한 다음, 무후투 사회운동을 시작하도록 장려했다. 이 운동은 나중에 ‘투치족 침략자’에 대항하는 ‘부족 항쟁’이라는 이념을 옹호하는 후투해방운동당(파르메후투)의 전신이 됐다. 벨기에인 성당 참사원 외젠 에르노트는 파르메후투가 ‘레지오 마리애’(2)를 모델로 한 세포 조직을 구성하도록 독려하는 한편, 투치족은 신속한 독립과 입헌 군주제를 요구하는 르완다전국연맹(UNAR)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런 갈등은 1959년 농민 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농민 반란은 후투족 농민들이 벨기에 주둔군 대령 기욤 로지스트의 사주를 받아, 벨기에 식민지 개척자들이 아닌 투치족 귀족들과 당국에 대항해 벌인 소위 사회적 ‘혁명’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았으며 르완다에서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이 강력한 권력자는 파르메후투와 최초의 르완다 대통령이 된 카이반다에게 공공연하게 동조했다.

1962년 선포된 독립은 평민들(후투족)의 승리였다. 투치족의 집들은 불탔고, 투치족 30만 명이 우간다로 도망쳐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난민이 됐다. 이후 1990년까지 벨기에인들은 승리한 후투족 편에 서서 인종적 다수가 정치적 다수와 일치한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공유했다. 투치족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지 않은 전임 대통령 카이반다와 달리, 온건파로 분류되는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은 벨기에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환대받았다. 또한 보두앵 국왕의 초청으로 벨기에 궁전에서 조직된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벨기에의 입장에서 “천 명의 협력자가 사는 나라” 르완다는 30년간 벨기에 개발원조의 주요 수혜국이 됐다. 또한,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이끄는 ‘통제 불가한 나라’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와의 비교는 종종 르완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까지 구조조정 정책(3)으로 목이 졸린 르완다는 화폐 가치를 절하하도록 강요받았고, 에이즈와 가난에 시달리는 국민들 사이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 10월 우간다 국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벨기에는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RPF, 1986년 요웨리 무세베니를 우간다 대통령으로 추대했다)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충실한 동맹(후투족의 르완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미 지급된 탄약은 전달되지 않았고, 고대하던 벨기에군의 지원은 지역 주변국들에 외교순방을 나서는 것으로 대체됐다. 이에 당황한 르완다 정부는 프랑스로 눈을 돌렸다. 장크리스토프 미테랑(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아들, 당시 엘리제궁 아프리카 담당 보좌관)의 표현을 빌리면, 프랑스는 이미 르완다에 “졸병 몇 명”을 보낸 상태였다.(4) 프랑스군은 자이르군과 동맹해 한동안 RPF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90~1994년 벨기에는 어떻게든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 했다. 벨기에는 아루샤 평화협상과 당사자들 간 권력분담 원칙을 최대한 지지했으며, 강경 정권에 맞서 야당인 후투족 정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르완다 내 인권침해, 정치적 암살, 인종학살 등에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벨기에 당국은 오랜 세월 자신들의 위탁통치를 받았던 르완다가 저항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밀콜린스 라디오 방송(후투족의 급진파 라디오 방송)에서 공개 선언했듯(5) 투치족 말살 위협을 실제로 이행하거나, 그 범위가 표적 암살과 지역 학살을 넘어설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듯하다. 

브뤼셀이, 특히 기독교 사회당 출신의 국방장관 레오 델크루아가 그런 위협에 대해 올바른 조치를 취했다면, 1993년 가을 키갈리로 파견돼 유엔 르완다(미누아) 지원단의 중추 역할을 할 예정이던 벨기에 평화유지군 550명은 더 효율적인 장비와 제대로 된 키갈리 지도를 제공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방어할 수 없는 14개 구획으로 흩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천 개의 언덕이 있는 땅(밀콜린스)으로의 바캉스”를 약속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태가 계속 악화되자, 1994년 초 벨기에는 평화유지군이 직면한 적대감을 마침내 알아차렸다. 그리고 평화유지군이 르완다 군사 당국에 종속되는 “평화유지”의 임무를 보다 공격적인 작전으로 수정해줄 것을 유엔에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94년 4월 7일 아침 벨기에 평화유지군 10명이 학살당한 사건, 밀콜린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표명된 증오, 외국인들에 대한 위협, 투치족에 동화돼 서둘러 대피한 사람들. 그때까지 벨기에가 ‘친구’로 여겼던 나라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르완다에 대한 벨기에의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언어집단 간의 균형과 타협에 기반한 벨기에에, 르완다는 혐오스러운 거울이 됐다. 1994년 4월 14일, 빌리 클라스 외무장관이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브뤼셀은 평화유지군을 철수하고 다른 국가들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알렸을 때, 르완다를 사형집행인들에게 내맡기는 이 결정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벨기에 사회에서 들리지 않았다.

1998년 르완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의회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가이 베르호프슈타트 총리는,(6) 2000년 4월이 돼서야 키갈리로 가서 사과했다. “조국의 이름으로,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글·콜레트 브랙만 Colette Braeckman
브뤼셀, <르수아(Le Soir)> 기자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Gérard Prunier, ‘Le mythe des Hutus et des Tutsis 후투족과 투치족의 신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2월호.
(2) 1921년 아일랜드에서 설립된 교회에 봉사하는 가톨릭 신자 단체.
(3) Makhtar Diouf, 『L'Endettement puis l'ajustement. L'Afrique des institutions Bretton-Woods 채무, 그리고 조정. 브레튼우즈 체제의 아프리카』, L'Harmattan, ‘제3세계 포럼’ 시리즈, Paris, 2002년.
(4) Gérard Prunier, 『Rwanda 1959-1996. Histoire d'un génocide 르완다 1959~1996년: 인종학살의 역사』, Dagorno, Paris, 1997년.
(5) François Misser, ‘Rwanda: médias et génocide 르완다: 미디어와 인종학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4년 8월호.
(6) Anne-Cécile Robert, ‘En Belgique, jusqu’au cœur du pouvoir 벨기에에서 권력의 심장부까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8년 9월호.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교훈

 

“르완다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 1년 후인 1995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를 방문해 축구 경기장에 모인 군중에게 설교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에는 언어도, 인종도, 문화도 달랐습니다. (…) 여러분은 같은 인종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나는 우리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투투 대주교가 인종을 언급한 것은 연대의 표현이다. 그러나 르완다는 남아프리카도 나이지리아도 아니며, 아프리카인들은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르완다인이 다른 르완다인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아프리카의 자존심과 진보에 반하는 범죄로 보는 것, 이런 범죄가 야기한 수치심을 전 세계의 치욕이 아니라 아프리카만의 문제로 보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 필립 고레비치, 『Nous avons le plaisir de vous informer que, demain, nous serons tués avec nos familles. Chroniques rwandaises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당신에게 알려서 기쁩니다. 르완다 연대기』, Denoël, Paris, 1999년. 

 

번역·김루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