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중국몽’의 모자란 퍼즐조각

2021-09-30     탕기 르프장 l 교수

차이잉원을 총통으로 선출한 대만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자국의 고유한 화폐를 갖추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만. 전 세계적으로 대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15개국에 불과하다. 중국 본토는 대만을 다시 수용하고자 하지만, ‘일국양제’라는 표어에 회의를 품는 대만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한편, 미 정부도 이런 불안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에 바쁘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5월 초 <이코노미스트>가 대서특필한 기사의 제목이다. 잠수함의 표적이 된 대만의 모습이 표지를 장식했다. 비슷한 제목의 글들로 도배된 이 특집기사는 사실상 오늘날 대만의 미래를 경고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1) 가령 미국의 유력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CFR)는 2021년 3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대만이 어느새 “미국과 중국, 그리고 여러 주요국이 관여하는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다”(2)라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 미 인도태평양 사령관 필립 데이비슨 해군대장도 역시 상원 청문회에서 “향후 6년 안에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3)라고 전망했다.

군 수뇌부가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한 것은, 정부재정을 타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중국은 이웃국, 특히 대만에 대해 점차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16년 1월 독립 성향이 강한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된 이후로 대만과의 모든 소통 채널을 닫아버렸다.(4) 4년 뒤 차이잉원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에는 갈등이 한층 더 고조됐다. 앙트완 봉다즈 전략연구재단(FRS) 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중국 군용기가 대만의 방공식별구역을 침입한 횟수는 무려 380회에 달했다.(5) 2021년 빈도는 더욱 늘어났다.

 

대만과 중국, 갈등의 역사

최근 대만과 중국 사이에 고조된 갈등은 모두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는 대만해협 양안 관계의 지정학적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두 번째는 미중 대결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이 깊다.

50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1945년, 당시 중국을 집권한 국민당은 대만의 영토를 수복한다. 하지만 4년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1912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에 세웠던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옮겨오는 신세로 전락한다. 공산당의 공격이 임박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다.(6) 미국이 아시아 내 공산주의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대만을 보호하고 나서면서 국민당은 운 좋게 위험을 모면한다. 그리고 20년 동안 대만해협의 정세는 그대로 동결된다.

장제스가 철권통치하는 중화민국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제연합(UN) 안에서 중국 대표의 자리를 차지한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UN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1971년 UN 결의안 제2758호가 통과됨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합법적인 대표권을 부여받고 ‘장제스 정권 대표들’(7)은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로써 대만과 외교를 단절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미국도 1979년 1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면서 대만과는 공식적인 관계를 끊어버린다. 

이후 미국의 대 대만 정책은 모두 4가지 주요 법률(대만관계법, 3대 ‘미중 공동성명’, ‘5대 보장’)에 따라 시행됐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만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대만의 주권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으며 ‘평화적 해법’을 강조했다. 사실상 위 법조문들은 명확히 명시하지는 않으나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는 중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1979년, 대만의 외교 동맹국은 24개국에 불과했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15개 수교국이 동맹국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힘의 우위를 여실히 인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무력으로 ‘대만 해방’전략을 펼치는 대신, 경제적·인적 교류 강화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을 선전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중국의 공산정권은 미국과 수교를 맺은 날, ‘대만 동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며, 전 분야에 걸친 교류와 개방을 제안했다. 무력 사용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남겨놓았다.

 

중국 최후의 ‘굴욕’, 대만

2년 뒤, 중국 정부는 더 나아가 평화적 통합의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대만에 ‘특별행정구로서 높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중국이 어떤 ‘지역 문제’에도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한 마디로, 대만인이 고유의 경제 시스템과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제안은 훗날 홍콩에 적용될 ‘일국양제’라는 표현의 출생증명서를 구성한다. 이후 중국의 입장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2019년 1월 2일, ‘대만 동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한지 40주년이 된 해를 맞이해, 시진핑 주석은 대만의 유일한 미래가 여전히 ‘일국양제’ 체제를 통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통합뿐이며, 대만은 오로지 지역정부로서의 지위만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다.

중국이 일국양제를 고집하는 것은 줄곧 혈연을 중시하는 본질주의적 국가관을 표방해온 탓이었다. 중국 대륙 출신인 대만인은 당연히 중국인으로 간주됐다. 이점에 대해서라면 대만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분명 중국의 역사와 조상은 대만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된 직후인 2012년 시진핑이 주창한 ‘중국몽’은 모든 중국인이 제1차 아편전쟁(1942) 종식 이후 감내해야 했던 ‘굴욕의 세기’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다시금 조국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고 선전했다. 마카오와 홍콩 반환 이후, 중국에 남은 마지막 잃어버린 영토, 최후의 ‘굴욕’은 바로 대만이었다.

중국공산당과의 이념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신성한 사명으로 삼는 본질주의적 민족주의에 널리 공감하며, 대만인들에게도 같은 사상을 주입했다. 중국 본토 출신자가 백만 명 이상, 다시 말해 섬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이후 대만이 민주화의 길을 걷는 동안, 어느새 중화민족주의는 새로운 사조와 거센 경쟁에 부딪힌다. 대만은 중국에 일부 문화적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실상 고유의 역사적, 정치적 도정을 지닌 별개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정체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조는 결국 대만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2000년 독립주의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는 결과를 낳았다.

선거에서 참패한 보수주의 성향의 국민당 지도부는 이제 대만의 독립주의 세력을 새로운 주적으로 간주하며, ‘위대한 중국’이라는 공통된 대의 아래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이에 국민당은 2008년 재집권에 성공한다. 국민당과 널리 뜻을 같이하는 언론과 재계가 지원 사격을 해주는 한편, 주권 문제에 대해 시민들에게 모호한 화법을 구사하고, 본토와의 긴밀한 관계가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전략이 성공의 열쇠였다. 

마잉주 총통 시절, 대만은 중국과 ‘양안 공동시장’의 초석을 마련할 협정을 무려 19건이나 체결했다. 양안 사이에 모든 종류의 교류가 증대됐고, 이미 높은 수준이던 대만 경제의 대중국 의존도가 독립주의 세력이 우려할 정도로 급격히 확대됐다. 대만 수출의 무려 40%가 중국을 향했다. 30년 전 중국 정부가 평화적 통일을 완수하고자 포석을 깔기 시작한 길은 어느새 고속도로로 변모했다.

하지만 2014년 말 ‘중국몽’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국민당 정부는 의회(입법원)에서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날치기 통과하려다 시민들의 분노에 직면했다. 출판, 언론, 문화 부문의 중국인의 투자를 허용하고, 대만의 일자리 시장을 중국 노동자에게 개방하는 내용이 담긴 이 협정은 시민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시민들은 3주 반에 걸쳐 의회와 인근 도로를 점거하고 ‘해바라기 운동’(9)을 펼쳤다. 몇 년 동안 쌓인 대만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이 사건은 대 중국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해바라기 운동은 민주주의 체제만을 경험하고 자라난 40세 이하 청년들의 시민 의식을 각성했다. 또한 양안 경제통합의 정치적 영향에 대해 불신이 깊은 운동가들과 정치인들 세대가 새롭게 등장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중국몽은 끝났다, 나는 대만인”

15년 전부터 실시해온 연구 조사에 따르면, 대만을 독립적인 주권국으로 인식하는 시민들은 꾸준히 늘고 있다. 2020년 대만 국립정치대학 선거연구소에 따르면, 자신이 ‘오직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은 전체 인구의 2/3에 달했다. 1992년만 해도 1/5에 불과했다. <커먼웰스> 매거진에 실린 한 연구 조사도 이런 수치를 재확인해주며, 대만 내부의 현실을 더욱 면밀히 보여줬다.(10) 

대만 시민의 90%가 ‘일국양제’에 반대하고, 본토(중국)에 대해 예전처럼 경제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중국 정부의 로드맵에 따라 양안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봤다. 게다가, 30세 이하 청년들은 ‘중국몽’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고 인식했다. 그들 중 80% 이상이 자신을 ‘대만인’으로 인식하며, 자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대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만 독립에 대해 우호적인 시민의 비율도 이와 비슷하다.

사실상 미국의 눈에 대만은 언제나 역내 ‘현실정치’의 셈법에 따라 상대적인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체스판의 말로 비쳤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이 가치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냉전 시기 공산주의 봉쇄정책의 벽돌 노릇을 했던 대만은 어느새 미국이 ‘포용정책’에 기초해 중국에 불어넣기를 바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범으로 변신했다. 30년 동안 이런 접근법은 대만 내에 각종 노동집약적 오염 산업을 줄줄이 심어 놓은 다국적 기업의 탐욕과 합쳐져, 미국 지도층이 낙관적 믿음을 지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결국 중국이 ‘자신들의 세계’에 통합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에서 지배적이던 낙관론은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러 그만 충돌론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물론 충돌론에서 대만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지리전략적인 차원에서, 대만은 여전히 중국 해군이 서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일본에서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섬 사슬의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대만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미 정부의 계획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기술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 동맹을 구축하기를 원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계획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사실상 디지털 글로벌 경제(스마트폰,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 등)의 핵심 부품인 최신 반도체는 대부분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에서 생산되고 있다.(11) 

분명, 미국은 이 같은 역량을 영원히 자신들의 진영에 남겨두기를 원할 것이다. 

 

 

글·탕기 르프장 Tanguy Lepesant
대만 타오위완 국립중앙대학 교수, 타이베이 프랑스현대중국연구소 객원연구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Gilles Prais, Frédéric Lemaître, ‘Taïwan, au coeur des tensions entre la Chine et les Etats-Unis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놓인 대만’, <르몽드>, 2021년 4월 15일. Brendan Scott, ‘Why Taiwan is the biggest risk for a US-China clash’, Bloomberg, <Washington Post>, 2021년 1월 27일.
(2) Robert D. Blackwill, Philip D. Zelikow, ‘The United States, China, and Taiwan - a strategy to prevent War’, Council on Foreign Relation 보고서, New York, 2021년 2월.
(3) ‘China could attack by 2027 : US admiral’, AFP, <Taipei Times>, 2021년 3월 11일.
(4) Tanguy Lepesant, ‘Taïwan en quête de souveraineté économique 대만 정권교체 이후의 쉽지 않은 과제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6년 5월.
(5) Nathalie Guibert, ‘Taïwan : des incursions aériennes chinoises sans précédent 대만 : 전례를 찾기 힘든 중국 항공기의 침입’, <Le Monde>, 2021년 1월 25일.
(6) Philippe Pons, ‘L'engrenage de la guerre 전쟁의 악순환’, in ‘Corées. Enfin la paix 한국. 마침내 평화’, <마니에르 드 부아르>, 제162호, 2018년 12월~2019년 1월.
(7) 결의안 제2758호.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권리 회복’, 제1976차 UN 본회의, New York, 1971년 10월 25일.
(8) Alain Roux, ‘Les guerres de l'opium revisitées 재해석된 아편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4년 10월호.
(9) Jérôme Lanche, ‘A Taïwan, les étudiants en lutte pour la démocratie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 중인 대만의 학생들’, Planète Asie, 2014년 3월 28일, blog.mondediplo.net.
(10) ‘Taïwan vs. République de Chine, le conflit de génération surpasse la division sud-nord 대만 대 중화인민공화국, 남북 분단을 초월한 세대 갈등’, <CommonWealth>, 제689호, Taipei, 2019년 12월 31일(중국어판)
(11) Evgeny Morozov, ‘Doit-on craindre une panne électronique? 전자기기의 작동 중단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8월호.

 

법조문 속 유엔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연합(UN)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까지 22년을 기다려야 했다. 1971년까지는 대만이 중국을 대표했다. ‘UN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합법적 권리의 회복’이란 제목의 UN 결의안 제2758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규정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헌장의 여러 원칙을 상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유엔 헌장의 보장 및 유엔 헌장의 준수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고려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하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임을 승인함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지는 여러 권리를 회복시킨다. 유엔에서 합법적인 중국의 대표는 오직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임을 인정하며 유엔 및 관련 조직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장제스 정권 대표를 즉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 1971년 10월 25일, 제1976차 UN 본회의

 

글·알리스 에레 Alice Hérait
번역·허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