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경비원의 노동경제학

2011-10-10     은수미

2011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4320원이다. 하루 8시간 일하면 3만4560원, 주 40시간씩 한 달을 일하면 90만2880원을 받는다. 2012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4580원이다. 260원(6%)을 올리기 위해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자위원이 퇴장하는 파행을 겪었고, 9월 정기국회에서 처음으로 국정감사도 받았다. 감사에 따르면,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중 8명이 서울대 출신이고 그중 3명은 가정관리학과다. 가정관리가 최저임금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하다 최근 신문기사를 보니 그 관계가 꽤 분명하게 잡혔다.

그들은 왜 최저임금을 ‘거부’했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국아파트입주자 대표 연합회가 최저임금법 개정을 위한 입법청원 서명을 해 서울 서초구에서만 4천여 가구 주민이 서명에 동참했다. 지금까지 아파트 경비원 등 감시단속직 노동자는 최저임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닌 예외적 노동자였다. 하지만 내년부터 최저임금 적용 대상에 포함돼 가구당 아파트 관리비가 평균 7천 원 정도 상승한다. 가정관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입주자연합회는 아파트 경비원의 임금을 계속 최저임금의 80%만 줄 수 있게 최저임금법을 개정해달라는 것이다. 안 되면? 경비원을 자르고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하겠단다.

효율성 증진을 위한 사람 자르기는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관리를 위해서도 항상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니 최저임금위원회에 서울대 가정관리학과 출신의 전문가가 참석해야 한다. 가정관리에서도 채용과 고용, 임금 등에 대한 효율성 계산과 확고한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경비원도 서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최저임금 적용에 따라 월 30만 원 정도 임금이 오르겠지만 그 때문에 해고당할 수 있으니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냥 서명할래, 해고당할래”를 묻는 조폭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에 따르면,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에 노력해야 하고,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 국가의 의무에서 적정임금 보장이 우선 항목이고 최소한이 최저임금 보장이다. 그런데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0만 명에 육박하고, 저임금 노동자가 400만 명이 넘으며, 최저임금제를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적용하지 말아달라고 서명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면 헌법이 유명무실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다. 혹자는 최저생계비를 따지고, 혹자는 노동력 재생산비를 거론한다. 그러나 임금은 경제적 계산이 아니라 사회적 협의로 결정된다. 노사의 임금 교섭이나 사회적 교섭이 매우 중요하다. 외국에서는 사용주 혹은 국가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대표와 협상해서 임금을 결정한다. 기업, 지역, 업종, 전국 수준에서 해당 직무의 임금 기준을 정한다. 그래서 최저임금은 정말 최소한의 규정일 뿐, 지역이나 업종별로 최저임금이 따로 있다. 그것이 법정 최저임금을 웃도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또한 협상을 할 때 노동의 시장가격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단순노동으로 폄하되는 쓰레기 치우기, 시설 경비 등의 업무가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 없으면 상당히 불편하다. 연구자나 전문가가 없는 것과 비교하기 어려운 이유는 해당 노동의 사회적 가치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인정할 경우 전문가와 단순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줄어들고 형평성이 높아진다. 선진국의 운전사가 훨씬 쉽게 운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의 운전사에 비해 임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 가치를 인정해준 사회에 대해 노동자는 시민으로서 품위를 지킨다. 친절함도 그런 품위 중 하나다. 외국의 운전사가 더 친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임금, 노동조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및 그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인식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국민성을 거론하는 것은 상식 이하이겠다.

임금을 통제하는 가정관리학

굳이 임금 교섭이 아닐지라도 노동과 관련된 다양한 협의가 있게 마련이다. 어떨 때 기계를 쓰고 어떨 때 노동을 사용할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광범위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만약 기계로 바꿔야 할 경우 해당자의 전직 지원이나 해고 이후 생활보장 문제가 주요 관심사다. 왜냐하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국가와 사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대신 해당 노동자의 시민권을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것이 종종 필수 요건이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예의이자 사회적 기준선이다.

시장이나 기업은 경쟁이나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라고 하는 ‘상품 사회’다. 하지만 시장이나 기업을 포함하고 있는 ‘사람 사회’는 경쟁이나 효율성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의나 연대가 거론된다. 지구인의 몸속에 기생하던 에일리언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지구인을 지배하면 지구가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사회 속에 있는 시장이나 기업이 튀어나와 사회를 지배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헌법이나 노동법이 있고, 사회권이나 시민권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사관계나 사회적 가치, 노동권이나 시민권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간혹 소비자의 권리를 말하는데 그때도 노동자의 권리는 감춰진다. 예를 들어 소비자에게 1만 원짜리 피자를 주문에서부터 배달까지 20분 이내에 처리해온 업체가 경쟁 혹은 소비자의 권리를 들어 가격을 8천원으로 낮추고 10분 만에 배달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러면 노동자는 임금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제시간에 배달하기 위해 위험한 속도로 내달려야 한다. 임금을 낮추는 것에 저항하면 해고이고, 그렇지 않아도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에 내몰린다. 경쟁이나 소비자의 권리가 노동권과 부딪히는 것이다. 이때 ‘어떻게 이 충돌을 조정할 것인가’는 한국 사회의 관심사가 아니다.

1944년 전세계의 정부·기업·노동자 대표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모여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그것은 모든 국가 노동법의 근간이 되었고, 복지국가의 전세계적 출발의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헌법과 노동법도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대개 라면이나 생수와 똑같은 상품이다. 사람 사회가 아니라 상품 사회다. 노조와 사회적 협의가 없고, 오직 시장과 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임금은 시장변동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껌은 휴지통에, 노동자는 어디에?

아파트 경비 업무처럼,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고 쓰는 사람이 적을 경우 임금은 더욱 낮아진다. 경쟁을 위해, 수수료 때문에, 금융이나 부동산 투기를 위해 임금은 한없이 떨어지고 심지어 가정관리를 위해서도 낮아진다. 기계로 바꿔 사람을 해고할 때 반드시 필요한 해당자 보호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씹고 난 껌도 휴지통에 버리라는데, 버려진 노동이 어디에 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이패스를 사용하면 나무를 보호한다는 플래카드는 있지만 하이패스를 사용하기 위해 버린 노동, 그 노동자를 어찌했다는 플래카드를 본 적은 없다. 특정 지역을 개발해 멋진 아파트를 지었다는 광고는 자주 볼 수 있지만 그곳에 거주한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한 아파트라는 이야기는 자주 듣지만 그 때문에 버려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나 임금 삭감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것에 저항하면 시대착오적이거나 ‘절망버스’ 선호 집단이 된다. 이런 주장은 꽤 오랜 역사를 갖는다. 수백 년 전 영국에서 24시간 혹은 16시간 노동을 12시간 혹은 10시간으로 줄이자고 했을 때, 런던의 벽지공장 지배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의 노동시간을 허가하는 법률은 우리(!)에게 매우 적합하지만,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정한 공장법의 노동시간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왜? “시간의 손실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이 이윤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손에 넣은 화폐(당시에는 금)는 1503년 콜럼버스의 편지에 따르면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할 수 있다”. 가히 신대륙의 발견이다.

심지어 그것은 경제적 필연 법칙이며, 규제는 명백한 잘못이다. 1776년 영국 국교의 목사 타운젠드는 “기아는 근면과 노동에 대한 평화적이고 조용하며 끊임없는 압력일 뿐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동기를 주어 최대의 노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면서 필연 법칙을 설파했다. 아마 기아를 해고나 임금 삭감으로 바꾸어도 문맥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해고와 임금 삭감은 근면과 순종적 노동을 위한 필연 법칙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당시 전문가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고 주장했다. 부유한 나라를 만들고 싶으면 해고와 임금 삭감을 통해 가난한 노동 대중을 양산하는 것이 보편 법칙인 셈이다.

복지국가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쉽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인류는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람 사회가 아닌 상품 사회의 끝까지 가서야 전세계의 기업가나 정부, 그리고 전문가는 사람 사회로의 선회, 즉 복지국가에 동의했다. 재산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공정노동과 △사회보장이 복지국가의 핵심이라고 선언하고, △노동3권 △적정임금과 적정노동시간 △행복추구권 △국가의 의무 등을 핵심 요소로 간주했다.

절약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복지국가가 왜 사회적 쟁점인지 성찰해볼 때가 되었다. 시간당 최저임금을 260원 올리는 데도 숱한 시간과 논쟁이 필요한데, 법만 적용해도 가구당 월평균 7천 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니 서명운동을 할 수도 있겠다. 가정관리를 하는 처지에서 매달 7천 원을 더 내야 하는 것은 적잖은 부담일 수 있다. 학비, 세금, 대출 부담금, 물가 인상에 따른 각종 비용 등 써야 하는 돈의 목록이 길다. 그러니 7천 원을 아껴야 한다. 하지만 아껴야 할 것은 돈이나 상품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다. 기업이나 시장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나의 현재가 아니라 우리 미래의 문제다. 한 번쯤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추신: 1848년 10월 31일 영국 공장 감독관(한국의 근로감독관)이 이런 보고서를 썼다. “그들은 차라리 더 적은 임금을 받고 10시간 일하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거나 저임금을 받는 대다수의 한국 노동자도 이럴 것이다. 하지만 그 혹은 그녀 역시 시민이며 이웃이다. 취약한 노동자의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최소한 시민의 덕목은 아니라는 것이 다수의 생각이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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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수미 
노동운동을 하다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노사관계·노동정치·사회운동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