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숲엔 마오주의자가 산다

2011-10-10     니콜라 자울 & 나이케 데스케스네스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 내각이 반부패 시위에 부딪히자 마오주의 게릴라와 소수부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이면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대법원마저 인도 정부의 행위가 헌법의 가치를 위배한다고 판결했다. 마오주의를 내건 낙살라이트의 대정부 시위 방식이 때론 폭력성을 띠지만, 갈수록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이들을 지지하고 있다.

인도 정부가 민심을 무시한 채 중부 지방의 광산 개발을 강행하려고 이곳 반대파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지난 7월 5일, 인도 대법원은 지도층에게 인권침해를 들어 헌법의 준엄한 가치를 환기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이 반대파들에게 자신감을 회복해줄 수 있을까?

2009년 10월, 팔라니아판 치담바람 내무부 장관은 인도 중동부의 산림 지역과 소수부족 마을에서 마오주의자 혹은 인도 공산주의 혁명세력, 이른바 ‘낙살라이트’(Naxalite)라는 반군세력을 소탕하는 ‘그린헌트’ 작전을 선포했다. 민병대 ‘살와주둠’(Salwa Judum, 평화사냥꾼) 소속의 특수경찰 4천 명이 차티스가르에서 활동하고, 즈하르한드·차티스가르·비하르·오리사·서벵골 등 주요 반군지역 5곳에는 민병대원 5만 명이 배치되었다. 요컨대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공식 담론의 엄호 속에서 안보적 접근으로, 국민과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국가 발전을 이끌려 한 과거의 권위적 태도를 강화하고 있다.

광산 개발 노린 정부의 군사작전

정부는 언론을 통해 그린헌트가 마치 평화적 개발을 위한 필수 과정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를 동반하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반면 정부와 경제계는 자신들의 목표인 두 자릿수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반군지역에 매장된 광물 개발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린헌트가 선포되자, 지식인들은 “진보세력이 낙살라이트 쪽으로 기울고 있다”며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낙살라이트는 최근 잠복·과격 투쟁을 하며 시민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낙살리주의자인 역사학자 수만타 배너지는 우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 정부는 지식인층이 중립을 지킬 수 없도록 사태를 몰고 갔다. 설령 지식인들이 마오주의 전술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이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화 약탈 정책, 즉 비옥한 땅을 몰수하고 하천을 파괴하고 주민 수천만 명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정책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중략) 무장한 마오주의 반군과 비폭력 간디주의자들이 힘을 합해 인도 정부가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에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마오주의자들이 ‘부재 중’인 틈을 타 이들을 비난하는 언론 플레이가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가운데, 언론에 패널로 초대된 좌파 지식인들이 본의 아니게 마오주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오로지 (쫓겨나는) 부족의 처지를 들어 정부의 부당함을 규탄할 뿐이다. 자신도 이와 ‘관련된 시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정부가 공평한 개발 모델을 도입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들의 우려가 정부기관 내부에 반영된 듯하다.

지난 7월 5일, 대법원은 특수경찰(시민 중에서 모집한 대리 경찰)을 동원한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 젊은 민병대원들에 대한 즉각적 무장해제와 이들에게 지급하던 지원금 중지를 결정했다. 대법원은 “정부는 헌법이 정한 자신의 책임을 완전히 잘못 해석했다”고 비난했다.

2007년, 시민이 나서서 차티스가르 주정부를 공익침해 행위로 고소하지 않았다면 대법원이 정부에 이런 명령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소를 이끈 델리대학 사회과학대 학장인 난디니 선다르가 한 시민으로서 시작한 도박을 승리로 이끈 셈이다. 지금은 각계각층에서 찬사를 받지만, 법정 다툼은 외로운 투쟁이었다. 게다가 그는 무장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급진좌파의 멸시도 받아야 했다.

이를테면 대중 여류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마오주의자들의 정책이나 방법론은 지지하지 않지만, 이전의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 비폭력주의가 시민전쟁의 맥락에서 볼 때 결코 적합하지 않다고 천명했다. 2010년 3월, 그녀는 인도의 유력 주간지 <아웃룩>에 32면에 걸쳐 숲 속에서 반군과 함께 보낸 체류기를 실어 논란을 야기했다.(1) 중산층 소비자 삶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녀는 반군을 자극하는 중산층의 이기적 정치이념를 비판했다.

아룬다티 로이는 2010년 10월 <아웃룩>에 게재한 ‘전우들과 함께하는 행군’이라는 글에서, “낙살라이트는 독재정치 모델이며 분명한 환경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마오주의 ‘인민해방게릴라군’에 입대한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녀는 언론 기고를 통해 처음으로 반군들의 목소리를 소개하고, 인도 언론이 조직적으로 외면해온 투쟁의 특징을 조명했다. 인도 언론들은 ‘황폐화 지역’, ‘소탕’, ‘마오주의자의 위협’ 등과 같은 정부 공식 용어에 희생자 수를 연결하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2004년, 만모한 싱 총리가 마오주의자들을 “국내 보안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규정하자, 이 여류작가는 낭만적이며 도도한 자세로  헐벗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들고 외쳤다. “간디여, 그대의 총을 꺼내 들어라!” 그녀는 성상파괴주의의 의미를 담은 이 구호를 외치며, 그동안 생태와 인도주의를 멸시하는 정부 당국에 맞서왔다.

2005년 차티스가르주가 채택한 보안법을 피하려 뉴델리로 피신한 간디주의자 히만슈 쿠마르는 비폭력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바꾸었다. 인도 북부의 한 아시람(ashram, 수행 장소)에서 간디 추종자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비폭력의 힘을 실질적으로 테스트” 하기 위해 마오주의의 산실인 단테와다 숲에 거주했다.(2) 그가 머물며 현지 주민에게 복지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던 아시람은 2009년 5월, 중앙정부 소속 경찰과 민병대원 수백 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가 600명의 아디바시(Adivasi, 인도 토착 원주민) 부족에게 민병대를 수탈죄로 고소할 수 있게 법적 자문을 해준 것이 화근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그 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현장을 방문해 수탈에 관한 조사를 벌였다. 민병대가 아시람을 공격할 때, 폭행을 당하면서도 중립을 지킨 그이지만, 이제 그는 무장 저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마오주의자들, 원주민과 저항 나서

격렬한 파벌 싸움 이후 1960년대 말 발생한 낙살바리 부족의 반란을 계기로, 2004년 낙살라이트 운동의 강경파가 인도 중부 소수부족 거주 지역(3) 주변에서 무장투쟁을 개시하며 이른바 ‘인도 마오주의자 공산당’(CPI-Maoist)이란 이름으로 한데 뭉쳤다. 인도 정부가 ‘포스트 9·11 대책’을 내놓으며 낙살라이트 문제를 국제적 테러리즘과 연계시켰는데, 이것은 정부가 경제적·사회적·환경적·정치적 문제를 순전히 안보문제로 접근하는 편리한 명분으로 삼은 것뿐이다. 일부 관료들은 정부의 이런 논리를 이용해, 자신들을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가담하는 활동가들을 “테러범 지지자들”이라 규탄하며 범죄자로 내몰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빈민 의료봉사를 펼치며 ‘맨발의 의사’로 알려진 인권운동가 비나약 센 사건이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그는 2년간 옥살이를 했다. 비나약 센이 라이푸르 감옥에 투옥된 한 마오주의자를 진료차 방문한 사실을 들어, 그를 마오주의자들과 함께 ‘선동과 음모’를 꾀한 혐의로 종신형에 처한 차티스가르주 고등법원 판결에, 지난 4월 인도 대법원은 마침내 무효 판결을 내렸다.

2010년 3월, 좌파 대학의 산실로서 수많은 활동가와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중역을 교육하는 것으로 알려진 뉴델리의 자와하랄 네루대학에선 총장이 캠퍼스에서 펼쳐지는 특정 문화 및 정치 활동을 검열했지만, 그린헌트의 학내 찬반세력 간 집회와 정치적 폭력사태에 부딪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학교 공문에는 ‘대인전쟁반대포럼’이라는 단체를 겨냥해 “허가받지 않은 공공집회, 영화 상영, 전시회는 국가의 통합과 조화와 안보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마오주의 반군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안에서도 무장봉기 지지자와 합법투쟁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긴장을 촉발한다.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인도 공산당(CPI-M)에 대한 지식인들의 지지율은 최근 몇 년 동안 서서히 떨어졌다. CPI-M이 다국적기업의 서벵골 진출에 호의적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5월, CPI-M은 지난 30년간 자신의 텃밭이던 서벵골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4) 2007년 3월, 난디그람에서 CPI-M 지지자들과 경찰들이 특별경제구역 개발 반대자들을 상대로 대대적 폭력 진압을 자행해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대중의 항의가 빗발쳤다.

인도 좌파의 과격화는 민족주의적 감성 프리즘을 통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야당 진영이 반제국주의 감정에 불을 지피기 때문이다. 부족들의 무장 저항은 반식민주의 투쟁 때부터 인도의 논쟁거리가 되는 케케묵은 대중주권 이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현재의 봉기는 식민지 시대 농민투쟁의 메아리다. ‘하위주체 연구’(Subaltern Studies) 사조의 영향으로 식민지 시대 농민투쟁에 관한 사료가 편찬·재발견된 이후 과거 좌파 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인도의 민족주의와 부르주아의 성격을 비판하는 데 자양분이 된 농민투쟁의 메아리이다. 소수부족과 아디바시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 또한 현재의 봉기가 카슈미르, 펀자브, 북동부 국경 인접 지역에서 최근 수십 년간 발생하는 분리 투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지방들과 달리, 현재 봉기가 일고 있는 단다카란야 숲은 인도 한복판에  있다. 인도 정부 또한 독립 이후 줄곧 세계화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소수부족들의 보호자를 자처해왔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소수부족은 인도 민족주의의 상상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판엔 취약하지만, 동시에 정통성을 갖춘 ‘인도 내의 또 다른 민족’을 구현하며 인도 도시 중산층 사이에 혼재된 감정과 경멸, 양심의 가책을 유발한다.

합법과 무장 사이 치열한 논쟁

자신의 토지가 강제로 산업화되면서 삶의 터전과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규탄하던 소수부족들은 이제 2005년 제정된 경제특구법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국민주권 침해 반대를 기치로 내세우며 신개발 모델을 비판하고, 국민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깊이 스며든 사회주의 모델을 포기하는 게 정부가 상징적 약속을 깨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강대국들이 이득을 착취하던 과거로부터 완전히 탈피하겠다던 약속을 포기한 것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은 자본 착취의 문제를 과거 반식민지주의자들이 부의 흡수세력으로 집중 비판한 식민주의자와의 상관성 안에서 바라본다. 정부 정책은 관료의 다양한 탈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원과 인력 착취를 일삼는 정부의 독재적 틀은 소수부족 지역의 민주적 시스템을 말살한다. 소수부족들은 예전에 비해 문맹률은 낮아졌지만 더 못살게 된 사실을 자각하면서 현지 기관들의 운영에 참여하고, 그 기관들을 자신의 권리 옹호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또한 중산층이 크게 늘면서, 지식인들은 소비만능주의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은 네루의 모델- 책임감 있는 부르주아 지성인들이 국민 문제와 국가 발전에 신경 써야 한다- 에 소원했던 자신들의 행태를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 계층과 마오주의자들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CPI-M이 역사적으로 많은 지도자들과 간부들을 부르주아와 최고의 카스트 계층에서 뽑아 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식인층, 심지어 지도층이 마오주의 운동에 지속적으로 온정을 베푸는 것은,  분명 최고 명문대 재학 시절 이들이 맺은 우정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불가촉천민인 달리트의 반카스트 시위는 지식층과 지도층의 지지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좌파 지식인층과 달리트 간 케케묵은 불신 때문에, 지식인층은 달리트의 시위가 법과 공화국 시위 규범을 잘 준수하는데도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 달리트가 직접 투쟁을 주도한 탓에 좌파 지식인 진영의 권위가 손상됐다. 브라만 계급 출신이란 이유로 시위에서 배제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심지어 악의적 시위 간섭자로 의심받거나, 혹은 (카스트의) 해방을 반대하는 적으로 낙인찍혔다.

반대로 마오주의자들은 공공연히 법을 무시한 폭력적 시위를 벌이는데도 이념 투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로 인식되며 덕을 보고 있다. 게다가 지각없는 지식인층은 이따금 그린헌트 반대운동 탄원서에 시민권 개념을 ‘훌륭한 시민사회’의 활동가들의 전유물처럼 사용하는 반면, 소수부족들을 (시민권 개념이 없는) ‘원주민’ 취급을 한다.

원주민을 무시했던 좌파 엘리트들

여성 마르크스 경제학자 비플립 다사굽타는, 1970년대 초반 낙살라이트 운동에 가담한 콜카타의 전통 벵골 엘리트 중산층인 바드라록 출신 학생들이 강력한 주체가 되어 인도 마오주의(공산주의)에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엘리트들이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불량배 혹은 소외계층이 이 운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5) 지식인들은 유수한 집안의 자제들이 안락한 삶과 성공을 포기한 채, 이상을 좇아 비밀조직에 가담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이를 신성시하는데, 이것이 과연 타당한 걸까? 혁명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마오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지식인들의 전유물인 이타주의와 이상을 좇는 운동은 높이 평가하는 반면, 시골 사람들의 운동은 한낱 자신의 계층 이익을 옹호하려는 운동으로 치부하니 말이다.  

폭력과 연관된 이런 문제가 곧 지각없는 인도 좌파 엘리트의 증상이다. 아디바시 부족을 옹호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으로 좌파 진영이 나뉜 것도, 두 진영이 현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이념적 측면에서 다루며 서로 헐뜯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서 간디주의자로 전향한 델리대학 교수 딜립 시몬은 낙살라이트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브라만교의 특성, 즉 ‘우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열등한’ 존재(소수부족들)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이념과 연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인도 좌파의 무조건적 비폭력주의 준수 자체가 이미 일상화된 현장 폭력의 현실을 외면한 간디의 이념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마오주의 산실에서 체류한 뒤, 로이는 인도 최대의 민영 방송사 <뉴델리 TV>(NDTV)에 패널로 출연해 “비폭력이 진정한 무기가 되려면 대중과 청중이 필요하다. 한밤중에 민병대원 1천여 명이 마을로 진입하면 어쩔 것인가? 굶주린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단식투쟁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여류작가는 또 원칙적으로 ‘중립’을 고수하는 지식인층의 태도가 국가와 반군 간 폭력을 더욱 부채질한다고 분개했다. 실제로 그가 이른바 ‘샌드위치 이론’이라고 부르는 지식층의 중립적 태도는 현지 주민들을 탄압의 망치와 마오주의자들의 모루 사이에 낀 피해자들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번 정치투쟁을 시작하면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로이가 반군 가담을 통해 밝힌 증언들이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자, 언론들은 반복적으로 반체제 인사들에게 ‘국가’의 생각과 행동 양태에 순응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하달하는 장으로 변해버렸다. 로이를 TV 문학선집 프로그램에 초대한 인도판 <CNN> 프로그램 ‘아이비엔 라이브’(IBNLive)를 진행하는 여기자는 그녀에게 “인도를 사랑하든지 아니면 인도를 떠나라”고 다그쳤다. 로이는 이때 카슈미르의 자주적 결정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이후 체포 위협에 시달렸다. 갈수록 표현의 자유를 적대시하는 국가기관과 우파 진영의 사고방식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 바라티야 자나타당(BJP, 인도인민당) 지부 여성 회원들이 로이의 집을 공격했고, 현지 법원은 이에 장단 맞추듯 로이를 선동죄로 기소했다.(6)

전문성을 띤 독립 활동가들이 차티스가르주에 가는 것도 어렵게 됐다. 차티스가르주 경찰은 선다르, 쿠마르, 로이를 기피인물로 발표했다. 힌두교를 포기하면서까지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힌두교 지도자(7) 스와미 아그나이베시도 이런 협박을 받았다. 지난 3월 말, 그는 민병대원들이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남성 3명을 살해한 뒤 마을을 불태운 3곳 중 한 곳을 방문하러 가다, 경찰과 민병대 무리의 습격을 받아 머리를 다쳤다. 존경받는 여론 주도층에 대한 지나친 공격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탄압 거세지자 지식인들 동조 나서

인도 정부는 다름 아닌 ‘건국의 아버지’ 간디, 자와하랄 네루, 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등이 관심을 가진 소외계층의 참여운동을 탄압하고 있다. 선다르는 자신의 저서 <하인과 군주>(8)에서 “일부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지식인층과 지도층이 현재 소수부족 지역에서 정권이 저지르는 불합리한 행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고소인(선다르)의 이런 진술을 수용해, “어둠이 우리 정책 입안자들을 엄습하기 시작해, 이들을 점점 더 장님으로 만들어 이들이 헌법의 가치와 지혜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판결했다. 요컨대 대법원은 “지도층이 신자유주의 경제 이데올로기가 양산한 끝없는 이기심과 탐욕의 문화에 물들었다”며, 지도층의 도덕성에 경종을 울렸다.

선다르는 차티스가르주와 벌인 4년간의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현 상황에는 비관적이다. 만모한 싱 총리는 지난 7월 12일 개각 때 내무부 장관 팔라니아판 치담바람을 경질할 수 있었지만 그를 유임시킨 반면, 법무부 장관 비라파 모일리를 좌천시켰다. 비라파 모일리는 대법원에서 진행된 선다르 사건뿐만 아니라 최근 부패와 탈세 사건 등 국가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러 재판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무부 장관의 탄압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결연한 입장이 중산층 도시 유권자들의 현 정부 지지를 유지시키고 있다. 최근 집권 여당인 의회당은 다시금 인도인민당(BJP)을 따돌리고 중산층 도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소외계층의 표를 의식해 소니아 간디와 아들 라훌을 내세워 더 나은 ‘복지’ 정책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들의 담론은 최선을 다해 광산의 이득을 지키려는 현 정부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대법원이 민병대 해체를 선고했지만, 현재 일각에서는 민병대 해체가 경찰국가, 심지어 정규군의 개입을 부르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나 군 당국은 ‘군이 자국민에 대한 개입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그토록 정치적으로 민감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직접 진화에 나섰다. 요컨대, 마오주의자들이 모든 정부기관과 지도층을 딜레마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식인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층 탄탄해진 마오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위를 지키며,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민 앞에서 국가의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민의 진정한 수호신인 양 교묘히 포장한 것처럼 보인다.


 대법원은 인도의 양심이 될까

지난 7월 5일, 대법원은 중앙정부에 민병대 살와주둠(Salwa Judum)의 해체와 현지 주민을 특수경찰로 고용해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던 행위를 중단하라고 판결한 것 말고도,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비판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은 차티스가르주의 봉기 원인이자, 여러 측면에서 국가와 헌법의 가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첫째, 환경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은 ‘포식성을 띤 자본주의의 형태’를 지지하며 ‘약탈과 천연자원의 절도’로 먹고살고 있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는 국민에게 ‘큰 불행과 절망’을 안기며 차티스가르주에서처럼 ‘명백히 인권을 침해하는 정권’을 창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도덕적 측면에서는 이 모델이 국가의 헌법 위반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국가의 공식적 수사는 “이같은 개발 패러다임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인 반면, 대법원 판결은 “심지어 헌법에도, 국가는 모든 국민 간에 형제애를 증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며 정부를 반박했다.

가장 진보적 신문인 <더 힌두>와 <텔레카>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역사적 판례가 될 것이라며 환영한 반면, 인도 영자신문들은 이를 일제히 규탄했다. 종종 도발적 태도를 취하는 영자신문 <파이어니어>는 “지식인층 법관들이 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라, ‘저항운동의 초석’이던 민병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시위대 편을 든 대법원의 판결에 한때 열광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이제 시위대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자 연구원 벨라 바티아는 <더 이코노믹 앤드 폴리티컬 위클리>에 게재한 글에서 “대법원이 6500명의 민병대원에게만 초점을 맞춰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애초 투쟁을 유발한 장본인들, 즉 그린헌트 작전을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약탈을 저지른 정규 경찰력과 4만 명의 민병대원의 죄를 묵과했다”고 지적했다. 바티아는 비록 그린헌트 작전에 민병대와 특수경찰의 투입을 금지한 판결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특정 방식에 대한 선고이지, 전쟁 자체에 대한 선고는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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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 자울 Nicolas Jaoul 인류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 & 나이케 데스케스네스 Naïké Desquesnes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 남아시아 책임편집자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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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우들과 함께하는 행군’(Walking with the comrades), <아웃룩>, 뉴델리, 2010년 3월 29일.
(2) ‘If Gandhi were alive today, he’d be in a jail in Dantewada’, Himanshu Kumar 인터뷰, <Daily News and Analysis>, Bombay, 2010년 3월 23일, www.dnaindia.com 참조.
(3) 세드리크 구베르뇌르, ‘인도 낙살라이트 반군의 팽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2월호.
(4) 세드리크 구베르뇌르, ‘콜카타는 간디를 기다린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8월호.
(5) <The Naxalite Movement>, Allied Publishers, Bombay, 1975.
(6) 형법 조항은 “인도 법률에 따라 건립한 정부에 대해 증오, 모독, 무관심을 부추기는 말이나 제스처 혹은 표현 등은 국가에 대한 범죄행위로 처벌한다”고 명시돼 있다.
(7) 현재 은둔 생활을 하고 있음.
(8) Nandini Sundar, <Subalterns and Sovereigns. An Anthropological History of Bastar(1854~2006)>, préface à la seconde é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New Delhi,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