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얽힌 스코틀랜드 악기 ‘백파이프’의 서사시

하일랜드에서 서아시아까지 전파된 악기

2021-10-29     콜린 우세 l 기자, 아랍문화 전문가

1982년 8월 23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슬픔이 짙게 드리운 눈과 푹 숙인 고개. 초췌한 행색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조직원 약 1,200명이 줄지어 항구로 향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그리스 피레우스 항구를 거쳐 튀니스로 간다. 이들, 페다인(Fedayin, 팔레스타인 게릴라) 무리는 이스라엘군과 77일의 치열한 접전 끝에 난민캠프를 포기하고 베이루트를 떠난다. 최후의 일전을 치른 전사들을 배웅하듯, 주민들은 창문으로 페다인들이 가는 길에 쌀을 흩뿌렸다. 페다인들은 손가락으로 V를 그리고 AK-47소총을 공중에 쏘며 화답했다.

미국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일레인 캐리 특파원은, “눈물과 환호성을 뚫고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가 울려 퍼졌다”라고 전했다.(1) 전사들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수장을 찬양하는 연주에 맞춰 팔레스타인 민속춤 다브케를 췄다. 여기서 백파이프의 등장이 엉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악기는 기묘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타고 지중해 동쪽 연안까지 전파된 것이다(박스기사 참조).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 전쟁과 ‘스코틀랜드 고지대 하일랜드의 전사’라는 환상에 대한 문화적 전유가 뒤섞인 채 귀환했다. 18세기 중반, 영국군은 스튜어트 왕가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복원시키려는 자코바이트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1745년 컬로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군은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흡수했다. 영국군은 스코틀랜드 생존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특색 있는 문화와 용맹하다는 명성에 주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캐나다 7년 전쟁(1756~1763)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자리 잡을 때까지 영국의 식민지 확장 전쟁에 동원된다. 이것이 바로 ‘피오브 모르(Piobh mhor)’ 또는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라고 불리는 백파이프와 체크무늬로 대표되는 스코틀랜드 문화가 고국에서는 금지됐지만, 결국 제국주의의 상징이 된 과정이다.

스코틀랜드 군대와 백파이프 악단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인도 아대륙으로 파견됐다. 영국은 서아시아에 수많은 전략적 거점(영국령 동아프리카와 이집트를 잇는 나일강 유역, 수에즈 운하, 아라비아반도의 항구들)을 차지한 결과, 인도로 가는 루트를 확보했다. 또한 1908년 석유개발 시기와 맞물려 아라비아반도 북부와 이란의 유전지대를 차지했다. 이집트에서 나폴레옹과의 전쟁, 오만 협정국(페르시아만 아랍국가들)과 첫 협정 체결, 1922년 팔레스타인·이라크·요르단을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지정, 수에즈 운하 건설, 1882년 이집트 점령 이후 수단 정복까지 영국은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의 날카로운 연주를 앞세워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영국군 퇴각 후에도 살아남은 백파이프

백파이프는 단독 또는 전통 군악대와 함께 연주됐다. 공기 주머니의 지속적인 힘을 받아서 파이프 여러 개가 날카로운 다성음을 동시에 뿜어내는 위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는 행군, 퍼레이드, 추도식에서 진군과 퇴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며, 영국군 행사의 필수요소가 됐다. 적의 총알을 무릅쓰고 전진하는 영웅 신화에 얽힌 후광이 백파이프를 둘러쌌다. 20세기를 뒤흔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교전국들의 주요 격돌지였던 아랍세계와 유럽에서 백파이프의 전투적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켰다.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 이후 자국 군대에 백파이프를 도입했다. 백파이프의 매력에 푹 빠진 지도자들 덕택에, 영국군이 퇴각한 이후에도 백파이프는 건재했다. 사실 이들 국가에도 전통적으로 백파이프와 겹리드 악기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영국과 문화적, 역사적으로 가까웠던 옛 식민지들(북아메리카, 유형식민지였던 호주 등), 서아시아, 페르시아만 일대,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인도군의 제9고르카 소총대는 현재까지도 ‘스코틀랜드 용사’의 곡조를 군가로 사용) 등이다. 

반면, 영국령 동아프리카 출신 국가들의 경우, 군악대에 백파이프가 없다. 유일하게 케냐에 ‘쉬리 묵타지반 스와미바파’ 백파이프 악단이 있는데, 이마저도 나이로비에 소재한 인도 공동체 소속이다. 수단의 경우, 영국-이집트 공동통치(1899~1955)의 잔재가 오늘날 대중음악에 남아서 군악기의 금관악기와 백파이프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다만, 백파이프의 독특한 음색에 익숙한 수단 북부의 누비아족과 베르베르족만 사용한다. 영국의 옛 식민지들이 영국을 따라 백파이프 악단을 도입한 것은 옛 적의 용기를 찬탈하기 위해서다. 두려워했고 맞서 싸웠지만, 결국은 탄복했던 그 용맹스러움을 빼앗고 싶은 것이다. 

백파이프의 문화적 전유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고, 다른 민족 신화와 겹쳐지기도 했다. 일례로, 200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 개막식에서 이집트 의장대가 파라오 복장으로 백파이프를 연주했다. 전통악기를 두고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를 공식석상에 내세운 것이다. 1914년 축음기에 녹음된 ‘키랍(Qirab)’, 누비아족 출신 가수 알리 하산 코반이 초창기에 축제와 결혼식에서 연주한 ‘저바(Jirba, girba; 상이집트와 누비아 지역 전통악기)를 제치고 말이다. 

페르시아만 일대의 경우, 군대와 경찰이 자체적인 백파이프 악단을 소유한 경우가 많다. 일례로 두바이 토후국은 기마대 행진을 비롯해 여러 행사에 백파이프 악단을 선보인다. 이런 시도에는 용맹한 전사의 이미지 차용 외에도, 신생국가로서 새로운 전통과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일례로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1940-2020)에게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는 특별한 악기였다. 영국의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서독의 스코틀랜드 전투에 투입됐는데, 주말의 축제나 결혼식마다 백파이프 소리를 들었다.

1970년 12월, 영국의 지원을 받아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그는, 백파이프 악단을 대거 만든다. 악단 의상은 인도 마드라스의 어부가 걸치는 무명천처럼 생긴 체크무늬였다. 2010년 12월,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의 네 번째 연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100여 개의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들이 충성의 의미로 그의 앞을 행진했다. 오만과 외국의 백파이프 악단들이 그 뒤를 따라 행진했으며, 불꽃놀이를 끝으로 기념식을 마무리했다. 당시 그는 건강이 나빴다.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2019년 11월, 무스카트 로열 오페라 하우스 앞뜰에서 ‘오만과 세계’라는 테마로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백파이프 연주에 멕시코 전통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가 더해져 더욱 풍성한 소리를 자아냈다. 

요르단에서도 백파이프는 영광스런 존재다. 후세인 국왕(1935-1999)도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과 마찬가지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자국 군대에 백파이프를 도입했다. 그의 아들인 압달라 2세도 같은 학교 출신으로 아버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 요르단 수도인 암만의 칼다 지구에는 요르단 왕립 육군을 기리는 벽화가 있는데, 백파이프를 들고 빨간색, 흰색 베두인(아랍계 유목민) 모자를 쓴 군인이 행렬의 중심을 이룬다. 

 

백파이프 열풍을 부른 <브레이브 하트>

서아시아의 백파이프 도입은, 영국의 관점에서 탈식민지 이후 자국의 영향력과 옛 식민지와의 관계유지 수단이다. 요르단과 오만, 특히 오만 공군 군악대는 영국 군악대 축제인 ‘타투’에 정기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연대 합병으로 연주자 자리가 줄고 조기은퇴 문제까지 겹쳐서, 현재 백파이프 연주자들은 과거에 그랬듯 페르시아만 군주들에게 재주를 판다. 1970년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전 국가원수도 백파이프 교관 2명의 구인공고를 전문지에 게재했다. 2015년, 카타르는 2022년 11월 월드컵을 대비해 백파이프 악단을 만들고자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출신 백파이프 연주자 50여 명의 구인공고를 냈다.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무장 조직도 백파이프 악단을 도입했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대표적인 예다. PLO, 하마스, 헤즈볼라도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를 침략자에 저항하는 역사적 상징이자 전투력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헤즈볼라 국가인 ‘당신의 승리가 세계를 일으킨다’의 신시사이저 버전은 백파이프 연주로 시작된다. 호주 출신 배우인 멜 깁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백파이프 열풍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의 베이트잘라, 베들레헴,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청년들은 자신의 땅과 문화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2014년 9월, 스코틀랜드가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전날, 청년들은 백파이프와 북을 들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 행렬을 벌였다.(2)

한편 아일랜드 근위대 출신 용병이자 백파이프 연주자인 아서 둘리가 1970년대에 PLO에 가입하는 놀라운 사건도 발생했다. TYR(Sumoud Guirab de Bourj Al-Shamali), SAIDA(Atfal Al-Sumud à Ain Al-Helweh)와 같은 팔레스타인 백파이프 악단들은 난민캠프에서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백파이프를 공유하는 다른 문화권(특히 서유럽)에도 손길을 뻗치고 있다. 1989년 창단된 TYR 백파이프 악단은 브르타뉴 음악가 협회(Bodadeg Ar Sonerion)의 평생회원이며, 2007년 ‘로리앙 켄트문화 축제’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적 전유가 항상 완벽하지는 않다. 서아시아 신병들을 가르치러 온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자들은 답답하다. 파이프를 억지로 막지 않는 한 풍성한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서아시아 신병들이 연주하는 백파이프 소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파이프 악단에 대한 관심은 악기가 가진 상징성에 그친다. 실제로는 상사의 결정에 따라 억지로 악단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악기 자체도 변질되고 있다. 붉은색 로열 스튜어트 타탄을 흉내 낸 체크무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저렴한 중국산 백파이프가 등장하더니, 요즘에는 신시사이저의 사용이 폭증하면서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의 위치가 위태로워졌다. 

군대의 경우, 백파이프의 도입은 피상적인 수준이다. 군악대 레퍼토리도 새롭게 바뀐 부분 없이 영국군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오며, 곡조나 리듬도 별다른 고찰 없이 연주된다. 민간의 경우, 백파이프가 현지 음악의 음계와 맞지 않기 때문에, 레퍼토리를 제대로 연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레바논 음악가가 함께 동양음악에 자주 사용되는 4분음 음정에 맞춰 레퍼토리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베두인 음악가들은 요르단 북부 유적지인 제라시의 고대로마 극장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스코틀랜드 용사>를 연주했다. 서양인 관광객들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나름의 역사적 기원을 지닌 백파이프 연주를 감상했다. 

 

 

글·콜린 우세 Coline Houssais
기자, 아랍문화 전문가. 『아랍 세계의 음악, 아티스트 100명』(2020)의 저자.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Arafat packs bags for Tunisia, but plans to be elusive’, 1982년 8월 23일, www.csmonitor.com
(2) Cf. ‘Indépendance écossaise : des Palestiniens solidaires jouent de la cornemuse’(스코틀랜드 독립 : 팔레스타인 병사들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다), <L’Express>, 2014년 9월 16일.

 

 

백파이프의 기원

 

백파이프의 정확한 기원을 찾기는 어렵다. 갈대 리드를 사용하는 악기의 최초의 흔적은 수메르 문명에서 발견된다. 이후 고대 이집트의 네바문 무덤의 벽화에도 리드 악기의 모습이 등장한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시대 미상의 공기 주머니가 달려있어서, 연주자는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거나 풀무를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고 펌프질을 하면 된다. 이후 동로마제국과 로마제국이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중해와 인더스강 유역을 잇고 유럽과 지중해 일대를 지배하면서 백파이프는 기원지를 넘어서 다른 지역으로 널리 확산됐다.

백파이프 전문가인 쇼나 테이트는 백파이프를 ‘음악과 소음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라고 표현했다.(1) 일찍이 백파이프는 강력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전투에 나선 군대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문화 및 상업 교류를 통해서 유럽 전역,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예멘 제외), 이란 남부, 파키스탄, 인도 서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분포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분포지역에 따라, 백파이프는 다양한 형태와 명칭을 얻었다. 이란에서는 ‘네이 안반(Ney anban)’이라고 부른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하반(Habban)’ 또는 ‘저바(Jirbah)’라고 하는데, 파이프가 사라지고 몸통 전체가 염소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 ‘샤콰(Shakwa)’, ‘주크라(Zoukra)’, ‘주가라(Zouggarah)’는 몸통이 비교적 작고 나팔처럼 생긴 관이 두 개 달려있다. 북아프리카에는 ‘메주에드(Mezoued)’가 있다. 스웨덴 백파이프는 ‘색피파(Säckpippa)’라고 하는데, 스웨덴 재즈 뮤지션인 군힐트 칼링이 백파이프를 이용해서 재즈곡을 선보이기도 했다. 

불가리아 백파이프는 ‘카바 가이다(Kaba gaida)’라고 부른다. 아일랜드에서는 ‘일리언 파이프(Uilleann pipe)’ 또는 ‘카브레트 리무진(Cabrette limousine)’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백파이프의 연주에 맞는 안무도 등장했다. 처음에는 목가적인 민속춤으로 시작해, 궁중에도 진출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백파이프 종류를 자랑한다. 중부와 남서부에만 17종이 존재하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쓰던 ‘뮈제트 드 쿠르(Musette de cour)’에서 파생된 타입도 있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는 ‘피오브 모르(Piobh mhor)’ 또는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프랑스의 뮈제트 드 쿠르처럼 크기가 작은 백파이프와 대비된다)라고 하는데, 본래 야외에서 부족 간에 연락을 취하는 용도였다가 이후 군대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파이프는 걸어가거나 가만히 서서 연주한다. 소리가 최대한 잘 울려 퍼지게 고안됐으며, 3개의 파이프가 달린 공기 주머니 덕분에 지속음을 길게 뿜어낸다. 선율관의 구멍은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는 영국 제국주의 전쟁과 얽히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글·콜린 우세 Coline Houssais 
번역·이보미


(1) ‘Bagpipes a Scottish Invention? Not Really!’, TEDxUniversityofStrathclyde, <유투브>, 2020년 8월 27일.

 

전장의 선두에 나선 백파이프 연주자

 

제 1차 세계대전, 프랑스 동부에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참호를 뒤덮는다. 스코틀랜드 부대 근처에서 어김없이 백파이프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1916년 솜 전투 현장 사진 속에 독특한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철모를 쓰고 킬트 의상을 두른 남자의 팔에 악기가 들려있다. 그는 전우들에게 둘러싸인 채, 폭격으로 초토화된 전쟁터를 결연하게 전진한다. 같은 시기에 찍힌 또 다른 사진에서는 백파이프 연주자가 연기 기둥과 폭격 구덩이를 뚫고 병사들을 전장으로 이끌고 있다. 병사들은 참호를 박차고 나와서 총검을 손에 쥐고 돌격한다.

백파이프 연주자들은 보호 장비나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선두에 섰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영국군의 스코틀랜드 부대의 위상을 높였다. 크리스찬 카리온 감독은 전쟁터의 모습을 그린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2005)에서 음악이 가진 위력을 보여줬다. 브르타뉴의 경우, 대중역사에 1차 세계대전 때 스코틀랜드에서 ‘비뉴 브라즈(Biniou braz)’ 또는 ‘위대한 백파이프’를 빌려왔다는 기록이 있다(실제 백파이프가 브르타뉴에 들어온 시기는 19세기다). 

프랑스 아마추어 악단인 ‘솜 배틀필드 파이프 밴드’는 세계대전 기념행사 때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음악을 홍보하기 위해서 30년 전부터 백파이프를 연주했다. 프랑스 해군의 유명한 군악단인 ‘바가드 드 란비우에’는 1952년에 영국 백파이프 군악대를 본떠 만들어졌는데, 프랑스 국내외 기념행사에 자주 등장하며, 프랑스 군장비를 수입하는 파트너 국가의 행사에도 참석한다. 2020년 10월에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앞에서도 연주했으며, 2017년 5월에 프랑스 초계함 ‘프레리알’이 브르타뉴 축제기간에 싱가포르를 경유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도 섰다.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는 공식적으로 전쟁터에서 금지됐지만, 2차 세계대전 자료사진을 보면 여전히 전장에 등장한다. 배에서 소드 해변을 바라보며 찍은, 뿌옇게 바랜 사진이 있다. 소드 해변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지정된 5개 해안 지점 중 하나다. 이 사진의 전경에 ‘파이퍼 빌’이란 별명을 가진 빌 밀린의 뒷모습이 찍혔다. 그는 배에서 내려서 해변으로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해변에는 탱크들이 대기하고 있고, 특공 대원들이 신중하게 물길을 가르고 해변으로 접근하고 있다. 빌 밀린은 제1특수여단 지휘관이자 프레이저 가문의 수장인 로드 로바트의 개인 백파이프 연주자다. 

풍문에 따르면, 빌 밀린이 로드 로바트에게 백파이프 연주자가 전방에 서는 것이 금지됐다고 하자, 로드 로바트는 영국의 규정은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당시 20세 청년이었던 빌 밀린은 상사의 명령대로 전선에 섰다. 아버지의 킬트를 갑옷 대신 입고, 스코틀랜드 전통 단도 ‘스키언두(Sgian-dubh)’를 유일한 무기로 삼아 오른쪽 양말에 찔러 넣고, 용감하게 전진했다. 빌 밀린이 연주하는 <섬으로 가는 길>, <파란 보닛 모두가 국경을 넘었네>의 백파이프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로드 로바트와 특공 대원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독일 저격수들에게 달려들었다. 독일 저격수들은 빌 밀린이 미치광이인줄 알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디데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빌 밀린은 이후에도 하일랜드 경보병 연대와 여왕 직속 캐머런 하일랜더 보병 연대의 백파이프 연주자로서 모든 노르망디 전투에 참여했다. 그중 베누빌 다리(현 페가수스 다리) 맞은편에 고립된 연합군 구조작전에도 참전했는데, 당시 연합군들은 점점 가까워지는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제7 시포스 하일랜더 연대(제15 스코틀랜드 보병 사단)도 같은 해 진행된 엡솜 작전에서 백파이프 연주자를 내세웠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빌 밀린이 노르망디 해변을 상륙하는 이미지가 더 강렬하게 남아있다. 켄 애너킨 감독과 앤드류 마턴 감독이 만든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1962) 덕분이다. ‘미치광이 잭’이라고 불렸던 잭 처칠은 노르웨이 전투, 유고슬라비아 전투, 1943년 연합군 이탈리아 상륙작전에 참전했는데, 이때 기괴하게도 스코틀랜드의 긴 검과 백파이프를 들고 나갔다. 스코틀랜드인의 용맹함과 영국인의 엉뚱함을 동시에 가진 낭만주의적 전사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백파이프의 전쟁 서사시는 아랍세계에서 완성된다.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알렉산더 장군과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롬멜(독일군) 원수와 바스티코(이탈리아군) 원수의 부대가 서로 맞붙는다. 백파이프가 시포스 하일랜더 연대의 최후 공격을 알렸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몇 주 전에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서 백파이프 연주자인 맥도날드는 반바지 차림으로 이집트 사막을 행군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료들 앞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있다.

그로부터 25년 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미치광이 미치’라고 불렸던 콜린 캠벨 미첼 중령과 제1 아가일·서덜랜드 하일랜더 전열보병 연대는 예멘 아덴에서 벌어진 ‘대영제국의 마지막 전투’에서 철수한다. 이때 랍슨 소령은 백파이프로 <스코틀랜드 용사>와 군가를 연주했다. 이후 영국군과 유럽,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의 옛 식민지들은 그레이트 하일랜드 백파이프를 의례적으로만 사용하게 된다. 일례로, 1982년 성 패트릭 축제 때 레바논 국제연합 잠정군의 아일랜드 병사들이 백파이프를 연주했다. 

백파이프에 얽힌 서사시는 흑백사진과 개인의 증언 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해져, 군악군 레퍼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서 <와디아카리트 전투의 제51 하일랜드 사단>, <아덴의 척박한 암벽>, <쿠웨이트의 모래> 등이다. 백파이프의 전투적 상징성은 여전하며, 예술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듄>(2021)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백파이프를 이용해 아라키스 행성을 점령한다. 

 

글·콜린 우세 Coline Houssais
기자.

번역·이보미
번역위원