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다니엘 코르디에에 대한 오마주
1943~1946년을 배경으로 전쟁 속 첩보기관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담은 책이 나왔다. 『일명 카라칼라』의 속편이자 종결편인 이 책은 이루지 못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된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이 사망한 후, 물랭의 비서였던 다니엘 코르디에는 투쟁을 이어갔다. 코르디에는 자신을 비롯해 혼란의 시대상과 그 속에서 활약한 이들의 투쟁을 이 책에 담았다.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결정적인 시기를 겪고 있었다.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과 프랑스 국내 지도자들, 정규군과 지하 운동조직 사이에 분열이 시작됐다. 수백 명의 지하 운동가들이 나치 독일에 쫓기고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난동과 갈등이 일어났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진실의 순간을 맞았다. 장 물랭의 죽음을 많은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은 ‘해방’으로 여겼다. 물랭이 런던에 망명 중이던 드골 장군을 통해 무기운송과 자금활용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맹은 붕괴 위험에 처했고 각자도생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안이 대립하는, ‘전쟁 속 전쟁’이 벌어졌다.
코르디에의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일명 카라칼라 Alias Caracalla』의 속편은 이 위기 속 긴장감을 재현한다.(1) 코르디에는 자신이 독일군을 한 명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한다. 그의 울분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가 해방 훈장(Compagnon de la Libération)까지 받은 점을 감안하면, 그의 울분은 곧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디에는 4년간 게슈타포의 감시하에 있었고, 이후 해방 훈장까지 받았음에도 이런 사실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자책한다. 그는 전쟁 중 청산가리 캡슐을 늘 소지하고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다. 사보타주(Sabotage) 활동에서 무전도 담당했다. 하지만 앙드레 말로보다는 앙드레 지드와 비슷했던 코르디에는, 주목받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자기애가 넘치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 보고, 듣고 또 기록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필요한 정보를 얻고 기억을 보강할 수 있다.
이루지 못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
진정한 영웅은 겸손한 법이다. 코르디에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다소 수치스럽게 여겼으나, 그가 전쟁기간 유유자적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등한시하는 사실이지만, 코르디에는 격동과 파국의 시기를 거치며 거의 모든 프랑스 저항운동의 배후에 존재했다. ‘렉스’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한 물랭이 사라진 후, 자유 프랑스(드골이 영국에서 수립한 레지스탕스 체제. 일종의 망명정부, 나아가 임시정부의 토대가 됨-역주)와 국내 레지스탕스 조직들 사이에는 경쟁, 나아가 앙금이 존재했다. 양측의 동맹을 성사시킨 물랭은 프랑스 본토에서 활동하며 국외 조직망과 국내 운동들 사이 그리고 국외의 ‘단합된 프랑스’와 국내의 ‘다양한 레지스탕스 조직들’ 사이의 힘겨운 접점을 간신히 유지했다.
이런 물랭이 사라지자, 각 측은 향후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가고자 했다. 코르디에와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인사들은 이런 상황을 한탄했다. 코르디에는 의견의 대립이 있었지만(예를 들어 물랭과 피에르 브로솔레트 간 대립) 통제가 가능했던 자신의 진영과 정치인들의 논쟁 사이에 간극이 존재함을 점차 깨달았다. 자유 프랑스는 드골을 필두로 ‘하나’로 뭉쳤다. 반면 레지스탕스에는 ‘다양한 조직’이 존재했고 각각의 지도자들은 서로 충돌했다. 이 각기 다른 조직들은 선두를 놓고 경쟁했고, 이 때문에 레지스탕스에 다양성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투쟁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알제에는 5만 명의 군인이 남았다. 1944년 6월, 파리에서는 200만 명의 시민 중에서 2,000명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책에는 생생한 역사화 같은 장면들도 등장한다. 1943년 말, 지식과 예술을 사랑한 지하 조직원 코르디에는 임무를 마치고 다음 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자유 프랑스 지휘부의 지시로 프랑스 지식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파리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휴가를 보냈다. 레이몽 크노, 티에리 몰니에, 로제 바양, 장 폴랑, 알베르 카뮈 그리고 장폴 사르트르까지. 이 부분에서는 당시 파리의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특히 사르트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움에 동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던 지원자였다(코르디에는 사르트르를 계속 존경했다. 필자가 증인이다). 그러나 이 무모할 만큼 열정적이던 지식인들은 지하 운동가의 삶이나 무기를 다루는 법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나치 독일 점령기간, 파리는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절을 보냈다. 파리의 극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극장은 활기가 넘쳤으며, 독일인들에게서도 자유로웠다. 오페라를 선호한 독일인들은 극장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광인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방대한 교양을 자랑했다.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이 멋진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데, 아마 그들의 나이 때문일 것이다. 30세면 노인 취급을 받는 곳이 레지스탕스 판이었다. 프랑스 해방 당시 코르디에는 25세였고 일명 ‘파시 대령’, 비밀정보국장 앙드레 드와브랭은 30세가 넘은 상태였다. 가치는 나이에 반비례한다.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는, 근엄하고 신중한 사람보다 젊고 기발한 사람을 더 신뢰하는 법이다.
선구자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타르브뉘’
1944년 8월, 코르디에는 중앙정보작전국(BCRA)을 이끈 앙드레 마뉘엘의 보좌관으로 런던에서 귀환했다. 새롭게 개편된 이 첩보국에는 앞서 비시 정부를 지지했던 인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파브리스(스탕달의 소설 『파르마의 수도원』 속 영웅. 나폴레옹의 군대에 합류해 워털루 전투에 참가한 후 밀라노로 귀향-역주)에 비유하기도 한 코르디에는 귀국 후 가족을 찾았지만 대부분 죽은 후였다. 상관이었던 물랭의 가족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자유 프랑스는 패배했다. 이후 용기, 지위, 직함에 서열이 매겨졌다.
‘타르브뉘’(Tard-venus, ‘늦게 온 자들’)(2)는 서광을 비춘 선구자들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했다. 나르세스 여인이여, 그 이름은 바로 석양이다. (장 지로두의 작품 『엘렉트라』에 나오는 ‘나르세스 여인이여, 그 이름은 바로 서광이다’를 변형한 문장-역주.) 샹젤리제 근처에서 열린 열병식의 연단을 묘사한 장면을 살펴보자. 이미 기존의 질서는 재건된 상태였다.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드골은 신속히 빛을 잃어갔다. 코르디에는 ‘무모한 희망’의 마지막 증인 중 하나로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열병식 같은 행사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았다. 좋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늦게 도착해라.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전쟁 시기의 덕목은 평화 시기에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제 각자 다름을 추구할 때다. 삶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종종 이상을 바꿔야 한다. 이상이 승리하도록 삶을 바꾸지는 말아야 한다. 드골이 권력에서 물러나자 단념을 모르던 사나이 코르디에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화랑을 운영하며 다른 사랑, 다른 정박지를 찾았다.
이 아주 스탕달스러운 ‘행복한 소수’의 모험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예외적인 상황의 ‘우리’가 평범한 날들의 ‘나’에게 자리를 내주더라도 말이다. 훈련장은 세르클 앵테르알리에(Cercle Interallié) 사교클럽으로 변했고, 은신처는 클라리지(Claridge) 호텔로 변했다. 같은 진영에서 같은 대의를 위해 싸운 이들은, 싸움이 끝나자 ‘여기는 내 자리’를 외쳤다. 처음에 200명이었던 이들이 1만 명까지 늘었다(1945년의 첩보부처럼). 질적 승리는 양적 승리를 능가하기 어렵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붉은 언덕(Butte rouge, 전쟁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래), 안녕 내 사랑(Bella Ciao, 이탈리아 반파시즘 저항군이 불렀던 노래), 관타나메라(Guantanamera, 스페인 식민통치 당시 쿠바인들이 부른 저항가)를 부르며 패배할 것인가, 눈물을 흘리며 승리할 것인가? 당당하게 명예를 지킬 것인가, 넥타이를 매고 출세에 매달릴 것인가? 정치적 패배에는 시적 보상이 뒤따른다. 허무하게 지고 마는 시적인 성공보다 정치적인 패배가 결국에는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다니엘 코르디에가 장관직을 맡는 대신 눈물을 선택한 것에 감사하자.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그의 선택이 최악은 아닐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면에 등장하는 대신, 어둠 속에서 글을 쓰며 역사에 남기로 한 것은 말이다.
글·레지스 드브레 Régis Debray
작가. 저서로 『D’un siècle à l’autre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까지』(Gallimard, coll. Blanche, Paris, 2020)가 있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Daniel Cordier, 『Alias Caracalla 일명 카라칼라』, Gallimard, Paris, 2009.
(2) 백년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가 브레티니에서 휴전협정을 맺자, 도적떼로 변해 프랑스 지방을 돌며 약탈을 일삼은 용병 집단.(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