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의 ‘결함’을 파고든 탈레반의 ‘해결사’전략

2021-08-31     아담 바치코 외

2001년에는 몇 달 만에 패했던 탈레반이, 어떻게 미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을까? 서구의 패배는 싱크탱크, 행정부, 대학, 국제 및 아프가니스탄 비정부단체와 민간기업 등 전문분야에서 만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편견 탓으로 분석된다. 이 편견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국지주의자들의 사회로 보는 공상적 인류학이 생겨났다. 아프간은 국민들이 국지적 이익에만 몰두해, (어떤 형태라도) 국가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회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최근 역사 기록과 모순되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문화적 시각은 외세 개입을 다룬 보고서나 기사, 저서 및 공식적인 담화에서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1)

2009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나토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 스탠리 맥크리스탈 장군은 말했다. “뿌리 깊은 불만은 개별 부족 및 종족 정체성을 강화하고, 중앙집중식 국가의 강점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종족, 그중에서도 특히 파슈툰족(주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친 지역에 사는 이란계 민족으로,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인종 집단-역주)은 전통적으로 중앙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추구해 왔습니다.”(2)

 

전쟁에 활용된 유사 인류학

전문가들은 대부분 국지적인 차원에서의 ‘인근의’ ‘적법하고’ ‘자연적인’ 것을 ‘멀리 떨어져 있고’ ‘적법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인위적인’ 국가에 대비시켰다. 인접성은 차갑고 관료적인 관계와 반대로 친숙함과 개인적인 관계를 보장해줬다. 군대와 같이 ‘개발’을 담당하는 기관들은 이 상투적인 표현을 동원해서 ‘국가’를 왜곡할 수 있었다. 지방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지르가(Jirga: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부족 원로회의-역주)나 슈라(Shura: 이슬람 공동체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구성원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합의를 이루는 협의 그 자체 또는 협의체를 의미한다-역주) 등과 같은 지방 회의가 가진 적법성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 중앙정권과의 협력이 부족한 상황을 정당화했다. 이 지방 회의는 관습법처럼 소개되지만 사실은 국제원조 단체들이 만든 것이다. 각 마을 슈라의 경우, 세계은행의 사회연대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지방에 대한 집착은 또한 공공정책의 종족화로 이어졌다. 일례로 상속 및 결혼 관련 실정법을 왜곡하기 위해 파슈툰족의 전통을 내세우자, 우즈베크족, 하자라족, 타지크족 기업가들이 자기 종족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족’을 이용해 요직과 부를 차지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은 부족 국가처럼 소개됐다. 이는 식민지시기에 나온 민족지학적 문서에서 영감을 얻은 동양주의적 시각이다. 이 유사 인류학은 전쟁에 활용됐다. 이 사실은 2006년, 합동참모위원회에서 과학 고문을 지낸 몽고메리 맥페이트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국가 치안조직은 부족들의 거점에서 전투를 지원하고자 고안된 인류학을 이용해야 한다.”(3)

미군의 현지 문화 이해 전략의 일환으로 맥페이트는 미군 부대에 인류학자(사실은 사회과학 학사, 석사)를 투입시키는 ‘주민지역연구(Human Terrain System)’를 실행했다. 맥페이트는 그 밖에도 반군진압 매뉴얼인 FM. 3.24를 작성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이 매뉴얼은 동맹조직, 정보수집을 위해 미군이 사회분쟁에 개입하기를 장려한다. “지역 주민들을 따르고 거스르지 말 것. 먼저 몇몇 마을의 신뢰를 얻을 것. 그런 다음 거래, 결혼, 사업을 주관하는 이들과 일할 것. 이 전술로 지역동맹과 동원 가능한 주민 및 신뢰 네트워크를 얻을 것.”(4)

미군 장교인 짐 간트 소령은 2003년에 쿠나르 주(州)에서 특수부대 파견대를 지휘할 당시, 토지 분쟁에 휘말린 유력 인사를 도왔던 이야기를 해줬다. “산악지대 사람들은 평야지대 사람들의 땅을 장악하고 이용했습니다. 족장은 내게 그 땅은 아주 오래전 ‘아프가니스탄의 왕’이 자기 부족에게 하사한 땅이라며 관련 문서도 보여줬습니다. 저는 족장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그의 말만으로 충분했습니다. (…) 저는 족장을 돕기로 했습니다. 나는 족장에게 그와 함께하겠다고, 산악지대 사람들과 담판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족장의 편에서 싸우겠다고 했어요.” 간트 소령은 그 일의 과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도움으로 ‘친구’가 땅을 되찾았다”라고 했다.(5)

1980년대부터 수행된 (실제) 인류학적 연구들은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 탈부족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종족을 기반으로 한 해석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내세웠던 ‘아프가니스탄 문화’에 대한 관심 이면에는 이런 연구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춰져 있다.(6) ‘오만함의 왕국’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덮기 힘들어지는 ‘국제사회’의 실패를 변명하는 데 이용됐다.(7) 지출된 비용을 보더라도, 아프가니스탄 국가건설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점령한 이래 가장 야심찬 계획들 중 하나였다. 200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정부 예산은 전부 기업의 출자자로부터 나왔는데, 현재 그 비율은 75%다. 여기에 경찰, 사법부, 군대의 자금조달 그리고 학교, 병원, 도로 인프라 및 공공건물 건설에 투입된 비용은 수백억 달러에 달한다.

 

무너진 ‘국경 없는 의사회’의 명성

이런 원조 프로그램의 문제는, 운영을 잘못해서 프로그램과 운영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겼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하도급이 연쇄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서구 기업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수주하고 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공모가 있었다는 뜻이다. 로널드 뉴먼 전 주아프가니스탄 미국대사(2003~2005)는 사법부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법률 지원에 뛰어든 것은 혼란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국제개발처(USAID: 미국의 대외원조 실시기간-역주)는 민간기업을 통해서 일부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국무부는 자체 경쟁 입찰을 했지만, 법무부에서 파견된 경험 많은 검사들에게도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미군도 특정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도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기관 간 공조는 약했고, 관계는 경직돼 있었습니다.”(8)

더군다나 해외 인력들은 아프가니스탄 주민들과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었고, 현지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서구에 대한 평판이 나빠진 데는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천 명을 위한 ‘인도주의적 격리공간’의 운영이 큰 역할을 했다. 1980년대에 힘들게 쌓았던 ‘프랑스 의사들’(‘국경없는 의사회’를 뜻함-역주)의 명성은 비지니스와 인도적 지원을 오가며 일하는 현세대 재외국민들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다.

국가재건을 담당하는 외국기관들은 아프가니스탄 기관들을 지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아프가니스탄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2003년 헌법을 통해 미국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통령 체제를 강요하고, 의회와 정당을 무력화했다. 서구 수상들이 법률을 작성하면, 이 법을 대통령이 공표하기도 했다. 의회 휴정기간에는 그렇게 하는 게 가능하다는 조항이 헌법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보 분야에서 미국은 이중체제를 선택했다. 아프가니스탄 공식 조직(군대, 첩보기관, 경찰)과 더불어, 미국은 CIA 직속의 민병대, 과거 소련과 싸웠던 옛 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의 무장 게릴라 조직-역주) 세력 등 다양한 무장단체를 지원했다.

무자헤딘은 초기에 미군이 알카에다 무장세력을 추적하는 데 보조 역할을 했다가, 이후 특수부대 습격과 드론 공격에서 번역가와 가이드를 제공하면서 탈레반과의 전투를 도왔다. 이들은 아프간어도 할 줄 모르고, 현지 지형에도 익숙지 않은 미군을 조종해서 자신들의 적수를 ‘반군’이라고 하며 제거했다. 2011년부터 미국이 철수를 준비하자, 민병대 조직은 특히 쿤두즈, 바르다크, 칸다하르 및 로야 파크티아 주에서 반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전략상 핵심 요소가 됐다. 하지만 민병대가 수탈을 일삼고 혼란(공동체 간의 불화, 범죄 행위 등)을 야기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국가기관의 입지를 계속 약화시켰다. 결국, 국민들에게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비쳤다.

놀랍게도 서구 동맹들은 적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2008년 11월, 당시 국제안보지원군(ISAF) 지휘관이었던 데이비드 맥키넌 장군은 이렇게 밝혔다. “작전과 전략 면에서 이 반군단체들 사이에 일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반군세력은 대부분 국지적이고, 지방에 분산돼 있고, 협력하기도 했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로부터 (…) 지지를 얻고 있지 못합니다.”(9) 

따라서 탈레반 운동은 부족, 종족, 이익을 위해 싸우는 수십 개 단체의 집합체라는 전제 하에 탈레반 반군 진압이 진행됐다. 일례로, 전투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인 월 300달러를 받는다는 말이 퍼져있다(확인되지 않은 사실). 전문가들의 경우에도 오랫동안 ‘하카니 네트워크(아프가니스탄 동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강경 탈레반 무장단체-역주)’를 탈레반으로부터 독립된 단체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였다. 시라주딘 하카니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우리 탈레반이 원하는 것’이라는 칼럼에서 자신을 부지휘관이라고 소개했다.(10)

 

‘데오반디’의 철저한 흑백논리

사실 탈레반은 조직화된 이데올로기를 지닌 중앙집권적인 집단이다. 핵심 간부는 파키스탄의 데오반디 출신이다.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신학생들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내 전투에 참여하게 했다.(11) 신학교 네트워크인 데오반디에서는 이슬람교의 법·신학 지도자인 울라마를 교육하고, 이들은 근본주의적 시각을 공유하고, 관료주의 기반 형성에 필요한 단결심과 역량을 키운다. 간부들이 주기적으로 순환근무를 하고 집단들끼리 협력하는 걸 보면, 탈레반이 위계질서가 잡혀있고 제법 효율적인 조직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표적이 된 간부들이 집중적으로 제거된 이후 한계는 있다. 탈레반 지휘관은 전술은 자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도,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많은 지휘관들이 규율 불이행으로 해임됐다. 

2006년부터 탈레반은 지휘관들에게 이슬람 율법을 계승한 행동지침을 내렸고, 2009년에 개정된 행동지침에 국제인도법의 원칙을 일부 반영했다. 공식적으로 절도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 행위, 재판 없이 스파이를 처형하는 행위가 금지됐지만, 계속되는 전쟁 범죄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민간인 표적을 대상으로 한 공격(2020년 5월 산과 병동 공격, 2021년 5월 여학교 공격)을 주장하는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다에시)과 달리, 탈레반은 주로 정치적 암살을 자행한다.

이 뿐 아니라 수장 승계나 협상 과정에서 보였던 입장의 일관성을 보면 탈레반 조직의 안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비밀정보기관이 ‘물라 오마르(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최고 지도자. 물라는 이슬람교 율법학자를 뜻한다-역주)가 2013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사망 사실이 은폐됐었다’고 발표했을 때,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미미했다. 그 뒤를 이었던 물라 아크타르 만수르도 이듬해 파키스탄에서 드론 공격으로 사망하자, 하이바툴라 아쿤자다는 어려움 없이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이런 탈레반의 권력 승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지난 세 번의 선거와 대비된다. 201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력 후보 두 명이 모두 2차 투표에서 승리를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탈레반의 경우에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큰 어려움 없이 간부가 교체됐던 반면, 중앙정부의 경우 주지사가 없어지면 해당 지역의 정치적 균형이 종종 타격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탈레반은 초기에 주로 남부의 파슈툰족에서 대원을 모집했지만, 이제 북부와 서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탈레반은 모든 공동체에서 전투원을 동원하고 있으며, 시아파 지역(탈레반은 수니파에 속함-역주)에 속하는 중부의 판치시르 계곡과 하자리스탄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주둔한다. 2016년을 기준으로 탈레반 내에서 여전히 우세한 세력은 파슈툰족(인구 가운데 40%를 차지)이었지만, 탈레반 최고 기관인 지도부회의에는 간부 12명 가운데 타지크족이 1명, 우즈베크족이 1명, 투르크메니스탄족이 1명 있었다.

 

아프간 민족주의의 옹호자

탈레반은 카불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다른 진영들과 달리 종족적 담론을 모두 거부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공동체 조작 정책들, 특히 서구 세력의 조작 정책들은 탈레반에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을 뿐이다. 탈레반은 쿤두즈에서 독일군에 이어 미군이 창설한 종족이나 부족 민병대를 활용해서 파슈툰족과 우즈베크족, 타지크족과 투르크메니스탄족 신병을 모집했고, 2015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쿤두즈를 탈취할 수 있었다.

탈레반의 전략은 중앙정부의 결함을 해결해서 공공 서비스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탈레반은 시골 지역에 자리잡고, 주지사, 판사, 학교 교육(프로그램 통제, 12세 이상 여아 배제) 담당자와 보건 담당자, 비정부기관 관련 담당자들과 함께 그림자 정부를 건설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시절(1996-2001)처럼 탈레반이 질서로의 회귀를 통해 명성을 얻었을 때, 법원은 탈레반 정부에서 핵심 기관이었다. 탈레반은 2005년부터 자신들이 자리잡은 곳에 판사를 임명했다. 그들은 이제 사실상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탈레반 법원은 약식이다. 판사들의 옷에는 눈에 띄는 표식도 없고, 그들은 마을 모스크나 민가, 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탈레반 법원은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탈레반 판사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녹차 한 잔이 식어가죠. 판사는 청원을 직접 받습니다. 그리고 탈레반 대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발된 사람들에게 그 다음날 오도록 하라고 말합니다.”(12) 판사는 증인에게 질문하고, 다툼이 있는 당사자들이 제출한 문서를 검토하고, 사건의 민감성에 따라 며칠에서 몇 개월 후에 판결을 내린다. 분쟁은 대부분 토지나 결혼에 관한 문제고, 판사들은 도둑질, 살인, 간통 등을 처벌하며 때로 매우 가혹한 처벌(처형, 사지 절단, 투석형)을 내린다. 

탈레반 법원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사법 시스템이 감춰져 있다. 2001년에 무너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사법 시스템을 계승한 탈레반 법원은 세 단계, 즉 다수의 구역 법원, 각 주(州)에 있는 다수의 항소법원과 하나의 대법원으로 이뤄져 있다. 마드라사에서 교육받은 판사들은 이슬람 법학에 대한 지식을 묻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후 출신 주(州) 이외의 지역에 임명된다. 순환 근무 시스템을 통해서 주민과 지역 전투대원에 대해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가지고 있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지고, 사람들을 잘 알게 되죠. 독재자로 변할 수 있고, 매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막기 위해서 탈레반은 정해진 임기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을 전근시킵니다.” 탈레반은 감독관을 파견해서 판사들의 정직성을 확인하는데, 금품이나 뇌물 수수 혐의로 판사 몇 명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 

 

“탈레반, 빈자들의 유일한 희망”

일반적으로 탈레반 판사들은 공정하다고 알려져 있어서 시골 지역에서 인기가 많다. 로가르 주의 한 이용자는 “내가 부자였다면, 정부 판사에게 도움을 청했을 거예요. 돈만 내면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가난하다면 탈레반이 유일한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비 처가가 결혼 지참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면서 소송을 하게 됐다. 예전에 몇 년간 근무했던 영국의 웨스턴 유니언 사무소 영수증이 있어서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다.

쿠나르 주의 파이잘 아크바 전 주지사(2002년~ 2005년)의 친지 중에도 같은 이유로 탈레반 법원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탈레반에 대해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가축 절도 사건 때문에 탈레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권에서 임명한 판사들은 ‘부패했었고’, 경찰에 신고하고 공식 재판을 받는 데 필요한 비용이 도난당한 가축의 가치를 크게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원래 농촌 출신지만 대부분 카불에 거주하는 아크바 전 주지사는 시골에서는 탈레반 판사를 높이 평가하지만, 도시에서는 이런 형태의 정의를 거부하는 대립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농촌 지역에서는 접근하기 쉽고 친숙한 탈레반 법원이 인기가 많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드라사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이슬람 법률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 반대로 국민의 2/3가 문맹인 사회에서 국가법은 난해하게 보인다. 그 지식이 미약하다고 할지라도 이슬람 법률과 규범을 아는 것은 농촌 지역 사람들에게 법원이 내린 결정의 일관성과 공정성을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재판은 규칙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법정에 출석한 사람들은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어렵다. 

이 시스템은 분명히 여성보다 남성에게 유리하다.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관습과 억압에 저항할 방법이 거의 없지만, 여성을 배제한다는 사실은 반군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특히 파슈툰 지역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 더욱 심한 곳이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탈레반 법정에서는 샤리아법을 따르고 있음)은 가부장 제도를 토착화시키고 있다. 온건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도, 서구국가의 것으로 만들어 막아버린다.

외세가 개입해 구축하던 제도를 교묘하게 우회하는 외국 세력과 점점 더 부패하는 정부 시스템에 맞서서 탈레반은 많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앞에 법을 구현시킬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레반은 서구동맹보다 더 국가재건을 생각하고 있다. 이는 20년간의 외세 개입에 대한, 가장 가혹한 형벌일 것이다. 

 

 

글·아담 바치코 Adam Baczko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국제연구센터(CNRS-CERI) 연구원. 『La Guerre par le droit. Les tribunaux talibans en Afghanistan법에 의한 전쟁.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법원』(CNRS Éditions, Paris, 2021)의 저자.

질 도론소로 Gilles Dorronsoro
파리1대학 유럽사회정치학센터(CESSP) 연구원. 『Le Gouvernement transnational de l’Afghanistan. Une si prévisible défaite 아프가니스탄의 초국적 정부. 그렇게 예견된 패배』(Karthala, coll. <Recherches internationales>(Paris, 2021)의 저자.

번역·이연주, 조승아
번역위원


(1) Gilles Dorronsoro, 『Le Gouvernement transnational de l’Afghanistan. Une si prévisible défaite 아프가니스탄의 초국적 정부. 그렇게 예견된 패배』, Karthala, coll. < Recherches internationales >, Paris, 2011.
(2) Stanley McChrystal, ‘Comisaf Initial Assessment (Unclassified)’, 국방부, Washington, DC, 2009년 9월 21일. <워싱턴 포스트> 웹사이트에 공개된 문서.
(3) Montgomery McFate, ‘The military utility of understanding adversary culture’, Office of Naval Research, Arlington (Virginia), 2005.
(4) The United States Army and Marine Corps, 『The US Army/Marine Corps Counterinsurgency Field Manua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5) Jim Gant, 『One Tribe at a Time: A Strategy for Success in Afghanistan』, Nine Sisters Imports, Los Angeles, 2009.
(6) Bernt Glatzer, ‘The Pashtun tribal system’, in Georg Pfeffer et Deepak Kumar Behera (eds.), 『Contemporary Society : Concept of Tribal Society』, Concept Publishers, New Delhi, 2002.
(7) Michael Barry, 『Le Royaume de l’insolence. L’Afghanistan 1504-2011 오만함의 왕국. 아프가니스탄 1504-2011』, Flammarion, coll. ‘Au fil de l’histoire’, Paris, 2011 (초판: 2002).
(8) Ronald E. Neumann, 『The Other War: Winning and Losing in Afghanistan』, Potomac Books, Lincoln (Nebraska), 2011.
(9) ‘Transcript: General David McKiernan speaks at Council’s Commanders Series’, Atlantic Council, Washington, DC, 2008년 11월 19일, www.atlanticcouncil.org
(10) Sirajuddin Haqqani, ‘What we, the Taliban, wa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2월 20일.
(11) 인도의 ‘데오반디’는 수니파인 탈레반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학파로,  하나피법학파에서 파생했다. 데오반디는 델리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도시 데오반드의 이슬람학교를 가리킨다. 인도의 데오반디는 정치적 이슬람 운동이 아니었지만,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데오반디는 철저한 흑백논리로 무장한 과격급진주의다. 피아 구별이 확실하고, 시아파를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여성을 철저하게 공적 공간에서 배제한다. 탈레반의 반여성·반시아 행태는 이런 과격한 데오반디 운동에서 나온다. 마드라사(이슬람 교육기관) 이슬람의 혁신적인 사조였던 데오반디(인도)의 마드라사는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로 1867년에 설립됐다.(-역주)
(12) 인용문은 『La Guerre par le droit. Les tribunaux talibans en Afghanistan 법에 의한 전쟁.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법원』(Adam Baczko, Paris, CNRS Éditions, 2021)에서 발췌했다.

 

 

부족 갈등 조장하는 미국인들

 

미군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보를 검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상속 문제로 골칫거리인 사촌이나 토지 분쟁이 있었던 이웃 또는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을 알게 됐다. 체포되거나 살해된 많은 이들은 개인, 가족, 지역 사회의 경쟁을 촉발시킨 탈레반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2003년 쿠나르 지방 간지갈 계곡에 위치한 기지를 탈레반이 공격한 후 미군은 신와리 부족의 유력자, 압둘 왈리에 관한 고발을 접수했다.

2003년 6월 21일 왈리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파이잘 아크바르 주지사의 조언대로 주지사의 아들과 함께 미군기지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체포됐다. 주지사는 며칠 후 왈리가 CIA의 계약직원인 데이비드 파사로의 심문을 받다가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왈리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왈리의 친척들은 왈리를 고발한 사람이 그와 개인적인 원한관계가 있는 살라르자이 부족 출신 사령관, 마흐무드 미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의 대가는 참혹했다. 신와리 부족의 유력자들은 복수를 위해, 살라르자이 부족과 탈레반 간의 밀접한 관계를 미군에 고발해 관련자들이 체포되게 만들었다.

2007년 파사로는 미국연방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아프간 현지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왈리와 미란의 경쟁관계가 신와리와 살라르자이 부족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면서 이 지역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글·아담 바치코 Adam Baczko , 질 도론소로 Gilles Dorronsoro
번역·조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