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속전속결 아프간 장악, 그 비책은?

2021-08-31     로맹 미엘카레크 | 언론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8월 초부터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카불 시내 샤레나우 공원에 피난민들이 대거 모여든 것이다. 탈레반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자 북부 지방에서 피난을 온 이들이다. “도움도 못 줄 거면서 왜 여기 있나요?” 밝은 색 부르카를 입은 젊은 여자가 홧김에 눈을 번뜩거리며 쏘아붙였다. 주변의 다른 여자들도 모두 부르카 차림이다. 눈에 띄게 달라진 광경이다. 난민들이 카불에 입성하기 전까지만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감은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목숨, 팔다리 잃어

부촌에 들어선 이 공원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은 북새통 속에서 빵조각이나 돗자리와 방수포를 얻으려 서로 밀치고 다투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두 남자가 군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멍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하두르는 8월 11일 함락된 쿤두즈주에서 왔다.(1) 그는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라고 말했다. “질서를 통제할 사람도 조직도 없으니까요.”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였다. “탈레반이 마을을 불태웠어요. 시장, 상점, 집까지 모두요. 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겨우 열 살이었어요.”

수도에서 500km 떨어진 곳에 남부의 주요 도시 칸다하르가 있다. 국제 비영리 조직 휴머니티 앤 인클루전(Humanity & Inclusion, 舊 Handicap International, HI)이 운영하는 사무소에서 25세의 남성 라마툴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보름 전 로켓탄에 맞아 양쪽 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우리는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탈레반과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총격전에 휘말리고 말았다. “저는 그나마 교육을 받아서 형편이 나은 편입니다. 일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보철물을 달면 걸을 수도 있을 테고요. 죽은 사람도 있는데요.”

민간인들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대피한다. 파편 더미 속에서 사람들은 낮에는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하고, 고약한 오물 냄새 속에서 원조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HI에서 일하는 교육가가 아이들에게 폐허 속 두 아동의 그림을 보여주며 물었다. “정체불명의 물건을 만져도 될까요?” “아뇨!” 자칫하면 목숨이나 팔다리가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아이들이 외쳤다. 그중에는 플라스틱 의족을 달고 걸음을 시도하는 13세 소년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탈레반을 원망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들은 원래 군대 지휘관을 노렸대요. 그런데, 정작 지휘관은 손가락만 몇 개 날아갔대요.” 어린 소년의 이 말은, 일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거짓 보도의 자유’를 누리다

“탈레반 대원들은 위협적인 테러리스트지만, 군사력은 형편없어요.” 카불이 함락된 다음 날인 8월 16일,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이니셜을 따서 BHL이라고도 불린다)는 프랑스 뉴스 전문 방송 <BFM TV>에 출연해 “오토바이를 타는 탈레반 대원들의 군사력은 두려워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 방문 당시, 몇몇 마을에 가봤습니다. 여성들은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았고, 기자들은 자유롭게 보도하고 대부분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불어온 자유의 분위기가 만연하더군요. 탈레반은 권력을 넘보지도 않았습니다.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까요.”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탈레반의 힘에 대해 어떻게 이토록 모를 수 있을까? 최대 10만 명의 전투대원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탈레반에 대해 말이다.(2) 

일견 초라해 보였을지 모르나, 탈레반 대원들은 이륜차 덕택에 교통체증과 무관하게 작전수행이 가능한 기동성을 갖췄다. 대부분 도시에서 이륜차 운행을 금지했을 정도다. 탈레반이 칸다하르주를 장악하기 일주일 전에 이 도시는 ‘BHL’의 발언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탈레반 세력이 접근해오는 와중에도 거리를 거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부르카로 몸을 가린 소수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거리에서 여자들의 모습은 좀체 볼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주류 언론은 보도의 자유를 누렸지만, 탈레반이 예상을 초월한 속도로 진격해오는 사이에도 “반군 수백 명 사망”이라는 정부의 거짓 통계치를 받아들였고, 정부의 거짓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은 정부군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의도적으로 숨겼다. 어느 날 밤에는 공군 항공기를 촬영하려고 카불 공항에서 대기하는 기자들을 격납고에서 대기시켰다. 이때 바깥에 있던 서구 보안업체 직원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장교들이 감추려던 광경을 목격했다. 항공기에서 다치거나 죽은 병사 수백 명이 쏟아져 나왔다.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권의 측근으로 알려진 소식통이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사상자가 매달 5,000명씩 발생했다고 한다.(3) 텔레비전에 등장한 전문가들이 재차 강조한 바와 달리, 아프간 군대 중 일부는 전투를 벌였을 뿐 아니라 현금을 두둑이 챙겨두기도 했다.

 

썩은 정부보다는 차라리 탈레반?

모하메드가 철학자는 아니다. 대신 여러 국내외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그는 칸다하르주에 만연한 정서를 이렇게 설명했다. “탈레반이 속전속결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국민은 정부의 군벌들에게 질렸어요. 탈레반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 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국 75개 지구가 탈레반 통제하에 있었고, 탈레반은 주로 농촌 지역을 관할했지만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탈레반은 모습을 감추지도 않았으며, 여성 인권의식이 없는 일부 국민의 시각에서 그들은 부패한 정부 권력보다 더 올바르고 때로는 더 나은 방식으로 지역을 통치했다.

탈레반이 진격하면 지방에 고립된 소수의 병사가 보유한 탄약과 식량은 금세 바닥났다. 정부군은 주요 도시에 전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지방에 지원군을 증파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때 탈레반은 이웃 지구의 장로들을 협상단으로 보내 항복을 권했다. 군은 사기가 저하된 상황에서 쉽게 항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이루는 군인 18만 명과 예비군 10만 명 중 대다수가 항복을 택했다.(4) 아프가니스탄 국방부와 대변인은 매일 탈레반 대원 수백 명을 무찔렀다고 발표했다. 조작된 숫자였다.

탈레반은 여러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국가 전체를 고립시켰다. 도시 간의 주요 통신선을 단절시키고, 30개의 국경검문소 대다수를 점령했으며, 정권의 수입원을 끊고 공급망 중에서도 특히 식량 공급을 통제했다.

그렇게 해서 탈레반은 북부에 제2의 전선을 만들어 정부군을 놀라게 했다. 칸다하르주와 헬만드주 인근 남부 지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탈레반 대원들은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방 점령에 나섰다. 1990년대에 탈레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아프가니스탄의 정치·군사 조직인 ‘아프가니스탄 구원 국민 이슬람 연합 전선’(약칭: 북부동맹)의 재결성을 예상한 탈레반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세력이 약한 북부 지역에서도 반격의 희미한 불씨까지 짓밟았다.

이들이 카불에 접근하자 군과 경찰은 그 병력이 막강했음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국가 원수는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도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항복 전날 육군 장교 한 명이 국방부 사무실에서 왓츠앱을 통해 질문을 던졌다. 8월 15일에 탈레반은 카불에 당장은 입성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들과 맞서 싸울 사람도 없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수도를 점령했다.

이 나라 정치 엘리트들은 어쩌다가 승산이 없는 전투에 말려들었을까? 거센 퇴진 요구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부패한 국가 원수 가니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들이 많다. 의회 역시 무력했다.(5) 카불에서 무소속으로 선출된 여성의원 신카이 카로카일은 이렇게 말한다. “다들 자기 이권만 챙겨요. 당파적이지 않으면 정부에 어떤 통제권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오래 전부터 군벌들은 대개 자신과 공동체의 이익을 옹호했다. 1980년대에 소련에 대항한 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 단체)도 무너졌다. 75세의 노장 이스마일 칸이 헤라트에서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북부동맹’을 이끈 3대 군벌 지도자 중 우즈벡계 대표였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67세) 전 부통령은 SNS상에 아들과 함께 탈레반을 토벌하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우즈베키스탄으로 피신했다.

 

런던에서 유학한 ‘판지시르의 사자’

한편 프랑스에도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진 아흐마드 샤 마수드(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 운동가이자 정치군사 지도자. 반 소련, 반 탈레반 항쟁으로 이름을 떨침)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의 재앙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대항해 판지시르에서 봉기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 그는 “서구에서 배운 인권과 민주주의를 고향에 전파하려고 몇 년 전 귀국했다”라고 말했다. ‘판지시르의 사자’로 불리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마수드는 런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인구가 15만 명에 불과한 고향 판지시르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입지가 높지 않다. 마수드 주변 인물들은 당장 전투에 투입될 병력이 2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이들 자원군은 더 이상 잃을 것도, 기다리는 가족도 없는 이들이다. 

그 밖의 정치인들은 지금도 자신의 입지를 다질 만한 절호의 기회를 엿본다. 과거 활약했던 세 인물이 이번 기회를 잡아 보려고 탈레반에 합류했다. 승기를 잡은 탈레반이 ‘포용적인 정부’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세 사람은 국민통합 정부를 요구하는 ‘국제사회’를 안심시키기 위해 몇 가지 ‘개방 정책’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2001~2014)은 신속하게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2014년과 2019년 대선에서 가니 대통령과 경쟁해 승리했다고 주장한 압둘라 압둘라 전 부통령도 합류했다. 현재 국가최고화해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 대표단이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과 협상을 벌이던 당시 아프간 정부 대표단 수장을 맡아 회담에 참여한 바 있다. 이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헤즈비 이슬람 아프가니스탄당의 당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도 탈레반 정부에 합류했다. 서방에서는 테러리스트로 묘사하지만, 한때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서 높은 지지를 받았던 그의 정당은 2016년 카불에서 정부와 평화협상을 하기 전까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무장단체로 활동했다. 굴부딘은 2008년 프랑스 군인들이 탈레반의 기습 공격을 당해 사망했던 ‘아프가니스탄 우즈빈 계곡 습격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망명이 유일한 답이다 

정치판의 거물들이 권력의 파편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사이, 일부 국민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탈레반 정부의 공포 정치를 피하려는 것이다. 카불 함락 전에 만난 특수부대 장교는 12세 아들을 데리고 우리를 만났다. 아들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 아이는 우리에게 정확한 영어로 말했다. “부탁드려요.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이곳은 이제 안전하지 않아서 학교에 갈 수가 없어요.”

여러 아프간인에게는 망명이 유일한 답이다. 정부나 외국 군대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며 탈레반이 약속한 사면은 눈속임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은 특별 이민자 신분을 부여해 4,000여 명 통역관들의 출국을 서둘렀다. 이런 면에서 덜 적극적이지만,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를 위시한 대다수의 유럽 국가는 아프간 난민들의 추방을 중단했다. 부자들은 이미 해외로 도피했으며, 정치인과 민병대 지도자들도 대부분 가족을 해외로 도피시켰다.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기 어렵다. 이란이나 터키행 비자를 받으려는 줄이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탈레반이 승리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탈레반의 승리를 과연 나쁜 소식으로 여길까? 칸다하르주의 어느 주민은 정부군이 정권을 이양하자 마을에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탈레반 주지사는 공무원들에게 업무 복귀를 지시했습니다. 탈레반의 커다란 깃발이 올라갔어요. 탈레반 대원들은 저항하지 않는 주민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아요. 일부 주민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탈레반을 환영했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일상으로요.”

1995년 탈레반이 무자헤딘을 몰아냈을 때도 카불 거리에는 환희가 넘쳤다. 하지만 곧 주민들은 깨달았다. 탈레반 집권이 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지옥의 시작임을 말이다. 

 

 

글·로맹 미엘카레크 Romain Mielcarek
아프가니스탄 카불, 칸다하르주 특파원. 주요 저서로『Marchands d’armes. Enquête sur un business français. 무기 수출. 프랑스 무기 산업 현황 보고서』(Éditions Tallandier, 파리, 2017.)가 있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대부분 성이 따로 없다. 성이 필요할 때는 부친이나 자신의 이름을 성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2) Lindsay Maizland, ‘The Taliban in Afghanist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뉴욕, 2021년 8월 3일.
(3) Lynne O’Donnell , ‘What went wrong with Afghanistan’s defense forces ?’, <Foreign Policy>, 워싱턴 DC, 2021년 8월 11일.
(4) ‘The Military Balance 2021’, 
(5) 의회 형태는 양원제로, 하원은 5년 임기로 국민 직접선거로 250석을 구성하고, 원로회의로 불리는 ‘상원’은 4년 임기로 102석(2/3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하며, 1/3석은 공화국 대통령이 임명)으로 이뤄진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2021년 8월 17일에 미 국방부는 미국 아프간 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의 122쪽짜리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지난 20년간의 전쟁을 진단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아프간 경제기관에 서구의 기술관료 모델을 섣불리 강요했다. 또한 보안군 훈련에 첨단 무기 시스템을 적용했으나, 보안군으로서는 유지뿐 아니라 이해도 벅찼다. 미국 정부는 분쟁의 80~90%를 비공식적 방식으로 해결해온 국가에 공식법 모델을 부여했다. 그 밖에도 여성관련 문화적, 사회적 장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미국 책임자들은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권한을 요원들에게 위임하곤 했다. 권한을 넘겨받은 요원들은 현지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미국의 원조를 빼돌려 공금유용, 세력확산, 동맹지지를 위해 남용했다. 임무를 추진하려면 현지 실정을 파악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한 까닭에 그들이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추진했던 일들이, (부주의 탓에 반군에게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등)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았다. 

 

번역·이푸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