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랑하거나 이해하거나

2011-10-10     안드레이 쿠르코프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우크라이나 현대작가로 러시아어로 글을 쓴다. 그의 소설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펭귄처럼, 황당무계한 내용이 난무하지만 늘 정치적 주제 를 다룬다. 현실이 기이해질수록 그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환상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고골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에서 성장했고, 소련 해체를 경험했고, 19년 전부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지켜볼 수 있으니 말이다. 19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이 나라가 움직이는 원리를 깨달았다. 바로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서 푸코의 추처럼 흔들리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아내와 나는 키예프시의 유서 깊은 구역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방탄문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범죄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는 이는 아마 경찰뿐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갱스터들이 경찰에 돈을 건네곤 했다. 경찰 계획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들고 있다가 재수 없게 체포된 동료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시기는 6~7년간 계속됐다. 그러다가 직접 중소기업가의 뒤를 봐주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약삭빠른 경찰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언감생심 마피아, 그저 밀수꾼

같은 시기,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의 특수정보조직은 마피아와의 전쟁, 군인들의 부패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의 모든 마피아 조직은 2년 만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우크라이나의 묘지에는 비석 수천 개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손에는 메르세데스 자동차 열쇠를 쥔 이들이 그곳에 잠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밤에도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됐다. 방탄문을 팔던 상점은 파리를 날리기 시작했다. 끈질기게도 살아남은 범죄조직원들은 사업이나 정치로 전업을 했다. 많은 이들이 밀수에 손을 댔고,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에는 화려한 컬러와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한 수입품이 난립했다. 그리스산 모피, 터키산 가죽 재킷, 이스라엘산 리큐어, 벨기에 술 ‘니콜라 II’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아무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40~50달러에 불과했고, 공무원 연금도 기껏해야 빵 몇 조각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권력은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이 쥐고 있었다. ‘붉은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소박하고 순발력을 갖춘데다 국민에게 친근했던 그는, 이따금 낡은 기타를 들고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였다. 듣자하니 노래를 부르기도 했단다. 자애로운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대통령 곁에는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칭 음악 애호가들이었다. 이들이 대통령을 위한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업을 민영화했고, 우크라이나가 하루빨리 자유경제를 도입하려면 어떤 법안을 채택해야 할지 대통령에게 귀띔했다. 그러는 동안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무법시장으로 변모했다. 우크라이나 국민 2명 중 1명은 장사를 했다. 무엇이든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정원의 감자, 밀수 담배, 심지어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제품까지 내다팔았다. 의회 위기 사태 이후 노동자들이 급여를 직접 현물로 수령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못 받는 것보다 나았다. 차로 키예프에서 니콜라예프까지 가려면 페르보마이스크라는 작은 도시를 지난다. 과거 냄비·프라이팬 공장이 있던 곳이다. 공장 노동자들은 봉급 대신 받은 철제품을 들고 나와 도로변에서 하루 24시간 장을 열었다. 흑해 방면으로 가면서 페르보마이스크 부근을 처음으로 지나던 어느 날 밤, 나는 지평선을 태우는 듯한 광채를 보고 놀랐다. 처음에는 비닐하우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대낮처럼 조명을 환히 밝힌, 냄비들이 즐비한 시장의 모습임을 알아챘다. 불빛 아래 냄비들은 현장에서 분해한 우주선의 부속품처럼 반짝거렸다. 이곳 시장은 급여를 진짜 돈으로 받는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인 레오니트 쿠치마는 자신의 첫 번째 임기 때는 대통령 역할을 배웠으니, 두 번째 임기 때는 우크라이나를 현대적 유럽 국가로 개혁하고 싶다고 했다. 사소한 ‘뼛조각’만 발견되지 않았어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2001년 9월, 당시 무명 기자였던 게오르기 곤가제가 행방불명된다. 얼마 뒤 그의 주검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된다. 그러고 나서 쿠치마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밀착경호대 장교인 멜니첸코가 작성한 비밀 메모가 유출된다. 그 내용은 대통령 혹은 그의 측근이 게오르기 곤가제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는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고, 우크라이나 정계에 지금까지도 여파가 있다. 범인으로 지목된 군 중장 올레스키 푸카치의 재판이 조만간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인을 사주한 자는 2001년 쿠치마 대통령 행정부의 수반을 지냈고, 현 국회의장인 블라디미르 리트빈이라는 설이 있다.

빛바랜 오렌지 혁명

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도 쿠치마의 추종자 중 하나였다. 곤가제 피살 스캔들이 불거진 마당에 자신이 세 번째 임기를 맡는다면 국민 정서에 맞지 않으리라 판단한 쿠치마는, 2004년 야누코비치를 ‘후계자’로 택했다.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3선을 금지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허용한 터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대통령의 뜻을 헌법재판소가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지금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그렇지만 2004년 여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치르게 한 시민운동인 ‘오렌지 혁명’에 힘입어 야당의 빅토르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는 권좌에 앉아 나라의 경제 상황에는 무관심한 채, 그저 동네 교구 신부처럼 듣기 좋은 말을 설파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우크라이나는 바로 유셴코 자신임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때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의 시기는 아니겠지만, 가장 형편없는 정부를 둔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이 권력을 잡게 된다.

야누코비치는 종종 미국의 조지 W. 부시에 비견된다. 둘은 교육수준이 비슷하고, 단어로 실수하는 것도 같다. 야누코비치는 대통령 취임 전에도 유명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선거 출마용 제출 서류에 ‘현직 교수’라고 밝혔는데, 문제는 이토록 고결한 단어의 철자를 몰랐다는 것이다. (신이시여, 야누코비치 교수를 어쩌면 좋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신앙심도 독실하다. 이 역시 부시와의 공통점이다. 또 다른 비슷한 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야누코비치는 전임자가 악화시킨 푸틴 총리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서둘러 회복한다. 그는 임기 첫 두 달 동안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함대 주둔 기간을 25년 연장해줬고, 서유럽으로 수송되는 러시아 가스가 안정적·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통과할 수 있게 보장해줬다. 또한 지금은 조지아(그루지야)에서 독립한 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누코비치는 이런 우호적 몸짓 덕분에 가스를 저렴하게 공급받을 것이라고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특히 러시아를 달가워하지 않는 서부 주민들에게 해명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가스 가격을 인하하지 않았다.

야누코비치는 더 이상 ‘우호적 몸짓’ 운운하지 않았고, 대신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석유 공급원을 러시아에서 베네수엘라로 대체하기 위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협정을 체결했고,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벨라루스까지 수송되도록 했다. 이리하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우방관계도 유지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막대한 금액도 대출받고(덕분에 국가 지급불능 상태를 면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간의 분쟁을 틈타 이익을 챙기는 등(오세티야 공화국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은 아직도 지키지 않고 있다) ‘다중매개’ 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러시아’라는 애증의 대상

러시아 공영 텔레비전의 한 인기 프로그램은 야누코비치를 잔인하게 패러디했다. 비록 자신들의 대통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국민이지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석가들은 크렘린의 지시가 있을 때만 러시아 방송국이 희화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키예프 방문 일정을 돌연 중단한 직후이던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보낸 일종의 신호로 볼 수 있었다. 당시 푸틴은 오찬을 취소하고 격렬히 불만을 표시하며 예정보다 일찍 키예프를 떠났다.

푸틴의 방문은 우크라이나 집권당의 우세가 점쳐지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이루어졌다. 음모와 술수로 점철된 선거에서 집권당은 각종 도발과 법적 수작을 통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서부 지역 3곳에서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승리했다. 율리야 티모셴코(1)의 동맹자들을 저지하는 데 급급했던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어처구니없게 민족주의자들을 도운 셈이 됐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지역당이 다른 정파 의원들과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

그러나 정치인들의 경우는 몰라도 우크라이나 국민은 오렌지 혁명 덕분에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다시는 공포에 떨거나 매수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결국 대다수 국민의 반대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삼겠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오히려 공용어 기념일을 맞이해 오후 4시 전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특별히 준비한 받아쓰기 대회를 개최해, 국민에게 실력을 가늠하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물론 받아쓰기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했다. 이 임무는 교육부 장관 드미트리 타바치니크가 맡았고,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그는 받아쓰기에서 단 1개를 실수했다.

러시아어에 대한 찬반 전쟁은 벌써 19년째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민족주의 정당이 득세한 우크라이나 서부에도 유럽인보다 러시아인 관광객이 훨씬 많다. 도시 정비 상태도 낫고, 주민들의 표정도 더 밝다. 이 지역은 소련 치하에서 보낸 기간이 45년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설명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와 인접해 있음에도 ‘모스크바가 수도인 소비에트 주민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이곳 기업인들은 자녀를 영국이나 미국에 유학을 보내곤 한다. 얼마 전 도네츠크주 출신인 한 사업가는 자기 아이들이 우크라이나어를 배웠다며 내게 자랑스레 말했다. 러시아어로 완벽히 의사소통이 가능한 도시에 사는 자신은 정작 우크라이나어를 배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러시아의 미래와 다르다는 걸 그가 감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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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 쿠르코프 Andrey Kourkov 작가

번역 / 최서연 qqndebie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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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렌지 혁명’ 뒤 총리를 지냈고,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