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공개되는 체 게바라의 편지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 당신을 품는다”

2021-08-31     체 게바라 | 혁명가

쿠바혁명에 유례없는 공로자인 체 게바라의 미공개 편지가 그의 딸 알레이다 게바라가 최근 출간한 게바라의 편지 모음집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편지(1947-1965)』에 수록되면서,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됐다. 본지는 체 게바라가 그의 과학자 친구인 에르네스토 사바토에게 보낸 편지(1960)와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1965), 그리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연도미상) 등을 소개한다.

 

에르네스토 사바토에게

친애하는 나의 동포 사바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1956년 11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80여 명의 혁명군 무장게릴라를 조직해 처음 쿠바에 도착했지만, 바티스타 정부군에 쫓겨 쿠바 남동부 끝자락의 산악지대로 피했다-역주)에서 당시 우리를 찾아온 인민사회당(PSP, Popular Socialist Party) 지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순식간의 조직력을 발휘한 것에 대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각 뿔뿔이 흩어져 활동하던 그룹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지휘력에 대한 감탄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우주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혼돈’이라며 추켜세웠습니다. 분명, 우리의 혁명은 그렇게 불릴 만했습니다. 우리의 혁명은 초기 이념활동보다 크고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피델을 따랐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은 부족했지만 선한 의지와 정직함이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1956년 “영웅이 아니면 순교자”라고 선포했고, 그보다 더 훨씬 전에 “돈은 치욕”이라고 외쳤던 피델의 슬로건은 우리의 아주 단순한 생각을 담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독재자 풀젠시오 바티스타를 상대로 한 전쟁은 우리에게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바티스타 정부에 의한 잔인한 살상사건을 겪으면서 총을 들고 봉기했고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무장군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릴라군으로서 바티스타 정부의 군대와 군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당당히 치러냈습니다. 하지만 1959년 쿠바혁명 완수는 우리가 겪은 그 어떤 전쟁보다 심오한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도자로서 우리는 총을 들어본 적 없는 농부들에게 “당신들도 무기를 들 수 있다”라고 설득했고, 무장한 농부들은 정부군에 맞섰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커도, 주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또한, 혁명을 위한 슬로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슬로건은 사람들이 실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반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염원을 정치적 기치(旗幟)로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것을 경험했고 토지를 향한 농부들의 염원이 쿠바의 투쟁 속에서 가장 강한 자극제였음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바로 그것이 쿠바혁명이 태어난 동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조금씩 우리의 이론이 발전했습니다. 우리의 이념 정립은 언제나 우리의 행동보다 뒤쳐져서 따라왔습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토지개혁법이 공포됐을 때 이미 그곳의 땅은 재분배됐습니다. 실체적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후에도 우리의 첫 번째 토지개혁법은 아주 소심한 조치여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진 대지주의 땅을 완전히 몰수하지 못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언론은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피델 카스트로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택입니다. 그는 필요한 말만 하면서 자신의 깊은 속내를 쉽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기자들을 포섭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센세이셔널리즘에 몰입된 대기업 소유 언론사들의 기자들은, 우리가 던진 미끼를 선뜻 물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항상 자신들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분석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혁명을 분석하려는 접근 방식에서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모든 공공서비스를 국유화하겠다”라고 공표하면 미국은 “상당한 지원이 담보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지주를 제거하겠다”고 말하면 그들은 우리가 “정치자금을 확보하고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대지주의 농장을 이용”할 것이라는 식으로 믿었고, 계속 그런 식이었습니다. 피델과 우리가 가슴에 품은 혁명은 그 의도대로 드라마틱한 거짓 없는 진실이었지만, 그들의 머리로는 이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그저 지난 반세기 동안 나타난 최대의 사기꾼처럼 비춰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던진 이야기와 행동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우리가 스스로의 원칙을 배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사실입니다. 다만, 마치 거짓말 잘하는 목사들처럼, 우리가 배반한 것은 우리에 대한 그들의 환상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단 한 번도 우리가 말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말하거나, 그 생각을 구체화하는 것보다 더 빨리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고, 이에 관한 이론은 훨씬 뒤쳐져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말입니다. 내가 단기간에 쓴 매뉴얼은 이미 당신에게도 보냈지만, 그조차 쿠바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져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내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는 유효할 겁니다. 급할 것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습니다. 다만 지적 능력을 발휘해 잘 적용한다면 성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완성한 혁명의 이념을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책 한 권을 탈고하면, 세계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쓴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외부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국제적 긴장이 높아지는 사이 우리의 혁명은 생존을 위해서 더 강화돼야합니다. 그럴수록 긴장상태는 더욱 높아지고, 우리도 더 강화되면서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한계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 곤경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사바토, 확신하건대 우리는 싸워 이겼고 그 승리의 맛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또 우리는 총알과 폭탄의 맛을 봤고 압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의 본보기가 되는 성실함을 가지고 싸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미 내가 겸허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우리의 경험을 이론화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 같습니다. 게릴라 생활에 적응하며 키운 순발력으로 수많은 도전을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친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1960년 4월 12일, 아바나에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인생 말기의 레닌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상당한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앙은행장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를 보면, 은행의 이익을 조롱하며 기업들 간 거래와 수익관계, 기업들 사이에 전달되는 단순 서류의 관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미 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진 분열상에 대해 당혹스러워 했던 레닌은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닌이 살아서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혁명을 계속 이끌었다면 그는 1921년 자신이 수립한 소비에트연방의 ‘신경제정책(NEP)’을 빠르게 바꿨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닌 서거 전, 소련 공산당에서는 자본주의 일부를 모방하자는 논의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과학경영관리제도인 테일러리즘을 빙자한 착취였습니다.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개인의 자발성에 의한 생산활동 향상 운동으로, 과장된 목표초과달성 운동으로 비판받음)은 이미 사라진 테일러리즘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허울 좋은 품삯 일이었습니다. 이런 경제 정책은 소비에트 사회 창조를 위한 당국의 계획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소련 사회의 경제정책 발판은 신경제정책에서 비롯됐습니다. 이것은 상품과 은행 그리고 어느 정도 이익을 포함하는, 자본주의에 포함된 전통적 카테고리의 관계에서 나온 정책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노동자를 위한 직접재화 생산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련의 경제정책 기조는 독과점에 가까운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시스템은 두 가지 토대 위에서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적 의식의 한 현상입니다. 허공을 뛰어넘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닙니다. 생산의 질 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서의 단순한 충돌을 통해 발생하는 변화만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의식의 현상이고 우리는 사람들이 소유한 이런 의식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집단 교육은 공산주의로의 길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몇 년 내로 공산주의에 도달할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자본주의를 버리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소득만으로 공산주의 사회 도달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국민소득과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그 어떤 상호관계도 없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국민소득에 도달하려면 수백 년이 걸릴 것입니다. 국민소득은 추상적인 목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업자와 흑인들을 포함한, 미국 노동자 급여 평균을 계산해봅니다. 그들의 소득수준은 높습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국가적 비용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테크놀로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우리들의 의식과 물적 재화 생산이 합쳐져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 이용을 증가시키지 못한다면 생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좋다는 자본집중 증가에 의한 생산이 없다면, 아니, 방대한 고정 자본이나 가변자본의 증가와 노동 없이 테크놀로지 이용이 증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선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기대고 있는 신생국가에 분쟁을 던져주고 또 다른 신생국가들의 노동자 연대를 가르며 갈등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이익과 자원을 뽑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적 테크놀로지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제 시스템에서 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한 발전적 형태이지만, 사회주의적 발전 모델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울을 놓고 우리 자신을 잘 봐야합니다. 생산관계에서 충돌 없는 올바른 생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를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것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특이한 차이점에 대해 자동화 케이스를 예로 설명해봅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자동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 중인 반면,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주 느리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노동자들의 실업 문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빠른 페이스로 자동화를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만약 미국의 스탠더드 정유사에서 공장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생산을 멈추고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제공할 것입니다. 공장은 1년 간 문을 닫고, 그러다 새로운 설비가 들어서면 생산은 더 효율적으로 재개될 것입니다. 소련의 상황을 살펴볼까요. 수백, 아니 수천 가지의 자동화 계획을 과학기술대학에서 마련했다고 해도 바로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공장 감독관들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연간생산 계획의 차질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 주도하의 계획완성 정책과 관련한 문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장이 자동화되면 생산 목표치를 더 올려야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해결방법은 있습니다. 자동화 공장에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하면 됩니다. 이 방법은 소련 경제학자 이브세이 리베르만(중앙통제적 경제 요소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지표에 바탕을 두자는 제안-역주)에 의해 시작됐고 동독에서 현재 시험 중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경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빠져들기 쉬운 주관적인 이론이며 기술적 정밀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를 시작하기 전에 현실적인 어려움을 먼저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형식의 변화를 먼저 선택해왔습니다. 

그 형식은 오늘날 본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 할 때보다, 비판적으로 볼 때 더 잘 보입니다. 문제는 인간을 하나의 생산도구로, 생산과정의 숫자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전통적 경제정책에 경도된 한 공산주의자의 잘못된 인식 때문에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스템에는 큰 간극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에 소명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들을 향한 ‘의욕 없는 물자’란 말을 어떻게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모든 노동자들 각자가 혁명의 필수 자원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즐겁게 일하고 지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노동자들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우리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흥미를 느끼는 지도자를 양성할 수 없다면 우리가 원하는 선반 노동자나 능동적인 비서를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동등한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우대책을 제공하는 방법도 잘못된 처방입니다. 책임감 있는 노동자를 어떻게 찾을까요?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나의 최대 과제입니다.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쿠바 공산당과 정부의 역할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당은 지금까지 당신이 조종하는 인형과 같았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소련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당은 당신의 말을 잘 들었지만, 결국 균열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지휘체계를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공산당이란 인형은 구석에 던져진 상태입니다. 우리는 인형의 다리를 하나씩 없애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감히 말합니다.

당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진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의 이념적 엔진이자, 가장 효율적으로 엔진 작동을 돌보는 조직입니다. 이념적 엔진이란 것은 당과 당원들이 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면서 정부 내 모든 부서와 공무원들을 지휘하며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은 이런 차원에서 전체를 지휘하는 조직이어야만 합니다. 당을 구성하고 있는 풀뿌리 위원회에서부터 지휘부서까지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 조직과 관련해 사기와 훈련, 리더십 방법 또는 여론 등등… 통계나 경제 분석에 반영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이 혼란스럽게 보여도 풀뿌리 수준에서부터 단단한 기초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건설부 장관)의 말이 좋은 예입니다. “사탕수수 추수를 위해 지원팀을 보내도록 공무를 연기했지만 사탕수수를 책임진 회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라 바빴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당의 역할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정부 내의 모든 일에 당이 포함될 수 없다면 적어도 낮은 단계의 부서에서라도 메이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의 기관요원들을 상대로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을 포함한 전반적인 철학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토론회의 직급 타이틀에 대해 맞냐 틀리냐를 놓고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분위기의 활성화 또는 최소 무슨 토론회인지 정도를 알 수 있는 교육으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당의 기관요원들이 나라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생각하는 인간이 되도록 바꿔나가야 합니다. 또 장식품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 이론까지 포함시켜서 말입니다.

나의 이런 비판은 우리의 오랜 우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감사와 경의와 절대적인 충성을 보냅니다. 너무 긴 편지라서 당신이 다 읽을지 모르겠으나…

고향이 아니면 죽음을.

- 1965년 3월 26일, 아바나에서 

 

나의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힐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리오, 세실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 보거라.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너희들은 아마 나를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막내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의 아빠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너희도 훌륭한 혁명가가 되거라. 공부를 열심히 하거라. 자연을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테크놀로지를 마스터해라.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임을 기억해라. 우리 각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너희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 어느 누군가를 향해 벌어지는 부당함을, 그리고 그에 맞서는 정의를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아름다운 가치다.

영원히, 끝까지 너희들과 함께하마. 여전히 너희들이 보고 싶구나.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키스와 큰 포옹을 보낸다. 

 

 

글·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1967. 의사 출신으로 20세기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생의 혁명가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가담했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민중혁명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사망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39세로 죽은 게바라는 프랑스 ‘68운동’ 당시 영웅으로 추대됐고 지금까지 혁명의 아이콘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번역·이정필
번역위원

 

 

나의 아버지, 체 게바라

 

체 게바라는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편지들은 자신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편지 1947-1967: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 당신을 품는다(I embrace you with my revolutionary fervor)』는 사상 최초로 영어와 각국의 언어로 소개된 체 게바라의 친필 편지 모음집이다.

그의 솔직한 글은 역사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준다. 이 편지 모음집에는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물리학자 겸 철학자, 소설가인 에르네스토 사바토와 쿠바의 혁명가인 피델 카스트로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등이 담겨있다. 당시 아버지는 쿠바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경제 및 재정과 예산 정책의 실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새롭게 결성된 쿠바 공산당의 내부적 기능과 여러 이슈들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카스트로에게 새로운 사회를 창출함에 있어서  ‘정치적 의식화’의 중요성을 지적했고 쿠바의 경제를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형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작별의 인사를 담은 아버지의 편지들을 소개하며 마무리되는데,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 편지에서 아버지는 장녀인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를 잘 돌봐 달라”고 썼다. 어린 시절 이 편지를 읽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을 내버려 둔) 아버지에게 화가 났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나의 사진들을 발견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진 않았지만, 그가 어디에서나 마음에 나를 간직하고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알레이다 게바라 (체 게바라의 장녀), 서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