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오래전부터 온전한 국가를 꿈꿨다!
백향목, 공동체주의, 후견주의, 투기, 불평등의 나라
코로나 사태와 경제위기로 이미 힘든 레바논 국민들에게, 레바논 파운드의 화폐 가치 하락은 또 다른 고통을 안겼다. 게다가 지난 8월 두 번의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레바논 정치인들은 무력한 정부에 기대 특권유지에만 열을 올릴 뿐, 국가 개혁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세기부터 레바논은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형식적인 주권만 부여된 ‘완충지’라는 굴욕적인 지위가 레바논에 부여됐다. 1833년 레바논을 점령한 이브라힘 파샤의 아버지는 이집트의 부왕 무하마드 알리(또는 메헤메트 알리)로, 과거 오스만 제국 술탄의 신하였으나, 후에 정적으로 돌아선 인물이다. 그러나 영국 제국은 이집트의 레바논 점령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이집트 왕과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를 압박해 1840년 파샤의 군대가 레바논 영토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의 5대 강대국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무하마드 알리의 야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러시아 외교부가 ‘병자’라 칭한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둘러싸고 유럽 강대국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중, 사상 최초로 레바논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마론파와 드루즈파 간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여러 시대에 걸쳐 슈프 지역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던 마론파 공동체와 드루즈파 공동체를, 프랑스와 영국이 파괴하려 했기 때문이다. 레바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 경쟁이었다. 이 두 공동체가 있던 지역은 1590~1635년 레바논을 통치했던 파크르알딘 2세(Fakr-al-Din II)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이탈리아 토스카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오스만 제국 군대의 공격을여러 차례 막았지만 결국 붙잡혀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에서 참수됐다.
반감으로 뭉친 두 집단, 온전한 국가는 불가능
오스만 제국 군대의 지원을 받은 드루즈파와 기독교도들 간의 갈등은 나날이 심해져 1860년에는 베카 평원에까지 확산됐다. 당시 나폴레옹 3세 치하에 있던 프랑스는 개입을 결정하고 레바논 연안 지대로 군사를 파견했다. 당시 유럽의 5대 강대국과 오스만 제국은 작은 면적에 레바논을 건국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1920년 9월 1일, ‘소(小) 레바논’이 아닌 ‘대(大) 레바논’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처럼 면적 1만452㎢의 레바논의 운명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 경쟁에 끊임없이 휘둘렸다. 나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대표 주자로 떠오른 미국까지 가세해, 구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이 3개 종교를 자기 입맛대로 이용했다.
여기서, 프랑스가 레바논을 신탁 통치하던 시기(1920~1943년)에 고등판무관이 1936년 조약을 통해 종교적 공동체를 제도화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조약에는 제도적으로 지위가 인정된 종교적 공동체의 목록이 포함돼 있었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레바논 국민들을 위해서는 추후에 보통법이 적용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신설될 예정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법적 지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규정되지 않아, 레바논의 많은 남성과 여성은 결혼을 하기 위해 오늘날의 키프로스, 터키,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다.
레바논은 적대적인 외부 세력에 언제나 노출돼 있는 ‘완충 국가’였던 탓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레바논의 저명한 기자이자 1925년 일간지 <L'Orient>(현재는 <L'Orient-le jour>)의 창간자인 조르주 나카쉬(1904~1972)는 1949년에 쓴 논쟁적인 사설 한 편 때문에 감옥신세를 져야 했다. “‘서구화 반대’와 ‘아랍화 반대’. 이 두 가지의 반감을 토대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는 1943년 11월에 여러 공동체들 간의 구두 협약을 발전시킨 ‘1943년 국민 협약’을 맺으면서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통일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레바논 국민의 절반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레바논 국민의 또 다른 절반이 무엇을 거부하는지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무능하고 무력한 두 집단이 힘을 합쳤다고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감으로 뭉친 두 집단은 절대로 하나의 온전한 국가를 이룰 수 없다.”(1)
장기간 사회적 분열로 불평등 악화돼
후에 조르주 나카쉬는 푸아드 셰합 장군(1902~1973)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푸아드 셰합은 레바논군 총사령관을 거쳐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레바논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레바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으며, 루이 조제프 르브레(1897~1966)의 빛나는 조언을 바탕으로 수많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푸아드 셰합은 성 도미니크회 수도사이면서 경제학자인 동시에 국제연구교육개발기관(IRFED)의 설립자였던 루이 조제프 르브레에게,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레바논 전역의 생활수준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연구를 진행해 줄 것을 의뢰했다. 전수조사에 가까운 방대한 조사 결과, 부를 독식한 극소수의 계층과 도시 외곽 농촌 지역의 극빈곤층으로 양분되는 레바논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이 드러났다.
1962년 ‘전환기를 맞은 레바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컨퍼런스에서 루이 조제프 르브레는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국가가 분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2) 그의 경고대로 1975년부터, 레바논의 ‘기독교’ 정당들, 그중에서도 피에르 제마엘이 창당한 팔랑헤당과, 드루즈파 공동체의 수장인 카말 줌블라트(1917-1977)가 이끄는 비공동체적 정당 연합 ‘레바논 민족 운동’ 간의 충돌이 잦아졌다. 이슬람교도들은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은밀한 지원을 받으면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평등성 제고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푸아드 셰합은 국가에서 돈을 뜯을 생각만 하는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을 종종 비판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이에 투기꾼 중산층 기독교도들은 격분했고, 범아랍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푸아드 셰합을 ‘악마의 화신’이라 비난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개혁과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대통령에 맞서, 보수적인 기독교도들은 “레바논의 강함은 약함에서 나온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들은 중산층 이슬람교도들이 독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고 있으며, 보수적인 중산층 기독교도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레바논 내 이슬람교도들의 수는 레바논이 다양한 위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상당수가 1970년 9월에 요르단으로부터 유입되면서 크게 증가했다.(3)
공정한 시각을 위해, 푸아드 셰합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 명의 인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미셸 치하(1891~1954)로, 은행가이자 경제자유화의 주창자였다. 그는 다양한 공동체의 공존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스라엘의 대 레바논 정책과 대 팔레스타인 정책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일찌감치 경고했다. 팔레스타인에 관해 쓴 미셸 치하의 논문집은 통찰력과 혜안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4) 공동체 중심의 배타주의를 기초로 세워진 이스라엘과 다원주의의 원만한 관리가 중요시되는 레바논 사이에는 태생적으로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셸 치하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5)
국가다운 국가를 세우는데 실패
그러나 일부 비주류 마론파 사이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도 국가를 세우는데 우리 기독교도들은 왜 못 세우는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 모두 소수인데 다수인 이슬람교도들에 맞서기 위해 왜 서로 힘을 합치지 않는가?’와 같은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 문학계로 번져, 레바논의 정세 불안을 반기고 레바논을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교 국가로 아예 쪼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1978년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으며, 1982년에는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까지 진격해 팔랑헤 민병대와 함께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캠프를 급습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했다. 팔랑헤당의 대표 피에르 제마엘의 아들인 바시르 제마엘은 이스라엘 탱크가 에워싼 레바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며칠 후 의문의 폭발 사고로 암살됐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형제 아민 제마엘도 시아파 세력에 의해 베이루트 남부 외곽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다국적군은 팔레스타인 병사들의 탈출을 도왔고, 이 때문에 수차례 테러 공격을 당했다.
1990년에 공동체들 간의 분쟁은 끝이 났지만, 레바논은 여전히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가다운 국가를 세우는데 실패했다. 1992년 총리가 된 라피크 하리리는 자신이 보유한 풍부한 자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고금리 경제체제를 도입했다. 라피크 하리리는 본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비호를 받던 유명 기업인으로, 2005년 테러로 사망하기 몇 개월 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는 수많은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레바논의 산업 및 농업 생산 능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달러와 가치를 연동하는 고정환율제와 비정상적으로 높은 국채 금리를 도입해 국가 부채를 빠르게 상승시켰다. 이는 레바논의 부유층들에게는 자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낮은 금리로 달러를 빌려 레바논 파운드로 국채에 투자할 경우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베이루트의 가장 아름다운 구역에 거주하던 시민들은 부동산개발업체인 솔리데어(Solidere)에 거주지를 빼앗겼다. 솔리데어는 오랜 역사를 지닌 상징적인 도시 베이루트를 유리와 철강 건물이 즐비한 걸프만 도시의 싸구려 복사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랜 내전으로 폐허 상태였던 베이루트는 이후 15년 동안 건축학적 학살도 견뎌야 했다. 역사 깊은 순교자 광장의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깨뜨리는, 거대하게 지어진 터키 스타일의 모스크가 그 예다.
‘하리리식’ 경영 실패로 경제난 초래
‘하리리식’ 경제 경영 방식은 곧바로 레바논의 경제 약화로 이어졌다. 수치상으로는 평균 경제성장률이 6~7%에 달했지만 실제 레바논의 경제 상황은 전후 재건 시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침체돼 있었다. 게다가 정부는 공정한 세금집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전 기간 동안 축적된 부에 특별세를 매겨야 할 상황인데도 소득세율을 10% 이하로 파격적으로 낮춰 버렸다. 부동산 업계도 처음에는 호황이었으나 부동산 대신 높은 금리를 내세운 은행 예금과 국채에 투자하는 국민들이 증가하면서 곧 자금난에 시달리게 됐다.
‘하리리 시대’는 레바논의 수많은 고학력 젊은이들이 고국을 떠난 시기이기도 하다. 독자적으로 떠난 이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대학생 장학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유럽이나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라피크 하리리와 그의 아들 사드 하리리(1차 임기 2009~2011, 2차 임기 2016~2020.1월 총리직 역임)가 일부 레바논 국민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현재 레바논의 경제는 붕괴 위험에 처했다. 은행 예금의 ‘사실상’ 동결 조치는 헌법에 완전히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인권을 침해하는 세계 유일의 ‘은행 전횡(Bancocratie)’ 체제가 레바논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은행 업계와 레바논 중앙은행이 단 한 사람, 리아드 살라메에 의해 독점적으로 형편없이 관리돼 온 결과다. 리아드 살라메는 메릴린치 투자은행에서 라피크 하리리의 자산을 관리하던 인물로, 1993년 8월 1일 레바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오늘날 레바논 파운드의 평가 절하와 환율 급등으로 인해 레바논 중산층 대부분의 삶이 무너졌고 빈곤율은 50% 이상까지 치솟았다. 레바논 국민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대대적인 개혁이 시급한 레바논
그러나 국가 경영을 책임져야 할 정치인들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만 유리한 정책을 내놓기에 바쁘다. 고통에 신음하는 레바논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마치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레바논의 경제를 쇄신하고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IMF 개혁안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공공 기업의 민영화와 국유지 매각 계획도 예정돼 있다. 최근에는 이런 악재에 더해, 8월 4일 두 차례의 대형 폭발 사고가 일어나 베이루트 동부 지역이 초토화되는 사건까지 있었다. 오늘날 ‘백향목의 나라’ 레바논은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재앙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중이다.
따라서 레바논에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하게는 선심성 보조금의 남발로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예산 지출을 합리화하고, 국가 소유의 부동산과 지역사회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 아울러 소득원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매기는 대신, 소득을 위한 특별 카테고리를 만들어 통일된 세율을 적용하고, 부유세를 도입하며, 은퇴자들의 구매력을 보존해야 한다. 또한 생산 분야를 지원하고,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며, 사회 보조금을 확충해 극빈층을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각종 보상 관련 독립 기금들을 해체해야 한다. 1975~1990년, 내전 기간의 난민들을 위한 기금과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레바논 남부에 자리 잡은 난민들을 위한 기금이 그 예다.
글·조르주 코름 George Corm
대학교수, 레바논의 전 재무부 장관. 저서로 『Le Liban contemporain. Histoire et société 현대 레바논. 역사와 사회』, 『La Découverte, Paris』(2012)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L’Orient>, Beyrouth, 1949년 3월 10일.
(2) Jean-Marc Fevret, 『1948-1972: le Liban au tournant. L’anémone pourprée 1948-1972: 전환기를 맞은 레바논, 자줏빛 아네모네』, Geuthner, Paris, 2011 / Stéphane Malsagne, Louis-Joseph Lebret,『 Chronique de la construction d'un État. Journal au Liban et au Moyen-Orient(1959-1964) 정부 수립 연대기, 레바논과 중동에서 쓴 일기(1959-1964)』’, Geuthner, Paris, 2014년 10월 1일.
(3) Alain Gresh, ‘Mémoire d’un septembre noir(한국어판 제목: 산산조각 난 팔레스타인의 혁명적 유토피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9월호·한국어판 2020년 12월호.
(4) Michel Chiha, 『Palestine 팔레스타인』, Éditions du Trident, Beyrouth, 1947.
(5) Yaacov Sharett, ‘L’État juif et l’intégrité du Liban 유대인 정부와 레바논의 통합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