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그라이,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화해의 희생양

2021-08-31     로라마이 가베리오 외

1년 이상 연기됐던 에티오피아 총선이 마침내 6월 21일 실시됐다. 하지만 티그라이는 예외였다. 2020년 11월 이후, 이 자치지역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사상 초유의 잔혹한 공격으로 초토화됐다. 에리트레아군의 티그라이 개입은 에티오피아가 새로운 정치·외교 게임에 돌입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하늘을 겨눈 칼라슈니코프 소총들이 빼곡하게 적재된 픽업트럭 여러 대가 황량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소총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어두운 적막을 가르며 울려 퍼진다. 수단 동남부에 위치한 알카다리프는 흡사 세기말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현재 기본적인 인프라가 미비한 이 지역은 그나마 비교적 안전한 지대에 속한다. 이 지역의 끝자락에는 길게 펼쳐진 땅이 있다. 이곳에는 군 검색대가 무수히 설치돼 있음에도, 온갖 무장집단이 드나들고 있다.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와 국경을 맞댄 이 수단의 접경지대에는 파샤가(Fashaga) 삼각지대가 펼쳐져 있다. 250㎢에 달하는 이 비옥한 땅에서 에티오피아와 수단은 분쟁을 계속해왔다. 그럼에도 이미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이 지대로 최근 수십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 2020년 11월 5일, 에티오피아 티그라이 주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티그라이에 살던 수많은 피란민이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으로 유입된 것이다. 전쟁 하루 전날,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은 정부군 기지를 공격했다. 이에 정부군이 즉각 보복공격에 나섰다. 국제연합(UN)에 따르면, 티그라이 전쟁은 이미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구호단체 인사 8명의 목숨도 앗아갔다.(1)

‘모트와킬’이라는 간판을 내건 낡은 건물로, 급히 파견된 비정부기구 인사들이 모였다. 이곳은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달려온 티그리아 출신 인사들(의사, 엔지니어, 간호사 등)을 위한 작전캠프로 변신했다. 알카다리프·카살라 등 수단에 긴급설치된 난민촌을 관리하고자, 해외에서 순식간에 달려온 이들이다. 비록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도, 티그라이 동포들이 얼마나 튼튼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양쪽에서 위협 받고 있다”

빛이 바랜 호텔 로비에는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큼지막한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하루 종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전화기와 씨름하고 있다. 태클로 H.씨는 자신을 ‘부족’의 우두머리라고 소개했다. 시카고 시민인 그는 최근 급하게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비공식 지원단체들의 활동을 위해 현지 당국과 접촉하고 있다. 특히 난민촌 출입을 통제 중인 군으로부터 통행허가증을 받아내는 중책을 맡고 있다. 기자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정치적인 역할도 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30년 간 줄곧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티그라이인에게 적대적인 에티오피아 중앙정부와 적국 에리트레아 사이에서 양측 모두의 위협을 받은 것이다.” 티그라이 반란군 출신인 그가 취재진에게 설명했다. 그는 “나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움 라쿠바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다”라고 했다. 사실상 이번 티그라이 전쟁은 군사동맹관계의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정부는 적국 에리트레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에리트레아는 과거 에티오피아에 속했던 주로, 1993년 독립했다. 독립하기 전 2년 동안, 두 지역은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당시 에티오피아를 집권한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이 에리트레아를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2) 

한편 티그라이인들은 1998~2003년 양국의 국경 분쟁에서도 선봉장으로 전쟁을 이끌었다.(3) 그러나 2018년 7월,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는 집권 뒤 곧바로 홍해 지역의 평화를 열망하는 미국·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에리트레아와 뜻하지 않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으로 20년의 냉전 끝에 원수처럼 지내던 두 형제 국가가 마침내 수교를 맺었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양국의 화해가 TPLF에는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4) 사실상 에리트레아는 티그라이인의 적대국과 동맹을 맺은 셈이었다.

수개월에 걸쳐 아비 총리는 온갖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레아군의 개입을 철저히 부인했다. 그러다가 2021년 4월 18일이 돼서야 비로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서한에서 진실을 실토했다.(5) 하지만 이미 그전에도 난민들이 전화기에 남긴 수많은 증거 영상을 통해 진실이 확인됐다. 가령 낡은 에티오피아 군복으로 위장한 군인들은 에리트레아인의 말투를 쓰고 있었다. “얼핏 에티오피아가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선전전을 옹호하는 상황에서, 아비 총리는 쉽사리 진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프리카 뿔 지역에 정통한 사회학자 롤랑 마르샬이 분석했다.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티그라이에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손에 내맡긴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일거양득의 결실을 얻었다. 국경 지대에서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동시에, 2000년 에티오피아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인 티그라이인들을 상대로 통쾌한 설욕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2020년 가을, 본래 8월로 예정됐다가 취소된 총선을 다시 한 번 연기하기로 한 결정은 티그라이 지역민의 분노를 부추겼다. 중앙정부는 처음에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그 다음에는 물자 공급을 핑계로 총선을 연기했다. 전쟁의 원인이 된 선거 연기 사태(결국 티그라이를 제외한 전국에서 2021년 6월 21일 개최)는 남아 있던 잔불을 다시금 되살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마르샬은 “모두가 전쟁을 원했다. 전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피할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아비 총리는 1991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군사집권 시대(데르그)가 붕괴한 이후 에티오피아를 장악한 티그라이 엘리트층의 패권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다.

 

조지 오웰식 5가구 감시제도

2019년 아비 총리가 창당한 번영당은 애국주의의 깃대를 열심히 휘날리며, ‘메데메르(Medemer)’ 사상을 널리 제창했다. 아비 총리는 이 개념을 공식 페이스북에서 온갖 공허한 단어들을 가지고 설명했다. “메데메르란 한 마디로 더욱 조화로운 화합을 이루기 위해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는 노력을 다하는 동시에, 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상호 이익이 되는 목표를 향해,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함께 협력해나가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메데메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1991~2018년 에티오피아 연방정부를 장악한 TPLF의 무거운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제약업체를 경영하는 사업가 마이클 훈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TPLF 사람들은 매우 사악하다. 27년 동안 나라를 이끌며, 제 잇속만 차렸을 뿐 에티오피아인들을 위해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티그라이인의 고통에 대해 연대의식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현 상황을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TPLF와 결별할 필요가 있다.” ‘티그라이의 특권’에 대한 비난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TPLF가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선가를 울리고, 멩기스투가 갑작스럽게 망명길에 오른 이후, TPLF는 비로소 자국의 모든 권력 요직을 장악하게 된다. 데르그 군사 체제가 해체된 이후, TPLF는 신 군부의 90%를 차지하고, 이어 모든 국가정보 기구를 독점한다. 에티오피아 문제에 정통한 프리랜서 연구원 르네 르포르는 “저들이 조지 오웰식의 ‘5대 1’ 원칙에 입각해 인민들을 밀착 감시했다. 당 관계자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5가구를 감시하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관에게 보고했다”라고 설명했다. PTLF의 창당 멤버이자 훗날 야권인사로 변신해 수년 간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던 아레가위 베르헤는 일부 지역에서는 이 감시 비율이 무려 ‘3대 1’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식으로 PTLF 당원이 소수의 엘리트 관료 계층을 형성했다. 경찰서장에서부터 시작해, 일반적인 사회·농업 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군청 관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간·행정·군사 통제권이 티그라이인에게로 귀속됐다. 그들은 자폐적이고 억압적인 소수의 특권적 지배 권력을 형성했다. PTLF는 에티오피아 경제도 대부분 손아귀에 넣었다. 그들은 여러 대형 공공기구들을 독점하며, 34개 친정부 기업들이 티그라이 재개발을 위해 조성한 기부금펀드를 떡 주무르듯 했다.

2010년대 중반, 일상적인 감시와 대규모 부정부패에 신물을 느낀 시민들(티그라이 지역민을 포함) 사이에 점차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권력의 생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PTLF의 원로들은 2014년 전당대회에서 전략 수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로써 PTLF는 티그라이 지역으로 물러나, 새 지역에서 다시 지지기반을 잡는 데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PTLF의 당 간부와 기업인들은 티그라이의 주도인 메켈레에 짐을 풀고 이 지역에 모든 투자를 집중했다. 2018년 아비 총리가 집권하자, PTLF는 본격적인 야권세력으로 밀려났다.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실력자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대대적인 숙청에 돌입했다. 군과 정보국의 조직을 개편하는가 하면, 모두 79명의 인사(공기업 대표, 군 간부, 사업가 등)를 부정부패로 체포했다. 심지어 데브레치온 거브러미카엘 티그라이 부주지사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를 운운했다. 그는 “저들이 개인을 쫓아야 하는데, 공동체 전체를 공격했다”라고 개탄했다. 단순한 권력 게임을 넘어, 11월 이후 지속된 티그라이 지역민을 타깃으로 한 극단적 폭력은 요컨대 1995년 헌법에 규정된 민족연방주의가 붕괴했음을 의미한다.(박스기사 참조)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2020년 11월 5일, 아비 총리는 ‘안보 작전’이란 미명 아래 전격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전쟁은 총리의 허를 찌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우리는 미리 경고했다. PTLF에 대해서라면 아주 훤하다. 1975년 에티오피아 군부가 야권 운동을 한참 억압하던 시절, PTLF의 창당을 직접 도운 게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중재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단 외교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최근 압달라 함독 수단 과도정부 수장과 에티오피아 총리가 단 3분 만에 전화 통화를 끝마친 사연을 들려줬다. 함독 총리는 “티그라이 저항군을 이끄는 수장들을 줄줄이 제거한다고 해도, 결국 지역민이 저항군을 지지할 것이고, 결국 이번 공격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아비 총리를 설득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 수단 외교관은 “아비 총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티그라이 지도부 역시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했다. 장기간에 걸쳐 준비한 11월 4일 기습 공격이 성공한 이후 지나치게 자신감이 흘러넘쳤던 것이다. PTLF는 메켈레에 주둔 중인 연방군 중 가장 대규모 사단으로 통하는 북부 지역 사령부의 중장비 일부를 장악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뿔 지역의 가장 강력한 군대’를 자처하던 그들은 불과 3주 만에 지역 변방 혹은 수단으로 퇴각하는 처지에 몰렸다.

티그라이 전쟁은 현재 철저한 깜깜이 속에 진행되고 있다. 전쟁 초기 통신이 두절된 데다, 5월 말까지 티그라이주의 주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연방군이 경계를 서고 있는 이 도시는 잠시 평온이 찾아든 듯 보이기도 한다. 한편 이곳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전투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전이다. 연방군이 메켈레를 수복한 직후인 11월 28일, 아비 총리는 ‘단 한 명의 민간인 피해도 없이’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연합(UN)에서 일하는 한 중진 인사는 “단 하루도 폭력이, 특히 시민을 향한 폭력이 발생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다”고 증언했다. 구호대 역시 쉴 새 없는 단속에 시달리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무기를 반입하고 전투원을 침투시키는 통로 노릇을 한다’며 구호단체들을 비난했다. 17세기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역주) 제국의 수도였던 곤다르 소재 한 종합병원에서는 올 6월 부상자가 수십 명씩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팔, 다리, 눈을 잃은 부상자들이 들것도 없이 소형버스에 실려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전쟁은 어느새 게릴라전으로 돌변했다. 골짜기에 잠복한 병사들이 기습하거나 기관총을 퍼부었고, 곳곳에 지뢰가 설치됐다.

곤다르는 연방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한 암하라인 민병대를 위해 현재 후방기지 노릇을 하고 있다. 어느새 번영당 티셔츠 차림의 아이들이 단속을 벌이는 민간 검문소가 줄줄이 도시를 에워싸기에 이르렀다. 인근 농촌지대에서도 온갖 민병대가 난립했다. 민병대는 학교를 장악했고, 아이들은 계속 학교에 나왔다. 처마 밑 분필상자 옆에 무기와 탄약이 쌓였다. 민병대원들은 초등생들 앞에서 정권 찬양을 늘어놓았다.

PTLF는 아프리카나 해외 조직망을 동원해, 소셜미디어상에 어처구니없는 루머를 퍼뜨렸다. 가령 이미 소말리아에 주둔한 아랍에미리트(UAE)가 홍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뒤에서 전쟁을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전혀 근거가 없었다. 이미 지난 2월 아부다비는 예멘 전쟁에서 빠지면서 쓸모가 없어진 에리트레아의 아사브 군사기지를 진즉에 폐쇄한 뒤였기 때문이다.

 

‘인종 청소’의 가능성

인도주의 위기의 심각성을 정확히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식량기구에 따르면, 35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더욱이 수단으로 도피한 티그라이 난민이 증언하는 수많은 잔혹행위는 점령자들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흉악한 만행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사실상 점령자들은 그동안 헌법에 명시된 민족연방주의에 의거해 보호를 받던 자치지역을 복속시키려는 속셈을 품고 있다. 지난 3월 10일, 앤소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공식 담화에서 ‘인종 청소’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공식적인 최신 집계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세계은행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티그라이인은 전체 에티오피아 인구 약 1억 1,200만 명 중 약 6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6)

수단의 움 라쿠바 난민촌에서는 많은 피란민들이 ‘인종청소 작업을 마저 끝마치기 위해’ 민병대가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떨고 있다. 40대 전기기사인 에르미아스 G.는 전쟁 초기 에리트레아 용병이 파병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피난길에 올랐다. 1991년 티그라이에 강제 병합된 비옥한 영토인 볼카이트에 거주 중인 이웃 암하라인들이 이미 자신을 밀고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티그라이인들은 고향에서 협박, 살해, 강제 이주에 시달리고 있다. 암하라 민병대는 강제로 티그라이인을 수십만 명씩 무더기로 버스에 태웠다. 

‘국경없는의사회’(MSF)에서 파견된 한 책임자는 “우리는 집단강간을 당한 여자들을 돌봐야 했다. 일부 피해자 중에는 임신 6개월에 접어든 여자도 있었는데, 도중에 땡볕에서 조산을 했다”라고 취재진에게 털어놓았다. 조직적인 성폭력 사건들이 쇄도했다. 병원은 수시로 약탈을 당했다. 그는 “대개 저들은 의료품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에리트레아로 몰고 가버렸다. 최악의 경우, 구호 요원이 재정비한 진료소를 다시 부수고, 지뢰를 심기도 했다”고 증언을 지속했다. 비정부기구 MSF는 자신들의 존재에 회의를 품기도 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만 같다. 우리가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것인지, 전쟁광들에게 물품을 대주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국제엠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의 각종 상세보고서는 11월 말, 민간인 수백만 명이 악숨에서 학살됐음을 확인해줬다.(7) 영국 BBC 방송도 지난 1월 말 티그라이 북부 마흐베레 디고에서 에티오피아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폭로했다. 정부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린 아이들을 지근거리에서 사살했으며, 수십 명을 길거리에서 처형하거나, 공개적으로 성직자들을 성적으로 능욕했다.

현재 아비 총리는 국제무대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도 많은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2019년 에리트레아와 화해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8년 4월, 당시 일개 하원의원이던 이 정력적인 40대 정치인은 PTLF의 지배를 받던 연합집권세력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의 사령탑을 맡았다. 당시 그는 오로모인의 대대적인 시위로 물러나게 된 하일레 마리암 데살렌 총리를 계승할 인물로 선택을 받았다. 

그는 장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이슬람교도로 오로모족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정교도로 암하라족 출신이었다. 그런 만큼 양쪽 공동체를 모두 만족시킬 만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수십 년 간 지속된 티그라이의 패권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적임자로 간주됐다. 국제금융기구들의 인정을 받는 기술관료인 그는 사이버군정보기관의 개편을 진두지휘하는 한편, 아내(그와 마찬가지로 펜티코스트파 교도)와 함께 젊음과 전통을 잇는 커플 이미지로 미디어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마크롱

아비 총리의 집권 뒤 에티오피아는 국가개입주의를 포기하고, 자유주의 경제로 전환했다. 이것은 에티오피아가 막대한 국가 부채를 재조정하는 데 필요한 협상 조건이었다. 에티오피아는 국내총생산(GDP) 960여억 달러 대비 국가 부채가 무려 280억 달러에 달했다. 한편 아비 총리는 정치범을 전격 석방하며, 아프리카 대륙의 인권 수호자로 등극했다. 당시 아디스아바바 주재 한 미국 외교관은 “우리는 그에게 ‘아프리카의 마크롱’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줬다”라고 취재진에게 털어놓았다. “아비 총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인물로, 당시 국제사회에서 왕따로 통하던 오마르 알 바시르가 집권한 수단이나, 아랍에미리트의 뒷마당으로 통하던 아페웨르키가 집권한 에리트레아 곁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동맹이 될 만한 역내 파트너로 통했다.” 특히 아비 총리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함께, 양국의 밀월관계는 최절정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저명한 스웨덴 한림원이 너무 성급하게 노벨상을 수여해버린 지도자 목록’에 이 에티오피아 총리의 이름이 올라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하던 시기에 이미 총리는 족벌주의나 후견주의로 흐르는 듯한 국정 운영 양상을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여성 대통령 살러워르크 저우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면서, 아비 총리의 본모습을 교묘하게 덮었다. 각국의 대사들은 요란하게 아비 총리를 칭송했지만, 일부 명철한 논평가들은 일찌감치 경고음을 울렸다. 한 아프리카 국가 출신 대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감언이설을 단순히 영어 단어로 치환하는 데만 급급해하지 말고, 그의 연설문을 차분히 뜯어보기만 했어도, 충분히 그의 본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에티오피아의 봄’ 이후 3년, 아비 총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전까지 미국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에티오피아는 이제 미국과 유럽연합으로부터 금융제재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제재조치를 벗어나기 위한 조건은 딱 세 가지다. 구호단체들의 자유로운 역내 출입을 허용하고, 각종 범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조사에 응하는 한편, 티그라이에서 에리트레아군과 암하라군을 철수하는 것이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런 취지에서 결의안을 채택하려 시도했지만, 끝내 티그라이 전쟁을 ‘국내 문제’로 바라보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에 부딪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아비 정부는 ‘제2의 세계공장’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수많은 해외투자자들을 유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와 정치 숙청·역내 인종 갈등 등으로 한층 불안정해진 ‘비즈니스 환경’ 때문에 에티오피아의 경제는 침체 국면을 맞이했고, 아비 총리의 계획도 차질을 빚고 있다. 물론 조세혜택을 누리는 10여 개 산업단지들이 여전히 여러 도시들 주변에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섬유공장과 제약업체들을 유치하기로 한 이 산업단지들에는 여전히 수도, 전기가 연결되지 않았다.

미국의 한 외교관은 지리적 위치나 역사를 고려할 때, “에티오피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현재 에티오피아는 과거의 모든 동맹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 사이, 아랍에미리트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페웨르키 총리가 역내 패권을 둘러싸고 공공연히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에리트레아의 독재자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화의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에티오피아는 현재 이웃 국가와 알맹이 없는 평화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르샬은 놀랍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돼온 홍해 아사브항을 다시 포위하지 않았다. 해상로 개방이 ‘평화의 배당(평화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동안 양국은 1998년 이래로 줄곧 이 지역을 놓고 끝없는 분란을 거듭했다.”

티그라이 내 힘의 균형 상태를 감안하면, 앞으로 군사적 해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비 총리는 PTLF와 일절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2021년 5월 6일, 에티오피아 정부와 에티오피아인민의회는 PTLF를 이미 ‘테러집단’으로 명명했다. 이제 티그라이의 장기적인 해법은 수단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다. 여러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티그라이군 수뇌부는 현재 수단을 방문 중에 있다. 수단과 에티오피아 양국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비 총리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패를 손에 쥐게 된 수단 정부는 굳이 이런 사실을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양국 분쟁의 수많은 요인 중에는, 파샤가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과 베니샨굴 구무즈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정부가 추진 중인 대규모 ‘르네상스댐’ 건설 사업을 꼽을 수 있다.(8) 수단과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에서 그들의 이웃국이 일방적으로 저수지 물을 채우는 행위를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티그라이는 현재 뜨겁게 달아오른 역내 지정학적 상황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를 우려가 높다.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는 이 점이지대(9)에 계속 군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티그라이 분쟁이 오랜 기간 교착상태에 머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한편, 티그라이군도 게릴라전에 점차 능숙해지고 있다. 

 

 

글·로라마이 가베리오 Laura-Maï Gaveriau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노에 오셰보댕 Noé Hochet-Bodi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Ethiopie : 350 000 personnes en proie à la famine, dont 30 000 enfants en danger de mort au Tigré 에티오피아 : 티그라이에 35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가운데 어린이 3만 명은 아사할 위험에 처해 있다’, 국제연합(UN), http://news.un.org
(2) Claire Brisset, ‘Fragile et renaissante Ethiopie 약하지만 다시 부활 중인 에티오피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3년 1월호.
(3) Jean-Louis Peninou, ‘Ethiopie-Erythrée : une paix en trompe-l'oeil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 눈속임에 불과한 평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0년 7월호.
(4) Gérard Prunier, ‘Ethiopie-Erythrée, fin des hostilités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화해의 이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1월호.
(5) 에리트레아 대사가 UN에 보낸 서한, 2021년 4월 18일.
(6) 세계은행 국가별 자료 참고,  http://donnees,banquemondiale.org/pays/Ethiopie
(7) ‘Ethiopie. Le massacre par les troupes érythréennes de centaines de civils à Aksoum est susceptible de constituer un crime contre l'humanité 에티오피아. 악숨에서 에리트레아군이 수백만 민간인을 학살한 행위는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국제앰네스티, 2021년 2월 26일, www.amnesty.org.
(8) Habib Ayeb, ‘Qui captera les eaux de Nil? 누가 나일강의 물을 차지할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13년 7월호.
(9)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을 지닌 두 지역 사이에서, 인접한 두 지역의 특성이 모두 나타나는 지대(-역주)

 

 

위기에 처한 모범 정치인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 후, 에티오피아에는 두 개의 국가관이 충돌했다. 중앙집권주의 성향의 에티오피아-안디넷(Ethiopianess, 에티오피아적 성향)을 옹호하는 주장과, 권력분산적 성격의 연방제를 통해 각 민족의 개성과 언어를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에티오피아-안디넷의 티그라이(Tigray) 인을 향한 혐오는 에티오피아에서 두 번째 가는 주류 민족(2,300만 명)인 암하라(Amhara)인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오늘날 전설로 전해지는 에티오피아 황금기의 계승자인 암하라인은 특히 메넬리크 황제가 정복전쟁에 열을 올리던 19세기에 남부나 티그라이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에티오피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5년 헌법은 이른바 ‘민족별 지역’이라는 원칙에 근거해 민족연방주의를 제도화했다. 하지만 ‘역사적 불공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헌법 서문의 주장은 실상 암하라족의 오랜 지배를 겨냥하는 한편, 티그라이인이 권력 요직 장악을 방조하는 주장이었다. 암하라민족운동(NAMA; The National Movement of Amhara)의 벨레테 몰라(Belete Molla) 대표는 취재진에게 “이 헌법은 왜곡된 역사관을 보여주는, 암하라에 공공연히 적대적인 법률”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연방군이 티그라이인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 어떻게 암하라인 민병대가 지원병으로 참여하게 됐는지 설명해주기도 한다.

연방주의는 결국 장기적인 차원에서 지역민족주의의 요구들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다. 에티오피아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세계의 공장’의 성과를 공평하게 분배하지 않고 있으며,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현실은 4년 전부터 옛 제국의 변방지대인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자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