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조지아

살 길은 오직 NATO 가입뿐

2021-09-30     피에르 돔 l 기자, 특파원

2021년 10월, 조지아는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1년 전부터 더 이상 의회에서 마주치지 않는 화해 불가능한 두 정치 진영의 승패가 투표로 가려지게 될 것이다. 두 진영은 러시아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서로 비난한다. 러시아가 정치 무대를 떠나지 않는 상황에서, 조지아는 러시아와 한층 더 상반된 관계가 존재하는 관계 속에 머무른다.

 

우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와 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거대한 박물관을 떠나자마자, 조지아 경찰 두 명이 보초를 선 오두막 앞에서 멈춰야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우리를 안내해 준 트빌리시 대학의 인류학자인 나티와 얄라바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제 가족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녀가 내민 신분증을 검토한 후, 담당 공무원은 우리를 통과시켰다. “러시아 군인들이 3킬로미터 떨어진 이 길 끝에 있습니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자 인류학자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부터는 러시아 군이 2008년부터 점령하고 있는 조지아 영토예요. 우리가 있는 이곳은 위험한 지역이고, 조지아 경찰은 국경 마을 거주자만 통과시켜 줍니다. 가족들 중 일부가 거기 살아서 제 성(姓)이 이 지역 사람들과 같아요.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국제적으로 남 오세티야로 알려졌지만 상당수의 조지아인들은  조지아 지역인 시다카르틀리 주의 일부로 여긴다. 조지아인들이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오세티야인들의 독립 정당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남 오세티야는 러시아 연방내 자치공화국인 북 오세티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 오세티야에도 오세티야 인들이 거주한다. 1989년, 구소련이 붕괴할 무렵, 조지아인들은 트빌리시에서 독립을 요구했고, 캅카스 소수 민족인 오세티야인들과 압하스인들 또한 독립을 요구했다. 이는 조지아 독립주의자들의 분노를 촉발했고, 남 오세티야 전쟁(1991~1992)과 압하스 전쟁(1992~1993)이 연달아 일어났다. 전쟁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대대적인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 그러나 내전(1991~1993)에 말려든 조지아의 새 정부는 러시아의 지원까지 받는 북쪽의 오세티야인들과 서쪽의 압하스인들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다. 두 분리주의 국가는 이런 혼돈 상태에서 생겨났다. UN의 인정을 받지 못한 이들은 오늘날 러시아의 경제 및 군사 원조로 살아간다.(1)

 

매일 되살아나는 러시아 점령의 고통들

2008년 8월, 조지아는 남 오세티야를 탈환하려 했다. 러시아는 10여 개의 연대 병력을 서둘러 파병했다. 5일 만에 조지아 군대는 패전했고, 러시아 군대는 트빌리시로 접근했다. 그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주축이 된 유럽연합(EU)의 주재 하에 휴전이 체결됐고, 조지아와 남 오세티야, 뒤이어 압하스 사이의 접경에서 러시아 군대의 통제를 승인했다. 비록 사상자는 많지 않았으나, 이 두 전쟁은 조지아인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들에게 이 두 지역의 상실은 ‘역사적으로 조지아에 속한 영토’에 대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러시아의 점령’이었다. 이 지역들은 아일랜드와 비슷한 면적에 거주민은 거의 4백만 명에 달했다. 오늘날에는 인구의 20%가 감소했다.

국토의 일부가 잘려나간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 그 어떤 합의도 불가능했다. 어제 고리에서 만난 극단 단장인 다비드 스카르티시빌리는 자유의 옹호자이자 반항적 기질이 있는 젊은이였다. 그는 오세티야인들과 압하스인들의 독립 요구가 정당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우리에게 거의 공격적으로 대답했다. “여기 휴대폰이 보이시죠? 저는 이 휴대폰을 빌려드릴 수 있고, 여러분들은 그걸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금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휴대폰은 제 것입니다. 제 소유란 말입니다! 시다카르틀리와 압하스는 조지아에 속한 지역입니다! 우리는 압하스인들과 오세티야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이겠지만, 결코 우리 것을 강탈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러시아 남부에 군사기지를 곧 설치할 가능성에 대해 러시아가 가질만한 불안에 대해서는 추호도 고려할 생각이 없다. 대부분의 조지아인들에게는 전략이랄 것도 없다. “200년 이래로 조지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시행한 러시아의 뿌리 깊은 제국주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트빌리시의 문학박물관 관장인 역사학자 라샤 바크라제는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의 점령’은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0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에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한 고령의 트빌리시 주민인 지오르지 쿠치시빌리는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에게 러시아 쪽의 입장을 말하자, 그녀는 저를 푸틴의 앞잡이로 취급하면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때부터 그녀 앞에서는 ‘러시아’라는 단어를 입 밖에도 내지 않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조지아 경찰로부터 멀어진 우리는 국경선 바로 앞의 코르디 마을로 들어갔다. 우리를 기다리던 인류학자 얄라바제의 사촌 집으로 가기 전에 우리는 마을 끝까지 가서 조지아인들이 ‘소위 국경(so-called border)’이라고 이름붙인 곳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비포장도로로 진입하자 안내하던 인류학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기서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러시아 군사들은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사과를 수확하러 실수로 국경선을 넘는 가난한 마을 주민들을 날마다 체포합니다. 운이 나쁜 이들은 여기서 10km 떨어진 남 오세티야 수도인 츠힌발리의 감옥으로 이송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구타를 당하고, 풀려나기 위해 몸값까지 지불해야 합니다.”

이러한 ‘몸값’, 혹은 오세티야 정부가 불법적인 국경 횡단에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벌금은 오랫동안 미화 30달러, 조지아 화폐로는 약 100라리까지 올랐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한 달에 200~300라리로 살아간다. “2018년 10월에 이 금액은 갑자기 200라리를 넘더니 800라리까지 올랐습니다.” 대학 연구 과제에서 개별적으로 조사를 진행한 얄라바제가 설명했다. 국제엠네스티에서 2019년 발행한 상세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에서 2018년 사이, 이러한 ‘체포’는 오세티야 국경에서는 매해 100~140건에 이르고, 압하스에서는 200~400건에 이른다고 한다.(2)

30m 앞의 들판 한가운데, 긴 녹색 철조망이 공간을 분할했다. 철조망은 지역 주민이나 조지아 정부와의 협의 없이 최근에 설치됐다. 국제 엠네스티는 보고서에서 2013년에 시행되어 아직 완료되지 않은 400km에 걸친 철조망의 설치가 미친 영향들을 제시했다. 마을은 둘로 갈라졌고, 농부들은 자기 밭에 접근할 수 없게 됐으며, 농산물 유통이 감소했다. “아시겠어요?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부모 무덤에 추모하러 갈 수도 없게 됐어요!” 바투미의 젊은 예술가인 이르마 테비제의 한탄이다. 그녀 자신도 더 이상 국경을 넘지 못한 채, 마을 사람들을 향해 ‘러시아인들’이 자행한 ‘잔학행위들’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팔로우할 뿐이다. 모든 조지아인들은 러시아가 날마다 몇십 미터씩 영토를 추가적으로 앗아가기 위해 철조망 설치를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트빌리시, 고리, 쿠타이시, 바투미에 사는 모든 이들이 러시아가 ‘은밀하게’ 땅을 계속해서 빼앗아간다고 고발한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1984년 구소련 지도의 도면을 충실히 따를 뿐이라고 반박한다. 조지아 대중매체에서 크게 보도하는 것처럼 국경 마을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이러한 고통은 ‘러시아 점령’의 아픔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 울타리들의 유일한 긍정적 효과는 국경선을 실수로 넘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체포’된 이들도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나티아씨의 사촌인 타타 얄라바제네 댁에 도착했다. 기울어진 나무 발코니가 딸린 집은 누추한 상태였지만, 정원의 채소밭은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채소들, 토마토, 오이, 가지, 양파, 감자, 파슬리, 고수, 딜, 세이보리, 꽃박하 등으로 무성했다. 벚나무 그늘 아래, 타타와 그녀의 어머니가 아침부터 준비한 식사가 식탁 위에 차려졌다. 타타의 어머니는 “저는 1952년 츠힌발리의 조지아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1993년에 저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 않으면 오세티야인들에게 죽을 테니까요. 우리는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고, 저는 우리 가족 소유의 오래된 시골집이 있는 이곳에 정착했어요”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츠힌발리에서 태어난 타타는 티블리시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어머니가 있는 코르디로 왔다. 이 작은 땅뙈기에서 두 여자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오세티야인들이 조지아인들을 미워하게 된 것은 러시아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았습니다.”

 

러시아 관광객을 환영하는 조지아의 이중 잣대 

식사가 시작되자 타타는 포도주가 담긴 플라스틱 물병을 집어 들었다. “제가 이걸 만들었어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집에서 담근 포도주라 화학물이 전혀 첨가되지 않아서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마을로 오기 전에 트빌리시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 물었다. “러시아 고객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여행사를 운영했습니다.” 우리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맞아요, 저는 러시아어를 사랑하고 러시아 문화를 사랑합니다. 러시아 여행객들은 매우 친절하고, 그들 또한 조지아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타타는 자기방식으로 조지아인들의 역설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그들은 영토의 1/5을 앗아간 러시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마다 수십만 명의 러시아 관광객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그들에게 정성스럽게 준비한 방을 내주고 무제한 포도주와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면서 조지아의 전설과도 같은 환대 원칙을 결코 저버린 적이 없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인 2019년, 조지아는 5백만 명의 관광객을 맞아들였고, 관광수입은 국내총생산(GDP)의 18%를 차지했다. 세계여행관광위원회(WTTC·The World Travel and Tourism Council)에 따르면, 관광산업의 여파를 고려했을 때 이는 국내총생산의 26%에 이른다. 2010년 이후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는 러시아 관광객이 2019년에만 150만 명으로 선두를 차지한다.

2008년 외교관계 단절에도 불구하고, 대 러시아 무역 또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터키, 아제르바이잔과 더불어 러시아는 조지아의 3대 주요 무역국이다. 구리, 망간, 토마토, 호두, 생수, 포도주, 독주 등의 수출품 15%가 러시아로 수출된다. 반대로 조지아는 탄화수소, 밀, 기계, 전자제품 등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한다. 

“러시아인들은 조지아에서 휴가 보내는 걸 항상 좋아했습니다.” 조지아 중부 수라미 출신의 프랑스어 교사인 니노 카라지슈빌리의 설명이다.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우리는 쾌활하고 축제를 좋아하고 맛있는 요리와 훌륭한 포도주를 생산하는 호감 가는 민족입니다.” 이런 장점을 살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트빌리시는 국경 규제를 최소화했다. 러시아인들은 조지아에 오기 위해 비자가 전혀 필요 없는 반면, 조지아인들은 러시아에 가기 위해서는 진절머리 나는 영사 절차를 따라야만 한다. 구소련 시대에 필수적이었던 러시아어는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통용된다. 

10여 년 이래로, 해변 대도시인 바투미는 휘황찬란한 카지노와 특급 호텔을 갖춘 흑해의 라스베가스로 변모했다. “우리는 항상 러시아인들과 함께 살아왔어요. 구소련 시대, 여기서 15km 떨어진 터키와 구소련 사이의 국경을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는 마을 남쪽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설치했습니다. 군사기지는 2006년이 되어서야 철수했죠. 이제 러시아인들 중 일부는 휴가를 보내러 여기로 옵니다.” 지역 방송사의 경제부 기자인 피루즈 볼크바제가 설명했다. 이 군인들의 존재가 나쁜 기억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묻자 그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군인들은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모두가 러시아어로 말했어요. 우리는 그들을 매우 가깝게 느꼈습니다. 그들을 점령군이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우리 아버지들과 함께 피를 흘린 전우로 여겼어요.”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이러한 역설적인 태도는 다른 수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조지아의 두 번째 큰 도시인 쿠타이시의 명문 고등학교 3학년인 치치 카차푸리제는 어떤 러시아 여성이 ‘점령된’ 압하스 수도인 수후미 해변에서 수영하는 틱톡 동영상을 봤을 때, “그녀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싶었어요! 나는 러시아인들이 싫고 러시아어도 싫어요! 러시아가 싫어요!”라고 격분해서 소리쳤다. 십여 분 후 이 여고생은 러시아인과 결혼해서 모스크바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로만 노래하는 조지아 인기가수인 케티 토푸리아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 가수는 그 무렵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러시아인들에게 우리도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다고, 아니 그들보다 더 뛰어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비록 어떤 조지아인도 러시아 관광객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이는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들은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향해 제국주의적 감정을 항상 품고 있기에 그들이 아주 고약할 수 있다”고 혹평했다. 바투미 영화제 감독인 즈비아드 엘리지아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들은 마치 작고 친절한 러시아 남부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조지아로 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러시아의 위대한 문화를 전파해야 하는 미개인들인 셈입니다. 그들은 조지아어를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곧장 러시아어로 말합니다. 조지아가 마치 그들의 점령지인 것처럼 행동하죠.”

지난 4월, 모스크바 출신의 유명 언론가인 블라디미르 포즈너가 트빌리시의 고급 호텔에서 87세 생일파티를 벌이기 위해 전용 제트기편으로 백여 명의 초대 손님들을 이끌고 왔을 때, 이런 불편한 심기는 극으로 치달았다. 코로나 위생 수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태였기 때문이다. 파티장면이 SNS를 통해 퍼져나갔고, 2시간 후 수천 명의 조지아인들이 분노에 차서 달걀, 토마토, 돌맹이 등을 던져대며 그를 비난했다. 더구나 그는 몇 년 전 조지아의 남 오세티야 반환청구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나토 가입은 사활을 건 문제”

2019년 6월, 비슷한 사건이 조지아 의회에서 이미 벌어졌다. 정교회 국가들의 국회의원 회의가 조지아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러시아 하원의원 세르게이 가브릴로프가 회의를 주재하는 회장으로 선출됐는데 그는 조지아 의회 의장석에 자리 잡았다. 조지아 의회 의장석에 앉은 러시아인의 모습은 식민지 시절의 고통을 되살아나게 했다. 야당은 집권당과 러시아 사이의 ‘공모’를 고발하기 위해 이 사건을 검토했고(아래 기사 참조), 정부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는 극도로 폭력적인 집회들이 이어졌다. 며칠 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조지아는 ‘안전한 국가’가 아니다”라고 러시아인들에게 설명하면서 모스크바와 트빌리시 사이의 직항노선 운행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민스크, 바르샤바 혹은 이스탄불을 경유하면서 푸틴의 조치를 피해갔기 때문에, 그 무렵 시작된 2019년 여름 관광시즌이 그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는 가브릴로프나 포즈너에게 달걀을 던지러 가지 않았고, 야당을 지지하지도 않지만, 반대 집회를 하는 시민들은 지지합니다. 이런 식의 식민지 취급은 참을 수 없습니다.” 남편과 함께 쿠타이시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는 31세의 바리나 고카제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타타와 그녀의 어머니가 준비한 식사가 끝났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언젠가 오세티야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오, 그럴 일은 결코 없습니다. 현재 오세티야인들은 우리를 매우 증오합니다. 게다가 러시아는 우리 땅을 결코 돌려주지 않을 겁니다.” 타타의 어머니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만약 조지아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게 된다면 더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푸틴이 우리 국토를 더 이상 침범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나토에 가입하는 건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기자, 특파원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처럼 사실상의 독립 국가인 이 둘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경우처럼 러시아 연방에 합병되지는 않았다.   
(2) ‘Georgia: behind barbed wire: Human rights toll of “borderization” in Georgia’, <Amnesty International>, 런던,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