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마그레브로 향한 좌파 기자들

2021-07-30     안 마티외 |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 교수

프랑스 인민전선은 주 40시간 노동법과 유급휴가법 제정에 기여했으나,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에서 이룩한 성과는 초라했다. 공산당 등 다양한 사회주의 단체에 동조하는 기자들은 마그레브로 향했다. 출발할 때부터 그들은 현지 생활이 자신들에게 환희도, 사회적 쟁취도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기근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종려나무 숲, 남국의 신기루, 오아시스의 온화한 열기, 하늘보다 푸른 바다, 모스크와 구시가지, 묵묵히 아프리카의 숙명에 순응한 도시, 히잡을 쓴 여인. 이 모든 것의 이면에 감춰진 모험의 행복한 유혹. 관광안내소는 많은 것을 약속한다.” 1937년 여름 마그레브 지역을 묘사한 기자 베르나르 르카슈의 글에서 빈정거림이 피어오른다. 관광객을 상대로 한 광고들은 언론, 정부, 식민지 개척자들이 퍼트린 북아프리카의 이국적이고 소비지상주의적인 이미지를 반영했다.

“아프리카는 병들었다.” 루이 아라공과 장리샤르 블로크가 이끈 공산주의 일간지 <스 수아(Ce Soir)>에 실린 베르나르 르카슈의 현지 보도의 큰 제목이다. 병의 근원은 프랑스가 “보호”하기로 돼있던 두 보호령(2) 튀니지와 모로코 국민에 대한 프랑스의 대우였다. 1936년 4~5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한 후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대(對)식민지 정책에서 소극적인 대처로 일관했다. 역사학자 장 비그뢰는 “정부는 식민 제국과의 관계에 (…) 자유와 휴머니즘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물론 정부는 여전히 프랑스 통치권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지만 식민지 국민의 권리 인정을 검토 중이다”라고 지적했다.(3)

1936년 12월 30일 국회에 제출된 블룸-비올레트 법안(4)이 대표적인 예다. 이 법안은 프랑스에 동화된 소수의 엘리트층 알제리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약 2만 2,000명의 퇴역 군인과 학위 소지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내부와 법안에 적대적인 우파와 급진주의 세력에서 이내 극심한 소요가 일어났다.”(5) 

 

“정의롭고 인간적인 식민 지배”, 과연 가능한가?

결국 이 법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최대한 사회적 정의를 보장하고 최대한 인간적인 식민 지배”라는 레옹 블룸의 구상은 블룸 정부의 식민지부 장관 마리위스 무테에 의해 재조정돼 식민지 지배 인력을 안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37년 아를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주창으로 리프전쟁(1920~1927년 모로코 베르베르족의 리프 공화국과 스페인·프랑스 연합군 사이의 전쟁-역주)을 고발했지만 이후 “프랑스 국민에 통합되는 것이(…) 식민지 국민에 이롭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사실 당시 신문과 좌파 지식인은 특히 반파시즘을 지향했다. 클로드 리오쥐는 반파시즘은 “식민지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뿐이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에서 벌어지는 운동들을 반파시즘의 목표와 역학관계에 포함시킬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6) 노동자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SFIO) 내 ‘혁명 좌파’ 분파의 일원으로 마리위스 무테와 대립했던 다니엘 게랭은 가장 위대한 반(反)식민주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사회주의 일간지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서 리오쥐와 반대로, “당 내부에서 식민지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불공정성이 지배하는 식민지야말로 정의 실현을 위한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곳이라는 점을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었다”라고 단언했다.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둘 무렵, 반파시즘 지식인 감시위원회(CVIA)는 『식민지 문제에 직면한 프랑스(La France en face du problème colonial)』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알랭, 마르크 카사티, 폴 랑주뱅, 폴 리베가 공저하고 공공연한 반식민주의자 마르크 카사티가 편집한 이 책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미 프랑스에 굴복한 영토에서 또다시 추악한 힘을 앞세우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프랑스가 인간성, 정의, 자유의 국가로 남고 싶다면 프랑스의 의무는 명확하다. 식민지에 그들만의 민주주의 헌장을 부여하고 식민지 국민 스스로 해방으로 향하는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반식민주의는 미세한 태동만 보이는 수준이었다. 반식민주의의 기초 설립에 기여한 기자들의 어조는 식민지 국민에게 저항을 촉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공동투쟁 구축이 아니라 추후 투쟁 가능성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인민전선 연합 내부의 갈등으로 굴절된 그들의 반식민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독립주의가 아닌 동화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그들이 마그레브에서 작성한 기사들의 핵심은 인간성, 정의, 자유에 대한 질문이었다.(7) 

이 기자들은 식민지 국민이 빈곤으로 고통받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베르나르 르카슈는 <스 수아>에 기고하기 몇 달 전부터 이미 마그레브에 머물고 있었다. 반유대주의 반대 국제동맹(LICA)의 기관지 <드루아 드 비브르(Droit de vivre)>의 발행인이었던 르카슈는 알제에서 열린 북아프리카 LICA 연방간 전당대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마그레브 지역을 여행했다. 1937년 4월 말, “아직 관광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모로코”에서 르카슈는 “유럽산 고급구두를 신고 이 도시들의 땅을 밟지 말라! 역겨운 흔적이 남을 것이다”라는 독설을 남겼다. “후각이 예민한 자는 남국의 공기를 마시지 말라! 시체 냄새가 날 것이다. 모로코 남부 사람들은 잠들 듯, 아니 그보다 쉽게 죽는다.” 

모로코의 계급투쟁은 현지인이 처한 환경만큼 가혹했다. 이 기자들에게 ‘원주민’이라는 단어는 열등한 지위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기자들은 대부분 원주민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붙였다. 인종차별을 암시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단어임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르카슈는 “모두가 구걸을 한다”라고 덧붙이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이 아닌 수스 지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주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규탄했다.

르카슈의 기사가 발표된 지 한 달 뒤, 공산주의 운동가로 변모한 유명 기자 시몬 테리(8)는 한동안 스페인 내전 현장을 떠나 프랑스 공산당(PCF)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의 특파원으로 모로코에 체류했다. 현지보도에서는 발췌한 인터뷰 내용이 기자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한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식민지 점령 이전에 모로코에서 살았다. 당시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빈곤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가진 것으로 살아갔다. 당시만 해도 식민지 개척자와 투기자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과일과 곡식을 수출하지 않았다’.” 모로코에서의 계급투쟁은 본격적인 투쟁의 양상을 띠지 못했다. 빈곤이 투쟁을 억제했다. 당분간은 말이다. 

“프랑스령 모로코”의 동쪽에 위치한 이웃 국가 알제리에서도 빈곤이 창궐했다. 당시 알제리는 식민지 지위를 획득해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작가 장 게에노는 1937년 5~6월 알제리를 여행하며 친인민전선 ‘문학·정치’ 주간지 <벙드르디(Vendredi)>에 여행기를 기고했다. 알제리를 둘러보던 게에노는 “곳곳에서 빈곤을 목도했다. 부사다와 비스크라의 길은 기근을 피해 북쪽으로 향하는 카라반들로 혼잡했다. 한 걸인 무리가 열흘 동안 내 뒤를 쫓았던 것 같다”라고 한탄했다. 모로코에서도, 알제리에서도 걸인은 모두 ‘현지인’이었다.

게에노는 기근상황을 폭로했다. 3년 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모로코에서는 특히 기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1937년 6월 29일, 급진주의 일간지 <뢰브르(L’Œuvre)>에는 프랑스 아동구호위원회의 모금 공지가 실렸다. 위원회는 “시급히 구호의 손길을 보내기 위해 따듯한 마음을 가진 모든 남녀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굶주리고 헐벗은 어렴풋한 형체들의 광경은 기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벙드르디> 1면의 현지 보도는 “푸른 낯빛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장 페리고는 “내가 여행한 나라는 보루의 높은 탑에서 프랑스 국기가 펄럭였지만 기근에 휩싸여 있었다”라고 냉혹하게 묘사했다. 시몬 테리는 “모로코 남부에서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상황이다”라고 노골적으로 기록했다.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반식민주의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인 마그들렌 파즈는 반인종주의와 외국인 권리 신장에도 앞장선 기자였다.(9) 1937년 7~9월, 파즈는 모로코에 머물며 <르 포퓔레르>에 기고했다. 그녀의 두 번째 기사는 경종을 울렸다. “사람 살려! 직접 보니 이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힘을 쥐어짜 외친다. ‘사람 살려!’ 굶어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소리가 들리는가! ‘굶어 죽는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이 되는가?”(10) 파즈의 직설적인 문장들은 그녀가 의도한 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파즈는 프랑스 국민의 귀에 조금이라도 들릴 수 있도록 소리 높여 외쳤다. 그녀는 식민지와 여타 “보호령”의 상황은 “프랑스 본토 국민”의 형제애 어린 지원으로만 바뀔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기자들은 종종 무력함을 느끼기도 했다. 베르나르 르카슈와 동행한 LICA 운동가 한 명은 카사블랑카에서 “한 무리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줬다. “사람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빵 조각을 뺏으려, 엄마들은 아이의 빵 조각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파즈와 그녀의 사회주의 동료들은 돈을 조금씩 거둬 페스 인근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건넸다. “여인은 커다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봤다. 겁에 질린 눈동자는 의심을 내비치다가 곧 환히 빛났다. 이거면 될까? 아이들을 모두 먹일 수 있을까?”

파즈는 동정심만으로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개인의 행동이 정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분개했다. “가슴이 시렸다. 부끄러웠다. 대책없이 젖은 내 눈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가리고 싶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하는 이 끔찍한 웅성거림, 일시적으로 생명력을 되찾은 이 헐떡이는 숨결을 뒤로 하고 나는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저 언덕을 넘어가면 매일 배불리 먹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처럼 말이다.”(11)

파즈가 느낀 ‘부끄러움’은 자신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민전선 연합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부끄러움도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기자 시몬 테리도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말도 못하고 숨도 거의 쉬지 않는 채 축 늘어진 이 아기들, 작은 몸에 머리만 거대한 이 아기들을 보고 몸서리치지 않는 엄마, 여성이 있을까. (…) 우리는 여전히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칵테일 파티를 즐기고, 하인을 거느리면서 사는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보호령의 여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에 취해 도망치고 싶어진다.”

재앙의 원흉인 국가의 국민으로서, 기자의 직분을 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36년 12월, 파즈는 잡지 <베트남>에서 “마다가스카르, 인도차이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앤틸리스 제도, 인도제국, 콩고… 출신과 무관하게 고발의 권리가 있는 이들과 만날 때면, 나는 몇 초 동안 그와 나 사이에 토론회가 벌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상념에 잠겼다. “나는 내 앞의 그 사람에게 외치고 싶다. 내 탓이다. 내 얼굴색은 착취와 난폭한 오만함의 색이다. 불공정과 잔혹함의 색이다.” 더 난처한 점은 ‘인권의 나라’, 프랑스라는 그녀의 국적이다.

반식민주의 기자들은 마그레브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직분에 충실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고발하고자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후 알제리 전쟁 중 다른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행동을 촉구하는 현지 보도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연대가 피부색을 초월하는 장이 됐다. 1934년, 반식민주의 투쟁에 지대한 기여를 한 운동가 앙드레 페라가 쓴 ‘알제리 농부, 내 형제…’라는 제목의 현지 보도가 공산주의 주간지 <르가르(Regards)>에 실렸다. 페라는 이 기사에서 “그들은 10만 명이 넘는다. 구체제의 농노보다 더 노예 같은 이 농장 노동자들은 그들의 땀으로 알제리를 거대한 영지와 비옥한 땅으로 일구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제국주의에 의해 쫓겨난 그곳의 땅을 말이다”라고 비난했다. 2년 후에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자취를 감춘 “거대한 희망”

가난과 굶주림이 기승을 부린 이유는 억압 때문이었다. 다른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인간들이 다스리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1938년 2~3월, 튀니지에 체류 중이던 마그들렌 파즈는 튀지니를 다른 마그레브 국가와 비교하며 예상되는 반론에 미리 답했다. “나도 알고 있다. 북아프리카 3국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지리적, 역사적, 민족적, 정치적, 사회적, 행정적 조건이 각 국가의 고유한 특색을 구성하고 각 민족마다 고유한 요구를 갖게 한다.”

파즈는 사르트르가 이후 “식민지 체계”라고 이름 붙인 체계를 규탄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국가 사이에는 궁핍과 가난이라는 공통분모가 하나 존재한다. 세 국가의 국민 사이에는 예속된 상태라는 엄청난 동질감이 존재한다. 아프리카 땅 곳곳에서 반복되는 사실이 알제리에도, 튀니지에도, 모로코에도 적용된다. 지금까지 정치는 언제나 식민지 개척자를 위했지, 원주민을 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마그레브 전역에서 식민지 국민의 노예화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공산주의, 조합주의, 페미니즘 운동가 베르나데트 카타네오는 전쟁과 파시즘 반대 세계 여성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1937년 5월, 알제리에 대한 카타네오의 현지 보도가 해당 위원회의 기관지 <팜므(Femmes)>에 실렸다. 알제에서 쓰여진 이 기사는 “교만한 태도의 식민지 개척자, 부유한 상인, 사업가 옆으로 보이는 대부분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아랍인 하역 인부들을 묘사했다. 

1938년 11~12월, 일간지 <스 수아>는 모로코에서의 나치즘 확산 위험을 파악하기 위해 유명한 기자 스테판 마니에를 모로코에 파견했다. 좌파의 정기 간행물들은 파시즘과 나치즘이 마그레브 지역에서 벌이는 ‘공작’을 매우 우려했다. 이로 인해 기자들의 담화는 동화주의 측면을 대단히 강조했다.(12) 1938년 8월, 비올리스는 “격정에 휩쓸리지 않은 튀니지 국민과 데스투르당 지도자는 원주민 민중은 현재 독립뿐만 아니라 제한된 자치권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변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마니에는 식민지 착취를 시작단계부터 솔직하게 되짚어 보기도 했다. “유럽인은 새로운 경작지, 수익원을 찾아 모로코에 왔다. 양심의 반론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살고, 협상하고, 일하고, 일을 시키고 있다. 그들은 오직 수익창출에만 신경 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로코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카타네오는 알제리에서 자본주의적 식민지 착취를 멸시와 결부시켰다. 모로코에 있던 마니에는 이를 인종차별과 결부시켰다. 비올리스도 튀니지에서 카타네오와 마니에의 관점을 공유했다. 1938년 여름, 비올리스는 <스 수아>의 특파원으로 튀니지에 머물며 ‘심’이라는 예명으로 불리던 위대한 사진기자 데이비드 시모어와 함께 장편 보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비올리스는 모든 식민지 개척자가 똑같은 “사고방식”과 “시대에 뒤진 편견”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중·소규모 개척자들 중 다수는 성실하고 양심적인 이들로, 일꾼들에게 더 많은 몫을 돌려주려 노력하며 일꾼들을 인간적으로, 심지어 애정으로 대한다.” 

하지만 비올리스가 드러낸 긍정적인 면들은 대부분 현실의 다른 면들로 상쇄됐다. 비올리스는 초창기의 튀니지 식민지 개척자들은 “박애주의 때문에 왔는가 아니면 이익을 좇아 왔는가?”라고 분노했다. “그들은 바르도 조약(1881년 체결)이 지켜졌는지, 변화한 튀니지 국민이 조국의 통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있지 않은지, 그들이 부를 쌓는 데 기여한 이 원주민들에 대한 의무가 있지 않는지 한 번이라도 자문해 본 적이 있는가?”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이 질문들을 전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아랍인은 여전히 멸시와 착취의 대상인 ‘비코’(Bicot, 북아프리카 원주민을 뜻하는 은어-역주)일 뿐이다. 아랍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것은 짐승을 대할 때처럼 본능적인 선의 혹은 계산적인 이유 때문이다. 아랍인의 언어, 특성, 사고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소용이 있긴 한가? 그들을 동등하게 대한다? 어리석거나 미친 짓이다!”

착취, 압제, 멸시, 인종차별은 탄압을 유발할 뿐이었다. 상황은 악화됐다. 1937년 11월 파즈가 모로코에서 쓴 것처럼 “공기 중에 존재하던 그 무엇, 천막촌, 시장, 내륙의 오지, 구시가지 곳곳에서 공기 중에 퍼져 있던 더 나은 삶, 정의, 자유를 말하는 그 무엇”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13) 1937년 6월 논객 로베르장 롱게가 ‘전쟁과 파시즘 반대 위원회’의 월간지 <클라르테(Clarté)>에서 언급한 “거대한 희망”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14) 

 

“강자의 특권도, 불행한 민중을 막을 수 없다”

저항이 시작됐다. 클로드 리아쥐는 “마그레브 전역은 집회, 노동자들의 파업, 정치적 보수주의에 대한 항의로 들끓었다. 하지만 곧 탄압이 뒤따랐다”(15)라고 기록했다. 1937년 1월, 알제리에서는 (인민전선에 속한) 북아프리카의 별(ENA)이 해체당했다. 모든 형태의 동화정책에 반대한 메살리 하지는 한 집회에서 “이 땅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이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라고 천명했다.(16) 같은 해 11월, 하지는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5월,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가로 마그레브 지역에 정통한 로베르 루종은 <레볼뤼시옹 프롤레타리엔느(Révolution Prolétarienne)>에 알제리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압제에 신음하는 모든 이들처럼 알제리 원주민은 법의 변화로 인한 구원을 기다릴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모로코에서는 1937년 국민행동위원회가 타의에 의해 해체됐다. 클로드 리아쥐는 “9월 1일, 메크네스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로 13명의 공식 사망자가 발생했다”(17)라고 이어갔다. SFIO의 ‘사회주의 투쟁(Bataille socialiste)’ 분파에 속한 운동가 장 롱게는 <르 포퓔레르>에 ‘굶주린 모로코는 탄압으로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다. “마라케시를 방문한 폴 라마디에(당시 공공 사업부 차관)에게 가장 정확하고 공손한 형식의 청원서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60여 명의 마라케시 시위대에게 수감형이 선고된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는 공공의 안녕, 정의, 프랑스를 섬긴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튀니지에서도 탄압이 가해졌다. 1937년 3월, 메틀라위의 인산염 광산의 파업 노동자들을 향한 발포로 20여 명이 사망했다. 가스통 베르게리의 주간지 <라 플레슈 드 파리>에서 식민지 문제를 담당했던 에드가르 롤랑미셸은 “메틀라위 학살”의 이유를 파악하고자 튀니지로 향했다. 그는 현지 보도를 통해 이 학살은 “사전에 계획된 범죄”라고 주장했다. 1938년 4월 발생한 소요사태로 신데스투르당이 해산됐으며 하비브 부르기바가 투옥됐다. 그해 8월 8일, 이 “프랑스의 죄수”는 <스 수아> 특파원 앙드레 비올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18) 

“나는 글을 쓰고 많은 책을 읽는다. 지금 읽는 책은 (이후 역사학자가 된 반식민주의 운동가) 샤를앙드레 쥘리앵이 북아프리카에 대해 쓴 훌륭한 저서다. 그를 파리에서 만나게 되면 내가 존경한다고 전해 달라. 그리고 내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내 이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여전히 강렬하게 살아있다고 전해 달라. 우리는 지도자들의 불의와 독단의 희생자이지만 싸움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분명히 전해 달라.”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뤼마니테>의 기자 피에르로랑 다르나르는 1935년 이미 알제리 티지우주에서 “카빌리의 용광로가 끓어오른다”라고 보도했다. 1938년, 비록 비올리스는 튀니지에서 “무엇인가 바뀌었다”라고 주목하며 “더 큰 상호 이해와 인간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한 단계 나아갔다”라고 지적했지만 그녀가 주변에서 본 것은 “저항할 준비가 된 성난 마음들”이었다. 튀니스의 한 법정을 묘사한 그녀의 현지 보도를 보면, 그녀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형을 선고한다고 해서 프랑스가 이 젊은 저항심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벌금 500프랑을 선고한다고 해도 누가 이 돈을 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어 “튀니지인은 법에서도, 아니 특히 법에서는 두 개의 저울과 두 개의 척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1937년 11월, 마그델렌 파즈는 모로코 현지에서 경고했다. “신문 발행을 중지시키고, 모임을 금지하고, 총으로 상점문을 열게 하고, 하늘에 비행기를 띄우고, 골목길에 병사들을 풀어놓고, 기관총을 배치하고, 감옥을 죄수로 채우는 것은 가능하다. ‘강자의 특권’이라는, 유일하게 정당하지 않은 권리를 합법적으로 사용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강자의 힘으로도 불행한 민중의 가슴속에서 폭발 직전인 강한 거부의 움직임은 막을 수 없다.”(19) 

 

 

글·안 마티외 Anne Mathieu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 교수. 잡지 <Aden. Paul Nizan et les années trente(아덴. 폴 니장, 그리고 1930년대)> 발행인.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6) Claude Liauzu, 『Aux origines des tiers-mondismes 제 3세계주의의 근원에서』, L’Harmattan, Paris, 1982. 
(2) 모로코는 1912년 페스(Fez) 조약으로, 튀니지는 1881년 바르도(Bardo)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됐다.
(3),(5) Jean Vigreux, 『Histoire du Front populaire 인민전선의 역사』, Tallandier, Paris, 2016.
(4) 알제리부 장관 모리스 비올레트의 이름을 딴 법안.
(7) 이 기사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앙드레 비올리스는 인도차이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1935년 『Indochine SOS 인도차이나 SOS』를 출간했다.
(8) 시몬 테리는 스페인 내전 동안에도 명성을 떨쳤다. 참고 기사 ‘En 1939, plongée dans les camps de réfugiés espagnols en France 1939년, 프랑스의 스페인 난민캠프를 돌아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8월호 
(9) Anne Mathieu, ‘Quand le droit d’asile mobilisait au nom de la République 공화국의 이름으로 비호권이 발동됐을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1월호.
(10),(11),(13),(19) Magdeleine Paz, 『Je suis l'étranger. Reportages, suivis de documents sur l'Affaire Victor Serge 나는 외국인이다. 빅토르 세르주 사건에 대한 취재와 자료들』, La Thébaïde, Le Raincy, 2015.
(12) 이 시리즈 기사명은 ‘Au Maroc cerné 포위당한 모로코에서’이며, 1938년 마그델렌 파즈(Magdeleine Paz)가 쓴 기사 제목은 ‘Le fascio en Tunisie 튀니지의 파시스트’다.
(14) 열렬한 반식민주의자였던 그는 1932년 모로코 지식인들과 함께 잡지 <마그레브>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35년 폐간됐다. 
(15),(16),(17) Claude Liauzu, 『Histoire de l’anticolonialisme en France 프랑스에서의 반식민주의의 역사』, Armand Colin, Paris, 2007.
(18) 안 르누가 펴낸 부르기바가 비올리스에게 보낸 편지, ‘Anticolonialistes des années 30 et leurs héritages 1930년대 반식민주의자들과 그들의 유산’, <Aden> n° 8, 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