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룬의 민주주의, 주술 또는 독백

2011-10-10     토마 들통브

10월 9일로 예정된 카메룬 대선에 등록된 정식 후보자는 (후보 등록 신청자 52명 중) 총 21명이다. 지난 29년간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온 폴 비야 정권은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국제사회의 규범을 교묘한 방식으로 피해가고 있다.

몇 개월간의 혼선 끝에 카메룬 대통령 선거 일정이 2011년 10월 9일로 확정됐다. 그러나 선거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듯하다. 1982년부터 대통령직을 고수하고 있는 78살의 폴 비야는 첨예한 사회적 문제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난 5월 20일 ‘공화국의 날’을 맞아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카메룬 국민에게 “자유롭고 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선거를 희망한다”는 공개 편지를 보냈다.(1) 이미 카메룬의 불공정한 선거제도에 대한 워싱턴의 비판에 익숙한 카메룬인들에게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프랑스의 태도였다. 그동안 비야 정권을 지지해온 프랑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비야 대통령이 텔레비전을 통해 공식적으로 초청 의사를 밝힐 만큼 공을 들였음에도 카메룬 방문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2) 2011년 공화국의 날 기념행사장에 프랑스 대표가 불참한 것 역시 프랑스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예다. 1960년 카메룬 독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부 언론은 ‘프랑스는 비야를 저버리는가?’라고 질문했다.(3)

우여곡절 대선 앞두고 분위기 변화?

지난 2년 사이 카메룬의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임기 연장을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한 비야 대통령은 (측근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 정부는 2008년 2월 말, 남부 지역 주민들이 물가 인하와 비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100여 명이 죽고, 체포된 사람만 수천 명에 달했다.(4)

유혈 사태로 비화된 카메룬의 헌법 개정 과정은 프랑스와 국제사회가 카메룬 정부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됐다. 코트디부아르의 로랑 그바그보와 리비아의 무하마르 카다피 정권의 몰락에 의기양양해 있는 사르코지로서는 정권 연장을 위해 자국민에게 발포를 명령한 독재정권을 너무 표나게 지지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카메룬 정부를 지지해온 국가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해서 ‘비야 체제’가 곧바로 해체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심각한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한 경험이 있는 비야 정권은 오히려 그 덕분에 더욱 공고한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장기 독재에 대대적 신자유주의까지

첫 번째 위기는 1983년 아마두 아히조 초대 대통령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미 1982년 폴 비야가 권력을 장악했다. 초대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힌 이들이 쿠데타를 기획하지만, 실행 직전에 실패하고 만다.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카메룬의 두 번째 대통령 비야는 스스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있다. 1996년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직에 공백이 생길 경우 상원위원장이 임무를 대신 수행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카메룬에서 상원은 단 한 번도 구성된 적 없다. 비야 대통령은 그 존재가 실질적이든, 잠재적이든, 추정적이든 어떤 정치적 라이벌이나 후계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보안조직(군대·경찰·정보부)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신속하게 유일 권력자의 자리를 굳혔다.

비야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모든 공직자에 대한 지명권과 파면권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뒤로는 그들에게 석유 등으로 모은 국부를 나눠줘 충성심을 유도해왔다.(5) 그러나 그는 아히조 전 대통령처럼 모든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방식보다는 뉘앙스 있는 메시지를 통한 신중한 통치 방식을 선호한다. 비야 대통령의 측근과 잠재적 정적은 그에 대한 의존과 불확실한 미래라는 이중의 굴레에 속박된 셈이다. 카메룬 전문가인 경제학자 올리비에 발레의 표현을 빌리면, “최고 행정관(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축을 이룬다. 속이 텅 빈 이 축이 권력자들의 운명의 바퀴를 앞으로 굴리는 힘이다”. (6)

현재도 진행 중인 두 번째 위기는 경제와 관련된다. 1980년대 말, 카메룬 경제는 유가와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카메룬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 손을 벌려야 했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했다. 관료주의와 세습이 지배하던 카메룬 경제는 민영화, 시장 개방, 대대적인 복지예산 삭감 등 이미 잘 알려진 충격요법을 강요받았다.

국민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으로 고통받는 동안(공무원 임금 60% 삭감, 비공식 경제의 급격한 확장) 지배계급은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했다. 그들은 국가의 부를 계속 약탈하는 동시에 민영화로 혜택을 본 다국적기업, 특히 프랑스 기업들과 협력해 개인의 부를 축적했다.(7) 프랑스의 카메룬 투자액은 6억5천만 유로로, 카메룬에 투자된 외국자본 총투자액의 20%를 차지한다. 프랑스는 미국을 제치고 카메룬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는 나라다. 프랑스 기업 총 500여 개가 카메룬 경제의 주요 분야에 진출해 있다(석유, 농업과 농산물 가공업, 목재, 시멘트, 건설, 이동통신, 유통, 교통, 물류, 은행, 보험 등).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민주주의 쇼

카메룬 사회에서 불법적 방식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사회적 규범이 되었다.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서 돈에 대한 집착은 모든 계층을 망라한 부패와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카메룬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봤을 때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카메룬의 정치·경제·사회적 난국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위기, 즉 민주주의의 위기로 전화됐다. 국민 저항에 부딪힌 비야 대통령은 1990년대 초 일말의 유화정책을 펼친다. 초대 대통령 때부터 존재해온 ‘체제 전복 방지법’이 철폐되고 다당제 정치가 시작됐다. 자유언론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런 개혁조차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됐다. 민주주의는 독재체제 연장을 위한 겉치장에 불과했다. 이른바 ‘민주독재’(Démocrature)라고 불리는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비야 대통령은 최초로 복수 후보로 치른 1992년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존 프루 은디 후보를 물리친다. 그 뒤 카메룬에서 선거 부정은 일상적 일이 되어버렸다. 선거 때마다 반대 진영은 분열돼 부정선거 폭로를 통한 전세 역전에 실패하고 들러리를 서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장기 집권 여당인 카메룬국민민주동맹(RDPC·카메룬민족동맹의 후신)이 국영 TV의 지지를 받으며 선거 유세로 국가재정을 축내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는 처지로 전락했다.(8)

서방의 투명성 요구, 독재자 손에 되려 칼자루

비야 제체는 국부를 빼돌리고 국민 의식을 조작하는 방식뿐 아니라 항상적 억압을 통해 유지된다. 지금까지 비야 정권은 몇 차례에 걸쳐 학살을 자행했다. 1984년 무장폭동을 일으킨- 혹은 그렇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학살됐고, 1990년대와 2008년 2월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희생자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

이런 집단적 진압에 덧붙여 특정 대상을 겨냥한 탄압이 자행됐다. 반정부 성향의 언론인·작가·노조활동가들은 감옥에 보냈다. (2010년 4월 옥중에서 사망한 제르맹 시릴 은고타 은고타와 달리) 감옥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싸우다 지쳐 권력에 투항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당근과 채찍에 단련된 대학교수와 지식인 역시 정권을 비호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의 자유가 무참히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항하는 이들을 적당히 회유하면서 전 국민을 복종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비야 정권이 의도한 바다. 파니 피조 기자는 “카메룬 시민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한쪽에는 정권의 연극에 속아주는 척하는 이들이 있고, (중략) 다른 한쪽에는 그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양쪽 모두 권력 행사의 정당성은 문제 삼지 않는다. 덕분에 정권은 관객의 중요성이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도 연극을 계속할 수 있다. 정권이 내뱉는 대사는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9)

오직 자신만을 대면하게 된 권력은 결국 자해하기에 이르렀다. ‘비야의 후계자’에 대한 논의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터부시된다. 비야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기 거부한 채 권력의 자리를 탐내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한 결정권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비야 대통령은 더 나은 ‘거버넌스’를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부패 척결’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덕분에 그는 ‘투명성 제고’라는 명목 아래 정작 자신은 제외한 채 정권의 비호 아래 재산을 축적한 이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눈 밖에 난 이들을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됐다. 비야 대통령의 한 측근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 언론에 선전된 ‘검거 작전’(2006~2011)의 본래 목적이었다. 이 일로 여러 명의 장관이 감옥 신세를 지고 남은 사람들은 비굴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증명해야 했다. 자크 팜 은동고 고등교육부 장관은 지난해에 어떤 비아냥거림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폴 비야 대통령의 피조물이자 창조물이다. 우리가 이룬 일은 대통령 각하의 업적이다. 우리 중 누구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하인이며, 기껏해야 노예에 불과하다.”(10)

카메룬의 정치적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비야 대통령과 측근들의 노련한 정치적 조작 때문만이 아니다. 이제 와서 투명한 선거를 촉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카메룬의 ‘파트너 국가들’ 역시 비야 정권의 끝없는 민주주의 연극을 지원해온 장본인이다. 가장 깊이 연루된 나라는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랑스다. 한때 카메룬을 식민지배한 프랑스는 비야가 정권을 잡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지지를 보내왔다. 프랑스는 비야 정권에 무기를 공급하고 치안 병력을 양성했으며, 재정 적자와 부채를 해결해줬다. 비야 정권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거제도 개혁도 입막음용

그러나 비야 정권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다른 서방국들- 특히 미국- 이 프랑스에 비해 더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과의 경쟁관계 속에서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는 이 국가들은 비야 정권을 훈계하면서도 그 결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비야 정권은 ‘좋은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에 모호한 약속이나 미온적 조처로 대응하면서 민주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한 ‘시민사회’와 대화하는 제스처를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11)

비야 정권의 부패 척결 캠페인이 정치적 숙청으로 변질된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EU)과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원 아래 진행 중인 ‘독립선거위원회’(Elecam) 설치 계획은 본래 의도와 대치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카메룬 선거제도 개혁 프로그램(전산화, 선거인 명부 작성 등)에 국제 파트너 국가들이 개입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 연구한 마리에마뉘엘 폼므롤의 지적이다. 이 개혁 작업의 목적은 선거 과정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들고, 선거 참여를 고무하고, 국민이 선거를 통해 자신의 불만을 표출시키는 데 있기보다는 선거 결과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하는 데 있다. 결국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해 비야 정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민주주의’의 탈을 쓴 체제를 연장할 수 있게 된다.

국제사회가 비야 대통령에게 미래를 준비할 것을 제안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야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고집할 경우 사회적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파트너 국가들은 그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레트르 드 콩티낭> 2011년 8월 25일자에 따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여름 비야 대통령에게서 ‘2년 안에 결정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 가지뿐이다. 이미 30여 년 전 이히조에서 비야로 정권이 승계되는 것을 지켜본 카메룬 국민은 또다시 그들의 의사를 묵살한 채 은밀히 이뤄지는 권력 승계 과정을 그냥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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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들통브 Thomas Deltombe  
공저로 <카메룬! 프랑사프리카의 숨겨진 전쟁(1948~71)>(La Découverte·파리·2010)이 있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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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카메룬 국민에게 보내는 축하 메시지’, 주카메룬 미국 대사관, 2011년 5월 20일.
(2) ‘파리 토크’, <France24>, 2007년 10월 30일.
(3) ‘카메룬: 프랑스는 비야를 저버리는가?’, <Slate Afrique>, 파리, 2011년 8월 1일.
(4) Matthieu Tébuché, ‘카메룬의 슬픈 상황’, www.monde-diplomatique.fr, 2008년 3월 4일.
(5) 1977~2006년 석유 수출로 얻은 수익금 중 107억 달러가 증발했다. Bernard Gauthier & Albert Zeufack, ‘Governance and Oil revenues in Cameroon’, OxCare Research Paper 29, Oxford University, 2009년 10월 7일 참조.
(6) Olivier Vallée, <부패 척결을 통한 도덕적 감시>, Karthala, 파리, 2010.
(7) Piet Konings, ‘The Politics of Neoliberal Reforms in Africa: State and Civil Society in Cameroon’, Langaa/African Studies Centre, 바멘다, 2011.
(8) Patricia Tomaino Ndam Njoya가 쓰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수록된 <카메룬의 허술한 선거제도 A에서 Z까지>, Editions Minsi/EAE, 야운데, 2004 참조.
(9) Fanny Pigeaud, <폴 비야의 카메룬에서>, Karthala, 2011.
(10) <Le Jour>, 야운데, 2010년 4월 14일자에서 인용.
(11) Marie-Emmanuelle Pomerolle, ‘파트너 국가들의 동의: 카메룬의 선거제도 개혁과 직업 정치인들 사이의 권력 게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