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속에서도 마테차를 나눠 마시는 아르헨티나인들
코로나19는 우리의 생명과 함께 일상을 앗아갔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에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동료들과, 친구들과 마테차를 나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이런 일상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됐다. 그 ‘절제’가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16세기에 들어 부에 목마른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정복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세운 뒤, 물살이 세고 초록색을 띠는 파라나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탐험을 이어갔다. 그들은 금과 은을 찾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카 인디언족 중 하나인 과라니족을 만났다. 당시 과라니족은 처음 보는 음료를 즐겨 마셨는데, 어떤 잎을 건조시켜 가루로 만든 뒤 ‘마티(Mati)’라는 호리병 모양의 용기에 넣어서 우린 차였다. 이 ‘마티’에서 ‘마테차’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마테차의 재료인 잎을 ‘마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테차에는 항산화물질, 물을 정화하는 기능, 콜레스테롤 억제제, 이뇨제 등 각종 성분이 함유돼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정복자들은, 마테차의 높은 카페인 함량과 천연 강장제로서의 역할에 특히 주목했다. 이는 정복자들이 직접 마테차 재배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17세기에 토착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남미로 온 예수회 선교사들도, 당시 노예 상태나 다름없었던 과라니족이, 마테차를 마시면 한층 순종적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아사도, 축구, 그리고 마테차
마테 재배지는 파라나강의 주변 지역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확대됐다. 고단백 식사를 즐기던 팜파스 대초원의 가우초(목동)들은 마테차를 이뇨제처럼 복용했다. 마테차는 아르헨티나가 아직 온전한 국가로 인정받기 전부터 이미 아르헨티나의 국민 음료였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이 중앙 권력이 먼저 확립되고 주변부로 그 권력이 확산되면서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과는 달리, 아르헨티나는 여러 지방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룬 경우다. 미국이나 독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면적의 4배에 달하는 300만㎢의 광활한 영토에는, 16세기에 세워진 북부 지방과 파타고니아처럼 생긴 지 100년도 채 안 되는 행정 구역이, 브라질 국경 지대의 열대우림과 아한대에 속하는 남부 지방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세계적인 대도시와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오지들이 공존한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에는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요소가 많지 않다. 같은 언어(스페인어), 국교(천주교), 전통요리 아사도(Asado; 아르헨티나인들이 즐겨 먹는 쇠고기 숯불구이), 국민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로 대표되는 축구, 그리고 마테차다. 마테차는 집, 사무실, 가게, 거리 등 아르헨티나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의회에서도 야간회의 시 입법 담당자들이 마테차를 다량 섭취한다고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테차는 아르헨티나와 그 이웃국인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에서만 소비되던 음료였다. 서구권의 상점 몇 곳에서 판매되기는 했지만 크게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오랜 전통, 의학적 효능, 독특한 맛 등 매력적인 요소가 다분했음에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특이하게도 아르헨티나 이민자들이 마테차를 퍼뜨린 시리아에서만 큰 인기를 끌었다. 마틴 카파로스 기자는 “다들 같은 음료를 마시면서 문화적으로 획일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마테차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거스르는 드문 것들 중 하나로, 앞으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1) 공식 자료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1인당 마테차 소비량은 연간 약 6.4kg, 약 100리터에 달한다.
이처럼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몸속 깊이 뿌리 내린 마테차는 아르헨티나의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며 사회적 통합 기능을 수행한다. 마테차는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음료다. 크리올(남미에 정착한 백인들) 귀족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촌 팔레르모에서 매주 일요일 폴로 경기를 하며 은잔에 마테차를 담아 마시고, 빈민촌 사람들은 소박한 목재잔에 담아 마신다. 저녁식사를 거르고 잠을 청해야 할 때 포만감을 얻기 위해 마시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50여 년 전 후안 도밍고 페론 집권시절 남미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적고 평등한 사회라 평가받았던 나라다. 이런 아르헨티나에서, 사회계급을 초월해 사랑받는 아사도, 축구, 마테차 이 세 가지 국가적 상징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연스럽다. 1970년대 군부 독재 이래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이 강해지고 있지만, 마테차에는 전통과 유대감을 중시하는 아르헨티나의 모습이 여전히 녹아있다.
물은 함께, 봄비야는 따로
마테차는 ‘나눔’이고 사회적 연결 고리다. 혼자 마실 수도 있지만 대개는 여럿이, 함께 마신다. 마테차를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함께 마테차를 마시는 것이다. 세바도르(Cebador, 마테차를 준비하고 모임을 주최하는 사람)가 호리병 안에 마테 잎과 끓는 물을 넣은 뒤 옆 사람에게 넘기면 한 명씩 차례차례 마테차를 마신다. 이때, 안에 필터가 든 마테차 전용 빨대인 봄비야(Bombilla)를 공유하면서 믿음과 친밀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당연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사라졌다. 봄비야를 여럿이 함께 쓸 경우 침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초기부터 마테차 문화에 문제를 제기했던 전문가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아르헨티나 정부는 주요 권고사항에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성관계 자제와 함께 마테차 돌려 마시기 금지를 포함시켰다. ‘물은 함께, 봄비야는 따로’라는 표어를 통해 감염병 전파를 막고자 했다.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남미 주변국들보다 이른, 지난해 3월 19일에 봉쇄조치를 내렸다. 아직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지방까지 모두 포함시킨 전국적인 조치였다. 이런 봉쇄조치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초기에는 코로나19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칠레와 브라질 등 주변국가들이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병원에는 환자들이 넘쳐나고 시체를 묻을 곳도 없을 때, 아르헨티나는 보건 시스템의 허점을 보완하고 인공호흡기를 확보하고 집중치료실을 정비하며 앞날을 대비할 수 있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불과 3개월 전에 그것도 대선 직전에 허술하게 급조된 여당 단일화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른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코로나19의 확산세를 억제하는 것이 자신의 지지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예상치 못한 성공에 도취된 정부는 봉쇄조치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경계심을 늦췄다. 그리고 오래된 풍습이 부활했다. 이때부터 아르헨티나에서는 매우 흔한,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의 확진자 수와 치사율은 치솟았다. 올해 1월 기준으로 아르헨티나의 코로나19 상황은 유럽의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원칙을 적용하는 일은 모든 나라에서 힘들지만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더욱 힘들다. 애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마다 크게 다르다. 42개국 대상 조사 결과,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사람과 친해질 때 신체적 접촉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 문화에서는 친밀감이 매우 중요한 요소다. 탱고도 그렇다. 탱고는 두 사람이 다리를 교차하고 몸을 밀착시킨 상태로 추는 춤으로 19세기에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었다. 해외 음악이 아르헨티나에서 유독 큰 성공을 거두는 이유도 마음껏 친밀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결성된 미국 뉴욕 출신의 펑크 밴드 ‘라몬즈’도 미국에서는 클럽에서나 공연을 하는 밴드였지만 아르헨티나 콘서트 때는 스타디움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팬들이 몰렸다. 이런 해외 뮤지션의 콘서트는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격렬한 춤을 마음껏 출 수 있는 장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사 역시 신체적 접촉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커플로 꼽히는 에비타와 후안 페론,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사랑은 비록 비극적 결말로 끝나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사진 속에 영원히 박제돼 있다(에비타와 네스토르는 모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페론주의는 1945년 10월 17일, 수천 명의 지방 노동자들이 아르헨티나 정치의 중심부인 5월 광장으로 전진해 당시 독재 군부에 의해 체포돼 감금 중이던 페론 대령의 석방을 요구하던 날에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 승리를 이끌어낸 이 사건을 기리는 시위가 지금도 매년 이교도의 의식처럼 열린다.
사망자 4만 3,000여 명, 마테차 모임은 계속된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폭넓게 사랑받은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사람을 “스페인어로 말하면서 프랑스인처럼 생각하는 이탈리아인”이라고 정의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자손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고, 몸짓과 손짓을 크게 하고,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접촉을 많이 하는 것은 모두 이탈리아의 유산이다. 볼 뽀뽀와 가벼운 포옹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악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여럿이 둘러앉아 마테차를 나눠 마시는 의식은 이런 아르헨티나의 친밀감 중심 문화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봄비야를 통해 서로의 침을 나누는 것보다 상대에 대한 믿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정부의 보건 지침과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유익하지만 보건 측면에서는 위험한 이 마테차 모임(Mateada)은 봉쇄조치 속에서도 (거의) 계속 이어졌다. 봉쇄조치가 내려진 지 1~2개월이 지난 뒤부터는 공원에서도 마테차를 나눠 마시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든 감염 경로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아르헨티나 보건 당국은 이 국민 음료가 바이러스 전파의 주요 매개체 중 하나이며 첫 번째 봉쇄조치 이후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추정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첫 번째 유행기를 별 탈 없이 보낸 일부 도시에서도, 마테차 모임이 재개되면서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결국 지방 당국이 더 엄격한 봉쇄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테차 모임의 제재는 아르헨티나에서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일부 지방은 대놓고 이를 위반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고집이 세다. 정부 지침에 따라 몇 개월 동안은 불편한 방식으로 인사를 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볼 뽀뽀와 가벼운 포옹을 한다. 마테차의 경우에도, 마치 정부의 제재와 과학의 경고에 면역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은 사무실이나 광장에서 마테차를 거리낌 없이 나눠 마신다.
아르헨티나의 식민지 역사에서 마테차를 나눠 마시는 문화는 과라니족에 의해 시작됐다. 과라니족은 부족 중 한 명이 죽으면 마을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마테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죽은 자의 가족이 마테를 정성껏 재배해 수확하면 부족 전체가 마테차를 나눠 마셨다. 그렇게 하면 죽은 자의 영혼을 흡수해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는 세바도르가 건네는 뜨겁고 씁쓸한 마테차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마테차 문화가 죽음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4만 3,000명이 넘는데도, 마테차 나눠 마시기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호세 나탄손 José Natans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르헨티나판 편집장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Martín Caparrós, ‘Elogio del mate’, 뉴욕타임스(스페인어), 2017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