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론 그림자 속 아르헨티나 부부 대통령

2011-10-10     세실 랭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실업자 운동조직)는 인내를 잃어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여성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오는 10월 23일의 대선 후보자를 선별하는 8월 14일의 예비선거에서  경쟁자들보다 40% 이상 앞선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녀는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데 이어 또 한 번의 임기를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정책이 남편의 정책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50대의 변호사 발데마르가 입을 연다. “솔직해집시다!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는 다른 사회주의 정부들이 시도조차 하지 못한 조처를 취했잖아요!” 발데마르의 사려 깊은 의견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 도시인 플로렌시오 바렐라의 조촐한 빌라에 모인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대통령 선거 12주 전인 7월의 어느 날 벌어진 이 대화는 키르치네르 부부인 ‘케이(K)씨들’에 대한 토론으로 열기를 띠었다. 2003년 아르헨티나 국가수반이 된 키르치네르 부부를 가리킬 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K씨들’이라고 지칭한다.

180만 가구에 보편적 아동수당

먼저 남편 키르치네르가 “국가의 부르주아 계층을 공고히 하겠다”(1)는 약속을 하면서 권좌에 올랐다. 그리고 2007년,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한 부인 키르치네르가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고, 올해 재선에 도전했다. 그날 모인 네카와 그의 동료 알베르토처럼, 발데마르는 ‘정치권’을 통째로 부정하는 극좌단체의 회원이다. 그의 목표는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투사에게 조금이라도 K씨들을 지지하도록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번도 회원 수가 1400명을 넘은 적 없는 이 단체의 ‘옛 회원들’은 과연 오늘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을까? 그는 다소 과장되게 말했다. “여러분, 사회가 양극화돼 당신이 K씨들에 반대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당신이 그들을 지지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그 시절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애를 받는 국가였다. 1989년 대통령직에 오른 카를로스 메넴은 금융계가 환호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메넴 정부는 대부분의 공기업들을 외국 투자자에게 헐값에 팔아치우고,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달러와 페소 사이의 고정환율제를 실시했다. 인플레이션은 떨어졌지만 수출도 함께 감소했다. 과대평가된 통화 때문에 생산품은 경쟁력을 잃었다. 국가 채무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70년대 초 76억 달러이던 채무가 2001년 1320억 달러로 1700% 증가했다. 실업은 공식적으로 18%에 이르렀다.(2) 2001년 12월 5일 IMF가 아르헨티나에 대출을 거절하자, 정부는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 부채 위기가 발생했고, 은행이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경제는 마비됐다. 국민은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네카·알베르토·발데마르가 참여하는 솔라노의 ‘실업노동자운동’(MTD)은 ‘피케테로’라는 수많은 실업자 운동조직 단체들 중 일부다. 실업자 시위자들은 “그들 모두는 떠나라!”라는 구호 아래 뭉쳤다.

연 9% 성장 등 성과 내기도

정치적 불안정이 2년간 지속된 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권좌에 오른다. 파타고니아 지역 산타크루스의 주지사였음에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는 민간보다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페론주의 전통(3)을 담은 담화를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 임기가 시작되고 몇 달 만에 전 정부의 사면권에 대한 대법원의 폐지 판결을 얻어내, 독재 기간(1976~83)의 범죄 용의자인 군인들에 대한 소송을 재개했다. 2011년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그의 부인이 K씨의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할 것이다.

네카가 “키르치네르 부부가 상당수 대중조직들의 피를 빨아먹었고 분열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의 정책은 우리의 저항에 의해 생겨났다”고 감정을 절제하듯 말했다. 이어서 발데마르가 K씨 부부의 조처들을 상기시킨다. 훌륭한 변호사인 그는 노동법, 특히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체결된 1천 개 이상의 단체협약에 대해 언급했다. 사회적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남편 키르치네르는 페론주의 역사에서 정부의 핵심 파트너였고 관료주의적 조합주의의 상속자인 ‘노동총동맹’(CGT)과 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런데 정부·CGT·경영주가 참여한 노사 동수 회의는 가죽·식품·운송·통신 등의 분야에서 더 나은 노동조건들을 협상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발데마르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노동조합에 유리한 기업파산법 개정(2011년 6월)을 언급했다. “파산법은 회사의 건물이나 기계를 구매하기 위해 자신의 해고수당을 사용할 권리를 노동자에게 부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파산법은 노동자에게 파산 위기에 처한 기업의 건물이나 기계를 구매할 권리만 줄 뿐, 그 기업을 인수해 수용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4)

우리는 또한 독점을 금지하고 주파수의 3분의 1을 비영리기업에 배분하는 새로운 미디어법(2009년 10월), 동성결혼 허용(2010년 7월), 메넴이 민영화한 퇴직연금의 재국유화(2008년 11월)(5)를 언급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부조 프로그램은 열거할 필요도 없다.

가파른 인플레에 임금 통제

2002년 실업자 시위대들은 대도시 교외에서 자신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서민급식소 덕택에 생존을 유지했다. 네카는 “현재는 ‘보편적 아동수당’(AUH)과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하는 아르헨티나’라는 프로그램 덕택에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생필품을 얻어 생활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2년 전 키르치네르 여사가 고안한 AUH는 가장 환영받는 조처다. 아동 1명당 230페소(약 37유로)를 주는 이 수당은 180만여 가구에 혜택을 주었다. 제한된 빈민층에게만 지급돼 ‘특혜’로 간주된 예전의 사회부조 플랜과는 반대로, 이 아동수당은 보편적 권리다. ‘일하는 아르헨티나’라는 프로그램은 사회적 경제의 틀 안에서 국가가 지원하는 일자리들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거 밀집 지역에 20만 개 일자리가 창출됐다. 그러나 상당수 실업자 단체들은 최저임금(약 2300페소, 약 370유로) 이하의 임금 문제 외에, 제도의 장점을 왜곡하는 인기영합주의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는 9%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면서 유럽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런 성공은 우선적으로 남편 키르치네르가 권좌에 오르기 전인 2001년 말, 달러 대 페소의 고정환율을 폐지하는 조처가 취해졌기에 가능했다. 급작스럽게 변동환율제로 바뀌자 국가화폐인 페소는 폭락했다. 실제 임금의 평균가치가 30% 하락했지만, 환율 평가절하는 대외무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동시에 전세계 원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유전자조작 콩에 집중한 1차 산업 분야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국내총생산(GDP)이 2002년 10% 이상 추락했다가 이듬해에 8% 증가했다. 이런 뜻밖의 선물을 이용해 K씨 부부는 재분배 정책에 재정을 투입한다. 그들의 공공지출이 경제의 ‘선순환’을 일으킨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정책을 지속할 수 있을까?

2002년부터 전문가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경제학자 피에르 살라마는 “2005∼2008년의 성장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전망’이 한 해도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고 말했다.(6) 자유주의적 야당의 정통 학자들은 심각한 어려움이 닥치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다시 올 것으로 진단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키르치네르 부부가 주도한 부채 재조정을 나름의 방식으로 열렬히 환영한다. 그들은 공공지출 감소를 추가로 요구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권장한다.

키르치네르 팀은 2005년, 민간 채권자들을 압박해 그들이 갖고 있는 공채 증서를 60% 감면한 새로운 채권으로 교환하는 데 성공한다. 2006년 정부는 25억 달러를 빌려준 베네수엘라 정부의 도움으로, 예정보다 앞서 IMF에 진 전체 부채 98억 달러를 상환한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9억 달러의 이자를 절감한다. 그때까지 아르헨티나에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했던 IMF는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여전히 K씨의 정책은 모호성을 드러낸다. 5년 뒤, 여성 대통령은 2005년의 교환 조건을 거부한 채권 소유자들에게 새로운 채권 교환을 제안한다. 그녀의 전임자는 투자자들이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몇 종류의 채무를 제외하면 현재의 채무는 독재 시절 체결된 채무와 같다. 그런데 독재 시절 채무는 연방법원에 의해 2000년 불법으로 선언됐다. 그 채무가 불법 계약이 난무하는 불합리한 메커니즘에 의해 순환됐고 재융자됐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에 국제 금융 시스템이 연루돼 있다.” 올모스는 이렇게 항의한다. 그는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이 그런 것처럼, 아르헨티나 부채도 감사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에 따르면, 2002∼2009년 빈곤율이 45%에서 11%로 떨어졌다.(7) 그러나 불평등이 심각한 상태다. 게다가 경제활동인구의 36%가 여전히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대학 사회부채연구소’(UCA) 연구원인 단아다즈코는 “인력개발 차원에서는 실제적 향상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일자리 창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인력개발 향상은 정점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가 상승 때문이다. 정부가 어수룩하게 이런 현실을 과소평가했다. 독립적 기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연간 25%에 이른다.

국유화·다국적기업 견제 미흡

인플레이션을 저지하기 위해 키르치네르 여사는 CGT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려 한다. 단체 ‘좌파 경제학자들’의 회원 에두아르도 루치타가 “임금 인상을 통제하는 것은 누구보다 기업들에 혜택이 돌아간다”고 지적한다. 임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노동비용은 2001년 이후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동자의 생산성이 25% 증가했기 때문이다. 루치타는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대부분 시장지배력을 가진 몇 안 되는 회사들의 비이성적 이윤율 때문에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 주제는 정치경제학 교수이자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회원인 훌리오 감비나를 격분시켰다. “2003년부터 경제는 계속 몇 개의 거대 기업들에 집중됐다. 그중 대다수가 외국 기업인데, 그들이 이윤을 본국으로 송금한 것이다.”

수많은 지역 공동체가 국가 경작 면적의 반 이상(1800만ha)을 차지하는 유전자변형 콩의 경작 확대를 규탄하고 있다. 유전자변형 콩의 재배지가 확대됨에 따라, 농민과 원주민들이 도시의 빈민지역으로 쫓겨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안화물과 수은을 활용하는 지상 탄광들에 대한 반대 투쟁도 쟁점이 되고 있다. 빙하보호법이 의회에서 통과됐지만, 키르치네르 여사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람들은 캐나다 기업 ‘배릭 골드’의 개입을 의심한다. 이 기업은 탑상빙괴(塔狀氷塊)를 별로 괘념치 않은 채, 안데스산맥에서 대략 500t의 귀금속을 추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좌파의 수많은 투사들은 국가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더 강하게’ 후려칠 것으로 기대했다. K씨 부부는 ‘건실하고 생산성 있는’ 자본주의의 틀을 너무 뒤흔들지 않으려고 항상 신경을 썼다. 감비나는 “경영 상태가 좋지 않은 우체국과 아르헨티나항공은 다시 국유화됐지만, 1990년대에 민영화된 다른 거대 공공서비스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애석해한다. 그는 정부가 소비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운송과 에너지 분야의 민간 기업들에 제공하는 보조금을 상기시킨다. “자원이 착취되고 있다. 가스, 석유, 탄광이 미국이나 유럽의 거대 기업의 손에 넘어가 있다.” 그는 키르치네르 여사의 모델인 후안 도밍고 페론 장군의 국가개입주의를 그녀가 따라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강조한다. 페론 장군은 적어도 처음 임기 동안 산업은행·국가해운회사·아르헨티나항공을 창설했고, 중앙은행·철도·전화·전기·가스 등을 국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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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실 랭보 Cécile Raimbeau
저서로 <반항하는 아르헨티나, 대안세력들의 실험실>(Argentine rebelle, un laboratoire de contre-pouvoirs)(에디시옹 알테르나티브·파리·2006)이 있다.

번역 /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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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울 지베치, ‘세계화 또는 국가 부르주아 계층’, Alai.net, 2003년 10월 9일.
(2) 칼로스 가베타, ‘아르헨티나의 전면적 경제위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1월.
(3)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1946~55, 1973~74년 재임)의 이름에서 따옴. 그는 첫 번째 임기 동안 독재적인 국가주의를 구현한다. 페론의 국가주의는 국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4) ‘아르헨티나에서는 점령하고, 저항하고, 생산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9월.
(5) 마누엘 리에스코, ‘아르헨티나, 칠레의 혼란스런 퇴직연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2월.
(6) ‘키르치네르 부부 임기 중 아르헨티나의 성장과 인플레이션’,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들>(출간 예정) 82호, 2011~2012 겨울호, 파리, 2011년 10월.
(7) ‘아르헨티나 가톨릭대학의 사회부채연구소’에 따르면, 빈곤율이 주민의 30%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