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엘리베이터’는 항상 고장난 상태

엘리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현실

2021-10-29     폴 파스칼리 l 사회학자

능력주의에 대한 토론은 엘리트층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울타리에만 자주 초점이 맞춰지곤 한다. 이러한 면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토론은 인구의 1/3에 달하는 낮은 학위 소지자들에 대한 맹점을 가지고 있다. 임금의 알력 관계가 노동자에게 유리했던 1960년대와 달리, 현재는 학위 없이 평온한 미래를 설계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이 사회적 분노의 원인 중 하나는 아닐까?

 

관용적 표현은 세월과 함께 변화한다. 1995년 알랭 마들랭 자유당 대표가 대선 운동을 위해 만든 ‘고장난 사회적 엘리베이터’라는 표현은 수십 년의 세월을 문제없이 뛰어넘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국립행정학교(ENA) 폐지를 발표하기 위해 낭트로 이동하던 중에 “오늘날 사회적 엘리베이터는 50년 전보다 기능이 떨어진다.”라고 밝혔다.(1)

‘고장난 사회적 엘리베이터’는 원래 엘리트층이나 그랑제콜의 사회적 폐쇄성을 지적한 표현이 아니다. 마들랭은 좌파의 평등주의 및 관료제 문제에서 비롯된 걸림돌들을 이 단어를 사용해 비판했다. 아버지는 공장노동자, 어머니는 타이피스트였던 서민 가정출신으로, 자유민주당 대표이자 1960년대 극우 소그룹의 전직 일원이었던 그는 ‘자수성가를 이룬 사람들의 프랑스’를 꿈꿨고, 미국이 택한 성장 모델을 따르며 산업의 선봉장을 추구했다. 그는 ‘고착된 사회’라는 주제를 재점화했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학자 미셸 크로지에보다 25년 앞선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라는 비유는 ‘사회적 격차’라는 혼성어보다 인기 없는 단어였다. 인구통계학자 아마뉘엘 토드가 표현한 ‘사회적 격차’는 1994년 자크 시라크 후보의 대선 운동에 등장했다. 1997년~2002년 좌파 연합 시절에 이르러, 점점 더 좁아지는 그랑제콜 입학문과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회적 엘리베이터’가 흔히 쓰이게 됐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사회 계층’이나 ‘지배’와 같은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비유적으로 엘리트층 간의 혼인 및 사회적 재생산과 같은 문제들을 축약하며 심각성을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었다.

1998년 클로드 알레그르 고등교육 및 국가교육부 장관은 국립행정학교(ENA), 사법연수원(ENM), 의대 및 다른 경쟁력 높은 학교에 들어가길 희망하며, 대학 입학자격(바칼로레아) 시험에서 ‘잘함’이나 ‘매우 잘함’ 점수를 받은 학생들을 위한 공로 장학금(Bourse de mérite)을 신설하며 첫 개방정책을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 ‘고장난 사회적 엘리베이터’라는 표현이 정치계로 퍼져나갔다. 언론과 선거운동을 주제로 반복해서 등장했고,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의 연설과 10년 후 마크롱의 연설에서도 등장했다.

 

영광의 30년과 능력주의 신화

그러나 이 표현은 오해를 바탕으로 정착됐다. ‘프랑스식 능력주의’에 대한 논쟁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별개의 이 두 현상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만 집중하고 그 밑바닥은 어둠 속에 버려두고 있다. ‘사회적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서민계층 자녀들이 극소수임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결코 국민의 1/3에 해당하는 저학력자들의 직업이동의 기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30년(1945~197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 성장과 삶의 질이 높아졌던 시기-역주)’에 대한 이상화와 결합된 혼동은 ‘능력주의 황금시대’의 신화를 살찌웠다. 옛날에는 출신, 재산 구별 없이 노력과 재능이 있으면 그랑제콜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 장학생이었던 에두아르 에리오, 조르주 퐁피두가 이에 대한 증인처럼 여겨진다. 1950년~1960년대까지 부자학교(중·고등교육, 서민계층 학생들이 중·고등 교육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와 평민학교(초등교육)를 분리 유지했던 심각한 차별은 집단 기억 속에서 잊혔다.

오늘날에는 잊혔지만, 1950년대 말 국립인구문제연구소(INED)에서 실시한 ‘사회적 성공’에 관한 방대한 연구는 이런 과거에 대한 착각을 해소시킨다.(2) 동일사회집단 혼인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사회학자 알랭 지라르의 지도 아래 1961년에 발표된 이 연구는 프랑스 제3공화국 당시에 태어나, 제4공화국 초 커리어의 절정에 도달한 프랑스 엘리트층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연구 중 일부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도달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파리 출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을 보면 육체노동자는 3%에 불과했으며, 사무직 노동자는 4%, 농부는 6%였다. 그리고 23%는 교육자 등 고위공무원, 22%는 변호사, 의사, 화가였고 17%는 경영자였다. 결론적으로 엘리트층의 68%는, 상위 5% 계층 출신인 것이다. 학교가 대중화되기 전인 이 시기에도 엘리트층의 85%는 학업을 이어갔다. 그중 1/4은 법대와 파리정치대학에, 1/4은 가장 저명한 그랑제콜, 즉 파리고등사범학교(ENS, 8%), 중앙공과학교(Centrale, 6%), 국립광업학교(les Mines, 4%), 고등상업학교(HEC, 4%), 생 시르 사관학교(Saint-Cyr, 2%)에 진학했다. 

이 연구는 또한 파리고등사범학교, 파리이공과대학, 국립광업학교, 파리농업과학학교, 국립행정학교 등의 그랑제콜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연구는 훨씬 선명하게 학생들의 출신을 도출해냈다. 그랑제콜 졸업생들도 대부분 파리출신이고, 2/3는 부유층 가정 출신인데, 이는 전체 인구분포도를 기준으로 하면 13배에 달한다. 그들 중 부모가 육체노동자인 경우는 2%에 불과했으며, 사무직 노동자는 4.5%, 농부가 6%였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세 가지 직업이 가장 흔하다.

최근 조사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4개 그랑제콜(파리고등사범학교, 파리이공과대학, 고등상업학교, 파리정치대학)학생들 중 83%가 부유층 가정 출신이며, 저소득층 가정 출신은 4.5%에 불과했다.(3) 옛날 그랑제콜 학생 중 중산층 가정 출신들은 부모의 직업이 상인(7%), 유·초등 교사(4%), 장인, 수공업자(2%)였다. 당시 중학교 1학년 신입생의 절반은 고등학교 2학년에 진학 전에 학교를 그만뒀고, 중산층 출신 학생 중 10%만 고등학교 2학년에 진학했다. 반면 부유층 출신 학생의 진학률은 80~90%에 달했다.

이 연구의 저자는 ‘엘리트들은 사회계급에서 가장 높은 곳, 매우 제한된 그룹 속에서 탄생한다’라고 최종적인 조서를 작성했다. 프랑스 엘리트주의의 성전이자 다른 그랑제콜보다 개방적이라는 파리고등사범학교 학생들 중에서도 육체노동자의 자녀 비중은 2%에 그쳤고, 파리이공과대학의 경우 1794년 개교 이래 1% 수준을 현재까지 유지 중이다. 1945년 국가 지도층을 민주화하기 위해 개교한 국립행정학교는 다른 그랑제콜들과 비슷하게 (...) 대부분 부유층 출신이 입학했다. 그랑제콜 입학 허가를 받은 하급공무원들만이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고장난 사회적 엘리베이터’라는 표현이 나오기 30년 전, 거의 쓰이지 않았던 이 비유는 자료와 해답을 가진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자료와 해답은 변화했지만 더 넓어진 것도, 회귀한 것도 아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장 클로드 파스롱(『계승자Les Héritiers, 1964년, 『재생산La Reproduction, 1970년)의 연구에 덮여, 교육에 관한 이 풍부한 연구는 잊혔다. 그러나 INED의 연구는 그것이 묘사하는 계층과 언론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호기심, 불신, 재미가 뒤섞인 이런 반향은 소위 프랑스의 절정기라 여겨지는 기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프랑스의 미덕으로 장학금, 우등상 등을 내세울 때 자주 프랑스의 절정기라고 여겨지던 기간말이다.

 

당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과거에 대한 착각은 사실에 대항하지 못한다. 1950년대에는 재능에 따라 선별된 엘리트라는 개념조차 불분명했다. 일간지 <르피가로(Le Figaro)>는 피조사자 자신의 성공이 우연이나, 특권으로 얻어낸 것임이 드러나 평판을 잃을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한 조사를 비꼬았다. 리옹지역 일간지 <르프로그레 드 리옹(Le Progrès de Lyon)>은 이 조사의 질문을 비웃었다. (당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입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의 노력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한 전직 장관은 “나는 성공하지 않았다. 나는 실패자다. 그래도 프랑스에는 나를 웃게 만들어 준 기관들이 있음에 감사하다”라고 덧붙였을 것이다.(4) 

프랑스 공산당 주간지 <프랑스누벨(France Nouvelle)> 에, 작가 앙드레 뷔름저는 알프레드 소비 INED 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5) 편지는 반사회 집단을 구현한 한 겸손한 운동가를 묘사하고 있다. 빈곤한 집안 출신인 뷔름저는 자신의 존재를 정치활동의 상품처럼 소개했다. “나를 나로 있게 한 것은 정당이다. 나는 보잘 것 없지만 공산주의자다! 즉 정직, 무사무욕, 유대감, 양식의 관점에서 충분히 성공한 인간이다.” 서민층이자 프랑스 공산당의 강력한 지지자인 뷔름저는 엘리트는 사회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전체 군중 속에서가 아니라 계급사회 속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기탄없이 말했다.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1958년 영국인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만들었다. 그리고 10년 후 그의 디스토피아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 The Rise of The Meritocracy』(6)이 번역돼 프랑스에 들어왔다. 이후 계층에 대한 자각과 투쟁 속에서 다져지던 연대의식이 퇴색하자, 이 용어는 본래의 의미와 신랄함을 신속히 상실했다. ‘영광의 30년’ 당시의 사회와 ‘사회적 엘리베이터’와는 무관하더라도, ‘영광의 30년’은 저학력자들에게 기회를 선사했다.

학업 경쟁에 뛰어들지 않아도, 이력서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취업과 승진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직급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는 조건하에, 숙련된 노동자는 향후 반장이 되기를 꿈꾸고 대학입학 자격(바칼로레아)을 취득한 기술자는 간부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때는 노동시장의 상태, 관리 방식, 기업 내 알력관계가 저소득층 자녀를 소르본 대학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중요했다.

진정한 변화는 약 반 세기 전부터 일어났다. 저학력자들이 직업적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승할 기회가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대학 학위가 대중화된 결과, 단순 대학입학 자격(바칼로레아) 취득자와 2년제 대학 졸업자는 직업에서 승진할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1970년에는 대학입학 자격(바칼로레아) 취득자 또는 중학교 졸업장을 가졌으며, 부모가 노동자인 30세 남성 중 61%는 중간 간부 또는 상급 간부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이 되자, 이 비중은 27%로 떨어졌다.(7) 동일한 조건의 30세 여성의 경우, 1970년에는 20%, 1990년대 말에는 12% 승진할 수 있었다. 바칼로레아 취득자 수의 증가(2020년에는 세대의 65%, 2019년에는 80%가 바칼로레아를 취득했고, 1945년에는 5%였다)는 명백히 진보를 증명하는 것이지만, 이는 또한 대학 학위가 낮은 사람들이 궁지에서 벗어날 희망에 사망 선고를 하는 셈이다. 

리더들의 주장과는 전혀 달리, 저학력자들은 실업과 불안정에 더 많이 시달린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 따르면, 중위계층의 월 소득은 1,500유로다. 무직 또는 열악한 일자리를 가졌을 경우 1,288유로에 불과하다. 반면, 대학 3년 이상의 학위 소지자의 경우 2,500유로(모든 직업 평균)에서 2,900유로(최고소득 직종)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사회를 약화시키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랑제콜 학생 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급여, 지위, 노동시간, 승진 등 모든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경제 시스템만이 갈등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엘리베이터나 뒷계단보다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징검다리’다. 

 

 

글·폴 파스칼리 Paul Pasquali 
사회학자,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저자, 『Héritocratie. Les élites, les grandes écoles et les mésanventures du mérite(1870-2020)』, Paris, La Découverte, 2021년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Macron enterre l'ENA, un "totem" français 프랑스의 토템인 국립행정학교를 마크롱이 폐지』, Courrier international(인터넷 사이트), 2021년 4월 9일. Factiva와 3개 신문사(<르몽드>, <Libération>, <L’Humanité>)의 인터넷 저장 자료를 통해, (<르몽드>, <Libération>, <L’Humanité>, <Le Figaro>) 4개 신문의 철저한 분석에 입각해 묘사했다. 
(2) Alain Girard, 『La Réussite sociale en France 프랑스에서의 사회적 성공』,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61년
(3) Cécile Bonneau, Pauline Charousset, Julien Grenet, Georgia Thebault, 『Quelle démocratisation des grandes écoles depuis le milieu des années 2000? 2000년대 중반부터 그랑제콜에 어떤 민주화가 있었는가?』, 연구 보고서, Institut des politiques publiques, École d'économie de Paris, 2021년
(4) Georges Ravon, <Le Figaro>, Paris, 1957년 10월 24일, Pierre Durosne, <Le Progrès de Lyon>, 1957년 10월 9일
(5) André Wurmser, <France Nouvelle>, Paris, 1957년 10월 31일~11월 6일
(6) Pierre Rimbert, 『La bourgeoisie intellectuelle, une élite héréditaire 부르주아 지식인, 세습되는 엘리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년 8월
(7) Christian Baudelot, Roger Establet, 『Avoir 30ans, en 1968 et en 1998. 1968년과 1998년의 30세』, Seuil, Paris, 1998년
(8) Claude Picart, 『Le non-emploi des peu ou pas diplômés en France : en effet classement du diplôme 프랑스 내 저학력자들의 실업. 사실상 학위의 계급화』, INSEE Références, Montroouge,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