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쓴다

2021-08-31     김지연 | 문화비평가

한  작가에게 특이한 업무 제안이 들어온다. 매일 출판사에 출근해 작가 미상의 소설 원고를 읽고 대표에게 소감을 들려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용이 들쑥날쑥했지만, 작가가 소감을 들려주고 이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다듬어진 원고가 나오게 됐다. 하지만 작가는 일하면서 점점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소감을 전달하면 불과 30분 만에 수정원고가 나오는 데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전달된 100편의 소설은 모두 같은 문장에서 시작해 변형된 구조의 이야기들이었다. 출판사 대표는 여전히 이 소설을 누가 썼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작가는 도저히 이것이 사람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최근 발간된 박금산 작가의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의 내용이다. AI(인공지능)가 소설을 쓰는 것은 이제 SF 장르에 나올법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 곁의 현실이다. 2008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AI가 쓴 소설집이 나왔고, 2016년에는 AI가 쓴 단편소설이 일본 문학상 예심을 통과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8월 25일, 국내에서도 AI가 쓴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가 출간된다.

소설뿐만이 아니다. 2016년에는 AI 작가 ‘벤자민’이 시나리오를 쓴 단편영화 <선스프링(Sunspring)>이 공개됐으며, 마이크로소프트가 2015년 중국에서 선보인 AI ‘샤오빙’은 직접 지은 시를 모아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시집을 출간했다. <햇살은 유리창을 잃고>라는 제목도 ‘샤오빙’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선스프링>의 경우 개연성 없는 전개로 혹평을 받은 바 있지만, ‘샤오빙’의 시는 꽤 그럴듯하다. 안개 낀 강가를 찍은 사진을 보고 “날개들이 바위와 물을 꼭 안고/적막 속에서/인적 없는 곳을 거니노라니/땅이 부드럽게 변하네”라는 구절을 즉석에서 읊을 정도다.(1)

『AI가 쓴 소설』 속의 주인공도 AI로 의심되는 작가가 거침없이 만들어내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변형을 보면서 ‘나보다 나아, 이 스토리는 내 상상 바깥에 있어!’라며 두려움 섞인 경탄을 내뱉는다. 인간 아닌 존재가 만든 결과물이 너무 뛰어나 놀라우면서도 그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어 두렵다. AI의 발달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빠르고, 그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때때로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이런 AI의 약진을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쓸 필요가 없어 보인다. 4차 산업혁명으로 사라질 직업의 순위를 꼽는 기사가 종종 보이는데, 단순 업무에 비해 소멸 확률은 좀 낮은 편이지만 작가도 순위권에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쓰는 사람들이, 심지어 쓰면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조만간 글쓰기가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각종 SNS와 브런치, 부크크와 같은 자가출판 플랫폼, 다양한 독립출판 페어 등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환경이 다양해진 시대다. AI가 인간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이 시대에 여전히 글을 쓰는 이유, 그리고 글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 편집자 리사 크론(Lisa Cron)은 책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이유는 생존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이 아닌 인간은 인생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모두 알 수 없다. 현재라는 시간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이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을 전부 조망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자신의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고 경험해보지 못한 생존 기술을 터득하기에 이야기는 매우 적합한 방법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이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AI가 무서운 속도로 학습해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이야기를 써낼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AI가 쓴 소설』에서 출판사 대표는 ‘서사의 자급자족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한다. 지금은 작가들이 서사를 만들어 공유하고 독자들은 이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AI 프로그램으로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면 독자들은 원하는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서 읽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른바 ‘셀프 독자’들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에 따르면 어떤 시대에든 작가는 계속해서 필요하다. AI가 건네는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독자를 위해 서사를 큐레이션하는 작가도 생길 것이고, 많은 작가들은 창작의 도구로서 AI를 활용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국내 최초의 AI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는 후자에 속한다. 수학과 컴퓨터공학 전문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김태연 ‘소설감독’이 AI 작가 ‘비람풍’의 뒤에 있다. 그는 주제와 소재,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하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입력받은 ‘비람풍’은 딥러닝을 통해 소설을 써내려갔다. 마치 『AI가 쓴 소설』 속의 작가가 소감을 전달한 것처럼, ‘비람풍’이 만들어낸 결과가 김태연 소설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명령어를 조정해 내용을 수정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듯 감독의 지시하에 스태프인 AI가 소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김태연 소설감독은 앞으로 AI 소설이 더욱 발전할 것이며, ‘소설가’는 ‘소설감독’이라는 직업으로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2) 단편영화 <선스프링>의 시나리오를 쓴 AI ‘벤자민’을 만든 AI 연구자와 영화감독 역시,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창작을 돕기 위해 AI 작가를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AI는 창작자에게 있어 ‘시력을 높여주는 안경’같은 존재라고 말이다.(3)

글쓰기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서사 창작에 있어서 AI가 일정 부분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에서는 이전과 달리 문장력보다는 주제와 플롯, 캐릭터 설정, 연출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일의 범위와 직업의 의미가 변형되는 특이점이다. 즉,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일부 직업이 소멸할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기준에서 해당 업무라고 인식하는 범위가 대체된다는 것이고, 또다시 그것을 넘어서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러니 AI로 대체 가능한 존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영리한 도구로 이용해 일의 방향을 어떤 식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쓰는 행위의 완결성

그런데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서 ‘쓰는 행위’가 AI로 대체할 수 있는 노동에 불과하다면 ‘쓰는 행위’는 사라질까? 이야기를 창작하려는 욕구를 AI 작가를 도구로 이용해 충족하고, ‘셀프 독자’들이 원하는 서사를 자급자족하는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쓰는 행위를 지속하게 될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사실 쓴다는 것은 타인에게 서사를 공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행위이기도 하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일기다. 개인이 사적인 일상과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는 사회문화적으로 대단한 기록은 아니다. 하지만 일상을 돌아보고 감정을 정리하며 알게 되는 진짜 자기 자신, 그리고 그것을 쓰면서 얻게 되는 내면의 힘이 있다. 이는 삶을 지속하고 변화시키는 단단한 주춧돌이 된다. 그래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자기 안에서 증명하고 더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쓴다. 평론가 알프레드 카진(Alfred Kazin)이 말한 “누군가는 자신을 위한 집을 종이 위와 시간 속,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 짓고자 글을 쓴다”는 문장은 그런 뜻일 테다.(4)  

10년 일기장을 무려 두 권째 쓰다가 그 일기로 책을 만든 윤혜은 작가의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그리고 자신의 일기로 메일링 서비스를 하고 있는 문보영 시인의 『일기시대』는 그런 일기 쓰기를 예찬하는 책들이다. 두 작가는 내밀하고 사적인 기록을 용감하게 공유한다. 우리는 타인의 일기에서, 그들이 매일 쓰는 행위를 통해 흩어진 일상을 바느질해서 꿰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일로 향해가는 과정을 엿본다.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의 부제는 ‘쓰다 보면 괜찮아지는 하루에 관하여’다. 

이쯤 되면 시인 키츠(John Keats)가 ‘밤새도록 격정을 불사르며 쓴 시를 새벽에 불태워도 좋다’라고 한 말이 이해된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정리되고 표현된 감정에 중점을 둔다면 시라는 결과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이는 예술 표현론과 같은 이야기인데, 이를 주장한 철학자 콜링우드(Robin Collingwood)에 따르면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다. 우리는 살면서 느끼는 강한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한 상태에 놓이는데, 예술 작품 창작은 바로 이 답답한 상태를 제거하기 위해서 감정을 정리하며 표현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개인이 스스로를 탐구하고 이를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고, 타인에게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는 것은 나중의 문제라는 것이다. 콜링우드의 예술관에서 예술은 관람자가 즐기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창작자에게 속한 행위다. 

예술의 표현론, 형식론 등을 따지지 않더라도, 쓰는 행위에 쾌감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AI가 재미있는 서사를 만들어내더라도 우리는 쓰는 일을 지속할 것이다. 게다가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은 AI가 해결할 수 있어도 인간의 통찰이 필요한 부분, 특히 ‘어떤 사람’의 관점이 필요한 경우에 쓰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코로나19로 봉쇄된 중국 우한 지역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한 간단한 외출조차 제한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사람들과 채팅을 통해 서로의 상황을 나눴고, 하루 일과와 감정을 일기로 기록했다. 국내에도 출간된 번역서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다. 뉴스에 등장하는 거대한 서사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개인의 서사가 돋보일 때, 우리는 존재조차 몰랐던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그 사이에서 무력감을 딛고 희망을 발견한다. 『안네의 일기』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럴 때 개인의 사소한 쓰기 행위는 타인을 변화시키는 사회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글 뒤에 사람이 있을 때 그 글은 유일무이한 기록이 된다. AI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

가까운 미래의 사회를 다룬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손편지 대필 작가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신해 손편지를 쓰는 일인데, 이 손편지 회사는 수백 명의 대필 작가를 고용할 만큼 성업 중이다. 모든 것이 자동화돼 편리한 시대, 마음을 전달할 다양한 매체가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손편지가 유효한 이유는, 텍스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의 목소리가 그립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자 뒤에서 사람을 보려 한다. 

글자를 통해 세상에 나오는 사람의 목소리는 텍스트의 범위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그런 식으로 개인의 개별 서사가 드러날 때 세상의 디테일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덟 명의 여성 작가가 자연스러운 내 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 책 『몸의 말들』에서, 발문을 쓴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 책은 앞으로 열 권 정도가 더 나와야 한다. 인구수만큼의 몸 이론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만큼 서로 다르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쓰고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다양한 구술사 프로젝트와 독립출판의 약진은 고무적이다. 1940~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이름에 얽힌 차별의 역사를 조망한 이시마 작가의 책 『이름생존자』는 상심, 절자, 해남, 보배, 월희 등의 이름을 가진 여성들을 인터뷰한다. 그중에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이도 있었지만, 작가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세상은 한 뼘 더 선명해졌다. 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이렇게 타인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며 그의 삶에 힘을 실어줄 때 쓰는 행위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삶뿐이라며,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했다.(5) 그가 말한 가난이 경제적 가난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의 결핍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 결핍을 세상에 드러내어 마침내 채우기 위해 글을 쓴다. 보뱅의 책 『작은 파티 드레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돈이 있는 사람들의 흰 손이 있고, 몽상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손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 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다.”(6)

우리는 여전히 쓰고 있고 또 써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등장하면서 회화는 더 이상 재현의 의무를 지니지 않게 됐지만, 인간은 사진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회화는 재현을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들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아직 미래를 확언할 수 없지만 아마 글의 미래도 그렇지 않을까. AI가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가 쓰는 글은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 더 우리 자신의 내부와 우리의 시선,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들을 향해 있을 테다. 

 

 

글·김지연
미술비평가 겸 문화비평가.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했고, 책 『마리나의 눈』, 『보통의 감상』을 썼다.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무한한 관심을 가진다. 


(1) 한겨레, 2018.8.16. ‘인공지능, 그림을 보고 시를 읊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technology/857808.html
(2) 한겨레, 2021.8.6. ‘AI가 쓴 소설, 읽을 준비 되셨나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06669.html 
(3) 김지연, 『보통의 감상』, 선드리프레스, 2020, p.182.
(4) 줄리언 반스 외,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다른, 2017, p.196.
(5),(6)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1984북스, 2021, p.91,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